여행

여행의 기술 – 긴 밤의 핀란드

2023.02.20

by VOGUE

    여행의 기술 – 긴 밤의 핀란드

    일상에서 여행할 기회를 찾아 헤매는 우리는 21세기 여행 유목민이다. 여행은 지속 가능한 삶을 위한 기술이며, 우리는 지속 가능한 삶을 위한 일상을 산다. 헬싱키와 레비, 라스베이거스, 코펜하겐과 스톡홀름, 아키타현, 하와이를 만끽하고 돌아왔다.

    핀란드의 밤은 길지만 어둡지 않다. 눈이 반사되고 달빛이 도시를 감싼다. 창의적인 헬싱키 그리고 눈의 도시 레비.

    예술가 백현진은 몇 년 전 인터뷰에서 “나에게 헬싱키의 반대말이 서울이었다”고 말했다. 활기찬, 변화무쌍한, 빠른, 열정적인, 감정적인 서울과 정반대의 도시. 차분한, 합리적인, 조용한, 한적한, 이성적인 도시가 떠올랐다. 가본 적 없는 헬싱키의 첫인상이었다.

    헬싱키 공항에 내려 고개를 들었을 땐 어둑어둑했다. 오후 3시였지만 한국의 8시 같았다. 여름에는 여름 같은 낮이 이어지고 겨울에는 겨울 같은 밤이 계속 이어지는 나라. 겨울에 핀란드를 여행하는 건 밤을 확장하는 일이다. 머무는 내내 수시로 손목시계를 들여다봤다. 동남아 리조트가 도시의 분주함을 삭제해 휴식을 제공한다면 핀란드는 긴 밤이 정적인 편안함을 선사한다. 24시간 불빛 속에 사는 우리에게 주어지는 의도치 않은 휴식이다. 여행이 낯선 감각을 찾아다니는 일이라면 핀란드는 흥미로운 선택지가 된다.

    수도 헬싱키는 ‘하루면 다 돌아본다’고 할 만큼 작다. 물론 물리적 크기가 작다는 얘기다. 핀란드의 디자인을 보고 싶은 사람에게 헬싱키 시내는 수개월을 머물러도 부족하다. 디자인 여행을 떠난다면 디자인 숍이 모인 에스플라나디 공원 (Esplanadi Park) 주변과 디자인 디스트릭트(Design District Helsinki)는 면면을 살펴보느라 50m도 전진하기 어렵다. 어느 건물에 들어가나 스칸디나비아 디자인을 만끽할 수 있기에 강렬한 추위에도 헬싱키는 쉬엄쉬엄 걷기 좋은 도시다. 캄피 침묵의 교회, 중앙역, 스칸디나비아에서 가장 큰 스토크만 백화점, 디자인 뮤지엄이 모두 발 닿는 거리에 있다.

    지금 헬싱키의 새로운 랜드마크를 꼽자면 2018년 8월에 문을 연 아모스 렉스 미술관(Amos Rex Museum)이다. 잠수함 창문 같기도, 우주 행성 표면 같기도 한 돔 형태의 설치물이 솟아 있는 광장 그 자체가 아모스 렉스 미술관이다. 전시 공간은 놀랍게도 우리가 서 있는 광장 바로 아래에 있다. 전시장에서 올려다보면 돔은 결국 전시장으로 빛을 전달하는 창문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동그란 창문으로 쨍하게 파란 하늘이 그림처럼 보인다. 이곳에서는 공간이 선사하는 실험 정신만큼 강렬한 전시가 주를 이룬다. 지금은 화가 비르게르 카를스테드트(Birger Carlstedt)의 전시가 열리고 있다.

    헬싱키의 새로운 랜드마크 아모스 렉스 미술관. 핀란드 기능주의를 상징하는 오피스 건물 라스팔라치를 보존한 채 바로 옆 광장에 지었다.

    핀란드의 컨템퍼러리 아트가 본격적으로 궁금하다면 인근에 키아스마 국립 현대미술관(Nykytaiteen Museo Kiasma)을 권한다. 8,000점이 넘는 작품을 상설 전시 중이고 미국 건축가 스티븐 홀이 설계한 건물도 그 자체로 예술이다. 들어서자마자 펼쳐지는 복도는 공간의 미학을 느끼게 한다.

    핀란드 건축의 새로운 흐름은 2018년에 오픈한 헬싱키 중앙 도서관 오디(Oodi)에서도 감상할 수 있다. 칸살라이스토리 광장에 함선처럼 자리하는데 내부 역시 핀란드 디자인의 정수다. 오토 카르보넨(Otto Karvonen)이 디자인한 계단은 물론 의자, 러그까지 핀란드 작가들의 손을 거쳤다. 헬싱키 사람들의 일상이 모인 곳이기도 하다. 책을 읽거나 대여하는 것은 물론 업무를 위해 미팅을 하기도, 게임을 하기도, 그저 앉아서 뜨개질을 하기도 한다. 나는 긴긴 밤 핀란드 사람들이 무얼 하며 보내는지 20년째 헬싱키에 살고 있는 번역가에게, 헬싱키 마케팅 담당자에게도 질문했는데 모두 ‘독서’라고 대답했다. 번역가는 외국어 공부라는 대답도 덧붙였다. 5개 국어를 해도 큰 자랑거리는 아니며 스릴러 소설은 스웨덴어로 읽어야 제맛이라고 했다. 오디의 1일 방문자는 1만~2만 명에 이른다.

    핀란드의 계절을 현대적인 방식으로 요리하는 레스토랑 ORA. 테이블이 적어 사전 예약은 필수다.

    핀란드에 머무는 동안 계절이 미식에 끼치는 영향에 대해 생각했다. 1년 중 만물이 소생하고 만발하는 시기는 단 4개월. 이때 거둔 식재료로 나머지 계절을 보내야 한다. 레스토랑에서 만난 번역가는 “핀란드의 셰프는 똑똑해야만 한다”고 말했다. 감자, 생선(그중에서도 연어), 순록 고기, 숲에서 채취한 허브와 버섯, 베리 등이 주요 식재료다. 미슐랭 1스타를 받은 ORA는 지금 헬싱키에서 가장 예약하기 힘든 레스토랑이다. 로컬 재료를 현대적으로 해석해서 요리하는데 핀란드의 계절에 따라 메뉴를 구성한다. 관건은 모두 재료다. 셰프는 근처 농장에 어떤 재료를 갖고 있는지 질문하는 데서 모든 요리를 시작한다고 말한다. ORA에서는 재료의 맛을 창의적으로 끌어올린 6코스가 나온다. 레스토랑 유리(Juuri) 역시 뉴 노르딕 무브먼트의 선두 주자다. 지역에서 자란 오가닉 재료를 쓰고 탄소 발자국을 최소화한다. 메뉴판 설명은 단순하나 조리법은 상상을 뛰어넘는다. 버섯을 얹은 오리 요리는 크림 같은 질감이었고, 아몬드를 곁들인 예루살렘 아티초크는 고기를 씹는 듯했다. 유리의 창의적인 세계를 고루 경험하고 싶다면 여럿이 핀란드식 타파스를 시켜서 나눠 먹으면 좋다.

    해안가에 자리한 로일리 헬싱키. 테라스 사다리를 내려가면 바로 바다 수영을 즐길 수 있다.

    여행자 입장에서 긴긴 밤을 보내며 독서 대신 몰두한 건 사우나다. 사우나의 고장, 인구 500만 명에 사우나가 300만 개에 이르는 곳. <모노클 헬싱키>는 당부했다. “핀란드에서 디너에 초대받았다면 수영복 가져가는 걸 잊지 마라.” 디너에 초대받지는 않았지만 로일리 헬싱키(Löyly Helsinki)에 가며 수영복을 챙겼다. 언젠가 사우나 직후 바다로 뛰어드는 핀란드 사람들 사진을 본 적 있는데 로일리는 그 상상을 실현시켰다. 발트 해안가에 자리 잡은 건물은 뮤지엄 같았는데 헬싱키 시내에서 본 힙스터들이 모여 땀을 흘리고 있었다.

    핀란드 사우나는 달궈진 돌에 물을 끼얹어 뜨거운 증기를 발생시킨다. 온갖 방으로 이루어진 우리 사우나와 달리 이곳은 정통 사우나 한 가지다. 증기를 쐰 후에는 바다나 호수에 뛰어들거나 휴식 공간에서 몸을 식힌다. 포일에 싼 소시지를 뜨거운 돌 위에 구워 먹는 문화도 있다. 소시지에 곁들이는 맥주 한잔은 핀란드 사우나의 대표적 즐거움이다. 사우나는 핀란드 소셜 라이프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금요일 밤, 로일리 사우나와 레스토랑은 모임을 하는 젊은이들로 늦은 시간까지 붐볐다. 수영복을 입었거나 근사하게 차려입었거나 마찬가지였다.

    여름을 숲속 오두막에서 보내며 호수 수영을 즐기는 핀란드 사람들은 맨몸 수영도 즐긴다. 남녀의 이용 시간을 달리 두어 수영복을 입지 않아도 되는 수영장이 있다. 영화 <카모메 식당>에서 사치에가 다녔던 위리왼카투 수영장(Yrjönkatu Swimming Hall)이 대표적이다. 1928년에 문을 연, 핀란드에서 가장 오래된 공공 수영장인데 고풍스러운 실내에 파란 수영장 색깔이 대단히 이국적이다. 이번에는 기회가 없었지만 언젠가 느껴보고 싶은 자유다.

    세인트 조지 호텔은 주요 관광지에 걸어갈 수 있어 편리하다. 지하 수영장 전경.

    90여 년 동안 같은 수영장이 운영되듯 핀란드의 유서 깊은 건물은 ‘완벽하게 새롭게’가 아니라 ‘창의적으로 새롭게’ 다시 태어난다. 세인트 조지 호텔(Hotel St. George)도 그렇다. 외관, 복도나 로비에서 1840년대 혹은 1980년대 모습을 발견할 수 있지만 객실 인테리어는 현대 디자인의 요약본 같다. 책상과 의자는 샬롯 페리앙과 마리오 벨리니의 작품이며 조명은 알바 알토가 디자인한 ‘Angel Wing’이다. 삶과 예술은 구분되지 않아야 한다고 말해주듯 호텔 곳곳은 예술 작품으로 가득하다. 로비에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아이웨이웨이(Ai Weiwei)의 ‘Tianwu’는 세인트 조지 호텔의 상징이다. 페카 윌해(Pekka Jylhä)의 금속 조각 ‘Learning to Fly’를 비롯, 호텔에서 볼 수 있는 작품은 400여 점에 이른다. 레스토랑도 훌륭하다. 조식을 먹으러 간 레스토랑 안드레아에서는 두꺼운 주물 팬에 오믈렛을 만들어줬다. 세인트 조지 베이커리는 동네 주민들도 찾아가는 맛집이다. 시나몬 롤이 특히 맛있다.

    헬싱키가 1년 내내 주목받는다면 레비(Levi)는 겨울의 주인공이다. 헬싱키에서 비행기로 1시간 20분 거리에 있다. 산타 마을로 유명한 로바니에미보다 북쪽이다. 평소에는 고요하지만 겨울이 되면 전 세계 스키 인파로 북적인다. 온통 눈에 덮인 나무와 숲 사이에 스키 슬로프가 자리한다. 까마득해 보이는 스키 슬로프에 함박눈이 쌓이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스키는 자연 발생적 스포츠라는 생각이 든다. 레비 시내는 ‘읍내’라는 우리말이 떠오를 정도로 자그마하다. 식당, 슈퍼마켓, 기념품 숍 등이 아기자기하게 모여 있다.

    따뜻한 오두막 분위기가 나면서도 현대식 시설을 갖춰 편리한 레비 스피릿.

    고급 시설을 갖춘 오두막집, 편리한 스키 리조트, 얼음으로 만든 이글루 등 레비에서 숙소 선택지는 여럿이다. 사방이 유리로 된 글라스 이글루도 레비에 있다! 따뜻한 이불 속에 누워 환상적인 오로라, 쏟아질 듯한 별을 만끽할 수 있는 곳. 눈밭 한가운데 보호막 속에 누운 기분은 특별하다. 레비 스피릿(Levi Spirit)은 핀란드 오두막을 현대적인 형태로 발전시킨 숙소다. 벽난로가 타오르는 거실은 아늑하고 창밖 풍경은 평화롭다. 빌라 한 채당 최대 10명까지 묵을 수 있는데 부엌, 사우나, 월풀은 물론 파이어 플레이스까지 공용 공간이 갖춰져 있다. 여럿이 떠난 여행에서 큰 만족감을 얻을 수 있는 선택지다.

    허스키 썰매, 사우나, 오로라 관람 등 다양한 즐길 거리가 있는 엘브스 빌리지. 요정 복장을 한 스태프가 안내를 맡고 있다.

    엘브스 빌리지(Elves Village)는 엘프를 테마로 한 마을이다. 노란 드레스를 입은 요정 이야기가 실재하는 곳. 숲속에는 엘프의 오두막, 라플란드 전통 집 등이 자리한다. 분명 테마라는 것을 알지만 모든 모습이 이국적이라 충분히 푹 빠져서 즐길 수 있다. 허스키 개썰매, 순록썰매, 스노 슈즈 워킹, 얼음낚시 등 겨울 스포츠 체험도 가능하다. 허스키 개썰매는 눈밭을 달리는 허스키들과 함께 호흡하는 경험이었다. 차를 탔을 때는 느낄 수 없던 공기의 밀도, 걸을 때는 보이지 않던 설원. 신기함을 넘어 모험에 가까운 짜릿함을 느꼈다. 스노 슈즈 워킹은 설원 산책이다. 무릎까지 빠져도 미끄러지지 않고 경사가 있어도 균형을 잡게 해준다. 스노 슈즈는 눈의 도시의 필수품이다.

    레비의 겨울밤은 아득할 만큼 길다. 차를 몰고 더 올라가면 아예 해가 뜨지 않는다니 얼마나 북쪽에 올라와 있는지 실감이 난다. 레비는 아이슬란드, 캐나다와 같이 오로라를 볼 수 있는 하늘이 선택한 도시다. 9월에서 3월까지만 이 신비로운 자연을 만날 기회를 허락한다. 포토그래퍼 유하 톨로넨과 케이트(Juha Tolonen & Kate) 부부의 아크틱 프런티어(Arctic Frontier, www. arcticfrontier.fi)는 레비에서 오로라 투어를 가장 오랫동안 안정적으로 운영하는 곳이다. 수시로 날씨를 체크하며 프로그램을 전개해 지금까지 신청자의 80%가 오로라를 만났다. 유하 톨로넨은 오로라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최적의 장비를 갖추고 그 환상의 순간을 담을 수 있도록 세심하게 설명한다.

    아내 케이트는 야생 음식 투어를 맡았다. 숲에서 식재료를 채취하고 핀란드 홈 쿠킹 방식으로 요리한다. 케이트는 친환경 에너지를 이용해 만든 나무 컵에 버섯 커피를 따라주었다. 나무에서 자란 버섯에 오트밀과 꿀을 넣고 끓였다. 버섯 커피에서는 숲 향이 났다. 그녀는 눈 밑에 무엇이 있는지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음식을 도구처럼 사용한다는 멋진 말을 했다. 케이트가 자주 사용하는 식재료는 베리다. 크랜베리, 클라우드베리, 블루베리, 링곤베리 등 베리는 라플란드의 상징이다. 그녀는 자연과 함께하는 레비에서 일상을 들려줬다. 아이들은 자전거를 타고 등교하고 숲을 놀이터 삼아 지낸다. 부부는 크로스컨트리 스키나 낚시를 즐긴다. 샐러드에 들어가는 재료는 모두 숲에서 채취해서 먹는다. 눈을 섞어 시럽을 만들기도 한다. 숲속에 먹을 것이 많이 있고 그대로 먹어도 전혀 문제가 없다. 직접 얻은 식재료로 음식을 만드는 경험은 놀라움 그 자체다.

    자연은 지속 가능한 삶의 해답이다. 이런 삶의 태도는 레비에서 일정하게 유지된다. 레비의 스키 리조트도 마찬가지다. 인공 눈 작업으로 생긴 열을 난방에 사용하고 태양열을 사용한다. 레비의 스키 리조트는 노르딕 스키 리조트 최초로 국제 환경 기준을 통과했다. 새하얗고 창백하고 허옇고 하얀 눈의 도시 레비에서 우리에겐 흰색보다 다양한 언어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핀란드의 자연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피처 에디터
      조소현
      Sponsored by
      핀란드 관광청
      포토그래퍼
      Courtesy Phot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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