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기술 – 나 홀로 북유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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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의 기술 – 나 홀로 북유럽

2019-12-30T14:02:15+00:00 2020.01.02|

오후 4시면 해가 지는 한겨울의 코펜하겐에서, 큰 식탁에 홀로 앉아 밥을 먹었다. 야경마저 어둑한 스톡홀름에서는 밤낮으로 커피를 마셨다.

노마(Noma)의 예약에는 실패했다. 몇 달 전부터 서둘렀다면 충분히 가능했을 테지만, 부러 서두르지 않았다. 코펜하겐에 들러 노마에서 식사하는 건, 파리 여행에서 에펠탑을 보러 가는 것만큼이나 지루하게 느껴졌달까. 15년 전 노마가 불러일으킨 ‘뉴 노르딕 퀴진’의 광풍은 유럽을 넘어 미식의 불모지인 독일에까지 영향을 뻗쳤다. 푸라그라와 트러플, 흰 식탁보와 수트를 입은 서버 없이 동네에서 나는 식재료만으로 충분히 희소한 식사를 경험하게 만든 일은 미식 업계를 뒤집어버릴 만했다.

하지만 ‘노마 이펙트’라고도 불리는 거대 파급력만큼 크고 긴 그림자도 존재한다. 최근엔 날것과 채집에 대한 집착, 로커브리즘(Locavorism)에 대한 맹신이 반대급부로 언급되는 것도 사실이니까. 별다른 세공 없이, 그저 풀밭에 있는 모습 그대로를 접시 위에 올린 채로 혁신도 야망도 꺼져가는 촛불처럼 희미한 레스토랑이 생겨나는 걸 두고 그저 ‘그놈의 트렌드’라며 웃어넘기기는 쉽지 않다. 3년 전 노마의 르네 레드제피 셰프가 <와이어드> 인터뷰에서 한 말을 나는 아직 기억한다. “이만하면 괜찮다는 타협적인 생각으로 어떻게 정신이 깃든 환경을 만들겠나? ‘노마’에서 하는 모든 결정은 배짱이다.” 여전히 언제든 만나면 두 손을 꼭 맞잡아보고 싶다는 생각은 했지만, 예약은 넣지 않았다. 오히려 노마의 정신을 나름대로 해석하고자 하는 노마의 옆집이 궁금했다. ‘역시 파리는 에펠탑이었어’ 한탄하며 후회에 무릎 꿇을지라도 이번에는 그렇게 해보리라 마음먹었다.

각종 채소와 스모크트 치즈가 함께 나오는 바르의 플래터와 곰새우 소스로 속을 채운 넙치 요리.

2015년 노마가 짐을 싸서 나온 옛터에 자리 잡은 레스토랑이 바르(Barr)다. 노마 그룹의 지원을 받는 스핀오프(Spin-off) 레스토랑은 코펜하겐에 총 여섯 군데 있으며 이곳도 그중 하나다. 바르는 Barley, 즉 보리라는 뜻이다. 노마가 있었던 곳에 레스토랑을 열면서, 이름마저 수수하게 지어버리는 맥 빠지는 패기에 조금 웃음이 났다. 메뉴판을 가득 채운 맥주 리스트를 보고 나서야 뒤늦게 이름의 뜻을 알아차렸고, 발효한 보리를 무기 삼았다는 것도 그제야 깨달았다. 아무리 요즘 스타일의 레스토랑이라고 해도 맥주는 구색을 힙하게 맞추고 싶을 때 사용하는 보조 음료에 머물 때가 많다. 공들인 와인 리스트의 뒷면 한구석에 대여섯 가지 선택지로 외롭게 자리 잡던 맥주를 이곳에선 아예 전면 배치했다. 20개의 비어 탭과 그보다 더 긴 보틀 리스트에는 북유럽 양조장은 물론이고 벨기에 람빅과 더 펑키한 크래프트 맥주 브루어리의 이름까지 섞여 있다. 벨지안 와플에 블릭 알(Bleak Roe)과 사워크림을 발라 먹을 때도, 깍둑썰기를 한 무에 비프 타르타르와 타라곤 소스를 버무려 먹을 때도, 온갖 구황작물의 맛이 황홀하게 블렌딩된 예루살렘 아티초크(Jerusalem Artichoke)에 닭구이를 곁들일 때도 맥주를 마셨다. 겨울의 스파이스가 더해진 달고 걸쭉한 맛의 맥주 한 잔을 마무리로 마시고는 한껏 기분이 고조돼, 타이어 한 바퀴가 구를 때마다 1,000원이 올라가는 악명 높은 코펜하겐 택시를 타고 호텔로 돌아왔다.

바르와 위치상으로 거의 어깨를 맞대고 있는 레스토랑이 ‘108’이다. 한국계 셰프 크리스티안 바우만이 주방을 지키는 곳이라 젊은 한국인 요리사들이 분주히 움직이는 걸 확인할 수 있다. 노마의 요리 스타일에 캐주얼 분위기를 한층 더 끼얹은 듯한 108은 일부러 점심시간에 예약하고 찾았다. 바르보다 훨씬 밝은 실내 분위기, 경쾌한 서버의 응대, 손잡이가 달린 투박한 맥주잔, 코스가 바뀔 때마다 서버가 와서 챙기지 않아도 되게끔 여벌의 포크와 나이프를 꽂아둔 커틀러리용 가죽 주머니, 서로 다른 지역에 있는 두 군데 농장에서 구입하는 채소, 멋 부리지 않았지만 세심하게 매만진 티가 나는 프레젠테이션… 점심 코스는 단출했지만 코스 간의 조화가 좋았고 무엇보다 겨울철에 맞게 블랙커런트와 헤이즐넛을 사용한 디저트가 황홀했다. 바르도, 108도 식재료가 가진 맛을 살리기 위해 진한 소스나 과한 시즈닝을 자제했다는 게 느껴졌다. 처음엔 ‘싱겁다’는 생각과 ‘농후한 풍미가 약하다’는 생각이 교차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즉각적 인상이야말로 파리, 바르셀로나, 밀라노와 코펜하겐을 구분 짓는 가장 큰 특징이다. 서버가 재료를 하나하나 설명해주는 일에 꽤 정성을 들이는 것을 보면, 역으로 주방에서 재료 하나하나를 얼마나 세심하게 고르고 손질했는지 유추할 수 있다.

108의 캐주얼 무드에 힙을 조금 더하고 싶다면 코펜하겐 미트패킹 디스트릭트의 쾨드비옌스 피스케바(Kødbyens Fiskebar)로 가면 된다. 르네 레드제피의 친구로 유명한 안데르스 셀머 셰프가 2009년에 문을 연 곳이다. 생각보다 연식이 꽤 오래된 레스토랑이지만 이케아의 독립 R&D 실험실이자 미래지향적 멀티플랫폼인 ‘스페이스10’이 바로 얼마 전 코앞에 문을 열었을 만큼 이 구역의 ‘힙 지수’는 여전히 최상이다. 어둑한 조명과 엷은 빛을 반사하는 흰 타일과 거울이 조화를 이루는 이곳에선 하이퍼로컬(Hyperlocal) 해산물을 우직하고 정직하게 다룬다. 뉴 노르딕 퀴진이 표방하는 로커브리즘을 가장 잘 구현할 요소 중 하나가 해산물이다. 가리비, 굴, 홍합, 오징어, 킹크랩, 해조류를 활용한 요리가 주를 이루며 뒤통수를 치듯 혁신적이진 않아도, 놀랍도록 신선하고 맛에 빈틈이 없다. 큰 소리로 대화하거나 음악에 맞춰 어깨춤을 춘다고 해도 전혀 어색하지 않으며 담요를 덮고 가게 앞 캠핑 체어에 누운 채로 칵테일 한잔에 굴을 곁들이는 것도 가능하다. 초고추장에 찍어 먹는 석화 무더기가 그리워질 가격이지만, 놀랍게도 이곳은 미쉐린 가이드의 빕구르망 자리를 오랫동안 지키는 가성비 좋은 음식점이다. 코펜하겐에서 이틀 밤을 넘기자 살인적인 물가가 아무렇지도 않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노르딕 힙스터를 목도하고 싶다면 시내 복판에 있는 아폴로 바 & 칸티네(Apollo Bar & Kantine)에서 즐기는 브런치를 놓치지 않아야 한다. 칸티네, 즉 구내식당이라 이름 붙은 이유는 덴마크 왕립 미술 아카데미(Det Kongelige Danske Kunstakademi) 건물 안에 자리 잡고 있어서다. 화려한 식사 메뉴나 묵직한 와인 리스트는 없지만 어떤 레스토랑보다 세련된 인테리어와 누구보다 멋진 사람들을 잔뜩 구경할 수 있는 곳이다. 30년은 입은 듯한 낡은 가죽 재킷에 발렌시아가 에브리데이 카메라 백을 두르고 나타난 손님이 바에 앉는 순간 ‘사람이 인테리어’라는 말이 온전히 이해되기 시작했다. 이곳은 인스타그래머블한 카페로 유명한 ‘아틀리에 셉템버’에서 만든 공간인 만큼 60~70년대 북유럽 아틀리에를 떠올리게 하는 조각 소품, 패브릭, 빈티지 의자로 세련되게 채워져 있다. 아침부터 글라스 와인이나 맥주, 커피를 마셔도 전혀 어색하지 않을 분위기라, 오전 11시에 맥주와 와인을 연이어 마셨다.

사워도우 빵과 가벼운 이탈리아 요리를 모두 맛볼 수 있는 뇌레브로 지역의 미라벨.

하루는 시간 여유를 만들어 뇌레브로(Nørrebro) 지역을 천천히 걸었다. 트렌드에 민감한 학생들이나 예술계 종사자가 모여 허름한 동네가 힙스터들의 새로운 성지로 탈바꿈한 곳을 꼽자면 이 동네가 첫 번째다. 지하실까지 가득 빈티지 그릇이 쌓인 가게라든지, 영국이나 이탈리아의 숨은 보석을 쏙쏙 골라 판매하는 빈티지 의류 숍이 맥주 양조장과 내추럴 와인 전문점 사이사이를 가득 채웠다. 이 구역에는 크리스찬 F. 풀리시 셰프가 이끄는 레스토랑 그룹에 속한 식당이 골목마다 흩어져 있다. 직접 모차렐라를 만드는 피자 가게 베스트(Bæst), 야심과 세심을 두루 갖춘 레스토랑 렐레(Relæ), 코펜하겐 최고의 사워도우 크루아상을 판다는 빵집 겸 캐주얼 다이닝 미라벨(Mirabelle) 같은 곳이 제각각의 명성으로 이 지역을 부흥시키고 있다. 점심시간에 미라벨을 찾아 간단한 파스타와 내추럴 와인을 마셨다. 프렌치와 이탤리언이 뒤섞인 메뉴, 손님과 손님이 어깨를 맞대고 앉는 대형 공유 테이블은 그 자체로 뇌레브로를 상징하는 풍경이다. 다음 날 아침에 먹으려고 산 크루아상은 호텔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다 먹고 말았다.

스톡홀름의 작은 카페 펠란스 콘펙튀르의 풍경.

여행이 중반을 넘어서자 ‘힙’에 조금 지치기 시작했다. 성대한 식사도 피로하게 느껴졌다. “북유럽은 역시 청어 아닌가요? 덴마크는 스뫼레브뢰(Smørrebrød)가 특산물 아닌가요?” 내 안의 꼰대가 귓가에 이런 말을 속삭이는 통에, 하루는 덴마크식 오픈 샌드위치를 맛보러 올 & 브뢰드 바이 미켈러(ØL & Brød by Mikkeller)를 찾았다. 덴마크의 마이크로 브루어리 미켈러에서 운영하는 모던 스뫼레브뢰 전문 레스토랑이다. 미켈러 맥주 10가지가 늘 탭으로 준비돼 있고 모양부터 재료 손질까지 그림을 그리듯 예쁘게 매만진 스뫼레브뢰가 나온다. 크리스마스 시즌에 잡히는 청어, 카레 드레싱, 적양파, 사과를 올린 스뫼레브뢰에 라임과 고추를 넣어 만든 맥주를 곁들였다. 스뫼레브뢰 하나를 다 먹을 때쯤 커피 한 잔에 빵 한 조각이 식사를 대체하던 스톡홀름에서 보낸 시간이 떠올랐다. 코펜하겐으로 오기 전, 스톡홀름에서 이틀 간 피카(Fika) 타임을 즐겼다. 생각보다 투박하고 예상보다 달던 카페의 빵은 커피로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였다는 걸 지나고 나서야 깨달았다.

코펜하겐 회스트의 포근한 인테리어.

1930년부터 운영된 가게지만 여전히 젊고 귀여운 카페 쉬스트라르나 안데르손(Systrarna Andersson)에서는 크리스마스 시즌에 나온다는 사프란이 들어간 단단한 빵과 커피를 마셨다. 스톡홀름 쇠데르말름 지역에 있는 작은 캐러멜 가게 펠란스 콘펙튀르(Pärlans Konfektyr)에서는 두 주먹 가득 캐러멜을 고르고 어둑한 호텔 조명 아래에서 커피와 함께 마셨다. 의외로 귓불이 찢어질 듯 춥진 않지만, 북유럽의 겨울은 내내 어둑하고 내내 스산한 기운이 가득해 커피 한 잔이 더 온화하고 포근하게 느껴진다. 코펜하겐에서도 식사와 식사 사이 카페를 찾아 커피를 마셨다. 여러 카페 중에 인디 레이블 바이닐이 한쪽 벽 가득한 블랙 커피 & 바이닐(Black Coffee & Vinyl)에서 가장 행복했다. 커피로는 부족하다 싶은 날엔 헨릭 빕스코브의 초리조 쿠션으로 실내를 장식한 귀여운 내추럴 와인 숍 빈 슈퍼 내추럴(Vin Super Naturel)에서 놀랍도록 싼 가격의 내추럴 와인을 한 병 사서 호텔 창가에 올려두고 나흘 내내 마셨다.

커피와 와인으로 위장에 휴식기를 준 뒤, 다시 거대한 식사가 시작됐다. 코펜하겐에서 마지막 밤은 아마스(Amass)로 갔다. 전날에는 코펜하겐에 있는 레스토랑 회스트(Høst)에서 8코스로 구성된 긴 식사를 했다. 간이 강하고 호방해서 그동안 익숙하게 즐겨온 유러피언 디시에 가까운 요리였고 그 덕에 좋기도, 아쉽기도 했다. 노마의 기운이 강한, 노르딕 퀴진의 오늘을 정확히 볼 수 있는 아마스에서 먹은 식사야말로 지난 나흘간의 식사를 마무리하는 근사한 피날레가 될 것 같았다. 9시가 넘어 도착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공장을 개조한 레스토랑 바로 앞에는 직접 운영하는 농장이 있다. 사람들이 식사를 하다 말고 밖에 나가 잠깐 산책을 하다 오기도 할 정도로 한산한 외곽에 자리 잡고 있어 가능한 일이다. 꽤 긴 시간 버스를 타고 아마스에 도착해 큰 테이블 끄트머리에 혼자 앉았다. 네 잔의 와인 페어링과 아마스의 ‘지속 가능한’ 방법으로 요리한 접시를 하나씩 천천히 비웠다. 전날 만들고 남은 빵, 다듬고 남은 호박, 감자 껍질, 식물 뿌리부터 줄기까지 모조리 요리로 만드는 아마스의 음식에선 어떤 의지가 느껴졌다. 나도 피아노 건반 앞에 앉아 끝을 향해 달려가는 조성진처럼 열렬히 음식을 즐겼다. 그 순간만큼은 노마도, 르네도, 에펠탑도, 물가도, 추위도, 긴 밤도 생각나지 않고 오로지 분주히 움직이는 회색 앞치마를 두른 10여 명의 셰프들과 핀 라이트가 떨어진 듯한 테이블의 음식만 선명하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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