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꾸뛰리에 엠마누엘 웅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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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꾸뛰리에 엠마누엘 웅가로

2020-02-04T13:15:28+00:00 2020.01.03|

“드레스를 입어선 안 됩니다. 그 안에서 살아야 하죠.” 드레이프와 컬러의 거장, 엠마누엘 마테오티 웅가로는 1960년대에 미니드레스와 싸이하이 부츠를 선보이며 오뜨 꾸뛰르 세계에 등장했습니다. 위대한 꾸뛰리에 중 한 명으로 기억될 그가 지난 12월 22일 향년 86세로 세상을 떴습니다. 정확한 사망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지만 유가족인 그의 아내 로라 베르나베이와 딸 코시마 웅가로는 지난 2년간 그의 몸이 급격히 쇠약해졌다고 말했습니다.

크리스토발 발렌시아가 밑에서 일한 웅가로는 1960년대에 여성복 재단 기술을 익힌 소규모 디자이너 집단에 속해 있었습니다. 이브 생 로랑, 앙드레 꾸레주, 파코 라반과 함께 파리 오뜨 꾸뛰르를 잇는 마지막 세대였죠. 1965년 엠마누엘 웅가로 하우스를 오픈한 그는 2년 후, 지금의 자리이자 파리의 주요 꾸뛰르 하우스가 모여 있던 애비뉴 몽테뉴로 아틀리에를 옮깁니다. 하지만 웅가로는 주위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전형적인 스타일을 따르지 않았죠. 첫 컬렉션에서 흔한 볼 가운 대신 눈에 확 띄는 미니드레스를 선보였습니다. 프린트의 대비 효과, 퀼팅 처리한 가죽과 싸이하이 부츠는 웅가로를 지극히 1960년대다운 인물로 만들었습니다. <WWD>는 그에게 “꾸뛰르의 새로운 고양이”라는 별명을 붙여줬고요.

웅가로는 이탈리아 출신으로 1933년에 태어나서 프랑스에서 자랐습니다. 그의 부모가 1920년대에 무솔리니의 파시스트 정권을 피해 엑상프로방스에 정착했거든요. 여섯 형제 중 둘째인 웅가로는 다섯 살 때 처음 재봉틀로 바느질하는 법을 배웠고, 아버지인 코시모 웅가로의 양복점에서 본격적으로 재단을 시작했습니다. 웅가로는 스물두 살 때 파리의 몽파르나스로 왔고 약 12개월 후, 동료인 꾸레주의 소개로 전설적인 꾸뛰리에의 어시스턴트가 됐죠. 20대를 발렌시아가 밑에서 보내고 치프 어시스턴트로 승진한 웅가로는 1965년에 발렌시아가 하우스를 떠나서 자신의 아틀리에를 차리게 됩니다. 그해 <WWD>는 “모두의 뇌리에 새겨진 이름은 바로 엠마누엘 웅가로다. 파리는 새로운 힘을 필요로 한다. 기자들은 새로운 것을 원하고 엠마누엘 웅가로가 바로 그것을 줄 수 있다”고 전하죠.

웅가로는 바그너와 베토벤의 실내악을 틀어놓고 12시간을 내리 일하곤 했는데, 종이 위에 디자인을 그리기 전에 투알이나 머슬린 같은 천에 핀을 꽂아 디자인하는 드레이핑 기법을 즐겼습니다. 웅가로는 1988년에 한 매체와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하기도 했죠. “동료들은 내가 원단에 코를 묻을 때마다 항상 놀리곤 했답니다. “난 원단에 신경 쓰고 냄새 맡고 귀를 기울였어요. 한 벌의 옷은 수많은 방식으로 이야기해야 하니까요.”

발렌시아가의 마지막 계승자 중 한 명이라는 사실이 웅가로의 커리어를 더 특별하게 만들었지만, 이 젊은 디자이너는 패션계의 흐름에 반항하는 대신 그 변화를 직접 이끌었죠. 그는 아틀리에 작업을 꾸뛰르 너머로 확장, 1967년에는 여성복, 1970년대에는 남성복으로 진출했습니다. 기성복 생산을 위한 라이선스 업체로 그루포 GFT와 처음 계약을 맺었습니다. “난 일주일에 3일을 투린에서 옷 만드는 방법을 가르치며 보냈습니다. 나는 선구자였죠. 뒤따를 사람들을 위해 그 길을 개척했습니다.” 1997년 패션 저널리스트 테리 어긴즈와 나눈 대화에서 웅가로는 자신의 뒤를 이어 GFT와 계약을 맺은 아르마니와 발렌티노를 언급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웅가로는 여전히 발렌시아가에게 배운 대로 옷을 만들 때 손으로 꼼꼼하게 작업했으며 ‘고객은 절대 옳지 않다’는 원칙을 지켰습니다. 물론 그럼에도 고객들은 그를 떠나지 않았죠. 영국 <보그>는 “2000년에도 웅가로는 여전히 전 세계에 200명의 꾸뛰르 고객을 보유했고 그중 60여 명은 매 시즌 고정적으로 꾸뛰르를 맞췄다”고 밝혔습니다.

1983년에 그는 유명한 ‘디바’ 향수를 론칭했습니다. 프랑스 여배우 아누크 에메와 연애를 하면서 이 향수에 대한 영감을 얻었죠. 에메는 헤어진 후에도 친구이자 웅가로의 팬으로 계속 남았습니다. 그 외에도 재클린 케네디 오나시스, 카트린 드뇌브, 린 와이어트, 헬렌 드 로스차일드도 웅가로의 의상을 좋아했고요. 웅가로는 1988년에 로라 베르나베이와 결혼했고 딸 코시마 웅가로를 낳았습니다.

1980년대와 1990년대, 웅가로가 디자인한 드레이프 시크 드레스와 안감에 모피를 댄 카디건은 엄청난 인기를 끌었습니다. 패션 평론가 캐시 호린은 “만약 당신이 댈러스나 뉴욕의 오만한 부티크 주인임에도 실크가 가슴과 허벅지를 타고 녹은 버터처럼 흘러내리는 웅가로의 드레이프 드레스를 팔지 못한다면, 당신은 망한 거다”라고 말한 적도 있습니다. “엠마누엘은 뚜렷한 자신만의 스타일이 있었어요. 그의 재킷은 절대 잊힐 수 없죠. 한번 보면 그의 재킷인 줄 단박에 알아볼 수 있습니다.” 1970년대와 1980년대 미국 <보그> 편집장 그레이스 미라벨라는 이렇게 확신했습니다.

웅가로는 1996년에 하우스의 지분을 판매한 마지막 꾸뛰리에였습니다. 이탈리아 가족 경영 기업인 살바토레 페라가모 SpA가 그 지분을 샀죠. 웅가로는 회사 지분을 4,000만 달러만 보유한 채로 2004년까지 웅가로 하우스의 꾸뛰리에로 활동했습니다. 자신이 직접 일군 패션 하우스를 파는 것은 “객관적으로나 감정적으로나 매우 힘든 일이었다”고 1996년 7월 <WWD>에 고백한 적이 있습니다. “결정을 내리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러고 싶지 않았지만, 하우스가 바뀌는 것도 원치 않으니까요.”

1998년부터 2004년까지 지암바티스타 발리가 웅가로 곁에서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활동했습니다. 2005년에 웅가로 하우스는 미화 8,400만 달러에 실리콘밸리의 거물, 아심 압둘라에게 팔렸고 웅가로는 완전히 은퇴했죠. 이후 웅가로 하우스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자리는 뱅상 다레, 피터 던다스, 에스테반 코르타자로 회전문처럼 이어졌습니다.

2009년, CEO 무니르 무파리지는 에스트렐라 아치스와 함께 당대 최고의 파티 걸이자 배우인 린제이 로한을 지목했습니다. 웅가로는 이 소식을 탐탁지 않아 했지만 어쨌거나 셀러브리티에 의지한 2인 체제는 오래가지 못했죠. 2010년에 영국 디자이너 자일스 디컨이 웅가로가 사랑하는 대담한 텍스타일과 대각선으로 뻗는 여성스러운 룩을 부활시켰습니다. 2012년부터 2017년까지 파우스토 푸글리시, 그 후부터 지금까지 밀라노 출신 디자이너 마르코 콜라그로시가 웅가로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활약하고 있습니다.

재봉틀 앞에서 시간을 보내던 어린 시절부터 애비뉴 몽테뉴의 아틀리에에서 꾸뛰르 기술에 전념하던 시절까지, 웅가로는 아름다움을 구현하는 놀라운 능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나는 나 자신을 미래에 투영하고 과거 컬렉션은 기억조차 하지 못합니다.” 그가 남긴 유명한 말이죠. 그는 깊이 파인 아름다운 실크와 주름진 투알 가운으로 영원히 기억될 겁니다. 예술적으로나 열정적으로나 항상 앞을 향해 나아가던 뛰어난 꾸뛰리에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