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렌시아가의 디렉터 뎀나 바잘리아가 찾은 안식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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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렌시아가의 디렉터 뎀나 바잘리아가 찾은 안식처

2020-04-03T19:37:09+00:00 2020.04.09|

멀고 먼 나라에서

발렌시아가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뎀나 바잘리아는 10년 넘게 유럽을 횡단한 후 드디어 안식처를 발견했다. 우리 시대의 가장 도발적이고 창의적인 패션의 일부가 태어날 장소에 다다른 것이다.

상념의 개울. 바잘리아는 스위스의 집 근처 숲속에 서 있다. “나는 안정감을 갖고 싶었어요.” 그는 배우자이자 뮤지션 로익 고메즈와 2017년 이곳으로 이주를 결정했다.

그는 흔치 않은 디자이너이다. 패션계의 파격적인 영웅 중 한 사람인 동시에 패션계를 비꼬고, 충격을 주고, 뒤흔든다. 지난 10년간 기존 관습을 타파하는 베트멍의 디자이너였으며 2015년부터는 발렌시아가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반항적인 에너지를 건설적이면서 모두가 열망하는 영향력으로 전환해왔다.

2014년 뎀나 바잘리아(Demna Gvasalia)는 친구들과 함께 베트멍을 론칭했다. 베트멍의 상징적인 룩(오버사이즈 후디, 굽이 담배 라이터 모양인 앵클 부츠, 빈티지 리바이스를 해체하고 재조합한 데님 등)은 수많은 모방자와 카니예 웨스트부터 헤일리 볼드윈에 이르는 다양한 팬들을 아울렀다. 단순히 팔보다 더 긴 소매가 축 늘어지는 디자인 정도로 소비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게 아니다. 매우 과감하면서도 당당하게 ‘내 방식대로 보라’고 말하는 듯한 바잘리아의 자신감 넘치는 접근 방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스트리트 스타일을 따르기보다는 창의적인 방식으로 도시의 과시욕을 충족시켰고 길에서 마주치는 평범한 사람들이 옷을 입는 방식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일시적인 유행을 따르지 않는 대신 아리송하고 사적인 요소를 차용했다. 발렌시아가의 몇몇 코트에는 이유를 알 수 없을 정도로 길고 폭이 좁은 안주머니가 달려 있는데 이는 바잘리아가 친구들과의 저녁 파티에 와인을 가져가는 사람들을 관찰한 결과다. 전화를 받거나 문고리를 잡을 때 팔에 끼고 있는 와인병이 위태롭게 흔들리는 것을 포착한 것이다.

또 다른 예로 발렌시아가 2018 F/W 컬렉션에서 서로 다른 원단을 7단으로 쌓아 올려 지나치게 바잉을 많이 하는 사치스러운 패션 바이어들에 대한 비판을 표현하기도 했다. 이처럼 바잘리아의 인류학적 관찰과 패션 산업에 대한 모순적 감정의 결합은 그를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서 역설적인 인물로 만들었다. 그는 독창적이고 우아하며, 때로는 겉잡을 수 없이 아방가르드하지만 기본적으로 일상의 평범한 시각에 기반해 작업을 하는 디자이너인 것이다. 지난 5년간 바잘리아의 미적 감각은 패션계의 드높은 하늘에 박힌, 발렌시아가라는 보석을 마법의 돌로 바꿔놨다. 바잘리아의 통솔 아래 하우스는 업계에서 독보적인 길을 개척했으며 미래에도 더욱 가치 있는 브랜드로 성장하고 있다.

“배타적이고 누구나 쉽게 가질 수 없는 걸 추구하는 대부분의 럭셔리 브랜드와는 다릅니다.” 바잘리아 디자인의 전문가이자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의상 연구소 큐레이터인 카렌 반 고트센호벤(Karen van Godtsenhoven)이 설명했다. “그는 파티 피플, 직장 여성, 경비원 등 다양한 사람들을 위한 옷을 만들죠. 모두를 평등한 시각으로 보는 민주적인 접근입니다.” 그의 옷은 상업적 패션에서 찾아보기 힘든 방식으로 브랜드의 기호학을 탐험한다. 2017년에 그는 버니 샌더스의 로고를 발렌시아가 런웨이에 선보인 적이 있는데, 이는 젊은 구매자들의 구미에 잘 맞아떨어졌다.

이러한 접근법은 바잘리아의 의상 제작 방식에도 적용된다. 2009년 막 패션 스쿨을 졸업한 바잘리아는 메종 마르탱 마르지엘라에 일자리를 얻어 옷을 만들기 시작했다. 전통적으로는 옷을 만들 때 모슬린이나 울 같은 기본 재료로 재단하고 가봉하지만 마르지엘라에서는 이미 완성된 빈티지 의상으로 입체재단을 했다. “우리는 늘 아주 저렴한 옷, 중고 의류나 옛날 샘플 의상을 사용했죠”라고 그가 회상했다. 이러한 재료를 마네킹에 입혀서 자르고, 마름질하고, 시침했는데 2차원적인 평면 디자인으로 교육받은 젊은 바잘리아에게 재료 주위를 돌면서 하는 입체재단법은 일종의 반항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그리고 그는 지금도 그 방법을 사용한다. “패턴사들이 처음 나와 일하면 깜짝 놀라곤 합니다. 아마 새로운 것을 만들기 위해 내가 얼마나 많이 잘라내고 시침을 하고 형태를 바꾸는지가 놀라운 거겠죠.” 그는 말했다. 이 과정은 패션의 가장 핵심적인 순간을 포착한다. 기존의 것을 부수고, 천천히, 부드럽게 부서진 조각을 다시 이전과는 전혀 다른 아름다운 모습으로 만들어내는 순간.

지난 3년 동안 바잘리아는 자신만의 재조합 방식을 통해 파리의 현실적 경계를 찢어버리는 야생아 같았다. 2017년 그는 프랑스인 작곡가이자 뮤지션인 로익 고메즈(Loïk Gomez)와 결혼해 스위스로 이사했다. 발렌시아가의 거점인 동시에 패션의 도가니와도 같은 파리에서 창의적인 거리를 두기 위해서였다. 그는 채식주의자가 되었으며, 운동을 시작했고, 지난가을에는 형제이자 공동 설립자인 구람 바잘리아에게 베트멍을 맡기고 떠났다. 이른 겨울 나는 취리히 외곽의 언덕 쪽 마을에 자리 잡은 바잘리아의 집을 방문했다. 나는 저택 입구에서 벨을 누른 후 목가적인 조용함 속에 서 있었다. 노란색 DHL 밴이 주차장을 나와 작은 길을 따라 사라지기 전까지 말이다.

바잘리아는 나를 따뜻하게 맞아주었다. 공적인 삶에서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수수께끼 같은 방어막 뒤에 숨는 사람들이 흔히 그렇듯, 그는 사적으로는 대단히 말도 잘하고 특이한 수줍음을 가진 사람이다. 우리는 비스듬히 경사진 정원을 따라 정문에 다다랐다. 그의 집은 상자 모양의 확 트인 공간으로 온통 직선적인 기하학 형태와 나무 바닥으로 가득하다.

“이 집은 독일어로 치면 종합예술(Gesamtkunstwerk)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내가 한 발짝 들이자 그가 말했다. 그는 정문 뒤에 세워놓은 미국 작가 마크 젠킨스(Mark Jenkins)의 실물 같은 동상에 대해 주의를 주었다. 그 동상은 바잘리아의 검은 후디를 입고 검은 야구 배트를 험악하게 움켜쥐고 있었다. 마치 시각적 악몽 같았다. “사람들에게 경고해줘야 해요. 집 전체에 이런 동상이 있거든요.” 그는 웃음기 없는 얼굴로 말했다.

마침 바잘리아도 유사하게 소매가 손 아래까지 길게 늘어진 검은 스웨트셔츠를 입고 있었다. 그는 어중간한 길이로 밤색 턱수염을 기르고 머리카락은 바짝 짧게 깎았다. 양쪽 귀에는 은으로 된 링 귀고리를 달고 있었다. 그는 성인이 된 후 삶에서 옷 입는 방식이 자신의 존재를 증명해왔다고 말했다. 실내에서 모자를 쓴다는 이유로 고급 레스토랑에서 쫓겨나본 적도 있고 콜라를 뒤집어써본 적도 있었는데, 그가 너무 다르고 이상해 보였기 때문이다. “아마 내가 그런 반응을 도발하는 것 같아요. 최근에야 알게 됐죠.” 그렇지만 스위스에서의 몰이해는 좀더 고상한 방식이다. “덜 비판적이죠. 스위스 사람들이 그런 것 같아요.” 그가 말했다. “이곳이 안전하다고 느껴져요. 안전이란 건 평생 가장 중요한 이슈였죠.” 바잘리아는 흑해 연안 국가인 조지아에서 자랐고 이제 38세가 되었다. 그가 10세일 때 조지아 내전이 발발했고 그의 가족은 수도인 트빌리시로 피신했다가 다시 독일 뒤셀도르프로 이주했다. 그때 이후로 그가 사는 모든 곳에서 그는 이방인이었고 그가 성공할수록 이질감도 더욱 커질 뿐이었다. “안정감을 원했어요. 이전의 내게 없던 삶의 질을 가지고 싶었지만, 두 개의 직장을 병행했을 때도 늘 어디선가 패션 위크를 치르고 있었죠.”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패션에 대한 사랑에서 벗어나고 싶은 건 아니에요. 알잖아요. ‘신이시여, 또 다른 환절기 컬렉션이라니!’” 그렇다. 취리히라고 안 될 건 또 뭔가? 서유럽에서 가장 패션과는 거리가 먼 도시라고 불리는 것 자체가 부당한 게 아닐까? “패션과 정반대이긴 하죠.” 그가 웃었다. “어떤 옷을 입는지 정말 신경 쓰지 않으니까요.”

숲과 가까운 그곳에서 그는 다시 한번 창의성이라는 바람을 일으킬 거대한 상상의 공간과 삶의 리듬을 찾아냈다. 그의 집 거실은 댄스 스튜디오 같은 직사각형 공간으로 천장은 높고, 커튼은 창문을 전부 가릴 정도로 길며, 가구는 잘 배치돼 있다. 윤이 나는 그랜드피아노와 멋진 소파와 긴 협탁도 있다. 식당에는 철도 침목으로 다리를 만든 기다란 검은 테이블이 있다. 마음에 드는 것을 찾을 수 없어서 바잘리아가 직접 디자인한 것이다. 테이블 한쪽 끝에도 여자 동상이 있는데, 회색 후디를 입고 실망한 10대처럼 테이블 상단에 이마를 대고 있다. 그의 파트너 로익 고메즈는 가죽 스트랩 형태로 자수를 놓은 화이트 버튼다운 셔츠를 입고 도자기 접시에 먹음직스러워 보이는 스위스 디저트를 담아왔다. 바잘리아는 백악관 마크가 양각으로 새겨진 미스터리한 유리잔에 콜라를 부었다. 주방부터 이어지는 식당은 밝은 분위기의 전통적인 유럽풍으로 꾸며져 있다. 흑백의 체크무늬 타일로 덮인 바닥에 전면이 유리로 된 높은 도자기 장식장이 놓여 있으며, 가운데에 차가운 겨울빛을 붙잡는 대리석 아일랜드 식탁이 있다.

한 달에 한 번 바잘리아는 기차를 타고 파리로 간다. 일주일 정도 머무르며 피팅을 하고 업무상 미팅도 하며 친구도 만난다. 스위스에는 일부러 친구를 만들지 않았다. “SNS를 통해 사람들을 만날 수 있고 이미 모든 걸 알 수 있죠. 무슨 일이 일어났고, 어디서 놀고 있는지 같은 것들이오.” 그는 높고 킥킥대는 웃음소리를 내며 말했다. “매 순간 같이 있지 않아서 좋은 점도 있어요. 그래야 나중에 대화할 거리가 생기죠.” 그는 취리히에서의 아침을 꼭 자신과 고메즈를 위한 시간으로 지킨다. 함께 아침을 먹고, 집안일을 하고, 음악을 크게 틀어놓는다. 로마의 영웅처럼 숲으로 긴 산책을 떠났다가 11시쯤 돌아올 때면 창의력이 충전되고 일할 준비가 된 상태다. 그는 집 위층에 있는 작업실에서 이번 컬렉션을 준비 중이다. 각 의상마다 대략 네다섯 번 정도 가봉을 하지만 작업의 대부분은 SNS나 뉴스 사이트, 아카이브 이미지를 보는 데 사용하는 노트북이나 휴대폰을 통해 이루어진다. 그는 꼭 지금이 아니더라도 언젠가 그의 컬렉션에 쓰일 자료를 모아둔다. “지금 당장 쓰기에 적절하지 않다는 이유로 얼마나 많은 아이디어가 사라지는지 깨달았어요.” 그가 설명했다. “이젠 좀 따로 모아두고 있죠.”

스위스로 이사한 뒤 작업이 어떤 식으로 바뀌었는지 물어봤다. “내가 계속 갖고 있던 불안감을 지웠어요. 뭔가 증명해내야 한다는 의무감 같은 거였죠. 이제는 듣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말했다. “늘 ‘그렇게 이기적이면 안 돼’라고 생각했거든요. 브랜드, 팀, 다른 이들을 위해서 일해야 한다고 생각했죠. 하지만 지금은 나이도 먹었고, 나 자신과 연관시키는 건 어쩔 수 없는 것 같아요. 그래야 더 좋은 디자이너가 될 수 있고요. 지금의 나는 5년 전과는 다른 디자이너입니다. 더 이상 세상의 어두운 면만 보지는 않죠.”

이것이 그가 베트멍을 떠나야 한다고 느낀 이유다. 베트멍은 불안에 가득 찬, 정착하지 못하는 젊은이의 프로젝트였다. 그게 바로 빠른 성장의 요인이자 어필하는 부분이기도 했다. 그리고 바잘리아는 더 이상 스스로를 불안에 가득 찬 젊은이로 느끼지 않는다. “그 브랜드를 시작했을 때 나는 분노에 차 있었고 나 자신을 표현하고 싶었어요.” 그가 말했다. “브랜드 이름을 베트멍이라고 지었죠. 내 이름을 붙이지 않았어요. 디자이너가 되어가는 과정에 진행한 프로젝트로 여겼거든요.” 성공은 그의 허를 찔렀다. “내가 그런 걸 할 수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어요. 이 잔인하고 가차 없는 업계에서 말이죠. 만약 알았더라면 더 빨리 시작했을 텐데요.” 그는 말을 이었다. “하지만 인터넷을 통해서 젊은이들의 분노가 다시 유의미해진 시기라는 점에서 브랜드를 시작하기에 적절했어요.”

더욱 노련해진 대신 분노는 줄어든 그의 시각에서 베트멍은 전혀 다른 두 가지의 선택지를 가진다. 숲을 산책하는 거물 디자이너가 계속 디렉팅하거나, 굶주리고 젊은 혈기로 가득 찬 다른 사람이 브랜드를 이끄는 것이다. “어떤 프로젝트를 하건 베트멍은 나 자신을 반영하기엔 한계에 도달했다는 걸 깨달았어요.” 그가 설명했다. “아카이브와 브랜드의 DNA에는 더 이상 나 자신과 연관 지을 수 없는 광대한 아이디어와 제품이 있습니다. 브랜드를 시작한 이후 나도 바뀌었고, 패션의 흐름 역시 바뀌었죠. 베트멍은 나 없이도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갈 수 있어요.” 그 이후 그는 발렌시아가에 집중했다.

모델들이 물 위를 걸었던 발렌시아가 2020 F/W 컬렉션.

“뎀나 바잘리아는 독창적이고 창의적인 접근법을 고수하며 여자의 몸에 대한 관찰, 실험 정신, 엄격함, 혁신을 통해 발렌시아가의 존재감을 더욱 고양시켰습니다.” 발렌시아가를 소유한 럭셔리 그룹 케어링의 CEO 프랑수아 앙리 피노는 이렇게 말했다. 발렌시아가 창립자의 정신 속에서 바잘리아의 접근법을 ‘급진적’이라 표현하며 피노는 바잘리아의 도발적인 접근 방식과 사업을 대하는 실용적인 태도에 감명받았다고 이야기했다. “바잘리아는 사람들이 실제로 입고 싶어 하는 옷을 만드는 것에 신경 쓰는 동시에 보다 실험적이고 뒤섞인 것에 열린 젊은 고객에게도 집중하고 있습니다.” 그는 덧붙였다. 도박과도 같았던 시도는 좋은 결과를 가져왔다. 지난해 발렌시아가 매출이 10억 달러를 넘어섰는데, 이는 바잘리아가 들어왔을 때보다 두 배 이상으로 성장한 수치다. 그리고 70개 이상의 매장이 새로 문을 열었다. 청키한 트리플 S 스니커즈나 넓은 칼라와 긴소매의 ‘스윙’ 셔츠 같은 제품은 비주류적이면서 반패션적이었지만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현재 발렌시아가 매출의 70%는 밀레니얼 세대로부터 나온다. 점점 더 빠른 주기로 돌아가는 배송의 시대에 발렌시아가는 유통 경로를 더욱 가속화하는 데 집중하고 있으며 과거의 베스트셀러는 진열대에서 새 제품에 밀려나가고 있다.

바잘리아의 스케줄이 얼마나 자유로운지 알게 되면 브랜드의 꾸준한 인기가 더욱 인상 깊게 느껴진다. 지금 그는 일주일 중 사흘만 일하고 나머지 시간은 자신을 위해 사용한다. 콘서트에 가거나, 미술 전시를 보거나, 취미로 수를 놓거나, 집 인근의 대형 마트에 장을 보러 간다. “스위스에서는 저녁 6시만 되면 거의 문을 닫거든요. 일요일 오후에 당근을 사러 갈 수 있다는 것조차 큰 사치처럼 느껴진다니까요.” 그가 말을 이었다. “예전에 접골원에 갔을 때였죠. 여기저기 꺾이고 뒤틀리는 동안 정말 많은 아이디어를 얻었어요!” 그가 말했다. “그게 바로 제 머리가 돌아가는 방식이죠.”

대화 중에 바잘리아는 1968년 크리스토발 발렌시아가의 은퇴 이후로 선보이지 않았던 오뜨 꾸뛰르 라인을 곧 재론칭할 거라고 알려줬다. 새로운 오뜨 꾸뛰르 라인은 오는 7월 파리에서 공개되며 꾸뛰르 패션 위크의 가장 폭발적인 이벤트가 될 것이다. 발렌시아가는 원래 꾸뛰르로 이름 높은 하우스였고 바잘리아의 지휘하에 부활한 꾸뛰르 라인은 발렌시아가라는 브랜드를 샤넬이나 디올과 같은 예술적 패션의 거인으로 우뚝 서게 만들 것이다. “바잘리아와 내가 하우스에 합류했을 때만 해도 실현 가능한 아이디어가 아니었습니다. 다른 우선 과제가 있었으니까요.” 2016년 발렌시아가 CEO로 취임해 브랜드의 확장을 이끈 세드릭 샤비트(Cédric Charbit)가 말했다. “바잘리아의 창의적 비전과 성공으로 이제는 실현시킬 장과 자원을 모두 확보했습니다.” 발렌시아가는 크리스토발의 아틀리에를 본뜬 꾸뛰르 전용 아틀리에를 만들 계획이다. “오뜨 꾸뛰르는 우리의 DNA에 깊이 새겨져 있고 그 노하우는 지난 수년간 내부적으로 잘 보존되어왔습니다.” 샤비트가 말했다.

“발렌시아가에서 일을 시작하면서부터 줄곧 생각해온 일이긴 하지만,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충분히 준비됐다고 느낀 적은 없었죠.” 꾸뛰르를 자신의 ‘성배’라고 부르는 바잘리아가 말했다. “내게 꾸뛰르는 모든 유행 그 위에 존재합니다.” 그가 말했다. “꾸뛰르는 가장 높은 수준의 미학에서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것이죠.” 그리고 그는 크리스토발 발렌시아가에 대해 아주 자세히 조사 중이다. “크리스토발 발렌시아가의 작업이 담긴 자료를 반복해서 보고, 그 아름다움과 형태와 인체의 구조를 느끼려고 노력했죠. 그의 업적에 대한 어떠한 헌정도, 복제도 아닌 현대적 재해석이 될 겁니다.” 몇 년 동안 발렌시아가는 오늘날의 꾸뛰르와 다름없는 레드 카펫 행사를 위한 드레스 협찬과 거리를 두고 있었다. 꾸뛰르를 다시 시작하는 데에 레드 카펫에 대한 하우스의 입장은 아직 아무것도 결정된 바 없다. 하지만 이에 개의치 않는 바잘리아는 꽤 열정적이다. “더 재미있을 것 같은데요.” 그가 말했다.

베트멍 컬렉션은 트렌치 코트, 푸퍼 재킷, 팬츠, 스니커즈 등 유니클로와는 또 다른 기능적 아이템을 선보여왔다. 바잘리아는 발렌시아가에서 일하고 결혼한 다음부터 자신의 컬렉션에 대해 다른 식으로 접근하기 시작했다.

“로익을 만나면서 인생이 완전히 바뀌었죠.” 그가 말했다. “나 자신과 좀더 긴밀히 이어지기 시작했어요. 나 자신을 느끼고 내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죠. 내 작업에 서사를 담아야 한다는 걸 깨달았어요. 나는 할 이야기가 있고, 표현할 것이 있었으니까요.”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정해진 컨셉이 아니라 움직임의 관점에서 생각하기 시작했다는 거다. 그는 떠오르는 아이디어가 발전하는 과정에 흥미를 느꼈다. 2020 S/S 발렌시아가 쇼에서 그는 사람들이 유럽 의회의 좌석에서 착안했다고 여기는 원형극장형 좌석을 준비하고 푸른색 카펫을 깔았다. 이는 파워 드레싱(Power Dressing)에서 착안한 것이었다. 그는 이 아이디어를 오랫동안 간직해왔는데, 고국 조지아에서 어깨 쪽에 보형 패드를 잔뜩 덧대던 할머니와 여성의 인권이 전면적으로 부상한 1980년대 분위기를 떠올리며 드디어 그 아이디어를 꺼낼 때라고 생각한 것이다. 클래식한 비즈니스 우먼의 정치적 파워 수트에서 착안한 아이디어는 거대하고 부풀어 오른 무도회 드레스로 이어졌다.

“하나의 주제에서 다른 주제로의 전환이 곧 작업 과정이었죠.” 그가 말했다. “처음에는 무도회 드레스에 대해 전혀 생각하지 않았지만, 어쨌든 드레스도 파워 드레싱의 일부니까요.” 모두의 뇌리에 깊이 박힌 그 쇼는 패션과 문화, 정치의 힘에 대한 구상의 결과물이었다. 모델들이 푸른 카펫이 깔린 공간을 소용돌이 형태로 걸으면서 진정한 의미의 종합예술과 패션 컬렉션이 그 형태의 경계에서 넘쳐흐르는 듯했다.

바잘리아는 일곱 살 때 처음으로 패션을 통해서 ‘힘’을 실행했다. 그 무렵 옆집에 살던 그리스인 재봉사에게 바지 길이를 5cm 정도 줄여달라고 한 적이 있는데, 학교에서 그가 자본주의적 견해를 숨기고 있는 게 아닌지 확인하기 위해 그의 부모님을 호출했다. “난 그냥 크롭트 팬츠를 입고 싶었을 뿐이고, 레닌 같은 사람들이 주입하려 한 사상에는 해당되지 않았던 거죠.” 경제적으로 풍족하지 않았기에 그의 부모님은 형제에게 늘 몇 사이즈 큰 옷을 사 입혔고, 그로 인해 바잘리아는 딱 맞는 옷보다 여유 있는 핏의 옷이 훨씬 편하다고 느끼게 됐다. 그는 청소년기에 마른 편이 아니었고 넉넉한 옷으로 몸을 숨기는 걸 좋아했으며, 자신의 손에 난 털에 대해 매우 예민하게 받아들였다. 그래서 그는 손을 덮을 정도로 긴소매를 선호했다. 16세 때 바잘리아와 친구들은 어깨를 앞으로 푹 숙인 채 다녔는데, 그것이 몸으로 표현하는 그 시대의 패션 같은 것이었고 그들은 쿨하고 안전하다고 느꼈다.

한동안 디자이너로서 그의 심상에서 제외돼 있었지만 그는 언제나 딱 맞게 재단하는 것에 저항하는 듯한 형태와 넉넉함을 좋아해왔다. 트빌리시주립대에서 국제경제학을 전공한 후 유럽의 패션 코스 중에 가장 적당한 비용으로 전통적인 패턴 메이킹과 재단 기술을 배울 수 있는 앤트워프 왕립예술학교에 입학했지만, 쉽지 않았다. “남성용 싱글 브레스트 재킷을 만드는 과정은 인생의 역대급 도전이었죠.” 그가 말했다. 어쨌거나 그는 재킷 만드는 법을 배웠고 지금도 만들 줄 안다. 베트멍 초기에는 비용을 아끼기 위해 직접 패턴을 자르기도 했다. 앤트워프 시절, 처음에는 기하학적이고 과시하는 듯 대담한 옷을 만들곤 했지만 성숙하면서 그도 바뀌었다.

“형태나 색상, 무엇이든 폭발적으로 표현할 수 있었지만 4학년이 된 후 그의 작업물은 훨씬 성숙해 있었습니다.” 그 프로그램을 가르쳤던 교수 린다 로파(Linda Loppa)가 말했다. “그는 자신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죠.” 그리고 이렇게 회상했다. “그럼 모든 게 쉬워집니다. 이렇게 지적한 게 기억나는군요. ‘주머니가 두 개만 필요한데 왜 다섯 개나 달았지?’ 왜냐하면 거기에 어떤 의도가 있다고 느꼈거든요.” 바잘리아 역시 그 순간이 터닝 포인트였다고 말했다. “선생님이 그러더군요. ‘이 옷을 입을 누군가를 위해서 만드는 거잖아. 정확하게 이 옷을 누가 입을지 생각해봤어?’ 순간 머리가 띵했어요. ‘세상에, 난 나 자신은커녕 그 누구에 대해서도 잘 모르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죠.” 그는 머릿속에 무언가가 분명해짐을 느꼈고 패션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정립하는 단계부터 다시 시작했다. “내가 일할 때 최우선 순위에 있습니다. 모델 피팅을 할 때 가장 먼저 하는 질문은 입었을 때 어떤 기분이 드냐는 겁니다.” 바잘리아가 말을 이었다. “‘나한테 말 걸지 마’ 같은 느낌인가? 아니면 ‘오늘 밤 난 정말 섹시해’ 같은 느낌? 그것도 아니면 ‘내가 제일 잘나가’ 같은 기분인가?”

발렌시아가에 합류했을 때, 그는 브랜드의 창립자 또한 자신과 동일한 관점을 가지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됐다. 바잘리아처럼 크리스토발 발렌시아가도 몸에 딱 맞는 스타일이 유행하던 시대에 드레이핑과 볼륨을 살린 의상을 디자인하는 최전선에 있었다. 바잘리아처럼 무슈 발렌시아가는 틀에 박힌 비율 좋은 모델과 일하는 대신 자세가 구부정한 여인들이 곧은 자세인 것처럼 보이거나, 살집 있는 사람들이 늘씬해 보일 수 있는 꾸뛰르 의상을 디자인하는 데에 자부심을 느꼈다. 그 당시 그는 파리에서 가장 나이 많은 모델을 기용하는 걸로 알려져 있었다. 바잘리아 역시 비교적 이른 시기에 런웨이에 다양성이 부족하다는 비판을 받았고 지금은 업계에서 가장 다양한 인종과 연령대의 모델을 캐스팅하는 디자이너 중 한 명이다. 발렌시아가 2020 S/S 쇼에는 ‘18+’라고 쓰인 스웨트셔츠 차림의 모델이 나오기도 했는데, 성적 매력이 있는 어린 모델들만 노리는 분위기에 반하는 입장을 명백히 밝히는 것이다. 동일한 쇼에 선 머리가 희끗한 모델 역시 멋으로 염색한 게 아니라 실제 나이 든 시니어 모델이었다. “브랜드에서 연령의 다양성을 보여주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더 진정성 있죠.” 그가 설명했다. “길거리에도 다 같은 나이대의 사람들만 있는 건 아니잖아요.”

바잘리아처럼 크리스토발 발렌시아가 또한 옷으로 표현할 수 있는 특정한 태도나 자세에 빠져 있었다. 심리 상태가 불안하더라도 드레스를 입었을 때 어깨 형태 같은 디테일로 오히려 태연해 보이는 그런 것 말이다. “의도적으로 도전적인 상황을 선택한 걸 수도 있죠. 시각적으로 더 나아 보이기 위해서 인체생리학적으로 접근해야 하는 상황 같은 거요.” 바잘리아가 말했다. 그 역시 어깨를 표현하는 데 이미 달인이다. 가슴 부분을 뒤로 열어 젖혀서 입는 그 유명한 발렌시아가 파카를 디자인한 주인공이니까. “이제 이 주제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겠네요. 실제로 그 옷을 입었을 때 더 멋있어 보이는가에 대해서요. 하지만 내 생각에 중요한 것은 그 옷이 어떤 애티튜드를 만들어내는가입니다.” 옷을 통해서 누군가를 주목받게 만드는 힘이 바잘리아가 꾸뛰르에서 가장 흥미를 느끼는 부분이다. “그것은 패션보다 아름다운 옷 그 자체에 대한 것입니다.” 그는 말했다. 유행도 없고, 시즌도 없는, ‘쿨’함의 집합체도 아니다. 각각의 옷은 개인의 스타일에 맞춰지기 위한 옷이다.

잠시 후 바잘리아는 산책을 제안했다. 그는 코트를 입고 웰링턴 부츠를 신고 검정 발렌시아가 모자를 썼고 우리는 숲속을 향했다. 눈은 오지 않았지만 쌀쌀하고 땅은 축축했다. 작은 다리를 건너서 개들이 놀고 있는 잔디밭을 지났다. “이렇게 북적이는 건 흔치 않은데!” 바잘리아가 멀리서 개들의 주인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가끔 고가도로를 건너는데 거기에 주유소가 있거든요. 스위스를 가로지르는 사람들이 들르는 곳이에요.” 그가 설명했다. “여행하는 사람들을 볼 수 있죠. 길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옷차림이지만 그들은 과시하려고 입은 게 아니기 때문에 극단적인 예를 볼 수 있습니다. 그 옷의 진정한 실체를 알 수 있는 거죠.”

바잘리아에게 현실이란 영감의 원천이자 견뎌야 할 무게다. 디자이너로 알려지고 나서 그는 한동안 피란민의 과거에 대해 이야기하길 꺼렸다. “그 주제에 헌정하는 베트멍 컬렉션을 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과거를 내려놓아야 했으니까요.” 그가 말했다. “이제는 개인적인 발전 측면에서도 과거의 경험이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느껴요. 그런 어려움 속에서도 물질적인 걸 얼마든지 즐겨도 괜찮다는 것을 배웠지만, 사실 그건 그리 중요한 게 아닙니다.”

지금 그의 가장 큰 관심사 중 하나는 지속 가능성이다. 브랜드 입장뿐 아니라 쇼핑 습관에서도 말이다. “우리는 자문해봐야 합니다. 왜 우리는 지금까지 해온 방식으로 계속 소비해왔는가? 또 다른 것을 살 필요가 있는가? 내가 이런 말을 한다는 게 조금 아이러니하게 느껴질 순 있지만, 실제로 나 자신에게 하는 질문이에요.” 그는 소비가 더 나아지기는커녕 더욱 악화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가끔 화가 나요. 우리는 보다 지속 가능한 제품을 만들 수 있어요. 하지만 만약 그 이유가 단지 더 많이 팔기 위해서라면 그건 말이 안 되죠. 난 다음 세대를 믿습니다. 조카가 열 살인데, 비건이죠. 물건을 사는 것도 별로 좋아하지 않고, 비행기도 타고 싶어 하지 않아요.”

패션은 그 어느 때보다도 세계화된 시대에 변화의 매개체가 될 충분한 잠재력을 가진다. 바잘리아는 유럽의 어느 유명 브랜드에서 일하는 수많은 디자이너보다 더 동쪽에서 왔고 이제 아시아 시장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것 또한 인정한다. 그가 크리스토발 발렌시아가와 공유하는 또 한 가지가 있다면 그것은 기모노에서 차용한 독특한 형태의 디자인이다. “디테일을 잘 들여다봐야 해요. 중국에서 춘절을 어떻게 보내는지 알아야 하고 미국에서는 어떤지도 알아야 하죠. 사회 정치적 이슈 또한 중요합니다.”

바잘리아는 조지아 방송국에서 로이터통신 기사를 번역하면서 17세의 이른 나이에 국제 정세를 배웠다. 그는 2001년 9월 11일, 첫 번째 비행기가 맨해튼의 세계무역센터를 들이받을 때도 그 일을 하고 있었다. 예민한 10대였던 바잘리아는 충격과 공포에서 헤어나오기도 전에, 해본 적도 없는 동시통역 생방송으로 조지아에 이 소식을 전해야 했다. 그 경험은 그가 한 명의 성인이자 디자이너로 성장하게 했다. 바잘리아는 로익 고메즈와는 프랑스어로 이야기하고, 가족과는 러시아어로 이야기하지만 생각은 영어로 한다. 조지아 사람과는 패션에 대해 이야기할 수 없는데, 정확한 단어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는 다른 어떤 디자이너보다도 자신의 작업에 전 세계 사회 정치에 대한 관심과 학습을 반영한다. “우리는 점점 더 통제되고, 더 조작되고, 더 감시당하고 있습니다. 맞서 싸울 때지만 그러기에는 위험한 시기인 것도 사실이에요. 그게 우리를 두렵게 하죠.”

범지구적으로 우울한 시기지만 그럼에도 바잘리아는 낙관론을 가지고 있으며, 그 어느 때보다도 밝은 상태라고 말했다. “옛날에는 절망의 순간이나 삶이 잔인할 때가 가장 창의적인 시기라고 여기곤 했죠. 하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아요. 세상의 밝은 면을 발견했고 나 자신과 잘 지낼 때 생산성이 10배는 더 늘어나죠.” 그는 덧붙였다. “사랑에 빠진 게 내 인생에 가장 중요한 일 중 하나인 것 같아요. 나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았거든요.” 밖에 어둠이 깔리기 시작했지만 집에는 제때 돌아올 수 있었다. 집 안에서 그의 배우자가 쿠키와 치키타라는 이름을 가진 두 마리의 부산한 치와와와 함께 그를 반겼다. 저녁때가 다 됐다. 바잘리아가 부엌으로 향했다. “우리가 훈련을 잘 시켰죠.” 내가 개를 쓰다듬기 위해 몸을 숙이자, 그가 뒤에서 말했다. “전에는 짖기만 했는데, 이젠 모두를 반기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