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코 라반 디자이너의 모더니즘 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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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코 라반 디자이너의 모더니즘 하우스

2020-04-03T19:53:27+00:00 2020.04.10|

19세기 파리 오스만풍 아파트에는 중세 모더니즘을 향한 파코 라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줄리앙 도세나의 세레나데가 울려 퍼진다.

미셸 듀카로이 소파 앞으로 가에타노 페셰 테이블을 옹기종기 배치했다. 모던한 거실 풍경에 오리엔탈풍 가에 아울렌티(Gae Aulenti) 램프로 위트를 더한다.

파코 라반의 시그니처 ‘체인메일 드레스’를 입어봤다면 몸에 오직 금속만 걸치는 일탈이 얼마나 짜릿한 일인지 알고 있을 것이다. 갑옷 같으면서도 도발적인 섹시함이 동시에 느껴진다. “이 드레스는 급진적이고 시각적으로 강렬하면서도 옷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죠.” 파코 라반의 6년 차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줄리앙 도세나(Julien Dossena)가 말했다. “파코 라반의 디자인이 단지 치장이 아니라 ‘균형’을 추구한다는 사실을 만천하에 알리고 싶었어요.”

줄리앙 도세나가 부활시킨 60년대 파코 라반 스타일은 파리 패션 위크에서 가장 주목받은 쇼 중 하나였다. 몸에 완벽하게 밀착되는 ‘액티브웨어’ 라인을 세련되게 재편하고, 줄무늬 셔츠와 베이지색 캐시미어 니트 같은 정통 파리지엔 스타일을 접목했다. 여기에 브랜드의 핵심인 체인메일 드레스를 20세기 형태로 탈바꿈시켰다. 이 지점이 줄리앙이 지휘한 파코 라반 컬렉션의 터닝 포인트였다. 줄리앙은 몸에 밀착되는 체인메일 드레스의 실루엣을 한층 여유 있게 만들고 거기에 휴양지에서 입을 법한 원통형 사롱 스커트와 레이스 슬립 등을 결합했다. “기획 당시 파코 라반에 대해 심층적으로 탐구하지 않았다면 이런 쇼를 완성하지 못했을 거예요. 이젠 제가 꿈꾸는 파코 라반의 이상향을 다채롭게 펼칠 일만 남았죠.”

줄리앙 도세나는 ‘밸런스’를 따지는 원칙주의자다. 마레 지구 변두리에 자리한 그의 아파트도 인테리어 측면에서 철저히 균형을 이룬다. 낡은 오스만 스타일 빌딩의 여러 층계를 올라야 다다를 수 있는 그의 공간은 현관을 열자마자 마루가 깔린 긴 복도로 연결된다. 그곳에는 깔끔하게 정돈된 잡지, 책, 카탈로그가 한쪽 벽에 줄지어 있고, 맞은편에는 80년대 알레산드로 멘디니(Alessandro Mendini) 철제 의자가 놓여 있다. 시선이 머무는 공간은 따로 있다. 복도 끝에 자리한 볕이 잘 드는 거실이다. 미셸 듀카로이(Michel Ducaroy) 소파와 함께 그 옆으로 가에타노 페셰(Gaetano Pesce)의 네스팅 테이블이 분주하게 놓여 있다. 필립 스탁 메탈 램프와 스테인드글라스로 장식한 문, 대리석 벽난로가 조화롭게 어우러진 환상적 인테리어에 대해 줄리앙은 “퓨처리즘이 가미된 미니멀리즘과 올드 스쿨 파리 스타일”이라 정의한다.

2년 전 그가 처음 이 집에 발을 들였을 때는 그저 텅 빈 공간에 불과했다. “60년대에서 80년대 사이 출시된 미학적 오브제를 수집해요. ‘예리함’이 느껴지는 것에 매력을 느끼죠.” 집은 곧 공격적으로 쟁취한 가구와 장식품으로 채워나갔다. 서재에 놓인 알레산드로 멘디니의 올로(Ollo) 책상은 패션계에 갓 입문한 젊은 디자이너일 무렵 구입한 제품이라 더욱 애착이 간다고 덧붙였다. 켜켜이 쌓은 상자 위에 오렌지색 상판을 올려둔 것처럼 보이지만 의자 네 개가 테이블 안쪽에 숨어 있다. 체사레 레오나르디(Cesare Leonardi)와 프란카 스타지(Franca Stagi)가 협업한 엘리카(Elica) 플로어 램프는 줄리앙이 발렌시아가 생활을 청산하고 파코 라반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이직할 때 구입했다. 그가 수집한 모든 것은 하나같이 특별한 외형이지만 과하지 않은 절제미를 지녔다. “비싸고 귀한 작품을 모으는 데 집착하지 않아요. 일상에 자연스럽게 스며들 수 있는 가구를 선호하죠.”

서재에 있는 알레산드로 멘디니 책상은 이탈리아의 한 갤러리에서 구매한 것.

줄리앙 도세나는 자상한 호스트다. 여전히 10대 소년처럼 집으로 친구를 초대해 게임을 하거나 거실에 누워 음악을 듣기도 하고 에로 사리넨(Eero Saarinen) 테이블에서 파스타를 나눠 먹기도 한다. 매주 금요일에는 그를 따르는 젊은 디자이너들과 창의적인 작업을 한다. 집 근처 서점에서 공수해온 자료와 줄리앙이 소장하고 있는 스티븐 마이젤이 작업한 방대한 양의 이탈리아 <보그>를 거실 바닥에 펼쳐놓고 사진을 찍거나, 스케치 작업을 하는 식이다. 이 집에서 홀로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는 것도 줄리앙의 소박한 기쁨 중 하나다.

지금은 90년대 프랑스 변두리에서 성장하는 10대들의 이야기를 담은 니콜라 마티외(Nicolas Mathieu)의 <그들 뒤에 남겨진 아이들>을 침대 옆에 두고 매일 밤 읽고 있다. 주말이면 SF 소설과 영화를 감상하는 것도 줄리앙의 오랜 취미다. 가끔은 멘디니의 유리 램프와 그린 컬러 의자가 놓인, 파리에서 가장 시크할 것 같은 운동 공간에서 빈야사 요가를 즐긴다.

여러 시대의 요소가 조화롭게 연결된 줄리앙 도세나의 디자인은 어릴 적 숱한 이사 경험에서 비롯됐다. 그는 브르타뉴 출신이지만 그곳에서 파리로, 파리에서 베를린으로, 베를린에서 다시 브르타뉴로 줄곧 이사를 다녔다. “애인을 따라 프랑스 전역을 돌아다니는 어머니 손에 이끌려 아주 다양한 풍경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죠. 그 시절 제 마음에 축적된 다양한 문화가 오늘날 제 작업에 영향을 미치는 것 같아요. 내면이 단단하게 채워진 느낌이죠.”

아끼는 책을 모아놓은 로낭 & 에르완 부홀렉(Ronan & Erwan Bouruoullec) 선반.

미술사를 전공한 줄리앙은 요즘 자동차 디자인에 푹 빠져 있다. 파코 라반 사무실이 있는 몽테뉴 거리까지 출퇴근을 책임지는 빈티지 스포츠카는 그의 가장 친한 친구다. “이 친구가 내는 소음, 유려한 곡선과 컬러에 심취했어요.” 최근 위시 리스트엔 80년식 재규어가 올랐다. “무광 그레이 컬러 도색이 남성적인 분위기를 배가해요. 차체는 무려 3m에 이르죠. 내부는 골드빛 카멜 컬러 가죽을 둘렀어요.” 그의 유별난 자동차 사랑은 본업인 패션 디자인에도 영향을 끼친다. “자동차는 디자인의 완결판 같아요. 퍼포먼스와 테크놀로지, 편안함과 아름다움 그 사이에서 완벽한 균형을 이루죠. 그래서 저는 옷을 디자인할 때 외양은 기본, 기능성, 편안함, 이 옷을 입는 사람이 느낄 감정까지 고려합니다. 겉모습만 따지는 반쪽짜리 옷은 제 런웨이에 절대 오를 수 없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