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의, 여성에 의한, 여성을 위한 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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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 여성에 의한, 여성을 위한 글쓰기

2020-04-09T16:59:08+00:00 2020.04.16|

여성의, 여성에 의한, 여성을 위한 글쓰기의 필요.

<작은 아씨들>을 떠올리면 베스의 안타까운 죽음과 사이좋은 자매애 기억뿐인데, 어른이 되어 다시 본 영화 <작은 아씨들>은 달랐다. 150년 전 세상은 여자들이 결혼을 하지 않는 것도, 돈을 버는 것도 허락하지 않았다. 마치 가문의 네 자매는 각자 배우, 작가, 음악가, 화가가 되길 꿈꾼다. 내가 어릴 때는 그 꿈이 세상이 여자들에게 허락한 한 뼘도 되지 않는 보폭에서 찾은 현실임을 몰랐다. 그리고 또 한 번 생각했다. 네 자매 중 유일하게 ‘조’만 작가로 꿈을 이룰 수 있었던 이유는 글쓰기였기 때문이었다고. 집 안을 가득 차지하는 피아노가 없어도, 캔버스나 물감이 없어도 괜찮으니까. 부당한 세상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창작욕이 샘솟으니까.

종이에서 타자기로 그리고 오늘날 노트북까지. 상대적으로 간편한 물리적 조건 덕분에 글쓰기는 오랫동안 여자들의 숨구멍이었다. 글은 중간에 자를 수도, 끊을 수도 없다는 점에서 말보다도 질긴 생명력을 지녔다. 무엇보다 혼자 만들어낼 수 있는 생각의 덩어리다. 고심을 거듭한 유형물이라 쉬이 휘발되지 않고 논리가 견고하다. 그렇기에 세상은 오래도록 여자들의 글쓰기를 반기지 않았다. 책을 읽는 것도 원하지 않았다. 직업으로 인정하지도 않았고, 속 편한 취미 생활이나 허세로 조롱했다. 글이란 사상이고 동요를 일으키며 결국 변화를 일으킨다는 걸 너무 잘 알았기 때문이다. 식민지 시대처럼 여자들로부터 글을 빼앗아갔다. 그럼에도 여자들은 글쓰기를 멈추지 않았다. 브론테 자매는 남자 이름으로 <제인 에어>, <폭풍의 언덕>을 발표했고, 시도니 가브리엘 콜레트는 대필 작가로 글을 썼다. 여자들은 왜 끊임없이 글을 썼을까.

실비아 플라스는 1959년 <일기>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내게 가장 무서운 건 쓸모없는 존재라는 느낌이다. 훌륭한 교육을 받고 창창한 미래가 펼쳐져 있었는데,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무심한 중년으로 스러져가고 있다는 느낌. 글을 잘 쓰기 위해 노력하기보다는, 꿈속에서 얼어붙어버리고, 거절이라는 환멸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퓰리처상을 받은 대문호가 밝힌 글쓰기의 동력이 ‘사라져가는 느낌’이라는 건 가부장제가 여자에게 부여한 사회적 역할이 얼마나 쉽게 개인을 지워버리는지 보여주는 증거 같다. 진부하지만 이보다 더 확실할 수 없는 이유. 자신을 증명하고 남기기 위해 여자들은 글을 썼다. 그 시절의 기록이라는 점에서 글도 사진과 다르지 않다. 생각과 말은 흩어지고 잊힌다. 글은 그 시간을 내가 살았다는 증거다.

많은 작가는 ‘글을 쓰는 순간만큼은 근심 걱정을 잊을 수 있다’고 글쓰기의 몰입과 쾌감에 대해 말한다. 글은 자신에게 몰입해야만 쓸 수 있고 자신의 생각에 집중해야만 나올 수 있다. 이타적이기를 요구받는 여성들이 이기적으로 자신만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이기도 하다. <보그> 칼럼니스트 윤혜정은 “글을 쓸 때 가장 용기가 생기고, 대담해지는 느낌을 받는다”고 말했다. 엄마의 속성과 글 쓰는 사람의 속성은 다른 면이 있다. 엄마는 도덕적이어야 하고 타인이 우선이 된다. 하지만 글을 쓸 때만큼은 날을 세워도 되고 세상을 날카롭게 볼 수밖에 없으며 남들이 보지 않는 걸 예민하게 느낄 수밖에 없다. 윤혜정은 글을 쓸 때만큼은 원래 날카로운 자신으로 산다. 그녀에게 글을 쓰는 시간은 세상이 자기중심으로 돌아가는 유일한 순간이자 공인된 일탈이다. 제약이 많은 세상에서 유일하게 자기 마음대로, 기질대로, 뜻대로 해도 되는 것이다.

문학이든, 저널이든 글에는 필자의 사상이 담긴다. 페미니즘 작가로 유명한 마가렛 애트우드는 <시녀 이야기>, <증언들> 등에 환경, 인권, 페미니즘에 관한 자신의 사상을 반영해왔다. <제인 에어>는 순응하는 여성이 아닌 독립적이고 저항하는 여성을 담았고, <작은 아씨들>과 콜레트의 <클로딘 시리즈>는 여성의 삶이 그 자체로 문학이 될 수 있다는 걸 보여줬다. 일기를 제외한 글은 세상 밖으로 나갈 목적을 가지고 쓰인다. 글이란 결국 세상에 하고 싶은 말이다. 나혜석은 <이혼고백서>를 “조선 남성들 보시오”로 시작했다. 세상이 여성의 이름을 지우면 지울수록 여성은 글을 쓸 필요가 커졌다. 여성의 언어로 어려움과 고통과 답답함과 부당함을 내보여야 했다. 집에 갇혀 있을지라도, 직장 생활을 중단해서 사회적 교류가 사라졌더라도 글은 타인에게 전달할 수 있다. 읽히고 공감까지 얻는다면 세상과 연결 고리가 된다. 살면서 말이 편집되고 삭제되는 경험을 했다면 “어떤 말은 칼을 품고 있어 무장한 남자도 찌를 수 있다”고 했던 에밀리 디킨슨에게 어찌 짜릿함을 느끼지 않을 수 있겠나.

물론 여자들은 생계를 위해서도 글을 썼다. 루이자 메이 알콧은 주인공 조처럼 선정적인 단편소설을 써서 가족을 건사했고, 아가사 크리스티는 첫 번째 이혼 후 생계 수단으로 글을 썼다. 나는 늘 잉크 범벅이었던 조의 손과 총을 든 군인들의 손의 차이점을 찾을 수 없다. 글쓰기는 노동이고, 때로 글은 상품이며, 글 쓰는 여자는 기술자다. 나 역시 이 글을 쓰고 월급을 받을 것이고 그 돈으로 월세를 내고 가족을 위한 식료품을 살 것이다.

더 이상 우리는 여자가 썼다는 이유로 발표조차 할 수 없는 세상에 살지 않는다. 하지만 그런 지금 더 많은 글이 필요하다고 느낀다. 페미니즘 얘기다. 2015년을 기점으로 여성 관련 이슈가 주목받은 배경에는 여자들의 글쓰기가 있었다. 트위터에 연이어 올라왔던 미투 고발은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라는 것을 증명해 보였고, 여성 혐오로 일어난 강남역 살인 사건 후 강남역 10번 출구에 붙었던 포스트잇도 다수가 모이자 커다란 의견이 됐다. 탈코르셋 운동도, 낙태죄 폐지와 인공임신중절 허용 운동도 여자들의 글이 모여 더 강력한 힘이 생겼다.

사실 글이란 세상의 진리를 제시할 수 있는 신성한 존재만 쓸 수 있는 게 아니다. 글쓰기는 처음부터 완성형이 아니다. 누구라도 문제라고 생각하던 것, 흐릿하게 머릿속을 떠돌던 것을 활자로 적으면서 비로소 생각이 정돈되고 또렷해진다. 백지에서 시작해 완성형으로 발전해나가는 것이 글이다. 다른 사람이 쓴 글을 읽는 과정도 마찬가지다. 결혼 후 한동안 현실이 부당하게 느껴지던 감정의 정체를 결혼한 여자들의 모임 ‘부너미’에서 펴낸 책 <페미니스트도 결혼하나요?>를 읽고 알았다. 글로 쓰지 않았다면 멤버들에게만 공감을 얻었을 이야기가 글로 단단하게 기록되어 결혼한 여자들에게도 페미니즘이 필요하다는 공감대가 생겼다. 글을 쓰겠다는 의지, 글을 쓰면서 적극적으로 사고하는 자신, 완성된 글 모두가 변화를 위한 기초 재료가 된다. 서점가에 연일 진열되는 페미니즘 관련 서적은 여전히 해결되어야 할 문제가 많은 현실을 보여준다. 여전히 우리는 써야 할 이야기가 남아 있다.

얼마 전 오로지 마감일만 있는 글쓰기 모임에 대한 얘길 들은 적 있다. 서로의 얼굴도, 나이도, 소속도 모르는 여자들 10여 명은 마감에 맞춰 각자 쓰고 싶은 주제로 글을 쓴다. 글을 쓰면서 풀어내고 싶은 감정을 쏟고 생각을 발전시킨다. 그리고 그 글을 공유한다. 글을 더 잘 쓰기 위한 기술적 조언은 나누지 않는다. 그저 글을 쓴 사람의 상황을 알아가고 공감할 뿐이다. 글을 써서 시원하고,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이 있어 위로가 된다고 했다. 덕분에 이 모임은 친목을 위한 어떤 추가적인 노력 없이 수개월째 이어진다. 글쓰기에는 순수한 효용이 있다.

나는 벗어놓은 양말보다 A4 용지 뭉텅이가 더 자주 밟히는 집에서 자랐다. 시어머니를 모시고 살며 한국 사회가 여자에게 요구한 현모양처의 의무를 그대로 따르던 엄마는 수년간 시문학회 활동을 거쳐 시인으로 등단했다. 그 사실을 몰라도 될 만큼 엄마는 현모양처 역할에 소홀한 적 없지만 틈만 나면 무언가를 쓰고 있었다. 특히 가족이 모두 잠드는 새벽이면 침대 옆 노란 불빛에 의존해 A4 용지 뭉텅이를 붙들고 글을 썼다. 시를 쓰는 일은 돈벌이가 되지도, 명성을 안겨주지도 않았지만 손자를 돌보는 고단한 요즘도 엄마는 글을 쓴다. 얼마 전, 내가 도대체 왜 쓰는지 물었을 때 어린 딸에겐 하지 않았던 답을 들려줬다. 이거라도 써야 사는 것 같다고. 글을 썼기 때문에 살 수 있었다고. 여자에겐 사랑이 전부라는 말이 지긋지긋하던 조에게도, 가족을 돌보는 삶만 지속되는 엄마에게도 글쓰기는 여자에게도 감정만이 아니라 생각과 영혼이 있음을 보여주는 행위였다. 순응하며 사라지길 거부한 투쟁이었다. 글을 쓰는 건 가부장제가 지운 자신의 이름을 되찾는 일이다.

엄마가 수도 없이 새웠던 새벽, 작가들이 꼼짝 않고 자신을 들여다봤던 새벽에 나는 이 글을 쓰고 있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결혼과 가사는 여자들의 글쓰기의 끊임없는 방해물이다. 시몬 드 보부아르는 가사를 일절 거부하며 호텔에서 살았고, 제인 오스틴은 소설을 쓰기 위해 결혼하지 않았지만 세상을 움직인 수많은 글은 줄일 수 있는 게 자신의 잠밖에 없었던 작가들의 사투로 탄생했다. 새벽 3시, 글 쓰는 여자들의 시간이 흐른다. 새버린 잉크병과 펜 대신 스마트폰과 노트북이 놓여 있다. 여자들의 글은 어디든 가닿을 수 있다. 여자들이 개척한 시간이 지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