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기로운 피임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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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기로운 피임생활

2020-04-21T09:46:44+00:00 2020.04.22|

성관계와 임신은 인과관계다. 그러므로 피임은 방어권이 아니다. 건강권이다.

언제까지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삶을 좌지우지할지 가늠하기 힘든 요즘, 이 바이러스가 보여주는 건 인간의 밑바닥이다. 프랑스 의사는 아프리카에서 코로나19 백신을 테스트하자 했고, 한 회사는 정규직에게는 방진 마스크를, 비정규직에게는 면 마스크를 지급했다. 극한 상황에 몰리자 약자를 향한 존중을 새까맣게 잊었다.

바이러스만큼 이기심이 창궐한다. 그러던 중 ‘일부 국가’에서 코로나19 대응책의 하나로 ‘낙태 중지’를 내놓았다. 낙태를 긴급하지 않은 수술로 분류한 것이다. 이를 어길 경우 징역과 벌금을 부과한다는 처벌까지. 여성의 건강권은 가장 먼저 사라졌다. 그렇다면 낙태 수술을 위해 국경을 넘을 수도, 임신중절을 위한 약을 수급할 수도 없는 지금, 원치 않는 임신을 한 ‘일부 국가’의 여자들은 어쩌란 말인가. 세상은 피임의 책임을 여자들에게 돌렸다. 사실 놀랍지는 않다. 남자와 여자가 성관계를 한 이래 늘 벌어져온 일이다.

피임은 여전히 복잡한 문제다. 경구피임약, 콘돔, 피임 링, 주사, 임플란트, 콘돔, 구리 IUD, 패치, 자궁 내 삽입 기구 등 여자들 앞에는 여러 피임 선택지가 있지만 무엇도 못 미덥고 무엇도 손쉽지 않다. 터치 한 번이면 정보가 쏟아지지만 피임법을 둘러싼 정보는 의심과 불신을 동반한다. 경구피임약은 ‘몸에 안 좋을까 봐’, ‘엄마가 먹지 말래서’ 같은 선입견에 번번이 중단되고, 몸에 삽입하는 기구는 ‘몸에 넣는 게 싫어서’, ‘빠질까 봐’ 같은 우려에 시도할 엄두가 안 난다. 깔때기처럼 모든 불안은 ‘임신해야 할 때 임신이 안 되면 어쩌지’에 도달한다. 완벽한 피임법은 없고, 누구에게나 맞는 피임법도 없기에 누군가에게 발생한 부작용은 일반화되어 마음의 진입 장벽을 높인다. 자궁 내 삽입 기구 시술 후 부정 출혈에 시달리는 친구, 경구피임약을 먹은 후 얼굴에 여드름이 덮인 언니를 보며 나는 괜찮겠지라고 생각하긴 힘들지 않느냐 말이다. 게다가 피임 정보는 사소한 계기를 통해 차단되기도 한다. 어느 후배는 팔에 삽입하는 임플란트가 효과적이라는 얘길 듣고 산부인과에 갔다가 “저희는 ‘그런 거’ 안 해요”라는 얘길 듣고 바로 관심을 거뒀다. 산부인과에서 ‘그런 거’라고 표현하는 기구를 팔에 넣고 싶은 사람이 몇이나 될까. 어떤 피임법이 나에게 맞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여러 피임법을 직접 시도해보는 수밖에. 하지만 대부분이 시도 대신 걱정만 하며 성관계할 때만 콘돔을 사용한다. 한국 피임률은 그렇게 늘 하위권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적극적으로 피임하게 만드는 건 ‘임신에 대한 공포’다. 당신과 내가 인정하듯 성관계가 일어나는 순간은 매번 통제 가능하지도 이성적이지도 않다. 술에 취해, 어쩌다 보니, 그러려고 한 건 아닌데 일어나는 경우도 많다. 이런 말이 있다. 이성애자라면 언젠가 사후 피임약을 먹는 순간이 꼭 찾아온다고. 일요일이라 사후 피임약 처방전을 받지 못할 때, 평소보다 생리가 늦어질 때, 불안한 마음에 임신 테스트기를 해보며 한 줄이 떠오르길 두 손 모아 기도할 때, 검색창에 ‘임신 징후’, ‘낙태하는 법’ 따위 검색어를 쳐볼 때, 그러다가 정말 임신했을 때, 여자들은 정말이지 생지옥을 경험한다. 이런 일을 몇 차례 겪고 나면 피임이 진짜 ‘내 일’이 된다. 누군가가 미리 알려주었다면 좋았을 거라 여기면서.

피임은 번거롭다. 경구피임약은 매일 동일한 시간에 챙겨 먹어야 하고 두 번 이상 빼먹으면 바로 효력을 상실한다(술을 마시다가도, 비행기를 타고 국경을 넘다가도 챙겨 먹어야 하는 것이다. 정말 ‘인류의 기술 이게 전부냐?’라는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피임은 돈이 든다. 사후 피임약과 한 달 치 피임약은 수만 원이고, 피임용 임플란트와 자궁 내 피임 장치 시술은 수십만 원이다. 어떤 것도 의료보험이 적용되지 않는다. 언급했듯 사람에 따라 엄청난 부작용도 감당해야 한다. 그런데 세상은 피임에 관해 이상하게 군다. 잘해도, 못해도 싫어한다. 이를테면 피임에 철저하면, 그러니까 질외 사정을 거부하며 콘돔 착용을 요구하면 ‘예민한 여자’라고 한다. 피임약을 복용하고 있거나 콘돔을 상시 휴대하면 언제든 섹스를 대비하는 ‘부담스러운 여자’가 된다. 반면에 콘돔을 착용하지 않는 남자를 내버려뒀다가 임신하면 ‘부주의한 여자’가 된다. 하다못해 질염에 걸려도 남자에게 씻으라고 하지 않은 여자 탓이다. 그러면서 성관계가 임신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척 군다. ‘섹스로 인해 발생하는 모든 상황에 혼자 대처하라!’ ‘피임 기구를 발명해놨으니 알아서 잘 찾아 써라. 다만 실패할 경우 낙태는 불가다!’ 마늘을 먹고도 베르가모트 냄새를 풍겨야 한다는 미션을 부여하는 것 같다. 당연히 미션은 임파서블하다.

제약 회사는 오랫동안 ‘내 몸은 내가 지켜’ 같은 캠페인성 광고로 피임이 여자의 몫임을 설파해왔다. 피임약을 지상파에서 처음 광고한 2006년부터 지금까지 한결같이 ‘자기 몸을 잘 지키는 여자가 자기 일도 잘한다’고 광고했는데 그보다 놀라운 건 대한민국 역사상 콘돔 TV 광고는 두 번밖에 없었다는 사실이다. 성병을 막는 유일한 수단인 콘돔이 야릇한 이미지를 갖게 된 건 무조건 숨기고 감춰왔기 때문이라는 생각도 든다. 영화 <와일드>에서 리즈 위더스푼이 4,285km 도보 여행을 떠나며 꾸린 배낭에는 콘돔이 한가득 들어 있었다. 콘돔은 딱 그 정도의 중요성을 지닌다. 식량, 칫솔, 담요와 똑같은 필수품이다. 앞서 나열한 피임법을 실천하더라도 성병 방지를 위해, 피임률을 높이기 위해 반드시 사용해야 하는 것이다.

알렉산더 왕, 생로랑, 베트멍 등 패션 브랜드가 한시적으로 콘돔을 내놓으며 콘돔은 쿨한 거라는 이미지를 더한 적 있지만 대체로 콘돔 업계는 ‘얼마나 더 얇아질 수 있는가’에만 최선을 다해왔다. 그런데 최근 꽤 고무적인 일이 일어났다. 여성의 건강을 신경 쓰기 시작한 것이다. 세이브(Saib)는 콘돔이 여성의 질 속에 들어감에도, 유해한 성분을 많이 사용하는 현실을 지적하며 식물성 원료를 사용한 친환경 비건 콘돔을 내놨다. 바른생각은 고무나무에서 추출한 천연 라텍스를 사용함은 물론 간결한 패키지에 메시지를 담아 피임을 함께 해야 한다는 캠페인을 전개한다. 미국 브랜드 서스테인(Sustain) 역시 천연 라텍스로 콘돔을 만든다. 이들 브랜드는 판매액의 일부를 여성 건강 기관에 기부하고 여성의 성생활이 좀 더 건강하고 자유로워지도록 돕는다. 처음에는 콘돔까지 여자가 바로잡아야 하는가 한숨부터 나왔다. 하지만 성감대를 자극하겠다고 애쓰는 콘돔의 자잘한 시도를 덜어내자 콘돔이 여성의 건강권을 지켜주는 의료 기구처럼 여겨지는 결과를 낳았다. 결정적으로 정체 모를 딸기 향으로부터 구원받았으니 그걸로 됐다.

한편 얼마 전 만난 섹스 칼럼니스트 J는 남자에게 피임할 권리는 줘야 한다는 얘길 들려줬다. 의무가 아니라 왜 권리냐고 되묻자 사회가 남자들이 피임할 기회를 원천적으로 차단해왔다고 했다. 현재 남자들 손에 쥐어진 선택지는 콘돔, 정관수술뿐이다. (결혼하지 않은 남자 중에 정관수술을 선택지로 생각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정관수술을 받게 하려면 산아제한 정책을 펼치던 1970년대처럼 아파트 분양 우선권이라도 내줘야 할 것이다.) 성관계로 감당해야 할 것이 없는 남자들은 피임에 관심이 없다는 선입견으로 남성의 피임법 개발에 소홀했다는 지적이다. 사실 남성 피임약이야말로 페가수스, 그리핀, 켄타우로스 같은 존재다. 수십 년째 뉴스에서만 존재해왔다. ‘남성용 피임약이 개발되었으나 성욕 감퇴, 발기부전, 두통, 감정 기복이 우려되므로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는 것.

남성 피임 시장의 사업성에 확신이 없어 개발을 게을리하는 탓이다. J는 남자들 역시 콘돔을 끼우느라 분위기를 깨지 않기 위해, 살과 살이 맞닿고 싶어서, 피임으로 힘들어하는 여자 친구가 안타까워서 본인들이 할 수 있는 새로운 피임법을 바란다고 했다. 이상적이고도 지당한 얘기다. 만약 한 번 이식만으로 피임 여부를 조절할 수 있는 칩이라도 개발한다면 누가 마다하겠는가. 우리는 좀 더 나은 피임 기구를 원한다.

올 초, 양육비를 고의로 주지 않는 부모의 신상을 공개했다가 명예훼손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배드파더스’ 운영진에게 무죄가 선고됐다. 아이는 부모 모두가 책임져야 함을 국가가 인증한 유의미한 사례가 됐다. 넓게 봤을 때 성관계, 피임, 임신, 낙태, 출산, 육아, 양육은 이어져 있고 그 무엇도 혼자만 책임지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국가의 공식적인 경고다.

매일 코로나19가 바꿔놓은 세상에 관한 뉴스가 보도되는 요즘, 말레이시아에 확진자가 늘어 콘돔 생산량에 차질이 생겼다고 한다. 자택 격리 중이라 콘돔의 수요가 어느 때보다 늘어나는 지금, 코로나19 베이비 붐을 피할 수 없게 됐다는 것이다. 웃어넘길 가십인가. 비극이다. 코로나19는 성욕을 떨어뜨리기는커녕 상승시켰고 콘돔 구하기는 어려워졌는데 한쪽에서는 낙태하면 처벌하겠다고 한다. 세상은 아직도 성관계의 결과가 임신이 될 수도 있다는 걸 이해하지 못하는 듯하다. 바이러스가 아무리 창궐해도 원하지 않는 임신에 대한 두려움 없이 성관계를 가질 수 있어야 하고 자신의 의지대로 임신과 출산을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피임은 방어권이 아니라 건강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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