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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석호가 ‘포켓남’인 이유

2020.04.27

by VOGUE

    전석호가 ‘포켓남’인 이유

    주머니에 넣고 다니고 싶은 배우 전석호의 서바이벌 정신.

    빈티지한 느낌의 데님 봄버 점퍼는 에잇 바이 육스(8 By Yoox), 이너로 입은 노란색 터틀넥, 에메랄드색 집업 점퍼와 와이드 팬츠는 코스(Cos), 스니커즈는 라르디니(Lardini at Shinsegae International).

    시대가 열광하는 인물에는 시대상이 있다. 바이러스로 불안한 요즘, <킹덤> 범팔이 서서히 스며들었다. 겁 많고 능력이라고는 ‘도움 청하기’뿐인 약해 빠진 관료. 예전 같으면 ‘감초’ 정도로 여겼을 인물에게 세상은 ‘동질감’과 ‘연민’, 무엇보다 ‘귀여움’을 느껴버렸다. 김은희 작가가 딱 자기 같은 캐릭터라고 설명한 범팔은 역병을 해결하는 데 도무지 쓸모가 없다. 하지만 차가운 머리로 분석하면 범팔은 신세를 지면 은혜를 꼭 갚는다. 신분이 낮다고 하대하기는커녕 좌의정까지 올라가서도 천민들과 수다를 떨고 투정 부린다. 그러다 보니 앙심을 품는 사람이 없고, 모두가 죽는 와중에 살아남은 것이다! 꺼질 듯 말 듯하지만 희망찬 불꽃이여!

    “세상에 히어로들만 있으면 재미없을 거예요. 악역들만 있으면 무서울 것 같고. 범팔은 평범한 우리의 모습이었던 것 같아요. 오늘 조금 비겁한 행동을 하면 밤에 잠이 잘 안 오잖아요. 그러고 내일은 오늘보다 좀 나아져야지 하는 다짐으로 지내는 사람이 훨씬 더 많다고 봐요.” 환난 가운데 범팔은 성장한다. ‘죽을까 봐’ 한시도 눈을 뗄 수 없게 만들던 범팔은 급기야 ‘조선의 포켓남’ 지위까지 획득했다. 물론 주머니에 넣고 다니기엔 말이 너무 많고 180cm로 키도 너무 크지만.

    “작품은 현시점을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기록이에요. 작가님의 기록이기도, 감독님의 기록이기도 하고, 지금 저에 대한 기록이기도 해요.” 봄버 점퍼는 미스터 포터(Mr Porter), 티셔츠는 라르디니(Lardini at Shinsegae International), 체인 목걸이는 크롬하츠(Chrome Hearts).

    실력보다는 사내 정치에 집중하는 변호사를 연기한 <하이에나>와 방송 시기가 겹치면서 전석호는 어떤 인간미의 상징이 됐다. 흥미로운 지점은 ‘귀여운’ 전석호가 <킹덤> 전까지 가장 많이 받은 요청은 “찰지게 욕 좀 해주세요”였다는 것이다. 드라마 <미생>, <굿와이프>, <미스터 기간제>에서 전석호, 아니 그가 맡은 역할은 정말 악독하고 잔인했다. 살면서 범죄 조직 보스가 총을 겨눌 확률보다 직속 선배가 면전에서 “재수 없어, 꺼져”라고 욕할 가능성이 높기에 시청자들은 그의 연기를 보며 오들오들 떨었다. “사실 흔히 말하는 연기 변신을 대단하게 한 것도 아니에요. 좋은 사람하고 좋은 작품을 하면 관객이 그렇게 보시는 것 같아요.” <굿와이프> 당시 전도연 역시 “너만 보면 막 욕하고 때리고 싶어져”라고 했다던가. “흔히 말하는 악역은 그렇게 힘들지 않았어요. 주변에 실제로 그런 악역이 많으니까. 차라리 내가 악역을 해서 욕하고 사람들이 싫어하면 괜찮은 것 같았어요. 연기적으로는 현실적으로 볼 수 있는 인물이었으면 했어요. 진짜 불편했으면 했죠. 그래야 주인공이 하는 행동에 카타르시스가 있을 테니까.”

    하지만 이를 제외하고 나면 전석호의 필모그래피에는 또 다른 일관된 구석이 드러난다. 성폭력을 겪은 아내 곁을 지켰던 단편영화 <미열>, 이를 장편영화화한 <비밀의 정원>, 장애란 무엇인가 생각하게 했던 <작은 형>, 아동 학대를 다룬 <미쓰백>, 세월호 참사로 사랑하는 사람들을 떠나보낸 사람들의 이야기 <봄이 가도>. <굿바이 싱글>은 미혼모, <걸캅스>는 디지털 성범죄 이야기였다. 표현 방식을 떠나 서걱거리고 까끌까끌한 이야기였다. 때로 외면하고 싶은 이야기였다. 여성 감독 작품도 도드라졌다. 2년 전 <씨네21> 인터뷰에서 전석호는 언제부턴가 남자들의 영화에 피로를 느꼈고, 그 시기에 여성 감독의 영화에 짧게라도 출연하며 여성 영화에 무임승차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버티면서 좋은 사람, 좋은 작품을 찾았다.

    “한국 영화 중에 가장 충격을 받은 영화는 <마더>였어요. 아무리 봐도 질리지가 않았어요. 김혜자 선생님이라는 배우가, 이야기가.” 컬러풀한 배색 셔츠, 블랙 팬츠, 스니커즈는 프라다(Prada).

    “30년 넘게 바깥세상을 봐온 시간이 저를 만들어줬다고 생각해요. 시간이 나면 CD 사고 어떤 책이 나왔나 살펴보며 가장 일상적인 생활을 해요. 날씨 좋으면 한강 걷고요. 물론 요즘은 쉽지 않지만요.”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 움직이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법정 스님의 책 <살아 있는 것은 다 행복하라>를 읽고 어쩌면 내가 행복할 수 있는 기회가 있겠구나, 그 기회는 내가 잡아야겠구나 여겼어요. 소수자란 표현이 맞는지도 모르겠는데 중심에 서지 못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제 방식대로 이야기하고 싶었어요. 제 나름대로 구하는 용서죠. 그러지 못했던 자신에 대한. 시대가 움직이라고 했던 것 같기도 해요. 누군가는 나와서 싸우고 투쟁하지만 누군가는 예술로 승화시킬 수도 있으니까요. 연극을 통해서도 그런 불편한 이야기를 합니다. 사람들이 범팔이라는 인물을 좋아해 제 필모를 찾아보면 이런 작품도 했구나, 이런 이야기도 있구나, 새롭게 알아갈 수도 있겠죠.” 그에게는 다 계획이 있었다.

    우리가 전석호에 대해 하고 있는 오해가 있다. <미생>으로 이름을 알렸을 때 “드디어 빛을 보시네요”라는 얘기를 가장 많이 들었다. 그 당시 서른한 살이었다. “다들 마흔 정도로 봤으니 15년은 연극했다고 여겼겠죠. 하지만 물리적으로 가능하지 않아요. 연극을 열세 살에 시작했으면 모를까(웃음).” 게다가 대학 졸업 후 출연했던 첫 연극 <인디아 블로그>는 흥행도 잘됐다. “서른 살에 영화 <조난자들> 찍고 부산국제영화제에 초청받고 개봉하고 서른한 살에 <미생>을 만났거든요. 힘든 시기도 있었지만 물질적으로 힘들었을 뿐 빛이 보이지 않았던 건 아니에요. 그런데 다들 진선규 형과 비슷한 나이대로 봐요. 선규 형은 제가 대학로에 진출했을 때 정말 ‘신’이었어요. 고생도 많이 하셨죠. 선규 형 상 받았을 때 정말 좋았어요.”

    “최근에 가장 재미있게 본 영화는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이에요. 흔히 말하는 세상의 약자들이 절대 권력과 싸우죠. 정말 끝내줘요. 실화를 바탕으로 한 <히든 피겨스>는 또 어떻고요.
    이게 진짜 이야기다 싶었죠.” 체크 코트는 미스터 포터(Mr Porter), 이너로 입은 스웨터는 디젤(Diesel), 반바지는 에잇 바이 육스(8 By Yoox), 화이트 벨크로 스니커즈는 프라다(Prada).

    예상컨대 ‘연극 판에서 고생하다가 뒤늦게 이름을 알린 연기파 배우’로 보이는 데는 주름이 지대한 역할을 했을 것이다. 사실 감정이 증폭할 때 폭죽처럼 터졌다가 순식간에 사라지는 전석호의 주름은 정말이지 끝내준다. “고 1 때부터 있었어요. 어릴 때는 빨리 어른이 되고 싶어 어른들 표정을 많이 따라 했어요. 주름 많다고 놀림도 받았는데 사실 이 주름이 아주 좋거든요.” 어른들의 생각은 달랐다. “연기 배울 때 이마를 많이 맞았어요(웃음). 적절할 때 쓰는 게 아니라 거짓으로 쓰니까. 지금은 주름이 어울리는 나이가 되어가는 것 같아요.”

    전석호 인생의 변곡점에는 늘 여자가 있었다. 박선희 연출, 연기를 가르쳐준 선배 노은주, 그에게 범팔을 내려준 김은희 작가. 그녀들의 손에 이끌리다 보니 세상 보는 눈이 달라졌다. “20대 초에 박선희 연출을 만났고 15년째 함께하고 있어요. 남고를 나온 것도 아닌데 흔히 말하는 남성성이 강했죠. 지금 생각하면 참 아둔했던 것 같아요. 그런데 박선희 연출과 작업하면서 똑같은 사물을 봐도 이렇게 여길 수 있구나, 사고의 폭이 넓어졌어요. 그 사람의 그것을 표현하지 못해 속상했죠. 수없이 이야기하고 작업했어요.” 박선희 연출은 교육 연극의 세계로도, 국악 뮤지컬 집단 스태프로도 전석호를 ‘전도’했다. 서울역 노숙자의 멘토가 되어 공동 창작하고 무대에 올렸다. 가정 폭력 피해자들과 역할 놀이를 하며 상처를 보듬었다. 공연 트럭을 타고 울릉도, 백령도, 정선, 보성, 부안, 흔히 말하는 문화 소외 지역을 돌아다니며 연극 무대를 설치했다. 그 몇 년의 시간이, 일분일초가 전석호를 구성하는 세포가 됐다. 전석호는 점점 더 나은 배우가 됐다.

    최근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다이어트를 했어요. 살이 빠지니까 건강해지는 것 같고 할 수 있는 영역이 더 넓어지는 것 같아요. 요즘은 건강하게 늙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해요.” 봄버 점퍼는 미스터 포터(Mr Porter), 티셔츠는 라르디니(Lardini at Shinsegae International), 체인 목걸이와 왼손에 낀 링은 크롬하츠(Chrome Hearts), 팔찌는 존 하디(John Hardy), 오른손 약지에 낀 링은 우영미(Wooyoungmi), 카키색 팬츠는 레이 바이 매치스패션(Raey by Matchesfashion), 레더 슬리퍼는 버켄스탁 × 프로엔자 스쿨러(Birkenstock × Proenza Schouler).

    전석호가 배우가 된 데는 가족의 영향이 컸다. “아버지가 영화를 워낙 좋아하셔서 토요일마다 비디오 가게에서 빌려 봤고 엄마 친구분이 세종문화회관에서 일하셔서 공연도 자주 접했어요. <호두까기 인형>과 <백조의 호수>를 지겹도록 봤죠. 그 비싼 표를 끊어놓고 잘 정도였죠. 좋은 작품을 봤을 때 받은 좋은 기운과 기분의 영향이 제일 컸던 것 같아요.” 성인이 된 뒤에는 좋은 작품, 필요한 작품, 알아줬으면 하는 작품이 연기하고 싶게 만들었다. “다큐멘터리도 좋아해요. 사실 말은 계속 이렇게 해도 연기하면서 힘든 순간이 훨씬 많았어요. 그 과정을 다시 겪어보라고 한다면 지금보다 더 잘할 순 없어요. 돌아가고 싶은 순간은 없어요. 지금이 어느 때보다 제일 좋아요.”

    드라마나 영화 현장은 특별하다. 수십, 수백 명이 같은 목표를 향해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해 엄청난 창의성을 발휘하다가 뿔뿔이 흩어진다. 집단 이인삼각 같은 이 공동 작업을 전석호는 정말 사랑한다. “일반 회사나 자영업자하고 똑같아요. 현장에서 수없이 사람들과 대화하고 실수하고 도전하죠. 정답이 없으니 아닌 것을 쳐내고 깎아내며 가장 적합한 걸 찾아내는 과정이에요. 사람들과 부대끼고 조언도 듣고 때로 그 조언이 너무 싫어 울기도 해요. 끝없이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 같아요. 그런데 흥미로워요. 좋은 사람들이 옆에 있다는 신뢰가 큰 힘이 되죠. 그리고 좋은 배우와 연기하는 것만큼 배우에게 좋은 순간은 없어요.” 게다가 전석호는 말하는 걸 정말 좋아한다. 하늘이 내린 현장 체질이다. “정말이지 말을 안 멈추는 것 같아요(웃음). 제가 봐도 심하다 싶을 만큼. 그래서 주변에서 늘 얘기하죠. 벼가 되어라, 고개를 숙여라, 겸손해라, 입조심해라(웃음).” 사람들과 얼굴을 보고 얘기하는 걸 좋아한다고도 덧붙였다. 새카만 전석호의 눈썹이 잠시 올라갔다가 내려왔다. 요즘 전석호가 찾는 건 특별함이다. 연기를 잘하고 못하고의 문제가 아니라 그 인물만의 특별함. 예전보다 물질적으로 채워졌으니 도와준 사람들에게 어떤 식으로든 돌려주고 싶다는 마음도 있다. “이 사람한텐 뭐가 필요할까 그런 생각을 하죠. 그런 게 연기에도 도움이 돼요. 사람에 대한 관심이잖아요. 그런 순간이 좋아요.”

    <보그>는 <킹덤>, <하이에나>, <365: 운명을 거스르는 1년>으로 발바닥에 땀이 나도록 분주했던 전석호를 위해 마당이 있는 저택을 빌렸다. 물론 생사역에 물릴 위험이 없는 안전한 곳이다. (그는 저택에 혼자 있다면 홈 비디오를 찍고 싶다고 했다. 인테리어를 좋아해 가구도 만들고 집 개조도 소망했다.) 화제의 중심에서, 아니 옥상에서 마시는 공기는 얼마나 달콤한가. 하지만 그의 생각은 달랐다. “어느 정도 이뤘다고요? 아닌데요? 지금 탈의실인데요? 아직 출발선에 못 섰는걸요? 신발 신고 있는데요? 코치님이 나오란 얘기 안 해서 못 나가고 있는데요?(웃음) 이제 시작이에요. 20대 때부터 연기 잘하는 사람도 있는데 저는 안 그랬거든요. 농담으로 연기 잘했으면 학교부터 잘렸어야 했다고 해요. 만날 외국 나가서 사인회 하느라 출석 일수를 못 채웠을 테니까. 이제 제 속도를 알아요. 천천히 가더라도 좋은 사람들과 같이 손잡고 갈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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