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여자? 가짜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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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여자? 가짜 여자?

2020-05-07T17:09:49+00:00 2020.05.15|

트랜스 여성은 여성인가? 그럼 당신은 얼마나 여자인가?

나는 여자다. 의심해본 적 없다. 주민번호 뒷자리는 2로 시작하고 가슴과 질과 자궁을 가졌으며 빌어먹을 생리를 30년째 하는 데다 섹스 상대가 남자인 것에 큰 위화감이 없다. 살면서 여러 이유로 혈액검사를 했는데 병원에서 별소리 없는 걸 보면 성염색체는 XX일 거다.

하지만 사회가 제시하는 여성상에 부합하는 완벽한 여자가 될 자신은 없다. ‘여자가 조신하지 못하게’라든가 ‘여자는 그런 일 하는 거 아니야’ 등 ‘여자’를 주어로 하는 관용구를 대체로 혐오하며, 그런 말을 입에 담는 사람도 멀리하다 보니 평시에도 사회적 거리 두기를 실천하는 2020년형 모범 시민이 되었다. 학창 시절엔 공인 인적성 검사에서 ‘남향성’ 항목이 만점이 나와버려 놀림을 받았고, 외국에 살기 전까지 평생 “남자처럼 생겼다”는 말을 들었다. 이런 나는 여자인가? 적어도 ‘천생 여자’ 따위는 아닌 게 분명하다.

그럼 나는 몇 퍼센트나 여자인가? “마음이 고와야 여자지 얼굴만 예쁘다고 여자냐”라는 노래도 있는데 얼굴도 마음도 안 예쁜 내가 생물학적 성별만 믿고 순수 여자인 척해도 되나? 어차피 완벽한 여자란 말하는 돌고래나 똥 냄새 안 나는 고양이 같은 가상의 존재일 뿐이니 이 정도면 그럭저럭 여자라 할까. 헛소리 같겠지만 나는 진지하다. 나는 요즘 ‘무엇이 여자를 여자로 만드는가, 나는 얼마나 진짜 여자인가’를 고민하고 있다. 내가 여자인가 아닌가 묻는 게 아니라 내가 사회에서 그리고 나 자신에게서 여성으로 받아들여지는 이유가, 여자의 조건이, 궁금한 거다. 연초부터 진짜 여자와 가짜 여자를 가르는 논란이 끊이지 않는 탓이다.

3월 31일은 ‘트랜스젠더 가시화의 날’이다. 올해만큼 이날이 의미 있게 다가온 해는 없었다. ‘시스젠더’ 여성인 나는 그런 날이 있는지도 처음 알았다. 일이 왜 이렇게 됐는지가 재밌다. 1월에 전직 군인 변희수 씨가 성별 정정 후 강제 전역을 당했다면서 국가에 항의하는 일이 벌어졌다. 군복 입은 그의 모습은 ‘성 소수자란 특이한 성적 쾌락에 과몰입한 사람’이라거나 ‘트랜스 여성은 여성성을 과도하게 추종함으로써 가부장제에 기여한다’는 흔한 편견을 무너뜨리는 강렬한 메시지였다. 2월엔 트랜스젠더 학생이 여대에 입학하려다가 학교 당국의 허가는 받았으나 터프(TERF, Trans-Exclusionary Radical Feminist, 트랜스를 배제하는 래디컬 페미니스트) 학생들의 반대에 부딪혀 포기하는 사건이 있었다.

한편 대법원은 3월 16일부터 성전환자의 성별 정정 허가 절차를 간소화했다. 새 지침은 분명 “신청인 겸 사건 본인이 성전환증에 의하여 성전환 수술을 받았음을 이유로 성별 정정 허가 신청을 하는 경우에 적용한다”고 밝힌다. 그러나 수술 의사 소견서가 필수에서 참고로 바뀐지라 “수술을 안 해도 성별 정정을 할 수 있게 됐다. 그러면 남자 성기를 가진 사람이 여탕을 활보할 수 있다”는 선정적 논리로 종교 단체, 보수 언론, 지역 맘카페가 들썩였다. 설령 한국이 국제 인권 기준에 맞게 수술 없이 성별 정정이 가능한 나라가 된대도, 사유재산이라면 노 키즈 존도 용인하는 나라에서 여탕에 남성 성기를 가진 사람이 입장할까 봐 걱정하는 건 난데없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모든 논란이 ‘트랜스젠더 가시화’를 도왔다. 매달 관련 이슈가 터지는 바람에 3월에는 지상파 시사 프로그램이 돌아가며 트랜스젠더 문제를 다루었다. <한겨레신문>은 변희수 씨와 숙대 입학을 취소한 학생이 서로에게 쓴 편지를 공개했고, <한국일보>는 변희수 씨에 대한 미국 트랜스젠더 군인의 응원 메시지를 게재했다. 4·15 총선에 출마한 성 소수자 정치인들도 덩달아 홍보 효과를 얻었다. 정의당 비례대표 후보로 출마한 임푸른은 <아시아경제>와 인터뷰에서 “가시화되면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느끼는 사람이 늘어나게 될 테고, 그런 문제의식을 통해 입법 활동도 근거를 마련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마찬가지로 더불어민주당 윤호중 사무총장이 “성 소수자 문제 등 ‘불필요한 소모적인 논쟁’을 일으킬 수 있는 정당과의 연합에는 어려움이 있다”는 반인권 발언을 한 후, 녹색당 비례대표 후보 김기홍이 <오마이뉴스> 인터뷰에서 “홍보해줘 감사하다”는 인사를 전했다. 국방부와 터프 운동가들, 종교 단체 등의 활약은 목소리 큰 사람들에 의해 과대표되던 이 사회의 반소수자 정서를 다시 한번 드러냄으로써 관심 없던 다수의 이목을 끌었다. 전쟁터에서 피아 식별 못하고 아무한테나 총질하거나, 정당한 이유 없이 남을 먼저 혐오했다간 정작 자신이 미워하는 존재를 돕는 꼴이 될 수도 있다는 교훈을 누군가는 얻었기를 바란다.

최근 KBS <시사 직격> ‘시민, 트랜스젠더’ 편에 출연한 하리수는 이런 말을 했다. “20년 동안 인권이 오히려 후퇴했다.” 체감하기엔 그게 사실이다. 20년 전이라고 하리수를 혐오하는 사람이 없었겠나. 알다시피 세상에는 별의별 인간이 다 있다. 지구가 평평하다고 믿는 사람도 있고 소금물이 코로나 바이러스를 치유한다고 믿는 사람도 있으며 한국에 재림 예수가 산다고 믿는 사람도 있다. 당신이 아무 가설이나 세우고 그것을 지지하는 사람을 찾아봐도 반드시 한 명 이상은 찾을 수 있을 거다. 그러니까 굳이 성범죄를 저지르고 싶어 페니스를 자르고 호르몬 주사를 맞고 수년간 골치 아픈 법적 절차를 거치고 돈은 돈대로 쓰고 취업 불이익을 겪고 가족과 갈등을 빚으면서 여자인 척하는 남자가 있다고 믿는 사람이 있대도 놀랄 일은 아니다. 단지 존재한다는 이유만으로 이 모든 의견이 옳다거나 널리 다뤄질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니다. 심지어 그게 다수 의견이라 해도 마찬가지다. 정상 사회라면 인권, 자유, 타인에 대한 존중 등 시민이 지켜야 할 최소한의 선에 대한 합의가 있어야 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20년 전과 달리 요즘은 인터넷과 개인 미디어, 매스미디어란 이름의 트래픽 장사꾼들을 통해 온갖 황당하고 무지하고 야만적인 의견이 장롱 밑에서 굴러나온 먼짓덩어리처럼 공론의 장을 떠다니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단지 혐오를 위해 혐오하는 자들의 발언이 과분한 주목을 받기 예사다. ‘아무나 아무에게나 아무 말이나 할 수 있는’ 방종과 혼란의 시대, 약자와 소수자의 인권이 후퇴한 것처럼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이건 평범한 성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에게도 별로 도움이 안 되는 현상이다.

최근의 트랜스젠더 이슈는 몇 가지 잘못된 전제를 바탕으로 한다. 성 정체성이 선택의 문제라는 것, 세상에는 단지 두 가지 성별이 존재하며 모든 인간은 그중 하나여야 한다는 것, 이 사회가 많은 경우 성적 구분을 통해 시민을 분류하는 데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그나마 첫 번째는 많은 과학적 연구를 통해 충분히 반론이 나온 상태다. 알려고 하지 않으니 알지 못할 뿐 배우려고 하면 얼마든 배울 수 있다. 그러나 두 번째와 세 번째는 더 복잡하다. 우리는 남자 화장실과 여자 화장실, 남탕과 여탕, 남군과 여군, 남고와 여고가 존재하는 세계에 산다. 남성에 의한 여성에 대한 폭력이 반대 경우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고, 성별에 따른 기회의 차별이 엄연히 존재하는 현실에서 당연한 구분이다.

하지만 이런 구분이 세상에 단지 두 가지 성별만 있는 것처럼 인간을 세뇌시키는 부작용을 낳은 것도 사실이다. 모든 인간을 이 이분법에 끼워 맞추려니 자꾸 문제가 생긴다. 예컨대 성별 정정 절차 간소화를 반대하면서 혐오자들이 내세운 논리 중 하나가 ‘그렇게 되면 여자로 성전환한 남자가 여성 운동경기에 출전해 체력적 우세로 여자들의 파이를 빼앗을 수 있다’는 거다. 왜 운동경기에 반드시 남자부, 여자부만 있어야 하나? 제3의 성을 가진 운동선수가 많아지면 그들만의 리그를 할 수도 있는 문제이고, 성별이 아닌 체력을 기준으로 대회를 운용할 수도 있다. 요컨대 단지 사회적 룰을 지키기 위해 자연스럽게 존재하는 성 소수자의 인권을 침해하는 대신, 자연적 존재의 자유와 권리를 위해 사회를 바꾸면 안 되느냐는 거다. 최근 페루와 파나마는 코로나 팬데믹을 막기 위한 사회적 거리 두기의 일환으로 남녀 외출 2부제를 실시했다. 그러자 트랜스젠더들이 “그럼 우리는 언제 외출해?”라는 물음을 던졌다. 이 경우 꼭 시민을 두 부류로 갈라야 한다면 출생 연도 홀짝제처럼 제3지대가 발생하지 않는 방법도 있다. 어쩌면 우리는 성을 지나치게 중시한 나머지 불합리한 사회구조를 재생산하는 데 기여하는 패착을 저지르고 있는 건 아닐까. 물론 이것은 너무 근본적인 얘기라서 당장 여군이나 여학교에 트랜스 여성을 수용하는 문제에는 도움이 안 될지 모른다. 하지만 진짜 여자, 가짜 여자를 구분하는 걸로 이 문제가 간단히 해결될 것 같지도 않다.

나는 평생 심리적, 사회적, 법적, 의학적 고통을 겪고도 그 모든 난관에 맞서 자기 정체성을 고수한 여성들에 비해 내가 ‘진짜’ 여자라고 느끼지 않는다. 나는 그렇게 간절하게 여자이고 싶은 적이 없었다. 마찬가지로 내가 불임이나 폐경이 될지라도, 혹은 탈코르셋을 할지라도, 나는 어디까지나 스스로를 여자로 여길 것이다.

생물학적 특성과 외모가 나의 여성성을 결정짓는 전부가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나를 여자로 느끼는 것은 여자의 생식기를 타고나서 주민등록번호 뒷자리 2번을 자동으로 부여받았기 때문이 아니라 수시로 여성으로서 약자성을 인식하고 다른 여자들의 아픔에 공감하면서 나의 소속을 재확인하기 때문이다. 네 멋대로 살라고 내버려두는 사람들보다 여자니까 이건 되고 저건 안 된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만날 때 더욱 내가 여자임을 체감한다. 말하자면 나는 사회적 존재로서 여성인 거다. 지금처럼 온 사회가 모든 인간은 여자와 남자 둘 중 한 그룹에 속해야 한다고 강요하는 상황이라면 트랜스 여성이 소속될 곳은 여자일 수밖에 없다. 그들 역시 사회적 존재로서 여성인 것이다.

과연 100%의 여자, 100%의 남자가 세상에 존재하긴 하는가. 트랜스 여성이 여성이 아니라면 나도 여자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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