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알코올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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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알코올의 시대

2020-05-07T18:04:15+00:00 2020.05.19|

알코올만 쏙 빠진 새로운 알코올 시장.

“취하려고 술을 마시는 사람이 요즘 어디 있어? 술은 맛과 향을 즐기는 또 하나의 음식이지.” 우아하게 말해놓고 칵테일 두 잔에 눈부터 풀리는 게 요즘의 나다. “위스키는 향의 술입니다. 그윽하다는 말을 술로 옮기면 바로 이 향이 아닐까요?” 위스키 클래스에서 나는 이렇게 설파하지만, 위스키 세 잔을 마시면 다음 날 아침 30분은 뒤척여야 한다. 술이 주는 충만한 행복이 오로지 ‘취함’이 아니더라도, 술을 마시면 인간은 취한다. 귀한 오크통에서 30년을 숙성해 내가 세월을 마시는지 술을 마시는지 모를 값비싼 위스키가 있다고 해도, 마시면 취한다. 고칼로리를 섭취하면 운동이나 소식으로 이를 해소할 방편이 있지만, 고도주를 마시고 나면 해결할 묘수가 딱히 없다. 괴로움으로 가득 찬 시간밖에는.

증류를 통해 ‘스피릿’의 맛을 구현한 무알코올 증류주가 나온 것이 2015년이다. 무알코올 증류주의 등장을 기점으로 무알코올 음료의 장은 결이 좀 달라졌다. 이전엔 임산부나 복용자가 어쩔 수 없이 마시는 맛없는 술에 가까웠던 무알코올 맥주가 많았고, 달고 양 많은 색색깔의 무알코올 칵테일이 ‘대체재’에 가까운 선택지였다. “진저비어도 비어잖아요?”라며 머쓱한 웃음을 날리고는 아예 음료수 섹션으로 넘어가는 경우가 더 많았다. 하지만 세계 최초 무알코올 증류주 ‘시드립 (Seedlip)’의 등장 이후 판은 또 달랐다. 주류 회사가 ‘대체재’가 아닌 진화된 형태의 술로 ‘무알코올’을 인식했다. 바텐더들은 ‘술맛도 모르는’ 이들이 마실 목테일(Mocktail) 제조 시대를 지나 더 정교한 맛과 향으로 레이어를 쌓은 무알코올 칵테일을 개발했다.

다양한 보태니컬(Botanical)을 넣고 증류기를 사용해 진의 향을 구현한 영국의 무알코올 증류주 브랜드 ‘시드립’은 지난해 8월 사업적으로 큰 변화를 맞았다. 스미노프, 기네스는 물론이고 조니워커와 스코틀랜드 증류소를 다수 소유한 주류 대기업 디아지오가 시드립의 대주주가 된 것이다. 지난해 5월 ‘애이콘(Aecorn)’이라는 아페리티프 전용 무알코올 와인도 내놓았다. 영국이나 미국, 홍콩과 싱가포르 등에서 판매하는 전략을 살펴보면 누구보다 진지하게 ‘술’을 팔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알코올이 들어 있지 않지만 그 어디에도 ‘0’이나 ‘Zero’라는 글귀를 대문짝만하게 박아놓지 않았으며 크래프트 진 증류소에서 만든 새로운 술과 다를 바 없이 술 애호가들을 상대로 커뮤니케이션한다. 애이콘 역시 칵테일 비터에 익숙한 이들, 이탤리언 아페리티보에 익숙한 이들에게 적합한 맛과 향으로 시장을 파고든다.

시드립이 등장하자 시장이 움직였다. 무알코올 증류주 브랜드 ‘세더(Ceder’s)’도 시드립이 닦아둔 길 위로 안착했다. 주니퍼베리, 코리앤더, 생강, 카모마일, 루이보스 등과 같은 강렬한 보태니컬의 특징을 살려 칵테일로 내놓아도 중심을 잡을 수 있도록 만들었다. 얼음에 세더를 붓고, 토닉 워터만 더해도 진토닉의 맛을 느낄 수 있는 이유가 이 때문이다. 로얄살루트, 발렌타인을 소유한 페르노리카도 세더와 손을 잡았다. 세더의 유통을 책임지기로 한 것이다.

무알코올 증류주 시장이 열리자 바텐더들이 반응했다. 두세 가지 목테일로 구색만 갖추던 메뉴판은 사라지고, 한 페이지 혹은 그 이상을 할애해 무알코올 칵테일 선택지를 제시한다. 싱가포르에서 근무하다 한국으로 넘어온 바텐더는 말했다. “해외에서는 무알코올 증류주를 활용해 목테일을 만드는 게 일반 칵테일을 제조하는 것만큼 중요해졌다. 알코올은 없지만 클래식 칵테일 레시피의 맛을 거의 흡사하게 구현하려고 연구도 많이 한다.” 마티니가 아닌 ‘마티No’, 네그로니가 아닌 ‘No그로니’ 등의 칵테일이 전 세계에서 폭발 중이다. 이런 칵테일 레시피를 담은 책 출간도 늘었다. ‘All Day Cocktails’라는 설명이 붙은 책은 대부분 무알코올 칵테일을 다룬다. 미국 음식 잡지 <본아페티> 에디터였고, 식음료 관련 칼럼을 다루는 줄리아 베인브리지(Julia Bainbridge)도 무알코올 칵테일 관련 새 책 출간을 앞뒀다. <굿 드링크>라는 이 책은 ‘당신이 무슨 이유에서건 술을 마시지 않기로 결심했을 때 볼 수 있는 무알코올 레시피’라는 부제가 붙었다. 바텐더이자 수많은 칵테일 책을 집필한 저자인 짐 미한(Jim Meehan)도 전체의 3분의 1 이상을 무알코올 칵테일 레시피에 할애한 새 책을 준비 중이다. 제목은 ‘바텐더의 팬트리(The Bartender’s Pantry)’다.

바텐더가 움직이자 무알코올 칵테일만 전문으로 다루는 프로페셔널한 바가 생겨났다. 노팅힐, 쇼어디치, 코벤트 가든에 지점을 둔 ‘리뎀프션 바(Redemption Bar)’는 메뉴 전체가 무알코올 칵테일이다. 비건을 위한 건강식 위주로 판매하며, 명상을 권유하는 분위기의 공간에서는 대낮에 마티니 글라스를 손가락 사이에 끼고 있어도 이상하지 않다. 지금은 코로나19로 휴업 중이지만, 정상 영업은 오전 10시부터 시작해 무알코올이 음주 시간의 장벽도 무너뜨렸다. 지난해 문을 연 브루클린의 ‘겟어웨이(Getaway)’ 역시 모든 메뉴가 무알코올 칵테일로 이루어진 바다. 분위기나 바텐더의 태도, 그들이 쓰는 기물, 홈메이드 슈럽(Shrub)과 코디얼, 바텐딩을 하는 과정, 완성된 칵테일의 모양새 모두 기존 바와 다르지 않다. 차이라면 알코올만 빠졌다는 것. 덕분에 무알코올 칵테일에 기존 칵테일의 가격과 비슷한 1만5,000원 정도를 지불하는 것이 어색하지 않은 일이 됐다.

수요가 늘면 시장도 움직이기 마련이라 영국을 중심으로 크고 작은 크래프트 음료가 등장하고 있다. ‘센서 스피릿(Senser Spirits)’은 식물을 주재료로 음료를 만든다. 토닉을 섞어 칵테일처럼 음용하거나 온더록스로 마실 수 있다. 차와 술 그 사이쯤 포지셔닝한다. 역시 런던의 바텐더가 만든 브랜드 ‘에버리프(Everleaf)’는 중동의 후식 음료인 살렙(Salep)에 영감을 받아 만든 무알코올 음료다. 바닐라 향과 크림소다 느낌이 강렬하다. ‘스리 스피릿(Three Spirit)’ 역시 허브와 향신료를 활용해 드라이한 음료를 만든다. 이들이 공통적으로 외치는 점이 있다. 알코올을 마시지 않는다고 술에 대한 궁금증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라는 것! 알코올을 섭취하지 않아도 건강 음료, 다이어트 음료, 탄산음료가 아니라, 그저 어른의 유흥 음료를 마시고 싶은 욕망은 사그라들지 않는다. 무알코올 칵테일은 그 지점에서 자라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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