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라는 이름의 화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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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라는 이름의 화랑

2020-05-27T13:36:29+00:00 2020.05.27|

반세기 동안 예술 매개자로서 자리를 지켜온 ‘갤러리 현대’의 역사는 곧 한국 현대미술사다. 개관 50주년 기념 특별전 <현대 HYUNDAI 50>을 주목해야 하는 이유.

이우환의 작품이 걸린 갤러리 현대 신관 전시 전경.

지금 내 눈앞에는 ‘우주’가 펼쳐져 있다. 두 개의 원을 그리며 무한 팽창하는 푸른 우주. 한국 미술품 사상 최고가를 기록한 김환기의 1971년 작 ‘우주 05-IV-71 #200’이다. 2.5m 크기의 그림 두 점으로 구성된 푸른색 전면점화는 지난해 말 홍콩 크리스티 경매에서 131억8,750만원(8,800만 홍콩달러)에 낙찰되었다. 개관 50주년 기념 특별전 <현대 HYUNDAI 50>이 열리고 있는 갤러리 현대에서는 경매 이후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낸 거대한 블루 홀을 만날 수 있다. 사간동 본관과 신관에서 7월 19일까지 이어지는 전시는 김환기뿐 아니라 한국 근현대미술 대표 작가 40인의 주요 작품 70여 점과 1990년대 이후 갤러리 현대에서 작품을 선보인 국내외 작가 40여 명의 작품을 망라한다. 아카이브 자료도 흥미롭다. 50년이다. 한국 미술사의 전설이 된 김기창, 박수근, 백남준, 이중섭, 천경자의 젊은 시절, 파리로 떠난 이우환의 손 편지, 옛 미술 잡지와 전시 포스터, 그때 그 시절의 전시 풍경 등 갤러리 현대의 역사는 곧 한국 현대미술사다.

1970년 4월 현대화랑(갤러리 현대의 옛 이름)이 문을 열 때만 해도 인사동엔 서화나 골동품, 고서 등을 다루는 상점이나 화방만 있었을 뿐, 현대미술을 전시하는 갤러리는 없었다. 온 나라 통틀어 유일했다. 미술사 전문가들은 한국 현대적 화랑의 출발점으로 현대화랑을 꼽는다. 가나아트, 국제, 아라리오 등 대형 화랑이 출현한 건 10여 년 후 일이다. 88 서울 올림픽 개최와 더불어 미술품 수입 자유화가 시작되면서 일어난 변화다. 물론 그전에도 근대적 의미의 화랑은 존재했다. 근대 화랑의 효시인 1900년 상인 정두환이 서울에 개설한 ‘서화포’가 있었고, 외국어에 능통하던 서양화가 이대원이 운영한 반도화랑은 반도호텔(현 롯데호텔 자리) 1층 중앙 로비 한쪽에서 외국인 관광객과 주재원을 대상으로 한국화와 유화를 팔았다. 반도화랑은 한국 근현대 작가들의 사랑방이었다. 1961년 반도화랑에 직원으로 입사해 예술가들과 교류해온 박명자(현 갤러리 현대 회장)는 그간의 경험과 안목을 바탕으로 새로운 화랑 시대를 열었다.

“그 당시 서양화는 아무리 대가의 작품이라 해도 구입하는 사람이 없었어요. 주로 동양화 작품이 조금 팔릴 때였죠. 그런데 갤러리를 시작하기 전 한국에 화가가 몇 분인지, 어떤 분들인지 조사해보니 서양화가가 훨씬 많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어요. 그래서 저는 서양화를 다뤄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당대 작가의 작품을 판매해 화랑은 수수료로 운영하고 작가들은 수익금으로 창작에 전념할 수 있는 구조가 한국 미술 시장에도 필요하다고 여겼죠.” 박명자 회장은 50주년 기념 출판 프로젝트 <HYUNDAI> 인터뷰에서 당시를 이렇게 회상한다. 현대화랑이라 이름 지은 이유도 그 때문이다. 이 현대적 화랑의 등장을 누구보다 반긴 건 작가들이었다. 특히 운보 김기창의 아내이자 1세대 여성 화가 박래현은 “외국에는 여성이 경영하는 화랑이 많다”며 남편 작품까지 내주었다. 김기창은 1970년 개인전을 통해 ‘청록산수’를 처음 선보였다. 갤러리 현대는 기꺼이 힘을 보탠 작가들과 함께 성장했고, 작가들은 이곳에서 개인전을 열며 작가 인생의 전환점을 마련했다.

박수근은 1970년 가을 유작 소품전을 개최하며 인연을 맺었다. 그의 작품은 박명자 회장이 반도화랑에 취직해 제일 먼저 판 그림이다. 현대화랑에서 그의 전시가 열릴 때는 가난한 대학생이었던 유홍준 교수가 가정교사의 한 달 치 월급을 털어 풍경화 스케치를 한 점 사갔다. 시간이 흐른 후 미술 평론가로서 박수근 50주기 특별전에 참여한 그는 “그림 구입은 그때가 처음이었다”고 회고했다. 비운의 천재 화가 이중섭을 재평가하는 계기가 된 것 역시 1972년 현대화랑 회고전이었다. 전시 관람을 위해 몰린 사람들이 몇십 미터에 이르는 긴 줄을 서는 진풍경도 펼쳐졌다. 이 전시에서는 그 유명한 이중섭 ‘황소’와 함께 당시 전시장에 비치된 방명록과 작품집도 볼 수 있다. 대중에게 처음 공개되는 이 작품집에는 작가가 세상을 떠난 후 흩어져 있던 주요 작업의 이미지와 설명을 비롯해 해당 작품 소장가에 대한 기록까지 엮여 한국 미술사 연구의 출발점으로서도 의미를 지닌다. 이후로도 3회에 걸쳐 이중섭 전시를 개최하며 그를 국민 화가 반열에 올려놓았다. 1999년 회고전은 9만여 명이 몰려들어 대성황을 이뤘다.

꽃과 여인이라는 소재를 독창적으로 재해석해 한국 채색화의 기틀을 마련한 천경자는 1973년 첫 개인전을 포함해 총 다섯 차례나 현대화랑에서 전시했다. 이국적 풍광이 인상적인 전시는 줄을 서서 보는 당대 최고 이벤트였다. 재미있는 건 전시 포스터에 적힌 기간인데, 천경자처럼 아무리 인기 작가의 전시라도 고작 일주일 진행되는 게 당시 관행이었다. 이번 전시에서는 작가의 페르소나 같은 작품 ‘내 슬픈 전설의 49페이지’, 1973년 현대화랑이 창간한 미술 전문지 <화랑>의 첫 표지를 장식한 ‘팬지’를 비롯, ‘하와이 가는 길’이 전시된다. ‘하와이 가는 길’은 작가가 현대화랑의 개관을 축하하며 박명자 회장에게 준 선물이다. 함께 전시장 곳곳을 둘러보던 갤러리 현대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김재석은 숨은 사연을 들려주었다. “1969년 신문회관 전시에서 6,000원에 나왔는데 작품이 마음에 든 박명자 회장이 3,000원에 살 수 있는지 물었으나 그땐 작가가 거절했다고 해요. 당시 일반 샐러리맨의 월급이 3,000원 정도였으니 당장 수중에 있는 돈이 그 정도였을 거예요. 그런데 작가가 그걸 기억하고 있다가 이듬해에 감동적인 선물을 한 거죠.”

본관 전시가 한국 근현대 미술가를 재조명하고 한국화 거장들의 작품으로 구성되어 있다면 신관에서는 한국 추상미술의 계보를 확인할 수 있다. 1층에서 마주하는 작품은 1993년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독일관 작가로 참여한 백남준에게 황금사자상을 안긴 대형 TV 조각 ‘마르코 폴로’다. 갤러리 현대는 그의 한국 전속 화랑으로 작가의 국내외 활동을 전폭적으로 지원해왔다. 1988년 개인전에서는 올림픽을 주제로 한 작업과 ‘로봇 가족’ 연작을 처음 소개했고, 1990년 7월에는 갤러리 현대 뒷마당(지금의 금호미술관 자리)에서 작가가 굿판도 벌였다. ‘늑대 걸음으로’라는 이름의 이 퍼포먼스는 요셉 보이스를 위한 일종의 예술적 진혼굿이었는데, 500여 명이 몰려들어 담벼락과 지붕, 마당에 심은 나무에까지 올라가 구경했다. 현장에서 백남준의 신들린 굿판을 본 무당 김금화가 “무당은 난데 저 사람이 나보다 한 수 위”라고 말할 정도였으니 그야말로 야단법석이었다. “퍼포먼스가 끝나고 사람들이 다 돌아가고 난 뒤, 10~20분쯤 지났을까? 갑자기 천둥 번개가 쳐서 사간동 일대가 정전되었어요. 마당에 오래된 큰 나무가 부러져 결국 고사했죠. 백 선생님이 혼잣말로 ‘보이스가 다녀갔네!’라고 하시더군요. 굉장하고 특별한 퍼포먼스였어요.” 언급한 50주년 기념 출판물 <HYUNDAI>에도 박명자 회장의 생생한 증언이 담겨 있다. 그날은 백남준의 생일이었다. 그리고 프랑스 소르본대학 교수이자 방송 연출가 장 폴 파르지에(Jean-Paul Fargier)는 이 모든 광경을 찍어 유럽 전역에 방송으로 내보냈다.

신관 지하에서는 한국 추상화의 선구자이자 갤러리 현대의 첫 번째 추상화 전시로 기록된 남관의 작품을 필두로 이우환의 ‘선으로부터’, ‘점으로부터’, ‘바람’ 시리즈, 김창열의 물방울 회화, 박서보의 묘법, 이응노의 문자 추상 등 작가들의 대표작을 전시한다. 김환기의 ‘우주’는 이곳 2층에 걸려 있다. 김환기와 갤러리 현대는 단순히 화가와 화랑의 관계로 설명할 수 없는 그 이상으로 연결되어 있다. 그가 세상을 떠난 후 유족은 갤러리 현대와 더 깊은 인연을 이어갔다. 박명자 회장은 환기미술관 설립을 위해 집터로 남겨둔 부암동 땅을 시가보다 훨씬 낮은 가격에 매각했고, 수필가이자 미술 평론가인 김환기의 아내 김향안은 이를 늘 고마워했다. 김향안 여사가 박명자 회장에게 보낸 자필 편지와 1992년 환기미술관 설립 무렵 사진도 이번에 공개한다. 박 회장은 환기미술관뿐 아니라 강원도 양구의 박수근미술관, 제주도 이중섭미술관이 완공될 때도 도움을 줬다. 개인 소장 작품을 기증한 것이다.

20세기 초 파리 예술가들에게 ‘스타인 살롱’이 있었다면 한국에는 ‘현대 화랑’이 있었다. 소설가이며 비평가이자 미술 애호가였던 거트루드 스타인의 이 아파트는 예술 황금기로 우리를 초대하는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에도 등장한다. 피카소와 마티스가 그림 앞에서 논쟁하고, 헤밍웨이가 소파에 널브러진 채 술을 마시며, 에릭 사티의 피아노 연주에 맞춰 피츠제럴드 부부가 노래하는, 그 모든 장면이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펼쳐지던 공간 말이다. <뉴욕 타임스>는 당시 스타인 살롱을 일컬어 미술사 최초의 현대미술관이라 불렀다. 박명자 회장과 갤러리 현대는 새로운 예술운동의 비호자로서 예술가들과 함께 50년을 보냈다. 비록 1970년 개관할 때 사용하던 인사동 사거리의 현대화랑 건물은 이제 없지만 사진과 스케치는 남아 있다. 갤러리 현대가 사간동으로 옮긴 것도 경복궁 옆으로 개천이 흐르던 까마득한 시절 얘기다. 그 긴 세월 동안 갤러리 현대는 국내 최초의 미술 시장 정보 매체를 창간해 미술 대중화를 이끌었고, 한국 갤러리 최초로 해외 아트 페어(1987년 제8회 시카고 엑스포)에 참가해 한국 작가들을 국제 무대에 적극 소개했다.

수집가들은 한국 미술사에서 갤러리 현대의 위상과 의미를 누구보다 잘 안다. 이들은 50주년 특별전을 위해 기꺼이 소장품을 내놓았다. 그중 1973년 전시 당시 구입한 도상봉의 정물화도 있다. 이들이야말로 이 전시의 숨은 주인공이다. 박명자 회장은 50주년 기념 출판 프로젝트 <HYUNDAI>에서 “그때그때 좋은 작품을 전시해 작가들과 애호가들의 가교 역할을 하는 것이 화랑의 역할이라 믿고 그렇게 운영해왔다”고 말했다. “좋은 화랑이란 자신이 속한 시대의 좋은 작품을 얼마나 많이 전시, 판매했고, 그것이 어떻게 현재까지 이어지느냐로 가름한다”는 것이다.

이제 화랑은 새 시대를 준비한다. <현대 HYUNDAI 50>은 반세기를 회고하고 다음으로 가기 위한 숨 고르기다. 1부와 2부로 구성된 이 전시는 5월 31일 1부를 마치고 6월 12일부터 1990년대 이후로 2부를 연다. 그야말로 영화 같다. 역사는 흐르고 화랑은 아직 그곳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