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격의 예술가, 류이치 사카모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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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격의 예술가, 류이치 사카모토

2020-06-12T14:29:34+00:00 2020.06.16|

미리 말해두자면, ‘모두의 예술가’ 류이치 사카모토의 음악을 경험하고자 한다면 차라리 앨범이 낫고, 그의 공연은 인터넷으로도 볼 수 있으며, 그의 일생을 훑고 싶다면 자서전 필독을 권한다. 이 인터뷰는 시대를 관통해온 진격의 거인, 득음의 경지에 이른 거장과의 한때를 개인적 시각으로 기록한 글이다.

어느 날 도래한 고립의 시간 동안 얻은 몇몇 즐거움 중 하나는 류이치 사카모토(Ryuichi Sakamoto)의 공연을 기다리는 일이었다. 매주 금요일 저녁 7시, 역사적 공연이 온라인에 공개되었고, 각 영상은 한시적으로 한 달간만 볼 수 있었다. <Ryuichi Sakamoto Trio Tour 2011 in Europe> 공연은 2012년 세종문화회관에서의 삼중주와 공간 전체를 채우던 향 특유의 냄새를 상기시켰다. <Playing The Orchestra 2014> 영상이 공개된 덕에 애청곡 ‘Happy End’를 오케스트라 버전으로 ‘보는’ 호사도 누렸다. <Utau Live in Tokyo 2010 A Project of Taeko Onuki & Ryuichi Sakamoto>는 오누키 다에코의 목소리와 사카모토의 피아노, 심지 깊은 두 개의 선으로 그려진 그림이었다. 오랜 동료 알바 노토, 크리스티안 페네츠, 프란체스코 트리스타노가 글렌 굴드의 음악을 재해석한 <Glenn Gould Gathering_Limited Edition>의 조화와 충돌의 에너지는 원곡자의 그것을 능가했다. 내친김에 옛 영상까지 모조리 뒤져보던 중, 테크노 팝 3인조 그룹 YMO(Yellow Music Orchestra) 활동 시절, 빨간 양복 차림으로 키보드를 치던 소싯적 그의 흑발이 유난히 낯설게 느껴졌다.

류이치 사카모토의 머리칼이 본래 은색이었을 거라는 비현실적 착각은 그의 음악이 증명해온 동시대성에서 비롯되었다. 고등학교 때 선물 받은 조악한 컴필레이션 테이프에 그의 작업 <마지막 황제> O.S.T.가 포함되어 있었음에도, 그는 늘 ‘지금’의 모습으로 기억된다.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음악에 깃든 동시대성 역시 현재보다 더 현재적이고, 과거보다 더 과거에 충실하며, 미래보다 더 미래를 반영하는 식의, 시대와 묘하게 어긋나는 지점에서 발생했다. 최근에만 해도 레이디 가가부터 조성진까지, 전 세계 뮤지션이 저마다 온라인 공연을 선보였지만, 사카모토의 공연 영상은 진화를 일별할 수 있는 아카이브나 다름없었다. 실험 및 탐구로 점철된 광활한 작업 세계를 영상 몇 개로 ‘지도화’했다는 점에서, 이번 ‘공연 대방출’ 사건은 손발이 묶인 음악가의 불가피한 미봉책이 아니라 명민한 기획이라 할 만했다.

지난해 말 기획, 결정된 <보그>와의 인터뷰는 도쿄에서 진행할 예정이었다. 인터뷰 시간을 10분이라도 더 확보하기 위해 수십 통의 정중한 메일을 주고받았다. 하지만 돌연 세상은 멈추었고, 당연히 나는 가지 못했다. 화상 인터뷰는 우리가 도쿄와 서울 사이에서 만날 수 있는 좋은 대안이었지만, 그날따라 ‘IT 강국’이라는 별명은 무색했다. 원인 모를 접속 사고에 좌불안석이던 나를, 그는 2시간 내내 안심시켰다. 정작 때아닌 전염병에 속수무책인 건 그였는데 말이다. 원래대로였다면 그는 홋카이도의 아이누족 마을 니부타니에서의 대담, 홍콩 공연, 신작 오페라 준비, 알바 노토와의 <Two> 유럽 콘서트 등을 포함한 초인적 스케줄을 소화하고 있었을 게 분명하다.

애초에 약속 장소가 그의 생활 터전인 뉴욕이 아니었던 건, 아무리 바쁜 일정에라도 그는 3월 이맘때쯤이면 늘 일본에 머물기 때문이다. 2011년 3·11 동일본 대지진 후부터 거의 매년 해당 지역의 아이들과 오케스트라 공연을 열고 음악 축제도 기획하는데, 그에게 ‘가장 중요한 연례행사’라 했다. 류이치 사카모토처럼 사유하고, 행동하고, 실천하는 예술가는 드물다. 재해 지역의 원전 문제에서 출발한 반핵운동에 앞장서고 ‘모어 트리즈(More Trees)’라는 환경 단체를 직접 창설한 건 물론이고 저작권법, 테러리즘과 전쟁, 안보정책 반대 등 사회·정치적 현안을 다룬 시위에도 종종 등장한다. 이런 사회 활동가적 면모는 그의 음악이 옳고 그름을 ‘발언한다’고 종종 오해하게 한다. 그러나 사회·정치 이슈를 소재로 만든 세기말의 오페라 <라이프>의 시적 장면을 떠올려보면, 그에게 ‘정치’란 삶을 사는 태도 혹은 방식이다. 차라리 다큐멘터리 <류이치 사카모토: 코다>의 한 장면, 쓰나미에서 살아남았다는 낡은 피아노의 건반을 쓰다듬듯 두드리며 “자연이 조율해준 소리”에 가만히 귀 기울이던 심정에 더 가까운 것이다.

류이치 사카모토를 둘러싼 또 다른 오해는 ‘뉴에이지 피아니스트’라는 규정에서 기인한다. 그의 음악은 어디에서나 흘러나온다. 그에게 음악이 곧 언어라면, 피아노는 언어를 발화하는 가장 강력한 목소리다. 실상 그의 음악 세계를 직조한 건 바흐, 사티, 드뷔시(한때 자신이 드뷔시의 현신이라 믿을 정도였다) 등의 클래식과 곳곳의 공동체에서 숱한 세월 동안 살아남은 민족음악에 대한 애정이었다. 그의 음악에서 견고한 서양음악의 구조와 반서양적 질감이 공히 느껴지는 이유다. 만약 그가 ‘뉴에이지’로 분류될 수 있다면, 이는 ‘새로운 시대, 새로운 가치를 추구하는 흐름이자 전통 관념에 대한 반작용 운동’이라는 사전적 맥락을 충실히 반영했기 때문이다. 단, 뉴에이지 음악에 대해 통용되는, ‘듣기 쉽고, 편안하며, 잔잔한 기능 음악(일 뿐)’이라는 편견을 반드시 걷어내야 한다. 게다가 사실 “한 번도 무엇이 되어야겠다고 마음먹은 적 없다”는 사람에게는 이런 정의 자체가 부적절하다.

이번 인터뷰에서 류이치 사카모토는 자신의 작업 인생이 공교롭게도 10년 단위로 정리된다고 말했다. 이 말을 바탕으로 크게 구분해보자면 다음과 같다. 민족음악과 전자음악을 섭렵하고 YMO 활동을 통해 ‘앙팡 테리블’로 떠오른 1970년대, 영화음악 작곡가로 명성을 날린 동시에 자기 실험에 몰두한 1980년대, 뉴욕으로 이주해 본격적으로 세계 무대에서 활약한 1990년대, 새로운 시대에 대한 자각과 사회적 활동에 더욱 충실한 2000년대, 진화한 음악으로서의 소리를 탐구한 2010년대, 이 모든 것의 진화가 기대되는 2020년대, 그리고 그 이후.

연대기와 상관없이, 처음부터 내게 류이치 사카모토는 ‘새 시대에 걸맞은 전위적 예술가’였다. 학창 시절 비디오로 본 오시마 나기사의 <전장의 크리스마스>(1983)와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의 <마지막 황제>(1987)에서 어떤 배우와 영화음악가가 동일 인물이라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던 기억이다. 그가 공히 일본 군인을 연기했다는 사실은 잊혔을지 모르지만, 전자의 메인 테마 ‘메리 크리스마스, 미스터 로렌스’나 후자의 ‘마지막 황제’는 거의 모든 공연에 등장하는 불멸의 히트작으로 남았다. 특히 <마지막 황제>를 위해 일주일 만에 45곡이나 쓴 그는 아시아인 최초로 아카데미 및 골든글로브 음악상 등을 수상했다. 1978년 데뷔 이후 사카모토의 활약은 실로 대단했다. 이미 낭중지추였던 그는 YMO 활동으로 슈퍼스타의 대열에 합류했다. 크라프트베르크의 미래적 전자음과 동양 미학이 조화를 이룬 음악은 지금 들어도 매력 있다. 이들의 음악은 전 세계의 각종 음악 차트를 휩쓸었고, 특히 ‘Behind the Mask’ 같은 곡은 마이클 잭슨과 에릭 클랩튼이 리메이크했다. 사카모토가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개막식 주제가의 작곡가였다는 사실 역시 YMO가 ‘일류(日流)’의 선두 주자였다는 것 못지않게 유명하지만, 이 부담스러운 행사에 참여하기로 한 이유가 재능 있는 프로듀서와의 협업을 기대했기 때문이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모르긴 해도, 지난 2018년 류이치 사카모토는 이 시절에 버금가는 매우 바쁜 나날을 보냈을 것이다. 서울 피크닉에서 그의 전시가 열렸고, 작곡가로는 처음으로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올해의 아시아 영화인’으로 꼽혔다. 그가 활동을 시작한 지 40주년 되는 해, 한국을 비롯한 세계 영화인들이 나서서 그의 세월과 공로를 기린 셈이다. 그에게 이 특별한 해를 어떻게 자축했느냐고 물었다. “사실 저는 뭔가를 잘 기념하지 않는 편이에요. 연초에 새해 포부를 나누거나, 1년 계획을 세우는 데도 익숙하지 않지요. 하지만 다른 아시아권처럼 일본에서도 만 60세가 되면, 그간 잘 살아왔다고 환갑 기념행사를 조촐히 열어요. (자신의 사진을 보여주며) 주인공은 빨간색 조끼에 빨간색 모자를 쓰는데, 저도 그냥 그렇게 지난 60년 인생을 축하했습니다(웃음).”

두 편의 다큐멘터리 <류이치 사카모토: 코다>와 <류이치 사카모토: 에이싱크>도 같은 해에 개봉했다. 두 작품은 그의 ‘현재’에 대한 이야기다. 특히 <코다>는 인후암 투병 중 심경의 변화를 잘 담고 있다. “언제 죽더라도 후회 없도록 부끄럽지 않은 것들을 좀 더 남기고 싶다”던 그는 세상이 듣고 싶어 하는 음악이 아니라 자신이 듣고 싶은 음악, 아니 소리에 몰두한다. 리듬, 선율, 화음 등 ‘음악의 3요소’를 잊고, 일상과 자연의 소리를 되살려낸다. 피아노 현을 뜯거나 튕기고, 양동이를 뒤집어쓴 채 빗소리를 채집한다. 다큐에서 거론되는 영화 <레버넌트: 죽음에서 돌아온 자>를 보면서 나는 감독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뿐 아니라 사카모토 역시 거장의 반열에 올랐다 확신했는데, 소리를 적층하고 조각한 듯한 음악은 죽음으로 뒤덮인 백색의 땅을 걷는 휴 글래스(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분)의 절망감을 가장 극대화하는 중요한 요소였다. 이런 시도는 동명의 앨범 공연 실황을 담은 다큐멘터리 <에이싱크>에도 고스란히 반영된다. 혹자는 “내가 좋아하는 곡이 나오지 않아 실망했다” 했지만, <에이싱크>는 소리의 이치와 원리를 깨우쳐 궁극에 이르고자 한 예술가의 열망이 완성한 가장 진화된 상태다. 자쿠발란(Zakkubalan)과의 협업으로 영상, 텍스트, 음악과 소리로 구성된 작업을 낯선 무대인 싱가포르 비엔날레 같은 곳에 출품한 용기도 그렇거니와, 한때 도시의 모든 소리를 바꾸고픈 야심에 노키아 휴대폰 벨 소리나 게임 인트로 음악 작업도 마다하지 않았던 그가 이윽고 무음(無音)조차 두려워하지 않는 득음의 상태에 이르렀음을 시사하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몇 년 전 <버라이어티>에 그에 관한 일화가 소개된 적 있다. 평소 좋아하던 맨해튼 일식집의 음악 선곡에 실망한 나머지, 플레이리스트를 도맡겠다고 (정중히) 제안했다는 내용이었다. 그들은 “음악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기를 요구하는 자신감, 감수성, 믿음”이라 썼지만, 예의 자신감은 겸손함 없이 성립되지 않는다. 그에게 음악은 만국 공통어이지만, 침묵해도 좋다고 믿는다. 평생을 음악으로 살았지만, 음악이 보고 느끼는 세상의 전부가 될 수 없음을 안다. 그의 획기적인 감성은 멜랑콜리한 멜로디가 아니라 삶 면면에 가시처럼 박힌 각성의 순간이 만들어냈다. YMO가 그토록 큰 인기를 끈 건 1980년대 전후 일본 국력의 무서운 성장세와 맞물려 있었음을 자각했고, 어떤 위대한 천재도 공동체의 음악을 따라잡을 수 없음을 인정했으며, 심지어 드뷔시의 음악에도 식민지주의의 범죄성이 깃들어 있다는 점을 잊지 않았다. 음악의 절대적 한계와 결손감을 인정한 유일한 예술가를 통해 ‘태도가 곧 본질’임을 자각하고서야 나는 그의 음악이 완전히 다른 차원으로 들리는 초월의 순간을 종종 경험할 수 있었다.

실시간의 모니터 화면 속 류이치 사카모토는 고개를 숙인 채 수행자처럼 바흐의 우울한 곡을 연주하던 <코다>에서의 모습에 비해 활기차 보였다. 한국 팬들 사이에서 ‘용일이 형’으로 통하는 그는 한국에서 냉면을 먹고 싶다고 했다. 내년에 만나자는 인사로 인터뷰를 끝내고도, 내내 아쉬움이 남았다. 그 두 손의 물성을 직접 느껴보지도 못한 데다, 그의 파리 공연에 찾아와주었다는 수전 손택의 말을 인용해 마음을 전하기에 2시간도 부족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면에서 대신해볼 요량이다. “당신의 ‘뉴욕 동지’가 말했죠. ‘투명성은 오늘날 예술에서 가장 고상하고 가장 의미심장한 가치다. 투명성이란 사물의 반짝임을 그 자체 안에서 경험하는 것, 있는 그대로의 사물을 경험하는 것을 의미한다…. 지금 중요한 것은 감성을 회복하는 것이다. 우리는 더 잘 보고, 더 잘 듣고, 더 잘 느끼는 법을 배워야 한다.’ 내게 당신은 예술의 이런 이상적 면모를 알려준 예술가입니다.”

지난해 말, 인터뷰를 제안드릴 때만 해도 지금의 상황을 아무도 예상 못했을 겁니다. 이런 범인류적 재난의 시절을 어떻게 보내고 계신지요. 우선, 이런 비상 상황에도 인터뷰를 진행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말씀대로 우리는 비일상적인 시간을 보내고 있어요. 옛날에는 1년에 몇 번씩 열리는 축제 같은 것이 그런 시공간을 제공했습니다. 현 상황이 축제라는 건 전혀 아니지만, 이런 전 세계적인 대규모 사태가 산업 및 경제뿐 아니라 우리 일상이 얼마나 글로벌하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새삼 증명한다고 생각해요.

아프리카 차드의 문인 무스타파 달렙도 최근 그런 글을 썼지요. 작은 미생물이 우리에게 인류임을 자각하게 하고 휴머니즘을 일깨웠다고요. 섭리가 드리울 때를 기다리며 스스로를 직시하고, 살아 있는 자신을 사랑하자는 말이 여전히 기억에 남습니다. 2011년 동일본 대지진 역시 현실을 직시하게 하는 사건이었죠. 매년 3월 11일에 맞춰서 오시는 걸로 알고 있는데 어떤 활동을 하시나요? 5년여 전부터 재해 지역인 도호쿠 지방 아이들과 ‘도호쿠 유스 오케스트라’ 활동을 하고 있어요. 올해 3월, 다섯 번째 공연에서 아이들과 신곡을 연주할 예정이었는데, 아마 1년 정도 연기될 것 같습니다. 혹자는 이런 재난을 이미 과거의 일일 뿐이라고 치부할지 모르지만, 저는 정기적으로 자주 이 지역을 왕래하고 있어서인지, 과거라는 생각이 전혀 안 듭니다. 여전히 제가 음악가로서 무엇을 해야 할지 정답을 찾진 못했지만, 그런 마음으로 음악을 만들고 있어요.

아무래도 오케스트라 단원인 아이들의 현재와 미래를 매번 대면하실 테니까요. 지진과 쓰나미 때문에 원전 사고가 났고, 그때 유출된 방사능이 많은 이들을 고통스럽게 하고 있어요. 이 문제를 함께 고민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2012년부터 ‘No Nukes’라는 행사를 해왔는데, 반복하다 보니 한계가 느껴지더군요. 동일본 대지진 발생 10년째가 되는 2021년을 기점으로 행사를 대폭 바꾸려 기획 중입니다. 젊은 사람들이 동참할 수 있고, 원자력을 비롯한 사회 이슈 전반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행사로 말이죠. 내년에는 꼭 그 공연에 함께해주시면 좋겠군요(웃음).

예술가들은 시대의 문제점을 직감적으로 포착하고, 나아가야 할 바를 숙명처럼 고민한다는 점에서, 나이와는 상관없이 ‘어른’이라 생각합니다. ‘시대의 어른’으로 사시는 건 어떻습니까? (웃음) 할 수만 있다면, 그런 훌륭한 어른이 되고 싶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완벽하지 못하듯, 나도 단점이 많은 사람이에요. 하지만 노력을 안 하는 것보다는 하는 게 좋겠죠. 각자가 자신의 자리에서 할 수 있는 것을 조금씩 해나가다 보면, 아무것도 안 할 때보다 좋은 세상을 만드는 데 더욱 일조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요. 그게 가장 간단해 보이지만 가장 어려운 일일 겁니다.

쓰신 책 <음악으로 자유로워지다>에서 초등학교 때 피아노 레슨을 받던 일화를 읽었어요. 당시 음악 선생님이 생활 도구를 사용하는 창작 악기 연주 분야에서 활약하신 분이었다고요. <코다>에도 소리를 채집하는 장면이 나오고, 인스타그램 피드에서도 늘 어떤 소리가 들립니다. 세상의 모든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분이 가장 애정을 갖고 있는 소리는 무엇일까요? 좋아하는 소리가 많지만, 하나만 꼽으라면 역시 빗소리겠죠. 세상에는 정말이지 너무 많은 소리가 넘쳐요. 극단적으로 얘기하면, 인간이 만든 음악이 없어도 주변에 존재하는 소리만 즐기면서도 살 수 있고,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좋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정말 그렇게 된다면 내 직업이 없어져버릴 테니 좀 곤란할 테고, 자연의 소리로만 온전히 만족했다면 음악을 하지 않았겠지만요. 전 음악을 듣는다는 것만큼이나 주변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산다는 게 매우 즐겁습니다. 놀라거나, 기분이 좋아지거나, 긴장이 풀리거나, 내 일상에 영향을 끼치는 모든 소리가 그저 좋습니다.

최근 음악이 아닌 어떤 일에서 큰 즐거움을 느끼셨습니까? 솔직히 말씀드릴게요. 웃지 마세요. 드라마 <사랑의 불시착>을 재미있게 봤어요(웃음). 북한 사람들이 친근하다 못해 좋아질 정도였죠. <말모이>도 감동적인 영화였고, <벌새>도 매우 좋았어요. 저작권 문제로 못 본 <경주>(2013)도 많이 기대하고 있어요. 해외에서 한국 영화와 드라마를 보기가 쉽지만은 않지만, 부지런히 챙겨 보고 있어요. 막 개봉한 영화를 빨리 보고 싶어서 한국에 가고 싶을 정도입니다만, 자막이 없어서…. 조금씩 한국어를 공부하고 있어요.

한국 영화음악도 종종 맡아온 데다, 피에르 파올로 파졸리니, 프랑수아 트뤼포, 장 뤽 고다르, 페데리코 펠리니, 오시마 나기사 등을 신봉한 영화광답습니다. 얼마 전에는 <마지막 황제>의 수록곡 ‘Rain’을 딸과 함께 들었어요. 그녀가 그러더군요. 소나기 오는 날에도, 쨍하게 맑은 날에도 잘 어울린다고요. 삶의 비애와 환희가 공존함을 느낀 건 처음 듣는 그녀나, 수만 번 들은 저나 마찬가지였어요. 대신 감사 인사를 전해주세요(웃음). 그 당시 영화 <마지막 황제>를 위한 곡을 도쿄에서 만들어 런던으로 날아가서는, 영화감독 이하 스태프들과 함께 들으며 점검하는 시간을 마련했어요. 총 45곡을 순서대로 들었는데, 푸이의 두 번째 왕비가 견딜 수 없다고 뛰쳐나가는 장면에서 ‘Rain’이 시작되자마자 이탈리아 스태프들이 서로 껴안더니 “벨리시모, 벨리시모(Bellissimo, bellissimo)!” 하는 거예요. 사실 많이 놀랐어요. 지금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지?(웃음) 이들의 극적인 반응에 나 역시 잊지 못할 일체감을 느꼈죠. 방금 말씀을 들으니, 그때의 감동이 떠오르네요.

만약 미지의 관객에게 본인을 소개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1990년부터 뉴욕에서 사는 동안 꾸준히 콘서트를 열어왔어요. 일본인뿐 아니라 온 아시아 관객들이 와주시는데, 그분들로부터 늘 응원받는 기분입니다. 오래전 솔로 앨범 중 ‘The End of Asia’라는 곡을 쓰기도 했죠. 그러니 ‘세계에서 활동하는 성공한 아시아인 음악가’라 소개해주시면 어떨까요?(웃음) 사실 미국이나 유럽에서의 인터뷰에서 일본인 또는 일본 음악을 하는 누구라는 얘기를 들을 때마다 화가 났어요. 일본인이라는 점은 변함없지만, 전 어디까지나 사카모토라는 개인이고, 일본 음악이 아니라 사카모토의 음악을 하는 거라고 지겹도록 항변해왔어요. 이젠 더 이상 화를 내지는 않습니다만 항상 스스로를 일본인이라기보다는 아시아인이라 여기고 있습니다.

활동 40주년이 되는 특별한 해를 보낸 후 2019년과 올해 새로 생긴 목표 같은 게 있습니까? 지난해는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정신이 없었어요. 전 세계 여러 작업을 동시에 진행하다 보니 체력 소모도 많았죠. 목표 같은 걸 세우지 않는 편인데 몸이 힘들다 보니 프로젝트 사이 최소 하루, 사흘이면 더 좋고, 어쨌든 반드시 쉬자고 결심하게 되더군요. ‘온’과 ‘오프’의 구분을 갖자는 게 올해 목표였어요. 물론 이미 무너지고 있습니다만(웃음). 하긴 이젠 나이도 있고, 발맞춰 걸을 때도 되었어요. 30대엔 말처럼 기운차게 달린다는 얘기를 들었거든요(웃음). 함께 작업한 동료들이 다 쓰러져 입원해도 전 멀쩡했어요.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지…. 어머니께 감사하고 있습니다(웃음).

한결같이 미래로 진격해온 음악가에게 과거를 되돌아보는 건 쉽지 않은 일일 거예요. 그럼에도 숱한 우연과 필연을 곱씹어볼 때가 있지 않을까요. 중요한 ‘예술적 변곡점’이 언제였다 보십니까? 돌이켜보면, 오시마 나기사 감독님의 <전장의 크리스마스>가 제 인생에서 갖는 의미가 큰 것 같아요. 첫 영화 출연작이자, 첫 영화음악 작업이었죠. 어릴 때부터 영화를 매우 좋아하는 관객의 입장이었지만, 그때에야 비로소 영화를 함께 만드는 입장이 되어봤습니다. 영화음악 외에도 다양한 활동을 하게 된 출발점이자 변곡점이 된 작품이라 생각해요.

당시 배우로 섭외를 제안한 감독에게 영화음악 작업까지 맡겨주면 출연하겠다고 배짱을 부렸다는 일화는 꽤 유명하죠(웃음). 그렇다면 1970~1980년대 전자음악을 하고 영화에 출연하던 사카모토와 2017년 빗소리를 수집하는 사카모토는 각자 어떤 챕터를 쓰고 있을까요? 공교롭게도 1980년대부터 2010년대까지, 10년마다 챕터가 변화해왔어요. 그간의 변화가 진화라면 더욱 좋겠죠. 27세 즈음 솔로 앨범을 만들었는데, 만약 현재 앨범과 별반 차이가 없다면 지난 40년은 대체 무슨 의미였나 싶을 테니까요. 27세에 만들었던 그 음악을 지금은 만들 수 없어요. 마찬가지로 그때의 나는 현재 같은 음악을 만들 수 없을 거예요. 경험과 나이에 적합한 음악을 만들고 있다는 의미에서, 저마다 의미를 가진 챕터를 쓰고 있다는 말이 맞겠네요.

연륜 있는 예술가일수록 본질에 집중하고자 한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특히 소리에 몰두하는 당신의 모습을 보며 우리가 흔히 음악이라고 여기는 대상의 개념을 확장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감사합니다. 맞아요. 예컨대 베르사유 궁전이라는 기하학적이고, 인공적이며, 직선적인 건축물 앞에서 인간은 아름다움을 느낍니다. 반면 일본이나 한국의 시골에서 아무도 살지 않는 낡은 절을 보았을 때도 와비사비, 즉 불완전함의 미학을 느끼죠. 완벽하지 않은 것들을 귀하게 여기는 삶의 방식을 존중하고 싶어요. 저도 이 나이가 되어서야, 경주의 오래된 신라시대 벽이나 돌담 길을 보면서도 절실한 아름다움을 느꼈어요. 그러면서 음악을 대하는 마음도 서서히 변화해왔지요. 앞으로 10년, 20년 후에는 세상의 또 다른 면이 보일 테고 내가 만드는 음악도 달라지지 않을까요.

넷플릭스의 <블랙 미러>, 영화 <미나마타>, 루카 구아다니노가 연출한 발렌티노의 패션 필름 <The Staggering Girl> 등 작업의 성격이 천양지차입니다. 선택할 때 어떤 기준이 있으신가요? 아마 개런티겠죠? 당연히, 농담입니다(웃음). 특히 포토저널리스트인 유진 스미스(조니 뎁 분)가 미나마타시를 취재하며 겪은 일을 다루는 <미나마타>의 경우 내용에 깊은 공감을 느꼈어요. 프로젝트 자체에 공감하지 못하면 완벽한 작업을 하기가 힘들어요. 전 100% 직업적 영화음악가 혹은 작곡가가 아니니까요. 제가 만드는 음악 자체가 본업이자 전부인 데다, 특히 엄연히 감독이 존재하는 영화의 음악 작업이니 더더욱 그렇겠죠. 또 다른 기준이라면, 재능 있는 사람과 협업하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나이, 국적에 상관없이 각 분야의 창작자들로부터 좋은 자극을 받고 싶다는 열망이 작업을 선택하는 강한 원동력이 됩니다.

<레버넌트: 죽음에서 돌아온 자>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겠어요. 소리라 해도 좋을 음악이 감독과 배우가 미처 표현하지 못한 본질적인 지점을 섬세히 자극했죠.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O.S.T. 역시 자주 듣고 있습니다. 영화음악이란 수동적인 작업인 동시에, 영상과 음악의 절묘한 긴장감의 비율을 찾아내야 한다는 점에서 매력 있는 분야죠. 좋은 영화음악이란 무엇이라 생각하시나요? 정말 어려운 문제예요. 마지막 영화 작업을 하는 날까지 풀리지 않는 문제겠죠. 저도 젊었을 땐 못지않게 자기중심적이었고, 내 음악만 돋보이면 된다고 생각했어요. 내 의도와 달리 음악이 편집되기라도 하면 큰 충격을 받았죠(웃음). 하지만 영화음악 작업의 특성을 통해 제 작업의 또 다른 지점을 발견할 수 있었어요. 옛날부터 저는 제약이나 조건이 있는 편이 일할 때 오히려 좋더군요. 지금은 누가 뭐라 해도 영화가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게 옳다 봐요. 내 음악이 작품에 공헌했으면 하고요. 지금도 영화음악 작업을 할 때마다 내 음악이 영화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주의하자고 스스로 결심합니다.

“영화적으로 생각하려고 한다”고 하면서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폴라로이드 사진집을 보는 장면이 <코다>에 나옵니다. 음악가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 행위인지 궁금하더군요. 보통의 음악은 정해진 템포, 멜로디, 형식을 갖고 있어요. 독자적 템포에 영향을 받아 느닷없이 변하지는 않는 거죠. 마찬가지로 영상에도 나름의 템포가 있어요. 하지만 영상의 템포는 음악과는 달리 늘 같은 속도를 유지하지는 않아요. 갑자기 빨라지거나, 멈추거나, 그렇게 변화무쌍한 영상에 변하지 않는 음악을 붙이면 잘 맞지 않을 때가 많아요. 그래서 어디까지나 영화만의 템포를 존중해야 한다는 게 나의 생각입니다. 반대로 음악이 가진 법칙을 그대로 영화에 적용할 수 없을 때도 많아요. 음악은 참 이기적이에요. 강한 에고를 가지고 있죠. 이 에고가 영화에서는 가끔 장애가 될 수 있어요. 영화가 음악의 강한 에고를 잘 활용하기란, 경험상 쉬운 일이 아니더군요.

책에 “어떤 감정을 바탕으로 음악을 표현한다 해도, 음악으로 만들어지는 그 시점부터 이 세계의 것이 되어버린다”고 쓰면서, 음악의 소통 가능성 이면의 한계라 하셨죠. 그렇다면 공연은 어떤가요. <에이싱크>를 보며 공연이라는 특정 시공간의 사건에 대해 다른 차원의 해석이라고 여겼습니다. 앨범 <에이싱크>는 제 음악 인생의 거대한 변화의 출발점이라 할 만해요. 지금껏 만들어온 앨범과 매우 달랐는데, 실제 작업할 때 소셜 미디어도 일절 가까이하지 않았으니 마음가짐부터 다르지 않았나 싶어요. 더욱이 다큐멘터리 속 공연은 앨범의 변화를 상징적으로 집약해 공표하는 자리죠. 이미 전제하는 음악을 순서대로 연주하며 재현하는 기존 공연과는 달리, <에이싱크>는 인스톨레이션과 퍼포먼스가 합쳐진 공연이었어요. 예술적 형태의 인스톨레이션을 퍼포먼스라는 음악적인 면과 결합한 공연 말이죠. 언젠가 <에이싱크>를 더욱 확대, 발전시켜 저 이외의 다른 퍼포머들도 등장하는 일종의 시어터 피스, 즉 무대 작품을 만드는 게 저의 궁극적 목표입니다.

투병 생활도 어떤 계기가 되지 않았을까 합니다. 앨범 제작을 준비하다 암 진단을 받은 후 당시 스케치를 모두 폐기하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셨죠. 그 시기가 음악을 대하는 마음을 변화시켰습니까? 사실 <에이싱크>에 지대한 영향을 준 작품이 바로 영화 <레버넌트>였어요. ‘소리를 쌓는 느낌’으로 음악을 작곡했죠. 투병 중이었기 때문에 더 어렵고 고된 작업이었지만, 그를 통해 좋은 자극을 많이 얻었습니다. 그런 시도가 <에이싱크>로 연결되었어요. 투병이 미친 영향도 물론 있어요. 20대에 일을 시작한 이래 그렇게 오랫동안, 그러니까 10개월 정도, 아무런 일도 하지 않은 건 처음이었어요. 말씀드렸듯, 3일을 쉰 적도 없었으니까요. 그동안 다른 방법으로 시간을 보냈는데, 이것이 변화의 중요한 원인이 되지 않았을까 짐작합니다.

서울 피크닉 전시에서 선보인 ‘워터 스테이트1’은 미디어 아티스트 다카타니 시로와 협업한 작품이지만, 어쩐지 이우환 작가에 대한 오마주처럼 보였어요. 미술 작품, 특히 그의 작업에서 어떤 특별한 영감을 받습니까? 이우환 선생님은 18세 때부터 제게 동경의 대상이었어요. 미술 운동 ‘모노하’ 때부터 그의 미술적 활약을 좇아왔죠. 몇 년 전 직접 뵐 수 있었고, 2019년 프랑스 메츠에서의 개인전에 맞춰 음악 작업을 의뢰하셨어요. 아마 선생님도 개인전에 음악을 직접 도입한 시도는 처음이지 않았을까 싶어요. 오리지널 음악이라기보다는 작품을 방해하지 않는 1시간 분량의 어떤 소리를 만들어 전시장에서 내보내는 작업이었어요. 백남준 선생님도 굉장히 존경했어요. 30대에 만난 이후 ‘A Tribute to N.J.P.’라는 곡을 헌정했고, 돌아가실 때까지 활발히 교류했습니다. 기쁘게도 한국 출신의 위대한 예술가들과 교류할 수 있는 순간이 많았어요. 제가 복이 많은 사람인 것 같습니다.

재난 지역 쉼터에서 열렸던 공연 장면을 보고, 완전히 다른 차원의 공연을 상상하게 됐어요. 예컨대 데이비드 보위는 베를린 장벽에서, 요요마는 멕시코 국경에서 역사적인 공연을 선보인 바 있어요. 그래서 현재 가장 거대한 분단 지역이자 생태의 보고인 DMZ에서 공연을 하시면 어떨까 했습니다만. 그러잖아도 지난해 최재은 작가가 하라 미술관에서 DMZ 관련 전시를 열었을 때, 서로 의견을 나누었어요. 저도 어떻게든 참여하고 싶으니 협업하자고 말이죠. DMZ는 오랫동안 일반인들의 발길이 끊기면서 역설적으로 생태계가 가장 잘 보호된 지역이 되어버렸어요. 게다가 박찬욱 감독님의 <공동경비구역 JSA>도 참 좋아합니다. DMZ는 애착이라고나 할까요, 개인적으로 마음이 끌리는 곳이에요. 분단의 상징이자 인류 역사적 함의를 띤 이 장소가, 인간의 비극적인 역사와 풍부한 자연이 공존하는 이곳이, 통일 후에도 지켜질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철학, 과학 개념 등 세상 이치를 음악 재료로 삼고 있습니다. <에이싱크>도 비동시성, 소수, 혼돈, 양자물리학 같은 아이디어로 구성되어 있죠. 이것이 삶 전체에는 궁극적으로 어떤 영향을 줍니까? 가끔 지구도, 태양계도, 우주를 구성하는 모두가 저마다의 궤적을 돌고 있다는 생각을 해요. 마찬가지로 우리 몸속 DNA도 나선형으로 회전하고 있죠. 우리 주변에는 회전하는 것이 굉장히 많고, 이것이 자연스럽게 느껴져요. 원운동이 자연의 섭리가 아닐까 싶은 거죠. 어쩌면 인간만이 인위적으로 직선을 긋는 존재인 것 같아요. 자연 속에서는 직선이 존재하지 않잖아요. 저 역시 인간 중심의 직선적인 음악이 아니라 원적인 자연에 맞는, 순리에 맞는 음악을 만들고 싶습니다.

언젠가 그가 밝힌, 고(故)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음악을 작곡하고 싶다는 실현 불가능한 희망이 떠올랐기 때문에 나도 이런 질문을 마지막으로 건넸다. “당신의 판타지는 무엇입니까?” 각종 음악 이론과 철학, 동서양 미학과 사회·정치 현안 등을 섭렵해온 이 불세출의 예술가는 한 시대를 관통하고 지구를 몇 바퀴 돌아서 제자리로 왔다. 가장 좋아하는 문장이라는 ‘레스 이즈 모어’를 실천하듯, 소리의 본질로 한없이 수렴하는 음악은 새로운 방식의 소통법을 제안한다. 그런 그는 과연 어떤 직업적 욕심 혹은 인간적 바람을 가지고 있을까. 그는 한참 웃으면서도 진지하게 고민했다.

“옛날엔 다시 태어난다면 돌고래가 되고 싶었어요. 어릴 때부터 아름답고 지적인 그들이 온 바다를 자유롭게 유영하는 모습이 참 좋았거든요. 하지만 한 20년 전부터는 이런 생각을 합니다. 우리 주변의 살아 있는 나무나 풀이 내 육신에 스며들고, 그렇게 몇만 광년 멀리 떨어져 존재하는 태양계의 다른 행성에서 살고 있는 나무 혹은 풀과 교류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이죠. 이게 저의 판타지라 하면, 내 머리가 이상하다고들 할까요?(웃음) 아, 하나 더 있어요. 오늘의 이 인터뷰를 한국말로 직접 해내는 거예요. 한국어 공부에 더욱 매진하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