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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타살

2023.02.20

by VOGUE

    사회적 타살

    모든 자살은 사회적 타살이며 사회와의 관계 아래서 일어난다. 그 ‘사회적’에 나는 어떤 방식으로든 동참하고 있지 않은가.

    오예람 작가의 ‘작은 생존’. 어항 밖에서는 살 수 없는 금붕어(약자)와 그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을 담았다.

    자살인가, 사회적 타살인가 “자살 공화국”, “자살률 OECD 1위”, “노인 자살률 세계 최고”… 뉴스에 심심치 않게 등장하는 단어들이다. 나도 이런 어두운 이야기를 쓰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어쩌랴. 눈을 돌리거나 감는다고 해서 사실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니 말이다. 차라리 문제를 정면으로 응시함으로써 이 문제에 얽힌 수많은 오해, 낭설, 착시를 바로잡는 게 나을 듯하다.

    한국의 자살률은 흔히 생각하듯 우울증 같은 심리적 원인과는 크게 관계가 없다. 뉴스 매체를 떠들썩하게 만들곤 하는 연예인 자살 때문에 착시가 있지만 그런 원인은 일부에 불과하다. 자살률은 65세 이상, 75세 이상의 노년층으로 올라갈수록 급격하게 증가하고, 그 이유도 대부분은 생활고, 신체 질환으로 인한 비관이 차지한다. 노인 복지가 점차 확대되고 있다지만, 아직도 이분들을 위한 사회 안전망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다는 방증이다.

    우리 사회의 자살은 우울증 같은 개인적 이유보다 사회적 이유가 더 크게 작용하여 일어난다. “모든 자살은 사회적 타살”이며 사회와의 관계 아래서 일어난다는 에밀 뒤르켐의 주장을 새삼 기억하지 않을 수 없다. 근대 사회학의 시조 격인 뒤르켐은 <자살론>(1897)에서 자살의 유형을 네 가지로 나눴다. 은둔형 외톨이나 왕따처럼 사회 통합력이 너무 약해서 개인적 고립이 심화되었을 때 일어나는 이기적 자살, 반대로 사회 통합력이 너무 강한 나머지 개인이 사회를 위해 희생하는 이타적 자살, 사회규범이 통째로 흔들려서 개인 가치관이 무너질 때 발생하는 아노미적 자살, 전쟁 포로나 장기 수감자처럼 너무 강한 사회 규율 아래서 극한의 구속감 때문에 발생하는 숙명적 자살이다. 물론 이런 분석은 막스 베버의 용어대로 ‘이념형(Ideal Type)’에 가깝고, 현실은 그 몇 가지가 혼재되어 나타난다는 게 진실일 것이다. 중요한 것은, 겉으로는 아무리 개인적 이유로 인한 자살로 보일지언정 그런 선택에는 언제나 본인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회적 이유가 작용한다는 점일 것이다.

    자살이 사회적 성격을 갖는다는 것은 이른바 ‘모방 자살’이라는 현상에서도 알 수 있다. 유명인이 자살할 때마다 나타나는 자살 급증 현상 때문에 언론에는 자살에 대한 보도 기준까지 마련해놓았다. 자살을 주요 사건으로 다루지 않고, 자살을 암시하는 표현 대신 사망이라는 중립적 표현을 사용하며, 자살의 동기를 함부로 추측하거나 단순화해서 다루지 않는다는 등의 기준이다. 우스운 것은 그렇게 하여 등장한 말이 ‘극단적 선택’ 같은 표현이다. 극단적 선택이라니, 그 개인에게 과연 다른 선택이 가능했고, 나아가 그 선택이 오로지 개인의 자의에 의한 것이었으며, 극단적 방안을 택한 그 사람의 잘못이라는 얘기인가? 자살의 탓을 개인에게 온전히 돌리는 그 어떤 시각도 우리는 의심해야 한다.

    어느 경비원의 죽음 자살은 오늘도 끊이지 않는다. 악플에 시달리던 연예인들이 연이어 죽었고, 서울 강북구의 어느 경비원이 투신했으며, 정의기억연대의 위안부 할머니 쉼터를 지키던 활동가가 죽었다. 누구의 목숨인들 귀하지 않을까마는 많은 사람을 안타깝게 한 죽음들이다. 특히 강북구 경비원의 죽음은 그 자체로 ‘사회적 타살’을 입증하는 증거 같아서 더욱 분하고 슬프다.

    전직 경비원으로서 <임계장 이야기>를 쓴 조정진 씨는 이 문제를 ‘갑질’로 치부하고 넘기지 말라고 호소한다. 인격이 쓰레기 수준인 한 아파트 입주자의 ‘갑질’로 사건의 원인을 규정하는 즉시 가해자는 우연히 돌출된 인물이 되고, 그 가해자를 처벌하거나 병증을 치료하는 것만이 관심사가 되며, 사건의 진짜 원인은 연기처럼 사라지고 만다는 얘기였다.

    갑질을 일삼은 가해자와 죽은 경비원 뒤의 어둔 그늘에는 아파트 관리소장, 용역 파견 업체, 입주자 대표 등이 몸을 숨기고 “우리는 결백하다”고 중얼거리고 있을 것이며, 또 그들 뒤에는 분리수거가 엉망이라고, 화단이 지저분하다고, 눈을 아직 안 치웠다고 투덜거리는 숱한 입주민이 앉아 있을 것이다. 모든 자살이 사회적 타살이라면, 그 ‘사회적’이란 말에 누가 속해 있는지 우리는 정말로 곰곰이 짚어봐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말한다. “우리 아파트는 그런 일이 없는데 말이죠.” “요즘 경비원들은 무거운 짐 보고도 안 들어주는데 어찌 그런 일이…” 경비원을 죽게 한 갑질 가해자는 모두들 알고 있지만 이들 ‘선량한’ 가해자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아니다, 이들이 무슨 잘못이란 말인가. 우리는 ‘임계장’(임시 계약직 노인장)이 즐비한 이 사회에서 여태껏 이들의 역할과 신분과 처우에 대해 아무런 관심도 가지지 않은 중산층의 국회, 정부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그들 귀에는 아마도 한 경비원의 억울한 호소보다는 발언대와 ‘표’를 가진 아파트 입주자들의 목소리만 들릴 것이다.

    아파트 입주자들은 또한 이 사회의 경제와 생산을 지탱하는 소비자 군단이기도 하다.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은 <쓰레기가 되는 삶들>에서 소비자 사회의 작동 원리에 대해 핵심을 짚는다. 이 사회의 문제는 소비자가 끊임없이 쓰레기를 양산하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생산과 소비가 사회의 핵심 기능이 되면, 거기서 아무런 역할도 담당하지 못하는 사람은 과잉, 잉여, 초과된 인구로 취급받는다. “쓰레기 수거는 그 자신 폐기될 인간들, 소비주의 세계의 바깥에 사는 사람들에게 맡겨진다.” 왜 아파트 경비원들이 본래 임무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분리수거와 쓰레기 처리에 동원되는지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다.

    우리의 존엄과 정체성을 위해서라도 갑질 가해자와 죽은 경비원의 갈등은 더 복잡해지고 다원화된 이 사회의 얼굴을 보여주기도 한다. 최근의 사회학과 정치학에서는 사회 모순의 주 요인이 계급 갈등에 있는지, 정체성 문제에 있는지를 둘러싼 논쟁이 한창이다. 전통적 사회 이론에서는 계급과 분배를 사회문제의 핵심으로 봤다면, 새로운 사회 이론에서는 그에 못지않게 개인의 성적, 인종적, 종교적 정체성을 중시한다. 경제적 관점만으론 사회적 ‘인정’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것이다.

    확실히 강북구 경비원의 죽음은 경제적 지위라는 데서만 이유를 찾을 수는 없을 것이다. 거기에는 언제든지 쓰고 버릴 수 있는 일회용품처럼 다뤄지는 신분, 수시로 반말 짓거리를 들어야 하는 모욕감, 상처받은 자존감이 얽혀 있을 것이다. 그런 모욕감은 성 소수자라는 이유로, 신체가 온전치 못한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시커먼 이주 노동자라는 이유로 차별을 감내해야 하는 사람들의 모욕감과도 통할 것이다.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를 내건 인천공항의 시책에 대해 오히려 기존 정규직이 ‘무임승차’라는 논리를 내세워 반대했던 일을 기억할 것이다. 시험 통과라는 알량한 능력 하나를 공정의 잣대로 내세워 차별을 정당화하는 심리는 누구에게나 숨어 있다. 인정의 문제는 현실에서는 언제나 능력주의의 외피를 쓰고 출현하는 것이다.

    아우슈비츠의 생존자 장 아메리는 <자유 죽음>이라는 책을 쓰고 스스로 죽음을 택한 인물이다. <이것이 인간인가>라는 책을 쓴 프리모 레비와 함께 그는 극한의 비인간적 상황에서 인간의 존엄을 추구한 대표적 인물로 꼽힌다. <자유 죽음>에서 그는 인간 존엄을 지키는 최후 수단으로 자살을 옹호한다. 그의 논지를 찬성할 수는 없지만, 인간이란 존엄을 위해 삶보다 죽음을 택할 수도 있는 존재라는 데 공감하지 않을 수 없다. 장 아메리는 인간의 절대 자유를 증명하듯 자신의 죽음을 타인에 맡기지 않고 스스로 결정한다.

    모든 자살 앞에서는 입을 다물어야 한다. 나는 그런 죽음을 택하지도 권하지도 않겠지만, 그 길을 택한 사람을 함부로 비난하거나 동정하거나 안타까워하지도 않으련다. 그러면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내가 해야 할 일은 ‘사회적 타살’이라는 말의 그 ‘사회적’에 내가 어떤 방식으로든 동참하고 있지 않은지, 그 문제에 대해 어떤 항의라도 해보았는지 돌이켜보는 일일 것이다. 그래야 할 이유는 한 가지다. 내가 무관심하면 남들도 나의 죽음에 무관심할 테니까.

      피처 에디터
      김나랑
      글쓴이
      안희곤(사월의책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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