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곡 ‘OHIO’로 돌아온 크러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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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곡 ‘OHIO’로 돌아온 크러쉬

2020-07-23T18:30:36+00:00 2020.07.23|

세상에 착불로 도착한 우리에게 크러쉬의 노래는 부채를 탕감해줬다. 신곡 ‘OHIO’도 코로나 우울에 젖은 우리를 햇빛 냄새로 말린다.

지난해 12월, 이태원 공연장에서 열린 크러쉬 음감회에 갔다. 정규 2집 <From Midnight to Sunrise>를 가수와 함께 듣고 곡의 의도를 얘기하는 자리다. 아직 정규 2집? 그가 자리 잡은 지 꽤 되지 않았나? 나는 2015년 5월, 크러쉬가 자이언티와 발매한 ‘그냥(Just)’의 히트로 인터뷰했고, 크러쉬 명곡 모음집을 플레이한 적도 있다. 그 안에는 우리 엄마도 아는 노래 ‘Beautiful’(<도깨비> OST)도 있다. 심지어 그가 이촌 한강공원에서 31 대 1의 경쟁률을 뚫고 ‘2016 멍때리기 대회’에서 우승해 화제였던 기억도 난다. 데뷔도 2012년이니 꽤 늦은 정규 2집이었다. 1집 <Crush On You> 이후 5년 6개월 만이다.

집중 작업한 기간만 3년, 12곡 모두 크러쉬가 작사·작곡에 이름을 올렸다. 음감회에서 핀 조명을 받고 곡을 설명하는 크러쉬는 나에게 “번 돈으로 생로랑 재킷을 사고 싶다”던 스물넷이 아니었다. “당시 스스로 굉장히 ‘딥’한 상태였고, 그만큼 정규 2집은 타협점이 없는 음악으로 채웠어요. 음악의 정체성을 확실하게 보여주고 싶었어요.” ‘선셋’부터 ‘선라이즈’까지 시간순으로 이뤄진 트랙 구성은, 순서대로 플레이해 창작자의 의도를 따라갔던, 일종의 앨범에 예의를 갖추던 시절을 소환했다. 그렇게 마지막 트랙이 끝나면 권대웅 시인의 말을 빌려 “겨울밤 하늘에 보이지 않는 소 한 마리가 달을 끌고 가는 기분”이었다. 크러쉬가 앞으로 보여줄 음악이 얼마만큼 무거워질지 궁금했다.

그러나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처럼 후에 내놓은 싱글 앨범 ‘Homemade 1’은 예상과 달랐다. 레드벨벳의 조이가 피처링한 수록곡 ‘자나깨나’ 뮤직비디오는 가정용 홈 레코더 같은 화면에서 부은 얼굴의 크러쉬가 식탁보를 뒤집어쓴 유령과 몸싸움을 벌이는 B급 정서다. 곡 설명도 이렇다. “놀랍도록 힘 나는 자나 깨나 박수! 기분이 울적하고 몸이 무거울 땐 주위 사람들과 함께 박수를 쳐보세요. 간단해 보이지만, 활력이 돌고 웃음이 나며 즐거운 분위기를 순식간에 만들 수 있답니다.” 크러쉬는 ‘홈메이드 시리즈’를 이어갈 거라 말했다.

이번에 크러쉬가 <보그>를 통해 소개하는 신보 ‘OHIO’ 역시 ‘퍼커시브한’ 인트로부터 드라이빙 뮤직 같다. “맞아요! 팍 터지는 클라이맥스보다 리듬과 에너지가 끊이지 않아 드라이브할 때 어울리죠.” 정규 2집의 심연을 이어갈 줄 알았는데 몇 달 사이에 음악 스타일이 달라진 이유를 물었다. 요즘 누가 하나의 스타일만 고집하겠는가마는, 겨울의 크러쉬는 그의 표현대로 굉장히 ‘딥’해 보였기 때문이다. “욕심일 수 있지만 음악적 행보가 다양했으면 좋겠어요. 그때의 내가 하고 싶은 것, 생각하는 것, 느끼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요. 여러 색깔을 내야 듣는 사람도 재미있고.”

크러쉬가 홈메이드 시리즈를 시작한 이유는 코로나19 여파다. 요즘 누가 그로부터 자유롭겠나. “1,000% 관련 있죠. 코로나 때 집에서 작업만 했어요. 다른 포장지를 붙이기보다 집에서 느낀 감정을 곡으로 만들었죠.” 8년 만에 처음으로 공연 없이 길게 쉬었지만 크러쉬나 우리나 코로나발 스트레스에 시달린다. “공연이 정말 하고 싶어요. 관객에게 받는 에너지로 동기를 얻거든요. 요즘에는 어떠한 자극이 없어서 우선 가사 쓰기가 어려워요. 이번 ‘OHIO’의 작사는 타블로 형이 많이 도와줬어요.”

‘OHIO’는 뜻이 있기보다 의성어에 가깝다. 곡에서 인상적인 가사는 “요즘 가사 누가 봐”. 언젠가 만난 어느 뮤지션이 이런 얘기를 했다. 요즘은 가사보다 ‘필’이 중요하다고. 훅만 살고 가사는 위기인가? “음악을 ‘보는’ 시대잖아요. 가사를 듣기보다 이미지를 느끼는 시대 같아요. 물론 ‘OHIO’처럼 쉬워 보이는 가사 쓰기가 더 힘들어요.”

노래 자체를 듣기보다 노래가 주는 이미지에 반하는 시대. 챌린지도 그 방편 중 하나다. 특히 밈 문화(Meme, 온라인에서 공유하는 파급력 있는 사진, 그림, 영상, 유행어 등)가 장악한 요즘, 챌린지는 흥행의 초고속 지름길이다. 우리에겐 지코의 ‘아무노래’가 그랬고, 미국 신예 릴 나스 엑스의 ‘Old Town Road’는 19주째 빌보드 핫 100 정상을 차지했는데, 카우보이 모자를 쓴 그의 틱톡 챌린지가 큰 몫을 했다. 스스로 “틱톡이 내 인생을 바꿨다”고 인터뷰할 정도다. 드레이크의 ‘Toosie Slide’는 틱톡을 겨냥한 음악이다. 크러쉬 역시 ‘자나깨나’에 맞춰 틱톡에 챌린지를 진행했다. 크러쉬가 요술 피리(리코더)를 불면 문제가 해결되는 15초 영상들이다. 화장실에 휴지가 없을 때, 등산 가려는데 비가 올 때 크러쉬가 요술 피리를 꺼낸다.

이번 ‘OHIO’의 챌린지는 아직 정하지 않았다. “억지로 만들려고 하면 잘 안 되더라고요. 챌린지는 맞다 틀리다를 넘어 시대의 흐름 같아요. 시대에 발맞추는 것은 뮤지션으로서 숙명인데 거기에 목을 매는 것은 프라이드(자존심) 문제 같고요. 또 머물러 있자니 도태되는 것 같아서 고민이 많아요.” 그런 그에게 힌트를 준 것은 신중현의 어록이다. “’젊은 세대는 시대를 골라서 산다’는 말씀이 인상적이었어요. 음악의 포장지는 계속 달라지고 접근 방식은 더욱 다양해질 거예요.”

요즘 크러쉬가 선택한 시대는 1950~1960년대의 뉴욕.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에서 소설가 길(오웬 윌슨)이 밤거리를 배회하다 1920년대의 헤밍웨이와 피츠제럴드를 만난 것처럼, 크러쉬도 가능하다면 빌 에반스가 피아노를 연주했던 그 시절 뉴욕의 재즈 클럽 빌리지 뱅가드(Village Vanguard)와 버드랜드(Birdland) 등에 가보고 싶다. 나는 그렇다면 소설가 길이 거트루드 스타인에게 자기 작품을 평가받았듯, 자신의 노래를 전설들에게 들려주겠느냐고 무용한 질문을 던졌다. “물론이죠! 완전히 다른 장르라 놀라겠지만요!” 크러쉬는 3~4년 전 LP에 빠지면서부터 이들 시대에 매료됐다. 그는 네이버 나우의 오디오 쇼 <Crush네 Vinyl봉지>를 진행하고, 크루에게 턴테이블을 선물하는 ‘LP 요정’이다. “LP에서 느낀 감정을 동료와 공유하고 싶어요. LP를 디깅할 때는 음악도 음악이지만 그 시대의 문화를 흡수하려고 해요. 늘 크레딧을 살피고, 녹음실이 어딘지 찾고, 멤버들이 찍은 커버 사진을 보며 여기가 LA 녹음실이구나, 나도 가봤는데 하며 즐거워하죠.”

이러한 감성의 출발은 약재 수입업을 하면서 가수를 꿈꾸던 아버지로부터 출발했을 거다. 그의 집에선 늘 음악이 흘러나왔다. “지금도 기억나는 하루가 있어요. 유치원도 들어가기 전, 밤 8시쯤인가 아빠가 놀러 나가자고 하셨어요. 잠원동의 한 클럽, 압구정의 텍사스문이라는 라이브 카페 등을 돌았죠. 저는 오렌지 주스, 아버지는 약주를 드시며 밴드의 노래를 듣고 따라 불렀어요. 아버지는 노래가 끝나면 ‘어때 아들, 잘한 거 같아?’라고 물어보셨죠.” 유튜브에는 아버지와 티격태격 피아노를 치며 공동 ‘작곡’을 하는 ‘부전자전’ 영상이 올라와 있다. 언젠가 아버지와 함께 곡을 발표하는 거 아닌가요? “아마도? 아빠가 저보다 재능이 훨씬 많으니까요.”

크러쉬에게 또 하나의 가족이라면 반려견 두유와 로즈. 크러쉬는 반려견의 SNS 계정을 따로 운영하고, 두유를 위한 노래 ‘우아해’를 만들고 종종 뮤직비디오에 함께 출연한다. 4월 28일에는 유기견 ‘로즈’를 입양했다. “한 달 동안 망설였어요. 두유를 키우면서 보호자로서 책임감을 많이 느꼈기에 로즈 입양이 더 신중했어요. 저뿐 아니라 새 친구를 받아들여야 하는 두유의 입장도 있고요. 이제 로즈는 운명이 됐죠. 로즈란 이름은 제게 오기 전부터 가졌던 거예요. 전자 피아노를 로즈라고도 하기에 왠지 뮤지션인 저와 더 운명적으로 느껴져요. 두 친구들을 생각해서 앞으로도 고층 아파트에는 살지 않겠어요.” 그는 오히려 두유와 로즈가 자신을 키운다고 덧붙인다. “이 친구들 덕분에 생명에 대한 책임감과 살아갈 동기를 얻고 어제보다 나은 인간으로 성장해가고 있어요.”

크러쉬와 헤어지기 전 유튜브에 올라온 2014년 영상 인터뷰를 꺼냈다. 아, 이제 한번 꺼낸 말은 발각되기 쉬운 시대다. 당시 그는 “어릴 때 이곳에 발을 디디면서 밑바닥을 많이 찍었다. 나처럼 그러지 말고 준비가 되면 시작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망언이군요, 망언! 그런 말을 함부로 하다니. 그때의 일은 그 이후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어요.” 크러쉬는 여전히 불면증이 있다. 치료하려고 했지만 쉽지 않다. 그에게 둘 중 하나를 선택해달라 했다. 우울감이나 불안감을 자양분으로 삼는 아티스트 혹은 무라카미 하루키처럼 규칙적인 창작 습관과 건강관리의 아티스트. “지금의 저는 완전히 전자입니다. 하지만 미래를 위해서는 후자가 되고 싶어요. 불가능해 보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