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릭 남의 24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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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릭 남의 24시

2020-07-25T11:19:19+00:00 2020.07.27|

에릭 남에게 장르, 국경, 매체 같은 경계는 무의미하다. 자신의 자리를 만들어온 에릭 남은 24시간 생동한다.

꽃무늬 셔츠는 에잇 바이 육스(8 By Yoox), 데님 반바지는 오디너리 피플(Ordinary People), 팔찌와 반지는 크롬하츠(Chrome Hearts), 로퍼는 레드미티어(RedMeteor).

사회적 거리 두기로 마음 한편이 헛헛한 나날이 이어지고 있다면 유튜브에서 ‘에릭 남(Eric Nam)’를 입력해보길. 맨 위에 뜨는 영상은 ‘Kimchi Jjigae’일 거다. “제 이름은 에릭 남입니다. 가수고요. 사람입니다.” 인사를 건넨 에릭 남은 전성기의 제이미 올리버보다 자연스럽게 손을 움직이며 13분에 걸쳐 김치찌개를 소개하고 만든다. 밥할 때는 손목까지 물 양을 맞추라든지, 김치 국물을 꼭 넣으라든지. 한국인만 아는 유익한 노하우를 알려주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정말이지 김치찌개가 지구에서 가장 만들기 쉬운 요리처럼 느껴진다.

시작일 뿐이다. 스크롤을 내리면 트러플 오일을 넣어서 달걀 요리를 하고, 스킨케어 비법을 알려주며, 손가락장갑을 낀 채 팬의 머리에 곱창 밴드로 스타일링을 하는 에릭 남을 볼 수 있다(해외 잡지와 함께 작업한 컨텐츠다). 물론 하이라이트는 빌리 아일리시 ‘Bad Guy’를 커버하는 라이브 영상이다. 다섯 걸음도 움직이지 않으면서 심연에서 끌어 올린 듯한 그루브를 타고 끈적한 공기를 머금은 음성으로 귀를 간질인다. 그는 정말이지 ‘나쁘다’. 영상을 볼 수 없다면? 팟캐스트가 있다. 최신 K-팝이 궁금하다면 ‘대박쇼’를, 토크쇼를 듣고 싶다면 ‘I Think You’re Dope’를 재생하면 된다. 더 유익한 시간을 보내고 싶다면 ‘닥터뮤지’를 재생하시라. 에릭 남이 팝송으로 영어를 교육한다. (‘에릭 쌤’은 강의 후기도 다 지켜보고 있다!) 퇴근길 BGM으로는 지난해에 발표한 영어 앨범 <Before We Begin>을 추천한다. 눈을 감고 들으면 브루클린 뒷골목 클럽이, LA 사막 한가운데 끝나지 않을 도로가 펼쳐진다. 에릭 남으로 시작해 에릭 남으로 마무리하는 하루. 요즘 나는 ‘Runaway’와 ‘Congratulations’를 들으며 운전하고 ‘How’m I Doing’을 들으며 잠을 잔다.

“하하. 사실 3월에 미국 투어 중이었는데, 마지막 날 코로나19로 공연이 취소됐어요.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이라 컨텐츠라도 만들면 좋겠다 싶어서 에어비앤비를 빌려 김치찌개를 만들어봤죠.” 영상은 세팅이 힘들다며 어려움을 토로했지만 이는 누구나 컨텐츠를 만들 수 있는 시대에 에릭 남이 어떻게 자신을 알리고 세상과 소통하는지 보여준다. 영상 옆에는 문자를 보낼 수 있는 번호도 적혀 있다. 그쪽으로 문자를 보내면 정말로 에릭 남이 답장을 보낸다! “시스템상 지금은 미국과 캐나다에만 오픈되어 있는데 언젠가는 전 세계에 되겠죠. 팬들과 소통을 위해 올려두었어요. ‘설마 답장이 오겠어?’ 하며 보내는데 진짜 받으면, 난리가 납니다(웃음). 개인적인 고민을 보내오기도 해요. 저도 그 고민을 통해 한 번 더 생각하고 배우는 점이 있어요.”

티셔츠는 벨루티(Berluti), 데님 바지는 C.P. 컴퍼니(C.P. Company), 스웨이드 부츠는 쥬세페 자노티(Giuseppe Zanotti), 목걸이와 팔찌, 반지는 크롬하츠(Chrome Hearts).

스스로 컨텐츠를 기획하고 만드는 시대에 에릭 남은 자유로워 보인다. 예능 프로그램에서 본 반듯하던 모습을 떠올리면 더 그렇다. “2013년부터 유튜브를 하고 싶었어요. 그때는 다들 안 된다고 했는데 지금은 안 하는 게 이상해졌죠. 방송국에 기대기보다 아티스트에게 힘이 실리는 것 같아 좋아요. 미래가 더 기대되고, 더 잘해야죠.” 이런 활발한 소통은 그를 궁금하게 한다. 실제로 팟캐스트는 해외에서 새로운 기회로 이어지고 있다. (대박쇼는 한국,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체코의 애플 팟캐스트 차트에서 1위!) 다른 팟캐스트에 초대되고 방송 섭외로 이어지고 영화나 드라마에서도 꾸준히 오디션 제안이 들어온다. 해외 잡지는 코로나19로 인해 직접 만날 수 없다면 장비를 보낼 테니 영상을 찍어 보내달라고도 한다. 국내외를 오가며 일하고 싶었던 그의 오랜 소망이 이루어지는 중이다. 그러니까 요즘 에릭 남에게 한반도는 작다.

김치찌개를 끓이고 난 후에도 투어는 재개되지 못했다. 에릭 남은 LA와 팜스프링스에 두 달쯤 머무르며 새 음반 작업하는 쪽을 택했다. “너무 답답했고 위로받고 싶었어요. 슬프고 짜증 나고 이 모든 상황을 탈피하고 싶은 생각만 들었죠. 그래서 결국 그런 노래를 만들었어요. 어찌 보면 솔직한 마음을 담은 곡이 공감이 될 거라 여겼어요.” 새 앨범에는 코로나19가 시작되기 전에 쓴 곡과 그 시기를 거치며 쓴 곡이 함께 수록된다. “둘만 있으면 무척 달콤하고 연애하고 싶다고 노래했다가, 함께 있지 못해 너무 아쉽지만 잘 지내고 있을 거라 믿는다고 노래하죠(웃음). 지금은 밝은 에너지가 필요해 앨범 전체 분위기는 긍정적이에요.” 모순적이게도 타이틀곡 제목은 ‘파라다이스’다. “우리가 꿈꿔왔던 파라다이스는 어디일까요. 가사도, 뮤직비디오도 현실과 비현실을 오갑니다.” 요즘 장르를 구분하는 일이 더 어렵듯 새 앨범도 마찬가지다. “하우스 EDM, 유로 EDM, 록 발라드 등 다양해요. 평소 제 공연이 업 & 다운이 심한데 공연에서의 기승전결도 염두에 뒀어요.”

평소 그는 갈란트, 마크 E. 배시, 팀발랜드 등 여러 뮤지션과 협업을 선호하며 시기적으로는 몰아서 작업하는 편이다. 이번 앨범 작사는 그룹 데이식스의 영케이가 다수를 맡았다. 작업 방식에 대해서도 얘기하자면 모두 화상회의 앱 줌을 통해 이루어졌다. “직접 어떤 분위기나 특정 감정을 바로바로 소통해야 노래가 잘 풀리는데, 화상으로 진행하니 꽤 어렵더라고요. 그러다가 익숙해졌고 또 새로운 소프트웨어가 나오면서 수월해졌죠.” 한국에 돌아온 뒤에는 2주간 자가 격리에 들어갔다. 쉽지 않은 시간이 이어졌다. “너무 힘들었어요. 밤낮이 없어지고 날짜 개념이 사라지는 데다 계속 우울했죠. 급기야 예능 프로그램을 보는데 막 눈물이 나는 거예요. <아메리칸 아이돌>을 보며 도대체 왜 울었죠? (웃음) <런닝맨> 출연자들이 얄밉고 부러웠고요.” 코로나19 시대를 영감 삼아 견딘 이 동시대적 앨범은 7월 30일에 발매된다.

재킷과 바지는 프라다(Prada), 부츠는 요위(Yowe), 목걸이는 크롬하츠(Chrome Hearts).

사실 음원 차트 톱 100을 스트리밍하는 우리는 에릭 남의 음악 세계를 잘 모른다. 그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없고 그의 노래가 드라마에서 가장 중요한 장면에 흘러나와도 그렇다. 오디션 프로그램으로 얼굴을 알리고 데뷔한 에릭 남은 달콤한 사랑 노래를 주로 발표했다. ‘국민 남친’ 같은 유행어가 음악의 정체성이 됐다. 진짜 색깔이 드러난 건 2018년 <Honestly(솔직히)> 앨범부터다. 언제부터 자유롭게 음악 작업을 했느냐는 질문에 그 앨범을 꼽았다. ‘솔직히’ 하고 싶었던 음악으로 채웠다. 가사는 날카로워졌고 일렉트로, 트로피컬 하우스, 소프트한 팝의 느낌이 드러났다. 에릭 남은 인정한다. “음악적으로 한국에서 잘 안된다고 하는데, 반대로 한국에서 음원 차트에 신경 쓰지 않으려고 해요. 신뢰가 가지 않거든요. 유통사 플랫폼에서 투자한 대로 밀어주는 분위기가 강하고 팬덤이 차트를 좌우하기도 하죠. 제가 잘할 수 있는 음악을 지속하면 언젠가 빛을 보지 않을까요. 한국에서 1위는 못하지만 감사하게도 외국에서 투어를 할 수 있잖아요. 지금까지 가장 다양한 도시에서 콘서트를 연 K-팝 아티스트가 저라고 들었어요. 규모가 아니라 도시 숫자요.” 실제로 지난 1월 대만을 시작으로 싱가포르, 자카르타, 방콕에 이어 샌디에이고, 뉴욕, 보스턴, 디트로이트, 시카고 등 20개가 넘는 도시를 돌았다. K-팝 아티스트 중에 최초로 투어 버스도 이용했다. 코로나19로 남미 투어가 중단되지 않았다면 50여 개 도시에서 공연했을지 모른다. 얼마 전 에릭 남은 미국 빌보드 ‘소셜 50’ 차트에 진입했다. 스트리밍은 물론 아티스트의 SNS 친구 및 팔로워와 페이지 방문자 수 등 소셜 데이터 정보를 혼합해 순위를 산정하는 차트다. SNS에 수시로 근황을 전하고 실제로 듣고 싶은 음악을 하며 무대를 끝내주게 즐기는 뮤지션. 스트리밍 숫자만으로는 담을 수 없는 에릭 남의 현재 위치는 정말이지 특별하고 특별하다.

이번 앨범에서 이루고 싶은 성취를 묻자 사실 크게 없다고 답했다. 음악 애호가들이 ‘진짜 멋있는 앨범이다’라고 해주면, 그 덕분에 계속 활동하는 것 같다고 말이다. 에릭 남의 시도를 맨 먼저 반기는 건 역시 동료 뮤지션이다. “다른 가수들한테 앨범 아주 좋다, 어떻게 한국에서 이런 음악을 내게 되었느냐는 얘기가 큰 칭찬으로 느껴져요. 대중적으로 맞닿지 않는 부분도 물론 있어요. 이번에도 타이틀곡을 에일리에게 들려줬는데 ‘매우 좋은데 어렵다’고 하더라고요. 늘 들었던 얘기라 이제 그런 반응이 나오지 않으면 서운할 정도예요(웃음).”

‘K-팝 솔로 가수’는 미개척 분야다. 우리도, 해외 팬들도 K-팝으로부터 칼군무를 선보이는 아이돌만 떠올린다. 트렌디한 팝을 부르고 음악을 ‘느끼는’ 댄스를 선보이며 무대에서 생수를 뿌리고 만담에 가까운 진행까지 해내는 에릭 남을 과연 어떤 상자에 넣어 분류해야 할까. “제 자리는 찾고 있는 듯해요. 외국에서는 BTS와 블랙핑크로 대표되는 K-팝에 대한 고정관념이 있어요. 해외 레이블에서는 저를 ‘K-팝인데 BTS처럼 크지 않다’고 소개해요. 당연하죠. 하지만 그걸 계속 깨려고 하죠. 영어를 잘하는 K-팝 뮤지션은 있지만 문화적으로는 제가 좀 더 통할 수 있어요. K-팝의 고정관념이 답답하고 아쉬울 때도 있지만, 인기와 관심을 받아들이면 새로운 기회가 생길 겁니다.”

지난해 5월 뉴욕 타임스 스퀘어와 필라델피아 중앙역 스크린에는 에릭 남 얼굴이 등장했다. 팬들의 물량 공세 광고가 아니었다. 음악 플랫폼 스포티파이(Spotify)에서 에릭 남을 아시안 아메리칸 대표 아티스트로 선정해 광고를 내보낸 것이다. 이런 기회는 사실 에릭 남 스스로 만든 것이다. 새 앨범이 나오면 스포티파이든 애플 뮤직이든 직접 찾아가 음반을 소개하고 들려줬다. K-팝 시장이 크지 않았을 때는 무시당하는 느낌도 들었지만 지난해에는 전체 앨범 플레이가 끝났을 때 박수와 함께 “너 같은 동양인 아티스트는 진짜 없다. 정말 좋고 필요하다”는 반응을 들었다. 뉴욕과 필라델피아 한복판에 에릭 남 얼굴이 떠오른 건 해외에서 그의 음악에 환호하기 시작했다는 증거다. 그렇게 에릭 남의 길을 가는 중이다.

네온 컬러 스웨터는 발렌티노(Valentino).

“앞으로는 다 할 것 같아요. 미국 에이전시에서 저를 위해 팀을 꾸려요. 에이전시에서 하고 싶은 일을 묻자 딱 두 명 말했어요. 음악가, 작가, 프로듀서인 도널드 글로버(음악 활동명은 차일디쉬 감비노), 배우이자 모델이지만 투자 사업도 벌이는 애쉬튼 커처처럼 활동하는 게 목표라고요. 지금 그렇게 일하는 동양인이 없어서 제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싶어요. 저처럼 생긴 사람이 그 자리에 자주 서 있을수록 동양인이 더 존중받을 테니까요. 굳이 제가 아니어도 돼요. 그래도 제가 더 노력해야 누군가가 더 올라갈 수 있다고 봐요.”

한때 에릭 남은 방한한 해외 스타 인터뷰를 도맡으며 인터뷰어로도 이름을 날렸다. 김치와 싸이를 아는지 묻지 않으면서도 한국에 대한 호감을 끌어냈다. 그들의 근황을 전하면서도 재미도 놓치지 않았다. 인터뷰 후 해외 스타들과 친구가 됐다는 미담은 우리의 자랑이었다. 인터뷰어로서 근황을 전하자면 팟캐스트 ‘I Think You’re Dope’는 순항 중이다. 갈란트를 비롯, 알렉 벤자민 같은 뮤지션들이 에릭 남 앞에서 여전히 학창 시절까지 털어놓고 있다. (해외에서 개인적인 질문은 금기시한다는데 왜 에릭 남 앞에만 서면 술술 털어놓는지!) 섭외부터 진행까지 모든 과정은 직접 한다. “그동안 인터뷰하면서 더 좋은 대화를 끌어내고 싶은 욕심이 생겼어요. 다른 데서 하지 않았던 이야기, 속내를 듣고 싶었고요. 이 플랫폼을 통해 그 마음을 어느 정도 해소하고 있어요. 이 사람과 대화하면 재미있겠다 싶으면 섭외해왔는데, 역으로 요즘은 인터뷰를 해달라고도 연락이 옵니다.” 인터뷰의 장인답게 정의도 내린다. “인터뷰는그냥 좋은 대화입니다.” 역시 본질을 꿰뚫는다.

이 모의 작당에 능한 인재에게 시간, 자본의 제약이 전혀 없다면 무엇을 하고 싶은지 물었다. “스페인이나 이탈리아, 캘리포니아에서 농사를 짓고 와이너리를 운영하고 싶어요. 요즘 취미가 와이너리를 보는 거예요. 올리브 나무도 심고 개를 키우며 느린 삶을 살고 싶어요.” 농사도 조직적으로 지을 것 같다는 농담에 부인하지 않는다. “물론 거기서도 와인 만드는 영상을 올리고있겠죠? (웃음) 술이 약한 편인데 한두 잔이 여유인 것 같아요. 위스키도 좋고 테킬라도 좋아요. 딱 한 잔 그 맛을 음미하며 꿈을 꾸죠. 나도 언젠가 이런 술을 만들수 있을까? 더 좋은 테킬라를, 더 예쁜 병에(웃음).”

지금은 무대가 가장 그립다. 지난해 폭발적으로 무대에 섰기에 더 그립다. 그 속도로 한국에서 4년 만에 단독 콘서트를 열었고 10여 개 뮤직 페스티벌에 참여했다. 그의 무대는 폭죽처럼 펑펑 터진다. “관객들은 제 무대를 처음 보면 당황해요. 그러다 어느 순간이 되면 다들 즐기죠. 아티스트로서 관객에게 그런 반응을 끄집어내고 싶었어요. 제 목표였죠.” 문화 충격에 가까운 에릭 남의 무대를 접한 사람들의 반응은 댓글로 확인하길. “이번 앨범도 다들 ‘뭐지?’ 할 것 같아요. 무대도 ‘아저씨 왜 이래? 아이돌이 아닌데 왜 이런 춤을 추지?’ 할 거예요. 레이블에서도 그냥 안무를 하지 않는 게 좋겠다고 하고요(웃음). 물론 저도 제가 아이돌 뮤지션이 아닌 거 알아요. 그런데도 표현하고 싶은데 어떡해요. 음악에는 몸을 흔들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