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우치아 프라다의 마지막 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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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우치아 프라다의 마지막 쇼

2020-07-30T12:07:50+00:00 2020.07.30|

미우치아 프라다는 첫눈에 알아볼 수 있는 스타일을 창조했다. 이탈리아의 이 독창적 디자이너는 예술적 균형을 이룬 패션을 통해 ‘고상한 취향’이라는 개념과 여성다움의 표현에 혁명을 일으켰다. 그리고 럭셔리 제품을 생산하는 가족 기업의 행보에 변화를 일으켰다. 이토록 지적이고 사려 깊으면서 페미니스트이자 사회 참여적이며 파급력 있는 재능을 지닌 미우치아 프라다는 타협 없는 자신만의 비전을 구축해왔다. 지난 7월 14일 밀라노 패션 위크에서 선보인 2021 S/S 컬렉션은 그녀가 단독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참여한 마지막 쇼다. 미우치아 프라다는 이제 라프 시몬스와 함께 걷는다.

어느 우중충한 날의 밀라노. 미우치아 프라다(Miuccia Prada)는 자신의 사무실에서 생각에 잠겨 있다. 우리가 만난 목요일은 영국 국회의원 선거가 있는 날이었다. 보리스 존슨과 그의 브렉시트 계획이 승리할 것임이 예고되고 있었다. 몇 주 전에 튀링겐주에서는 독일 극우 정당이 앙겔라 메르켈 총리를 3위로 떨어뜨리는 데 성공했다. 거의 같은 시기에 스페인의 극우 정당 복스(Vox)가 두 배의 표를 얻었다. 이탈리아에서는 민족주의자 마테오 살비니와 그의 당인 북부동맹이 여론조사에서 압도적 지지를 받았다. 내가 탄 비행기는 선거가 시작될 무렵 런던에서 이륙했다.

유행의 창조자로 나서기 전인 1970년대에 ‘프라다 여사’는(우리는 이 호칭을 존경을 담아 부르고자 하는데, 그 이유는 업계 최고 실력자로서 아우라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탈리아 여성연합의 페미니스트 활동가였다. 오늘날 좌파는 실패의 늪에 빠져 있다. 대중은 현 세태에 반대하지만 또한 좌파가 어떤 식으로든 연결된 전문가, 엘리트, 지식인들에게도 등을 돌렸다. 이런 난세에 어떻게 소통해야 할까? 사람들에게 어떻게 말해야 할까? 복잡한 메시지를 어떻게 전할 수 있을까? 정보의 폭탄 세례가 쏟아지는 이 시대에 미묘한 차이는 어떻게 이해시킬 수 있을까? 요즘 미우치아 프라다를 괴롭히는 질문이다.

“지식인이 침묵하면 다른 사람들만 발언할 겁니다.” 프라다는 이렇게 말하며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흔든다. “무지가 민주주의의 한 형태로 인정될 수 있다는 것은 위험한 일입니다. 저는 이 점이 몹시 걱정되는데, 그래서 소통이 중요합니다.” 사람들에게는 발언할 내용이 있겠지만 그것을 전달하는 방식 또한 중요하다. 경박함에 응답하기 위해서는 종종 우리도 경박함을 보여줘야 할 때가 있는데, 이것은 확실히 문제가 된다. “프라다의 구성원들은 소통의 재능을 갖고 있지 못합니다.” 그녀가 덧붙인다. 베르데 비스콘티(Verde Visconti)는 완벽한 프라다의 뮤즈이자 커뮤니케이션 책임자다. 모피 스웨터와 무릎까지 오는 스커트를 입은 그녀는 언짢은 표정으로 하늘을 쳐다본다. 미우치아는 갑자기 웃음을 터뜨리고 손을 내저었다. “뭔가 좋은 일을 하는 것이 그 일에 대해 소통하는 것보다 저의 관심을 끕니다. 제가 틀렸을 수도 있죠. 오늘날 의사소통은 매우 중요하니까요. 매혹적인 방식으로 말하지 않으면 아무도 듣지 않을 겁니다.” 대중과 의사소통하거나 관계를 잘 맺는 디자이너들이 있다. 창조적인 디자이너들도 있다. 프라다 여사는 전자에 드는 사람이다. 그녀는 비평계의 총아다. 산업계의 시각에서 보면 그녀는 모더니티, 지성, 정신, 스타일의 여왕이다. 사람들이 다른 디자이너의 시도를 이해하려고 노력할 때, 컬렉션이나 새로운 시도의 성공을 위해 애쓸 때, 우리는 그들이 프라다 모델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말해도 크게 문제 되지 않을 것이다.

이탈리아의 다른 회사가 의복에서부터 인물의 창조까지 캐리커처나 과도함의 사례를 구현한다면, 미우치아 프라다는 더 온화하고 전통적인 상을 발전시켰다. 비평가들도 이탈리아의 유행이 유쾌한 키치 스타일이라면 그녀는 드물게 차분하다는 점을 일반적으로 인정한다. 밀라노의 패션 위크는 늘 과장된 특색을 드러낸다. 그래서 자제의 순간이 과장의 순간보다 더 주목받는다. 그러나 미우치아 프라다는 늘 특별한 모습을 드러낸다. 그녀의 컬렉션은 나일론의 중후함과 짧은 타이트 스커트 같은 복합성 속에서 어느 정도 차가운 무정함 같은 분위기를 연출한다. 사람들은 어느 경우에도 그 컬렉션을 ‘보보(Bobo)족’ 스타일로 규정짓지 않는다. 그리고 돌, 깃털, 금속 조각 같은 컬렉션의 작은 환상은 상냥한 미소보다 갑작스러운 주먹질과 더 닮아 있다.

렘 콜하스(Rem Koolhaas)의 OMA/AMO와 협업으로 이뤄진 패션쇼 무대가 언제나 화려하다면(복고풍 파스텔 타일 바닥의 빛나는 수영장 또는 호텔), 옷의 경우에도 가장 관심을 끄는 것은 드물게도 겉모습 자체다. 그것은 표면적인 것(그리고 그 귀결인 상업)의 그늘을 거의 늘 프라다를 토대로 계획했다는 점을 부정할 수 없다. 미우치아가 자신의 이상을 전파하던 시기에 그녀의 가족은 1913년에 조부인 마리오 프라다가 만든 브랜드로 고급 피혁 제품을 제작해 밀라노에 있는 웅장한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갤러리아의 매장에서 최상류층에 판매했다. 그 당시에도 역시프라다 간판을 보란 듯 내건 상점이었다. 미우치아 프라다는 1970년대에 이 기업에 합류했다. “패션 디자이너가 되겠다는 결심을 하기는 매우 어려웠는데, 나같이 정치적 성향을 지닌 사람에게는 가장 나쁜 직업이었기 때문이죠. 유행은 천박한 것이라 여겼으니까요. 별로 진지하게 생각한 것이 아니어서 그런지 점차 패션에 마음이 끌렸고 결국 그 매력에 빠져들었죠.”

7월 14일 프라다는 디지털 패션 위크를 통해 새로운 형식의 쇼를 발표했다. 다양한 시선이라는 의미가 담긴 ‘Prada Multiple Views’라는 제목의 이번 컬렉션은 총 다섯 명의 아티스트가 재해석했다. 아티스트 마틴 심스(Martine Syms)가 기획한 영상의 한 장면.

자신의 일과 그 가치, 열망과 창조와 화해하기 위한 미우치아 프라다의 투쟁은 결코 멈추지 않았다. 지금도 우리는 판매 목적, 박수갈채, 추종자 수에 시각이 제한되지 않는 사람들이 견디기 쉽지 않은 시대에 살고 있다. 이런 것은 성공을 위해 변함없이 필요한 최소한의 조건이다. “일할 때 제 머릿속 한구석에는 늘 좌파 지식인의 관심사가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그 역시 제 것이니까요. 사실 2016년에 <뉴요커>의 헤드라인 기사가 이렇게 났어요. ‘유행: 엘리트는 빠져라!’라는 제목의 기사였죠.” 그 기사는 디자이너로 자리매김하거나 갑자기 패션모델이 된 유명 인사들, 비평가를 자처한 인플루언서의 발흥에 대해 언급했다. 이렇게 ‘문화’라는 말을 저급한 용어로 여기는 반전문가주의의 확산에 직면해 미우치아 프라다는 크게 염려했다. 그래서 어느 예술가 친구와 함께 지식인 구성원의 행동을 관찰하는 것을 즐기는 유희에 몰두했다. “지성은 의사소통 없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어려운 문제인데, 왜냐하면 지적인 것은 복합적이기 때문이죠.” 미우치아 프라다는 주먹으로 테이블을 치며 자신의 생각을 부드럽지만 단호하게 또박또박 말했다. 그녀에 따르면, 저항의 가능성은 협소하다. “단순화하지 않으면 사람들은 듣지 않아요. 그렇기에 전투는 단순화를 둘러싸고 벌어지지만 거기에도 실제적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이것이 제가 일하면서 노력하는 지점입니다. 제 컬렉션이 많은 영감을 불러일으킨다고 달라지는 건 없어요.” 프라다가 계속 말을 이었다. “큰 소리로 말할수록, 천박해질수록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합니다. 제가 고통받는 것도, 제 자신과의 처절한 싸움에 빠져드는 것도 다 그 때문입니다. 한편으로는 회사의 이익이 있습니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더 보편적인 이익이 있고요. 저는 그 둘 사이에서 앞으로 나아가려고 끊임없이 노력할 뿐이죠. 확실한 건 없습니다.”

프라다가 일을 시작한 40년 전부터 많은 사람이 그의 창작에 대해 정치적 해석을 덧붙이길 원했다. 이 옷은 페미니스트의 권고라거나 이 스커트는 공산주의자의 주장이라는 식이다. 유행 속에서 도처에 존재하는 미묘한 암시를 보려는 경향이 팽배하다. #미투 운동 이후에 몸매가 그대로 드러나는 스커트가 갑자기 일부 비평가들에게 힘 있는 여성을 향한 참여의 호소로 비쳤다. 가죽의 사용은 성적 자유를 외치는 증거가 됐다. 그 후로 컬렉션은 의미와 메시지를 전달해야 했다. 순수 미학 또는 ‘취향’ 같은 프라다에게 매우 사치스러운 개념은 오래전부터 더는 만족을 주지 못했다. 그러나 미우치아 프라다는 획일적 선언보다 양면성의 추종자에 가까웠다. 복합성과 상반성, 대조, 삐걱거리는 합의, 담담한 조화같이 사물 사이에 존재하는 관계에 마음이 끌렸다. 그녀는 유행의 창조자를 가장한 과격한 여성 혁명가가 되려고 하지 않았다. 고급 스커트를 팔면서 정치적 행위를 하는 것의 아이러니를 거부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저에게 번번이 중요한 정치적 지위를 얻기 위해 입후보하라고 요구합니다. 하지만 저는 매번 거절했지요. 어쩌면 특권이랄 수 있는 유행의 창조자로서 제가 원하는 정도로 급진적일 수는 없습니다. 비판받을 수도 있겠지요. 저는 고급 패션 회사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저는 저의 참여가 티셔츠에 관한 충격적인 선언이나 슬로건으로 이루어질 수 없다는 점을 알고 있습니다. 정치에 더 깊이 있고 진지한 방식으로 참여하길 원합니다.”

미우치아 프라다가 유행과 정치를 결합하는 방식은 선동적 슬로건으로 치장한 즉흥적 행위이기보다 더 길고 끈기 있게 숙고하는 과정을 통해 이뤄진다. <뉴욕 타임스>는 그녀를 “자본주의 철학자가 호기심을 채우다”라는 표현으로 규정했다. 만약 다른 창작자가 제품이 말할 수 있는 것(그것이 정당화하는 선언)에 흥미를 가진다면, 프라다는 그 제품을 존재하게 한 권력의 균형, 전통, ‘고상함’의 외적 징후와 같은 구조와 시스템에 더 많은 관심을 갖는 것 같다. 내가 프라다에게 그녀의 설명이 매우 명료하다고 언급했을 때 그녀는 장 뤽 고다르를 언급하며 답변했다. “그는 항상 왜 모든 것이 명료해져야 하는지 물었어요.” 미우치아는 최근에 프라다 문화예술재단을 통해 영화인을 위한 작업 공간의 재창조를 주도했다. 이 재단은 그녀의 남편이자 프라다 그룹의 대표인 파트리치오 베르텔리(Patrizio Bertelli)와 함께 운영하고 있다.

오르페 스튜디오로 이름 붙인 이 시설에서는 방문자들이 고다르의 정신세계, 책, 장비, 개인 물품을 관람하며 감상할 수 있다. 이 재단 덕분에 프라다는 유행에서 빠져나갈 수 있는 구실을 찾았다. 그녀는 이 문화 관람 시설을 설치함으로써 이 ‘경박한’ 직업이 어떤 이점을 줄 수 있다는 점을 깨달았다. 예를 들면 웨스 앤더슨(Wes Anderson), 뤽 튀만(Luc Tuymans), 티에스터 게이츠(Theaster Gates) 같은 예술가와 협업할 수 있었다. 프라다는 예술의 세계에 확실한 자유를 구현한다. 그녀의 관점에서 예술가는 선동하고, 터놓고 이야기하고, 충격을 주기 위해 초대했다. “저는 그들을 이를테면 보호종으로서 인식합니다.” 프라다가 농담 삼아 말한다.

판매는 프라다 그룹에서 논쟁적 주제다. 2014년부터 2017년까지 수익은 서서히 떨어졌다. 창작자로서 프라다는 이런 결과는 실패를 보여준다는 기사에 짜증이 났다. “남편과 저는 아침마다 돈을 벌려고 생각하며 잠에서 깨어나지 않습니다. 다행히 우리는 돈을 벌었습니다. 하지만 그게 우리의 목표가 아닙니다. 정반대로 우리의 포부는 계속 회사와 브랜드를 유지하는 겁니다. 오늘날에는 특히 그것이 미덕으로 여겨질 겁니다.” 디자이너인 프라다의 흥미를 그토록 끈 것은 부분적으로는 성공과 인기의 관념에 있는 양가적 관계다. “전통적인 것은 전혀 제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아방가르드도 마찬가지였고. 제가 사랑하는 것만 제 마음을 끌었죠.” 프라다는 자신의 데뷔 시절에 대해 이야기했다. 또 그녀에 따르면 상황은 정말 변하지 않았다. “매우 소박하지만 심오한 뭔가와 함께 흐트러뜨리기. 제가 거기에 도달하면, 그런 상황이 별로 자주 오지는 않지만, 저는 만족합니다. 흐트러지는 것은 저를 즐겁게 합니다.” 프라다는 요즘 비난을 접하면서 데뷔 시절과 달리 자신을 진정한 스타일리스트로 만들려는 비판가들에게 응답하면서 변화하려고 시도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