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 트렌드

우리 시대의 핸드백

2023.02.20

by VOGUE

    우리 시대의 핸드백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핸드백. 패션 시장에서 상징적 위치를 점하는 아이템은 시대의 변화를 어떻게 반영하고 있나.

    BOTTEGA VENETA 나파 가죽 소재로 하우스의 시그니처인 인트레치아토 위빙 기법을 표현한 체인 카세트 백.

    FENDI 1970년대 크로스 보디 백에서 영감을 얻은 디자인으로 클래식한 바게트 메탈 버클을 곡선으로 재해석한 로고 장식이 포인트인 ID 백.

    SAINT LAURENT 엄격한 박스형 실루엣에 하우스의 심벌인 카산드라 로고를 장식한 클래식 디자인의 솔페리노 백.

    CHANEL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버지니 비아르가 하우스의 클래식인 2.55 백에 대한 오마주를 담아 디자인한 19 백.

    DIOR 부드러운 반달형 실루엣에 앞면에는 CD를, 뒷면에는 30 몽테뉴를 새긴 호보 스타일 바비 백.

    LOUIS VUITTON 구조적인 플랩 백에 1930년대에 사용된 오버사이즈 LV 로고를 장식한 퐁 네프 백.

    GUCCI 하우스의 1969년 시그니처 실루엣과 디테일을 동시대적으로 재해석한 스몰 실비 1969 백.

    주요 패션 하우스에서 백 시장을 독식하던 시절이 있었다. 몇몇 패션 하우스들이 그 시즌에 선보인 대표적인 백 몇 가지가 우리에게 주어진 선택항의 전부였는데, 당시 사람들은 케이트 모스나 올슨 자매가 들고 다니는 잇 백에 대해 새 교황을 뽑는 비밀선거 콘클라베 못지않은 관심과 집중도로 열을 올리며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하지만 SNS가 일궈낸 시장의 민주화는 소규모 독립 브랜드가 광고비 한 푼, 매장 한 뼘 없이 수많은 소비자와 만날 수 있는 접점을 제공했고, 그렇게 거대 자본주의의 백 시장 나눠 먹기 시대는 20년 만에 종식됐다.

    더 빠르고 짧아진 유행 주기, 끊임없이 트렌디한 신상으로 ‘플렉스’해야 하는 SNS 환경은 접근 가능한 가격대와 참신한 디자인으로 무장한 자크무스나 스타우드(Staud), 반들러(Wandler)와 바이 파(By Far) 같은 소규모 브랜드를 백 시장의 슈퍼스타로 추대했다. 하지만 Z세대는 예측할 수 없기로 악명 높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이 젊은이들은 한 방을 꿈꾸는 수많은 독립 백 브랜드가 우후죽순으로 등장하는 사이, 중고 명품 거래 플랫폼으로 눈을 돌려 1990년대 말 2000년대 초에 유행한 아이코닉하고 클래식한 빈티지 잇 백을 수집하기 시작했다. 덕분에 리에디션 발매로까지 이어진 대표적 사례가 디올 새들 백과 프라다의 나일론 미니 숄더백이다.

    중고 명품 거래 플랫폼 ‘더 리얼리얼(The RealReal)’의 여성 제품 카테고리 디렉터 사샤 스코다(Sasha Skoda)는 이렇게 말한다. “클래식한 잇 백의 가치는 오래가지만 트렌디한 잇 백은 수명이 짧습니다.” 스코다에 의하면 패션 하우스에서 선보인 트렌디한 디자인의 백은 보통 론칭한 그해 중고 거래 가격이 소비자가의 80%, 이듬해에는 60%까지 떨어진다. 반면 루이 비통 네버풀이나 샤넬 보이 백 같은 제품은 꾸준히 높은 중고 거래가를 유지하는데, 중고 명품 핸드백 거래 사이트 ‘리백(Rebag)’의 설립자 찰스 고라(Charles Gorra)에 의하면 디올 새들 백은 되살아난 인기의 불꽃에 힘입어 하우스가 리론칭하기 직전 1년 동안 중고 거래 가격이 무려 300%까지 치솟았다. 에르메스 버킨이나 켈리 백 같은 희소성 있는 모델의 경우 새 제품의 가격을 훌쩍 넘어 1,000만원 이상의 중고 거래가를 기록하는 것도 흔한 일이다.

    최근 급부상하는 중고 명품 시장의 활성화 주체는 단연 Z세대와 밀레니얼이다. X세대와 베이비 붐 세대에서 럭셔리 제품 소비자의 중고 시장 참여도는 고작 30%대지만 Z세대와 밀레니얼 세대의 참여도는 각각 무려 54%와 48%에 이른다. 1980년대 이후에 태어난 이들이 매력을 느끼는 중고 명품 백은 브랜드의 전통과 역사가 깃들었으며, 20~30년 전에 유행한 하우스의 시그니처 스타일. 더 리얼리얼에서 생애 첫 명품 백인 빈티지 펜디 바게트 백을 구입한 28세 패션 블로거 안드레아 로레도(Andrea Loredo)는 중고 제품을 구입한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지금 매장에서 팔고 있는 최신 디자인보다 오리지널 버전에 가깝고, 그래서 중고 시장에 되팔 때도 더 높은 가격을 받을 수 있으니까요.”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다. “내가 중고 거래를 합리화하는 방식이죠.”

    끊임없이 신제품을 생산하고 소비해야 하는 패션 시장에서 중고 시장은 계륵처럼 여겨지기 쉽다. 하지만 중고 명품 시장은 ‘다음’을 준비할 결정적 데이터를 브랜드에 제공한다. 보스턴 컨설팅 그룹이 중고 명품 거래 플랫폼 ‘베스티에르 콜렉티브(Vestiaire Collective)’와 함께 진행해 2019년에 발표한 조사 결과는 꽤 흥미로운 내용을 담고 있다. 럭셔리 제품 소비자의 44%가 새 제품을 구입할 때 중고 시장에 되팔 경우를 고려해 더 비싼 아이템을 선택한다고 답한 것이다. 즉 중고 시장의 존재가 사람들이 양심의 가책을 덜 받으면서 과감하게 고가의 제품에 투자하는 데 긍정적으로 작용한다는 뜻이다. 동시에 백을 선택할 때 시간이 지난 후에도 중고 시장에서 가치가 높이 평가될 클래식 디자인을 선호할 거라는 것 또한 어렵지 않게 예측할 수 있다.

    BURBERRY 하우스의 아카이브에서 영감을 얻은 토트백으로 캔버스 소재에 가죽으로 테두리를 두르고 호스페리 프린트로 포켓을 장식한 미니 투톤 캔버스 레더 포켓 백.

    MIU MIU 아이코닉한 누비 모티브가 특징인 마테라쎄 백.

    VALENTINO 1968년에 사용된 오버사이즈 V 로고 장식을 되살려서 장식한 슈퍼비 백.

    HERMÈS 1930년대에 탄생해 하우스의 시그니처로 자리 잡은 켈리 백의 새로 나온 미니 사이즈 버전.

    GIVENCHY 하우스의 아이콘 안티고나 백 탄생 10주년을 기념해 새로운 버전으로 재출시한 미니 안티고나 백.

    CELINE 1972년대에 탄생한 하우스의 모노그램을 프린트한 트리옹프 캔버스 원단의 트리옹프 캔버스 카바스 버티컬 백.

    코로나19로 인해 새 컬렉션 생산에 차질이 생기고, 세일 시기도 기존보다 미뤄지는 상황에서 핸드백이 패션계의 수익 창출에 얼마나 혁혁한 공을 세우고 있는지 새삼 놀라울 정도다. 새 컬렉션이 부재하는 쇼핑 소강 상태를 메우기 위해 하우스에선 새로운 백을 선보이고, 특정 하우스는 매장 폐쇄와 해외여행 금지로 떨어진 매출을 상쇄하기 위해 인기 핸드백을 비롯한 가죽 액세서리 가격을 최대 17%까지 올려 중국과 한국 매장에서는 ‘오픈 런’ 사태가 일어났다. 일정 수준의 가격 인상은 매년 이루어졌지만, 여태껏 평균 10% 이하였던 점을 고려하면 이번 상승의 목적은 너무도 분명하다. 어쨌든 패션 하우스의 공식적인 입장은 “요즘 같은 상황에서 특정 원료 가격이 상승했을 뿐 아니라 우리가 기대하는 일정 수준 이상의 질을 갖춘 원료는 특히 더 구하기 어려운 상황”, “환율을 고려해 전 세계적으로 가격을 균등하게 유지하기 위한 방안”이라는 이유다.

    그리하여 이 순간 패션 하우스는 중고 시장으로까지 이어지며 길이길이 사랑받을, 또 다른 클래식 잇 백을 탄생시키는 작업에 착수 중이다. 일회성으로 끝나지 않고 다양한 버전으로 재해석되면서 오래도록 살아남을 수 있는 디자인의 백 말이다. 하우스의 아이코닉한 코드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하고, 아카이브에서 역사적인 로고를 소환하거나 가장 반향을 일으킨 백 디자인을 교묘하게 변형하기도 한다. 혹은 과거 스테디셀러의 새로운 버전을 선보여 잠들어 있던 스타에게 인공호흡을 시도한다. 루이 비통을 위해 니콜라 제스키에르는 1930년대에 사용된 오버사이즈 LV 로고를 장식하고, 파리에서 가장 오래된 다리 이름을 따서 ‘퐁 네프’라고 이름 지은 새로운 플랩 백을 선보였다. 지방시는 2010년에 히트 친 안티고나 백 탄생 10주년을 기념하여 안티고나 소프트 라인을 론칭했으며, 펜디는 아코디언처럼 늘어나는 1970년대 크로스 보디 백을 참고한 새침한 실루엣에 클래식한 바게트 더블 F 로고를 장식한 ID 백을 내놨다. 생로랑 솔페리노 사첼 백의 극도로 간결한 디자인과 영원한 하우스의 상징, 카산드라 로고의 조화는 50년 후에도 유효할 것으로 보인다. 핫한 셀러브리티 착용 컷이 인스타그램을 장악한 디올 바비 백의 복고적인 분위기는 Z세대 아이돌조차 멋스러운 1960년대 여배우처럼 보이게 할 정도. 셀린의 트리옹프 캔버스 카바스 버티컬 백은 1970년대에 탄생한 트리옹프 모노그램 패턴과 피비 파일로 시절 히트 친 카바스 토트백의 실루엣을 결합해 또 한 번 돌풍을 기대하는 듯하다. 손바닥만 한 에르메스의 미니 켈리 백은 기존 켈리보다 아주 조금은 가까워진 기분이 들게 한다.

    점잖고 보수적인 스타일의 새로운 백은 과거 ‘남도 드니까 나도 들어야 하는’ 머스트 해브 백 유행을 거쳐 이제는 ‘아는 사람만 아는’ 디자인을 선호하게 된 30대 이상의 고상한 고객층의 취향에도 부응한다. 뉴욕에서 활동하는 퍼스널 쇼퍼 겸 스타일리스트 실비아 가이탄(Silvia Gaitan)은 30~60대가 주를 이루는 자신의 고객은 요즘 유행하는 과거 잇 백에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고 전했다. 바로 그 가방이 길거리에 차고 넘치던 시절을 실제로 겪었기에 더 그렇다. “평범한 여자들보다 인플루언서들을 겨냥한 거라고 보는 거죠.” 리테일 컨설팅 기업 로버트 버크 어소시에이츠의 CEO 로버트 버크(Robert Burke)의 결론은 고객 상당수가 결국 시간이 지나도 변치 않을 클래식으로 귀결한다는 것이다. “소비자들은 과거에 비해 훨씬 더 예리한 안목과 풍부한 지식을 가지고 럭셔리 아이템에 접근합니다. 원할 때 구할 수 있는 방안(중고 시장)이 많아졌기 때문에 ‘지금 당장 사지 않으면 안 된다’는 식의 충동구매는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죠.”

    생각해보자. 가방 하나에 몇백만 원을 투자해야 한다면, 그만한 가치를 따지지 않을 수 없다. 불과 지난 시즌만 해도 장식적이고 장난감 같은, 과시적인 가방이 하이패션 런웨이와 고급스러운 매장의 진열대를 장식했다. 이제 그런 백은 100만원이 채 안 되는 비용으로 얼마든 살 수 있다. 브랜드만 따지지 않는다면, 훨씬 더 재기 발랄한 디자인을 찾을 수도 있을 거다. 패션을 잘 아는 멋쟁이처럼 보이고 싶다면 중고 명품 사이트에서 빈티지 백을 검색하면 된다. 바스락거리는 유산지에 싸여 가죽 냄새 폴폴 풍기는 새 핸드백을 살 생각이라면 유행이 지나도 괜찮고 시간이 지나도 멋스러운, 질 좋은 소재의 보수적인 디자인을 선택하는 게 현명하다. 나중엔 어떻든, 지금 팬데믹 시대에는 그렇다.

      패션 에디터
      송보라
      포토그래퍼
      장우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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