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면 증후군에 걸린 여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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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면 증후군에 걸린 여자들

2020-08-27T09:38:28+00:00 2020.08.27|

가면 증후군에 걸린 여자들은 의심한다. 자신의 성과, 실력, 자리, 어쩌면 이름 석 자조차.

편집장은 모를 것이다. ‘<보그>의 知性’을 담당하는 내가 매달 원고를 낼 때마다 밑바닥이 드러날까 봐 전전긍긍한다는 것을. 일필휘지로 써 내려간 듯 ‘무심한 듯 시크하게’ 원고를 ‘툭’ 제출하지만 속으로는 ‘이번 달도 무사히 넘어가길’ 빌고 또 빈다.

인터뷰 때도 마찬가지다. 팬들이 지구 반대편까지 줄 서 있는 아이돌을 만날 때도, 레드 카펫에서 내려온 배우를 만날 때도, 고결한 문장으로 심금을 울리는 소설가를 만날 때도 <보그> 에디터 탈을 쓰고 이들을 속이고 있다고 여긴다. 사실 나는 이런 유명인을 인터뷰할 만큼 유능하지 않은데 운이 좋아 기자가 됐고 부족하지만 성실해서 이 자리를 유지하고 있다고 말이다.

처음에는 그저 자신감의 결여 정도로 여겼다. 혹은 더 잘하고 싶은 욕심 때문으로 여겼다. 그런데 아무리 써 내려간 원고의 숫자가 늘어나고, 승진을 하고, 주변에서 칭찬을 받아도 스스로를 향한 의심과 불안한 감정이 사라지질 않았다. 그러다가 밸러리 영(Valerie Young)의 <여자는 왜 자신의 성공을 우연이라 말할까>를 읽고 깨달았다. 나에게는 ‘가면 증후군(Imposter Syndrome)’이 있었다.

1978년 심리학자 폴린 클랜스와 수잔 임스가 처음 명명한 이 증상은 “높은 성취의 증거에도 자신이 똑똑하거나 유능하거나 창의적이지 못하다고 믿으며, 자신의 능력에 대해 남들을 기만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현상”을 뜻한다. 미셸 오바마, 나탈리 포트만, 엠마 왓슨 등 유명 인사들의 고백으로 더 유명해졌다. (“누가 또 날 영화에서 보고 싶어 하겠어? 난 연기할 줄도 모르는데 왜 이 일을 하고 있는 걸까.” 이 고백은 자그마치 메릴 스트립의 것이다!) 그나저나 가면 증후군은 성공한 여성에게 주로 일어난다는데 증상이 비슷하다는 이유로 나를 이 범주에 넣어도 될지 갑자기 망설여진다. 지긋지긋한 자기 검열이여!

사실 나는 오랫동안 이 쭈글쭈글한 증상에 불만과 의문을 품고 있었다. 시대마다 유행하는 용어로 그 의문을 풀어본 적도 있다. 10여 년 전에는 ‘남자의 근자감의 정체’라는 기사로, 몇 년 전에는 ‘야망에 대한 이중 잣대’ 같은 식으로 말이다. 당시 근자감의 정체에 대해 이렇게 적었다. “남자란 이래야지, 넌 우리 집 장손이야… 남자들의 근자감은 자기방어이자 과잉 자신감일지도 모른다. 사회는 약한 남자를 허용하지 않으므로 늘 복어처럼 몸을 부풀린다.” 야망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분석했다. “우리 사회는 잘난 여자를 싫어한다. 이들은 드세고 공격적이고 위협적인 존재가 된다. 여자의 야망은 선을 넘은 과욕이고 남자의 야망은 멋진 것이다.” 이런 내면화된 차별이 쌓여 가면 증후군이 생겼음을 이제 나는 실감하고 있다.

성별 일반화에 유의해야 하지만 가면 증후군은 여자에게 주로 발생한다. 그리고 이 지점이야말로 우리가 이 증상을 들여다봐야 하는 가장 큰 이유다. 1980년대에 대한민국에서 태어나 똑같은 부모가 차려주는 밥을 먹고 자라 비슷한 시점부터 사회생활을 하고 있는 한 살 터울 오빠에게 나는 가면 증후군 개념을 이해시키는 것조차 어렵다. 실제로 지인 남자 몇몇에게 이 증상을 털어놓았을 때 복사해서 붙여 넣기라도 한 듯 똑같은 대답을 들려주었다. “대체 그게 무슨 말이야? 편집장이 너한테 뭐라고 하디?”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안주연은 개인마다 성향 차이가 있지만 확실히 여성에게 가면 증후군이 더 많이 발생한다고 말한다. “우리 사회는 여성의 성취를 폄하하거나 어떤 식으로든 인정하지 않는 분위기가 있어요. 여자에게는 저렇게 해봤자 행복하지 않고 시집 못 간다고 하고 남자들에게는 능력 있고 멋있다고 하죠. 실수했을 때 남자는 개인의 잘못으로 봐주고 ‘다음에 잘하면 되지’라고 반응한다면, 여자에게는 ‘여자가 그럼 그렇지’ 하며 폄하해요.” 순응하도록 교육받았으며 관계 지향적인 여자들은 주변의 부정적인 피드백으로부터 더 큰 영향을 받는다고 안주연 전문의는 지적한다. 이런 상황이 반복되다 보면 비난을 받지 않기 위해 완전무결한 상태를 지향하며 점 점 더 높은 성공의 기준을 세운다는 것이다.“어떤 일을 한다는 것은 리스크가 계속 생기는 것입니다. 하지만 부정적인 면이 내재화되면 점점 두려워지기 마련입니다. 우리 인지에 한계가 있으니 부정적인 면에 계속해서 주목하면 긍정적인 부분을 되새길 기회가 없어지죠.”

결혼하고 일하는 여자들에게는 완벽주의 가면을 두껍게 하는 또 하나의 사회적 통념이 있다. 어릴 때부터 우리는 어머니로부터 다른 사람을 우선시하고 자신을 희생하라고 배웠다. 귀로는 ‘무엇이든 될 수 있다’고 들으며 자랐지만 남편을 출근시키고서야 자기 볼일을 보고 육아를 도맡아 하는 엄마로부터 애초에 커리어 추구에는 누군가의 희생이 따른다는 메시지를 매일같이 부여받은 셈이다. 그래서 결혼하고 가면 증후군에 시달리는 여자들은 스스로에게 한 가지를 더 묻게 되었다. 가족을 돌보지 않거나 혹은 가족이 희생을 감수해도 될 만큼 지금 하는 일이 가치 있는가,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을 만큼 이 일을 완벽하게 해내고 있는가에 대해 말이다. 그렇기에 남자들은 사회생활, 직장, 승진이 인생의 옵션이 아니라 벗어날 수 없는 의무고 인생 자체라 아무런 의심도 품지 않고 생존법을 찾는데 여자들은 그런 의무를 부여받지 않으니 인생, 시스템, 자기 자신에 대해 끝없이 회의하는 것 아니냐고, 가면 증후군은 어쩌면 엄살이나 핑계가 아니냐고 묻는 세간의 의견에는 동의할 수 없다. 경제 부양의무 2순위자로 포지셔닝된 자리에는 여자가 하는 일을 하찮게 여기는 태도, 다양한 역할을 수행하길 바라는 기대 등 여러 사회적 맥락이 얽혀 있다.

불행 중 다행인 건 가면 증후군의 불안한 심리가 커리어의 동력이 된다는 점이다. 자신을 못 믿으니, 남들보다 일찍 출근하고, 늦게까지 일하며 업무에 만전을 기한다(재능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일한 시간은 수치화되기 때문에 가면 증후군에 시달리는 사람들은 근면 성실하다). 끊임없는 자기 검증과 노력은 좋은 결과로 이어진다. 하지만 장점은 여기까지다. 일단 스스로 너무 고통스럽고, 성과를 제 손으로 깎아내리는 불필요한 겸손은 삶의 태도로 이어진다. 망설임으로 도전이 줄어드는 건 물론이다. 자기 의심으로 엄청난 시간을 보내며 성공을 자신의 것으로 여기지 못해 일 중독에 빠지거나 기대에 미치지 못할까 봐 아예 노력 자체를 그만두기도 한다. 무엇보다 가면이 벗겨지기 전에 스스로 그 자리에서 내려온다. 자작극의 연출과 대본, 주인공은 모두 우리 자신이다.

밸러리 영은 <여자는 왜 자신의 성공을 우연이라 말할까> 에필로그에서 불편한 진실을 고백한다. “가면 증후군은 줄어들 수는 있지만 완벽하게 없어지지는 않을 수도 있다.” 당연하다. 편집장이 원고를 박박 찢어 하늘로 날리며 특유의 드라마틱한 어조로 “이건 쓰레기야!”라고 외칠지 모른다고 공포에 떨다가 갑자기 “소현 차장의 문장에서는 미우치아 프라다의 진보성과 뎀나 바잘리아의 창의성이 느껴지는구나. 사실 첫 문장을 읽고 감동에 울었단다. 그 눈물에서는 아이리스꽃과 제라늄이 어우러진 레 조 드 샤넬의 향기가 났지”라고 반응하리라 기대할 리가 없지 않은가. 하지만 나는 우리가 가면 증후군으로부터 벗어날 가능성이 아예 없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칭찬에는 그저 고맙다고 반응하라든가, 남과 비교하지 말라든가, 당신과 같은 레벨에 있는 남자들이 얻은 돈과 기회를 떠올려보라는 전문가가 알려주는 가면 증후군 극복법도 중요하지만 원인을 스스로가 아닌 외부에서 찾아볼 필요도 있다는 생각이다. 더불어 주변 사람을 먼저 돌보도록 사회화된 자신을 부정하지 말고 후배 여자들을 위해 이런 자리에 오래 혹은 자주 앉아 있어야 한다고 생각을 전환한다면 자기 확신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안주연 전문의도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문제로 여기라는 당부를 들려줬다. “성차별적 사회 분위기로 강화된 걸 어떻게 개인이 혼자 정신 승리로 이겨냅니까? 우리가 모자라서가 아님을 서로 얘기해주고 다양한 자리에서 다양한 활동을 하며 서로가 서로에게 용기가 돼줘야 합니다. 완벽한 사람만 성공하는 게 아님을 서로 보고 느끼며 학습한다면 좋아질 겁니다.” 이 원고를 읽고 편집장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9월호에 무사히 실린다면, 그게 바로 ‘나의 쓸모’일 것이다. 거기에는 어떤 천운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