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shion

‘킨포크’ 창조자들

2023.02.20

by VOGUE

    ‘킨포크’ 창조자들

    잡지 <킨포크>는 ‘인스타용’으로 완벽한, 상류 지향적 밀레니얼 세대의 미학을 정의하는 데 기여했다. 그러나 지면에서 멀어져서 지켜본 <킨포크> 창조자들의 삶은 그 이상으로 훨씬 복잡했다.

    그는 질문에 답하기 위해, 불편해지기 직전까지 뜸을 들였다. 네이선 윌리엄스(Nathan Williams)는 스트로베리 블론드 컬러 머리카락을 손으로 쓸어 넘기지도 않았고, 손목의 투박한 브론즈 커프를 배배 꼬지도 않았다. 목에 멋지게 묶인, 그날 입고 온 딱 맞는 앙상블과 색을 맞춘 다크 네이비 실크 타이를 만지작거리지도 않았다. 그러나 천천히 눈을 깜박였다. 개인사에 대한 질문이었다면 분명히 이런 인터뷰를 수차례 했을 테고, 따라서 이런 반응은 당황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차에 치이기 직전의 사슴 같았다. 하지만 눈을 깜박이는 사이에도 그는 당신의 시선을 붙잡고, 마침내 이 깜박임이 자기 보호보다 심사숙고(무언가를 재보는 듯하며 그것은 당신이 믿을 만한 사람인지 혹은 자신 스스로가 그러한지)로 느껴질 것이다. 이 모든 것 속에서 <킨포크>(지난 10년간 인스타그램용 밀레니얼 스타일 미학의 함축이자 정석이 된 잡지)의 공동 창립자는 ‘의도’를 갖고 행동하고 있었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게 익숙하지는 않군요.” <킨포크>의 다사다난한 역사를 이야기하는 동안, 몇 번의 꽉 찬 정적이 끼어들었다. “제가 제대로 얘기하는 건지 확인하고 싶어요.”

    킨포크는 잘 연출된 의도성(Intentionality)으로 유명하다. 섬세하게 선정된 오브젝트, 신중한 큐레이션으로 연출된 순간, ‘작은 모임’ 같은 감성적 문구 한 줄로 건전한 슬로우 리빙의 기쁨을 전한다. 다른 라이프스타일 잡지처럼 8년 전쯤 얇게 썬 아보카도 토스트 혹은 아른거리는 햇빛이 비치는 오후에 리넨 침대보가 시크하게 걸린 빨랫줄에 이끌리는 자신을 발견했다면, 당신은 <킨포크>라는 잡지가 있음에 감사할 것이다. 하지만 <킨포크> 페이지에 펼쳐지는 유혹은 외면만큼 내면도 겨냥한다. 이런 의도성을 통해 <킨포크>의 엄격할 정도의 아름다운 페이지는 그저 예쁜 옷이나 방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자아의 더 진실한 표현, 더 의미 있고 마케터들이 주로 ‘진정성이 있다’고 표현하는 것을 조용히 드러낸다.

    딱 마음에 드는 가죽 앞치마를 샀을 때나 야생화로 보기 좋게 꽃다발을 완성했을 때 나오는 진정성 안에는 어떤 긴장감이 내재되었지만, 네이선은 그닥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아마 <킨포크>의 창립을 도운 지인들을 뿔뿔이 흩어지게 한, 그의 경직된 영혼에서 분출되는 긴장감 때문일 것이다. 확실히 잘 장식된 외면을 완전히 무너트리고, 궁극적으로 그가 어떤 사람인지 드러낸 이 트라우마에 비할 긴장은 없다. 그렇다고 엄밀히 <킨포크>를 만들어낸 네이선 윌리엄스가 거짓된 삶을 산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가 진실한 삶을 산다고 할 수도 없을 것이다.

    진정성, 퍼포먼스, 브랜드, 프로덕트, 이야기, 리얼리티. 33세의 윌리엄스에게 이런 단어의 연결성을 분리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는 늘 예의 바르고 신중하며 과시할 줄 모르고 겸손했다. 이런 점은 가짜 뉴스와 브랜딩이 난무하는 시대에 꽤 놀라운 모습이었다. 게다가 자신을 굉장히 잘 큐레이팅한 느낌이었다. 그에게 맞게 재단된 옷부터 거의 현실 세계 사람 같지 않은 느낌을 주었다. “우리 둘은 키와 체형이 같아요.” 그의 친구이자 덴마크 잡지 <유로맨(Euroman)>의 패션 디렉터인 프레데릭 렌츠 안데르센(Frederik Lentz Andersen)이 말했다. “우리 둘 다 엄청 슬림하죠. 윌리엄스를 볼 때마다 ‘어쩌면 저렇게 수트 핏이 완벽하지?’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가 하는 일에 실수란 없어요. 뭐 하나 흘리는 법이 없다니까요.”

    <킨포크> 탄생 스토리는 아주 완벽해 보인다. 미키 루니와 주디 갈랜드의 오래된 뮤지컬처럼 “이봐, 모두 모여 한판 벌여보자고!” 같은 대사에서 시작된 매력적인 이야기 같다. 10년 전쯤 대학생일 때 결혼한 이 커플은 잡지를 창간하자는 발칙한 아이디어를 냈다. 건전하면서도 들뜬 이 모르몬 커플은 나중에 나타난 혁명 같은 SNS 붐으로 단순히 성공적인 잡지 출판을 이끄는 사람들이라는 역할을 넘어섰다. 차분한 색감의 리넨, 핸드 드립 커피, 감사함을 나타내는 감성으로 전 세대를 품은 SNS 친화적 문화의 흐름이자, 시대정신을 정의하는 움직임의 첨병이 되었다. #Kinfolklife #Flatlay #Blessed

    초기 <킨포크>에서는 이 젊은 창업자들의 생활에 대한 적나라한 표현이 종종 등장하곤 했다. 네이선 윌리엄스와 케이티 설(Katie Searle)은 2008년 브리검영대학교 하와이 캠퍼스 학생일 때 처음 만났다. 네이선은 케이티가 매일 일하는 책상 앞을 스쳐 지나간 후, 이 조용히 빛나는 여성에게 완전히 빠져버렸다. 그는 케이티에게 지금 남자 친구는 버리고 자기와 만나자고 말할 용기를 내기까지 시간이 좀 걸린 것으로 기억했다. 케이티는 당시 전 남자 친구와의 관계를 이미 정리했다. 어쨌든 그녀는 그러자고 대답했고, 몇 달후 네이선은 케이티를 숲으로 데려가 꼬마전구로 장식한 나무 그늘 아래에서 청혼했다.

    기업 경영 수업 과제를 통해 둘은 전자상거래 플랫폼을 구상했고, ‘킨스포크 앤 컴퍼니’라는 이름으로 접시나 유리컵 또는 디너 파티를 위한 잡화를 파는 사업을 구상했다. 윌리엄스가 블로그를 통해 모은 기부자들과 가까운 친구인 더그와 페이지 비숍의 도움 등을 통해 진화해 2011년 아주 작은 DIY 매거진을 창간했다. 이 잡지는 음식과 그들이 사랑하는 ‘작은 모임(Small Gathering)’에 집중했다. 출판 경험도 없었고 정해진 어떤 역할도 없었다. 모두가 모든 것을 했다. “우리는 기혼 학생들 숙소에서 살았거든요. 그래서 수업 시간을 제외하고는 많은 시간을 함께했어요.” 더그 비숍이 말했다. “네이선과 케이티의 아파트에 우리가 한 번 가면 그 둘이 우리 아파트에 한 번 오는 식으로요. 늘 같이 모여 요리하고, 떠들고 서로 데려온 사람들과의 시간도 즐기고. 정말 멋진 우정이었어요.” 윌리엄스와 더그 비숍은 심지어 꽤 닮기까지 했다. 둘 다 키가 크고 날씬하며 옆머리를 깔끔하게 다듬은 짧은 금발에 또래 대학생이라면 대부분 좋아하는 딱 맞는 옷에 대한 애착까지 말이다.

    창간호 주제는 소로우의 <월든(Walden)>의 한 문장에서 영감을 얻었다. “나는 집에 세 개의 의자를 둔다. 하나는 고독, 또 다른 하나는 우정, 마지막은 사교를 위해.” 윌리엄스는 <월든>에 무척 공감하여, 생일 파티에서 친구들에게 이 책을 선물로 나눠주기까지 했다. <킨포크> 1권엔 최근 유행하는 스웨덴식 커피 타임인 ‘피카(Fika)’에 대한 기사를 실었다. 그리고 티타임 같은 의식의 시간이 <킨포크> 사무실에 함께하게 되었다. “정말 간단하고 기본적인데, 당시 실제로 하면 정말 좋겠다고 생각한 것들이죠.” 윌리엄스가 말을 이었다. “지나치게 키치하면서 깜찍한 느낌이었던 것도 맞아요. 하지만 이런 소재 간에 연관성은 있었어요.”

    <킨포크> 창립자 중 한 명인 네이선 윌리엄스가 고독한 표정으로 카메라를 응시하고 있다. 인생의 여러 부분에서 그를 억압해온 여러 중요한 문제가 있었다. 이를테면 모르몬교에 대한 의구심, 그의 성적 정체성 같은 것이다.

    시작부터 <킨포크>는 수백만의 구독자를 끌어모았다. 이는 윌리엄스 부부와 비숍 부부가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출판사와 출판 및 발행에 대한 지원을 요청할 만큼 강력한 반응이었다. 2012년 9월까지 <킨포크>는 18달러에 1쇄당 수만 부가 팔렸다. 이 두 커플은 케이티의 고향 가까이에 있는 오리건주 포틀랜드로 이사했다. 그곳에는 잘 꾸민 테이블 세팅으로 자신들의 창의적 정체성을 드러내고 싶어 안달인 예술가적 마인드를 갖춘 밀레니얼 세대가 많았다. 그런 뒤 사무실을 차리고 직원을 고용해도 <킨포크>의 동화 같은 느낌은 유지할 수 있었다. “네이선은 자기가 구운 새 빵을 가져오곤 했어요.” 2013년부터 서비스 매니저로 일하는 네이선 티크노어(Nathan Ticknor)가 말했다. “우리만의 티타임이 있었어요. 크리스마스에는 모두 밖에 나가 사무실에 둘 크리스마스트리를 만들었어요.” 그리고 조지아 프란시스 킹이 에디터 면접을 보러 왔을 때, 그녀는 사무실 근처의 소비(Sauvie)섬에서 열린 스태프 파티에 초대를 받았다. “직원 모두가 햇빛이 비치는 해변가에 앉아 수영을 하고, 페타 치즈와 수박을 먹고 로즈 워터를 마셨어요. 그때 이런 생각이 들었죠. 와, 이게 진짜였네.”

    만약 당신의 삶이 현재 당신의 경제적 상황이 허락하는 것보다 조금 더 나은 수준이 되면서도, 당신이 추구하는 가치가 전 세대가 꿈꾸는 것이 된다면? “2011년이 그렇게 옛날은 아닌데도, <킨포크>가 처음 등장했을 때 모두들 굉장히 신선하고 새롭다고 했거든요. 처음으로 커뮤니티라는 주제에 집중한 컨셉의 출판물이었어요. 테이블에 함께 둘러앉아 슬로우 라이프를 즐기는 그런 거죠. <킨포크>라는 잡지가 요즘 우리 삶의 수많은 전자 기기에 대한 해독제같이 느껴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다른 이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면, 우리가 전화하는 데 시간을 더 많이 쓸수록 진짜 인간관계를 더 갈망하게 된다는 것을 깨닫죠.”

    <킨포크>는 라이프스타일 매거진의 독특한 전환점이 되었다. <Gourmet>, <Metropolitan Home> 같은 오래되고 전통 있는 매거진, 더 연령층을 낮춘 <Domino>나 <Plenty> 같은 매거진은 이미 1~2년 전부터 폐간되고 있었다. 이제 막 빛을 보기 시작한 <Modern Farmer>나 <Cereal> 같은 니치 잡지는 몇 년을 더 버텼다. 그러나 2011년이 되면서 이 폐간된 잡지를 대신할 것을 찾는 수요가 생겼고, 그동안 살아남은 <Architectural Digest>나 <Elle Decor> 같은 잡지는 방향을 바꿨다. 그리고 <Rue>(현재도 출간 중)와 <Matchbook>(폐간)처럼 온라인 출간을 통해 반짝 관심을 모았다. 이는 <Portlandia>가 깊이 기억에 남을 정도로 풍자한 새로운 세대 DIY 애호가들과 맞아떨어졌다. “세계적으로 퍼져나가는 걸 보니 정말 놀랍더라고요. 세상에서 뭐가 일어나는지 실시간으로 볼 수 있는 지도를 본다는 건 대단한 경험이었어요.” 케이티가 말했다. 2014년 <킨포크>는 러시아, 일본, 중국, 한국에서까지 출간되었다. 윌리엄스와 비숍 부부는 ‘아우어 미디어(Ouur Media)’를 설립했다. 영상 시리즈물을 제작하고 <킨포크 테이블>이라는 서적을 출판하는 크리에이티브 에이전시였다. 또 <킨포크>를 만들어낸 ‘작은 모임’도 시작했다. 현실에서의 만남을 다시 되새기는 의미였다. 그 모든 것을 미학적으로 어찌나 선명하게 정의하고 표현했는지 빵도 자를 수 있을 정도였다.

    “포틀랜드 버전의 마사 스튜어트 리빙 스타일.” <뉴욕 타임스>는 2014년 <킨포크>를 이렇게 소개했다. 2년 후 <포브스>는 윌리엄스를 “30세 이하 영향력 있는 30인”으로 선정했다. 그리고 는 그를 레나 던햄(Lena Dunham)에 비교했다. “매거진의 크리에이터인 레나 던햄이 그녀 세대의 목소리라면, 윌리엄스는 그 자신의 눈이다.” 매거진을 주 대상으로 하는 런던의 디지털 디자인 에이전시 ‘퓨처 코퍼레이션’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마크 크레머스(Marc Kremers)는 “때로 하나의 잡지가 문화적인 순간을 캐치하고 구체화한다”고 말했다. “그 순간을 비추는 거울이 되는 거죠. 보고, 정하고, 아름다운 형태로 전달합니다. 그게 <킨포크>가 한 일이죠.” 크레머스에 따르면 <킨포크>에 장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지나치게 매력적이죠. 공격적인 것은 전혀 없습니다. 눈을 피로하게 하거나 튀는 것도 없어요. 전부 베이지 톤이죠. AI 봇이라면 손쉽게 같은 것을 찍어낼 수 있을 겁니다.”

    <킨포크> 창립자들에게 이런 비판은 요점을 놓친 것이다. “저는 언제나 <킨포크>는 미학이자 세상을 보는 관점이라고 말해요. 많은 사람이 오로지 미학만 보더군요”라고 킹은 말했다. <킨포크> 파트너들에게 <킨포크>란 허울이 아니었다. 그들의 삶이었다. 케이티는 <킨포크>라는 브랜드의 정신이 사라지는 것이 얼떨떨했다. “사람들이 제게 와서 어떻게 그런 모임에 들어가느냐고 묻더군요. 익스클루시브 멤버십이라도 있는 것처럼. 그래서 제가 ‘아뇨, 그냥 하시면 돼요. 저녁 식사에 사람들을 초대해보세요’라고 말했죠.” 하지만 실제로 이런 저녁 식사를 실천하기는 꽤 어려운 것이었다.

    <킨포크>가 2011년에 론칭했을 때 인스타그램은 약 9개월 전에 론칭한 상태였다. 여러 방법을 통해 이 두 매체는 완전히 잘 맞아떨어졌고 서로를 위해 존재하는 듯했다. 밀레니얼 세대의 인스타 피드가 킨포크 스타일로 꽉 차는 데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심지어 <킨포크> 잡지 자체의 사진을 포함해서 말이다. “어쨌든 어떻게 SNS에서 그렇게 인기 있었는지는 모르겠어요.” 윌리엄스가 말을 이어나갔다. “사람들이 커피 테이블, 카페, 책장 위에 있는 <킨포크> 잡지의 사진을 찍더군요. 그것도 엄청나게 많이. <킨포크> 시그니처 사진을 많이 봤어요. 아이스크림 콘에서 꽃이 피어나온 듯한 컷 같은 것들 말이죠. 계속 관심을 끌더니 SNS까지 진출하더라고요.”

    윌리엄스의 사업가 기질에 발동이 걸리려고 했다. 그러나 동시에 소로우를 사랑하며 자신이 중요하게 생각한 것들을 전달하려고 한 차분한 말투의 남자는 슬퍼졌다. “#kinfolk, #kinfolklife 같은 해시태그를 단 포스트가 정말 수십만 개는 되었을 겁니다. 그런데 독자들은 그냥 예쁜 테이블이나 카푸치노 잔의 사진 정도로만 받아들이더군요.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짐승이 된 것 같았어요.” <킨포크>의 ‘모임’에도 같은 일이 일어났다. “실제로 커뮤니티를 형성하는 데 중점을 두었는데, 누구도 실제로 하지는 않았어요.” 윌리엄스가 회상했다. “그냥 인스타그램으로 자랑하기 위한 포스팅을 올리더라고요. 그래서 스마트폰을 멀리하자는 메시지를 전달하기 시작했죠.”

    ‘킨포크’라는 단어는 일종의 기표가 되어 어느 곳에나 볼 수 있게 되었고, <킨포크>의 단조로움, 엘리트주의, 백인 편향적인 점을 풍자하는 패러디가 튀어나왔다. 킨스파이러시(Kinspiracy)라는 사이트는 인스타에 올라오는 <킨포크> 카피캣 이미지를 모아 “킨포크 매거진: 2011년 이후로 백인들의 아티스트 감성을 만들어냄”이라는 글귀와 함께 포스팅했다. 윌리엄스를 만난 사람들은 그가 여태까지 만난 어떤 사람과도 다르다는 느낌을 받는다. “사람들이 ‘조용한데, 잘 알게 되면 진짜 속이 깊다는 걸 알 수 있는 사람’이라고 말하는 사람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알겠어요?” 킹이 말했다. “네이선의 경우 그게 진짜예요. 침묵과 공간을 두고 앉아 있을 수 있죠. 다른 사람들이 자신에게 다가올 수 있게 해줘요. 그렇다고 꽃송이처럼 활짝 반겨주는 건 또 아니죠.”

    “사람들이 모여드는 사람이에요”라고 케이티가 그를 한마디로 묘사했다. 이것은 <유로맨>의 패션 디렉터인 렌츠 안데르센이 말한 것과 정확히 일치했다. 그는 몇 년 전 파티에서 윌리엄스를 처음 만났을 때를 기억해냈다. “대조적인 부분이 있어요. 극단적일 정도로 조용하거나 극단적일 정도로 카리스마가 있죠. 이 업계에서 오래 일했고 아는 사람도 많은데, 네이선 같은 사람은 처음이에요.” 그러나 그를 처음 만났을 때 ‘카리스마 있다’는 표현이 가장 먼저 떠오르지는 않았다. 윌리엄스는 솔직하면서도 직설적이었고, 그 속의 꿈꾸는 듯한 감상의 기저에는 굳건한 의지가 느껴졌다. 그는 적어도 인터뷰에서는 감정의 폭을 제한하려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킨포크>의 이른 성공을 이야기하는 목소리에는 어떤 승리주의, 우월감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리고 <킨포크>에 금이 가기 시작한 이야기를 그가 꺼냈다. 그런 이야기는 너무 침착하게 이어져서 무언가 억누르는 것인지, 아니면 그저 우리보다 더 깨어 있는 정신을 가지고 있기 때문인지 궁금해졌다.

    <킨포크>를 론칭하고 몇 년 뒤, 케이티와 윌리엄스는 그들의 신앙과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그 둘에게 완전히 새로운 충격은 아니었다. 케이티의 부모는 그녀가 어릴 때 이혼했고, 아주 가까운 사이였던 어머니는 모르몬 교회를 떠나며 레즈비언이라는 사실을 커밍아웃했다. 윌리엄스는 아주 독실한 모르몬교도로 성장했다. 그는 모르몬교도가 주로 사는 캐나다 작은 마을의 신실한 집안 환경에서 성장했다. 그러나 19세 이후 2년간 선교 활동을 통해 어떤 의구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는 LA에 배정되었고 교리에 따라 성실하게 일했으나, 영적 부분이 여전히 비어 있는 느낌을 받았다. “만약 정말 믿음을 가지고 있고, 종교적 믿음의 중요성을 느끼고 있다면 전도 활동은 굉장히 감사하고 보람 있는 일이겠죠. 하지만 저는 그런 걸 느끼지 못했어요. 그냥 주어진 것을 하기 위해 움직였죠.”

    선교 활동의 많은 행동 규칙 중 하나는 지정된 지역 외의 지리적 경계를 벗어나는 여행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는 단 한 번도 반항한 적 없다고 말했지만, 그만의 방식으로 룰을 깨버렸다. “게티 센터에 갔어요”라고 그가 말했다. 그리고 잠시 말을 멈추었다 이어나갔다. “몇 번이나요.” 지나고 보니, 그는 당시를 신앙과의 불화가 근원적으로 시작된 시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킨포크>를 론칭하고 나서 그와 케이티는 완전히 교회와 갈라서기로 결정했다. 킹은 당시에 윌리엄스가 모르몬 교리의 몇 가지 수행 사항을 지키지 않은 것을 깨달았다. “마감 직전에 네이선과 둘이서 야근을 하고 있었어요. 조용히 와인을 따른 글라스를 제 책상에 놓더라고요. 그리고 한마디 말도 없이 자기 잔을 손에 들고는 저에게 웃어 보이며 돌아서서 사무실로 돌아가더군요.” 더그와 페이지 비숍 부부는 종교 활동을 계속했다. 친구들의 결정에 상심하기는 했지만 말이다. 그들은 더 이상 종교 생활을 함께할 수 없었다. “눈물을 흘렸죠.” 네이선이 회상했다. 하지만 이로 인해 우정에 금이 가지는 않았다. “그 네 명이 하나인 것과 같았죠”라고 킹이 말했다. “서로 아주 가깝고 깊이 엮여 있었어요. 우정, 로맨틱한 사랑, 가족적인 사랑, 이 모든 게 합쳐져 있었어요. 그들 자체가 커뮤니티였죠.”

    그러나 왜인지 정확히 말할 수는 없지만, 2014년경 윌리엄스는 한계점에 도달했다고 느꼈다. <킨포크>는 유례없는 호황을 맞고 있었다. 미국판만 7만5,000부 이상을 찍어내고 있었다. 그러나 윌리엄스는 숨이 막혀왔다. “제가 원한 형태가 아닌 무언가에 너무 많은 에너지가 들어가고 있었어요. 어디 다른 데로 가야만 한다는 확신이 들었어요.” 말 그대로였다. 창립자 네 명은 <킨포크>의 헤드쿼터를 포틀랜드보다 더 대도시인 어딘가로 옮겨야 한다는 데 동의했다. 이들은 다른 옵션을 면밀히 살폈다. 파리, 런던, 뉴욕… 그러나 윌리엄스의 마음은 더 먼 곳에 가 있었다. “코펜하겐은 네이선의 소울 시티죠”라고 케이티가 말했다. “코펜하겐과 관련된 모든 것에 애착을 느껴요. 그가 집처럼 느끼는 장소 중 하나예요.”

    사업적 관점에서 덴마크의 수도라는 점은 어느 정도 의미가 있었다. <킨포크>의 미니멀한 미적 감각은 스칸디나비아 스타일에서 왔고, 이미 <킨포크>와 에이전시는 많은 덴마크 출신 사진작가나 디자이너와 협업하고 있었다. 하지만 장애물도 있었다. 북유럽의 세금과 임금으로 인해 포틀랜드에서 작업하는 것보다 비용이 훨씬 많이 들었다. 그리고 친구와 가족이 보내는 정신적 지지, 고향으로부터도 멀리 떨어지게 되었다. 케이티는 사무실 이동이라는 생각에 의구심이 있었지만 ‘아이를 갖고 완전히 정착하기 전 마지막 모험’이라는 생각으로 의구심을 지워버렸다. 비숍 부부는 이미 그 무렵에 두 아이가 있었다. 이 두 사람은 이 이동 계획의 최전선을 담당했으므로, 윌리엄스보다 훨씬 경제적 압박에 대한 많은 것을 알고 있었고 더 많이 우려했다. “비숍 부부는 내가 변화를 일으키거나 나갈 거라는 것을 알고 있었어요.” 윌리엄스가 말을 이어갔다. “그들에게 동료를 잃는다는 것과 같은 의미였죠. ‘힘내자’고 할 수 있는 그런 좋은 순간은 아니었어요. 어쨌든 그들도 동의했고, 동시에 만약 잘되지 않을 경우 제게 책임이 있다는 것도 확실히 했죠.” 불확실함 속에 8개월을 보낸 뒤(가재 요리로 완성한 ‘킨포크다운’ 송별회를 한 번 가졌다), <킨포크> 팀은 2015년 여름 마침내 코펜하겐에 정착했다. 윌리엄스는 “탱크를 다시 채운 것 같은 느낌이었어요”라고 그때를 묘사했다.

    당신이 진짜 어떤 사람인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킨포크>가 윌리엄스를 바꾼 것인지, 윌리엄스가 매거진을 바꾼 것인지는 알 수 없을 것이다. 사무실을 이전하기 전에 두 사람 모두 거짓 없는 성실함을 간직하면서 점차 세속적으로 성장해왔다(<킨포크> 17호는 마지막으로 포틀랜드에서 출간된 판본이다. 친인척으로부터 멀어져 개인적인 공간을 가지는 것이 괜찮은 것이라는 메시지를 전해 독자들에게 위안을 주었다). 그러나 윌리엄스가 스스로를 위해 세운 아이덴티티는 곧 다가올 변화 혹은 상처를 견뎌내지 못했다. 이사했을 때 케이티는 임신 4개월이었다. 어느 날 늘 해오던 초음파 진단을 받은 후, 케이티와 윌리엄스는 어떤 준비도 하지 못한 채 의사로부터 아기에게 심장 질환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미 그때까지 꽤 시간이 지났는데, 의사는 우리가 이미 알고 있다고 추측하더군요.” 하지만 처음 듣는 얘기였다. 두 살이 되기 전에 여러 번 수술을 받아야 하는 병이었다. 만약 태어났다면 레오라는 이름을 가졌을 아이는 스무 살까지 살 가능성조차 희박했다. 아기가 이런 병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대부분의 부모는 임신중절을 결정한다. 이미 임신한 지 어느 정도 되었기에 케이티와 윌리엄스는 48시간 안에 결정을 내려야만 했다.

    케이티와 윌리엄스 부부는 결국 그들의 성장과 함께해온 종교적 믿음은 더 이상 의미가 없다고 결론을 지었다. 하지만 그들은(신도 대부분이 그렇겠지만) 어떤 믿음을 가져왔는지 명확히 말할 수는 없었다. “돋보기를 내 양심에 가져다 댄 것 같았죠.” 윌리엄스는 둘만의 결정을 내리기 위한 격렬한 대화의 시간에 대해 이야기했다. “포틀랜드에 있던 사무실은 가족계획연맹(Planned Parenthood) 근처에 있었죠. 차를 운전하며 그곳 근처를 지나갈 때면, 피켓을 들고 항의하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제 윤리 의식의 한구석을 면밀히 파헤쳐보는 시간을 따로 가지지 않았어요. 그런데 48시간 안에 저는, 아니 우리는 그 문제에 대한 결정을 내려야 했던 거죠.” 케이티와 윌리엄스는 레오의 병에 대해 월요일에 들었다. 그리고 그 주 금요일 케이티는 임신중절을 결심했다. 둘 사이에는 거리감이 생겼고 관계는 악화되었다. 임신이 진행되면서 케이티는 업무량을 줄였다. 그리고 결국 완전히 그만두었다. 반면 윌리엄스는 <킨포크>에 더욱 투신했다. 케이티는 이번 상실로 인한 치료를 받았고, 술이 어느 정도 문제를 일으킬지에 대한 충분한 경험이 없었다. “치료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설명하니 ‘큰 문제예요’라고 말해주더라고요.” 그녀가 말했다. 사무실을 이전할 때까지 윌리엄스와 케이티는 윌리엄스의 표현에 따르자면 그야말로 딱 붙어 다녔다. “학교에서 만났을 때가 생각났어요. 가족의 기대와 상관없이, 학교에서 우리에게 어떻게 행동하라고 지시했는지에 상관없이, 우리가 있는 그대로의 사람이 되고 우리에게 옳다고 느끼는 것을 추구하기 위한 십자군 원정을 함께 했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지금 케이티는 그와 가까워질 수 없는 것처럼 보였다. 처음에 케이티는 그 거리를 윌리엄스가 슬픔을 표하는 방식 때문이라고 생각했지만, 이 이유는 어느 순간부터 설득력을 잃었다. 어느 날 밤 그녀는 그의 영혼을 갉아먹고 있는 것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고, 이유가 밝혀졌다. 윌리엄스는 게이였다. “케이티에게 말할 계획이 없었어요. 영광스럽지도, 자랑스럽지도 않은 순간이었죠. ‘우리의 관계를 위해서나 나 자신을 위해서나 계속 이렇게 살아서는 안 돼’라는 생각에 가까웠어요. 나 스스로와 그녀에게 진실을 숨기고 있는 거니까요.” 하지만 늘 거짓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케이티에게 끌렸고, 케이티와 사랑에 빠졌고, 미래를 함께할 거라고 완전히 생각했어요. 그렇다고 제가 남성에게 육체적으로 끌리지 않았다는 것은 아니에요. 결혼 생활 내내 그랬죠.” 오랜 시간 그는 그저 성적 이끌림으로만 치부하고 억눌렀다. “수치스럽지는 않았어요. 완전한 비밀 같은 것이었죠.”

    촬영하는 케이티 설과 네이선 윌리엄스. 킨포크는 ‘의도성’이라는 단어를 밀레니얼의 표어로 만들었다.

    그러나 레오의 죽음은 그의 마음을 담금질했고 내적 갈등을 더 강렬하게 만들었다. “육체적 필요나 성적 욕망은 억누르기 쉬웠어요. 그러나 이를 넘어서 자아 정체성이라고 느껴지면 더 힘들죠. 스스로에게 거짓말을 하는 것처럼 느껴지기 시작했고, 완전한 나 자신으로 존재하지 못한다는 생각이 이번에는 들었어요.” 케이티는 허를 찔린 것 같았다. “그를 괴롭히는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우리의 미래에 영향을 미칠 무언가일 것이라고는 의심하지 못했어요.” 여전히 어머니의 커밍아웃이라는 경험은 케이티가 윌리엄스의 고통에 예민하게 반응하도록 만들었다. 윌리엄스가 커밍아웃한 다음 날, 그녀는 편지를 써서 식탁에 남겨두었다. 케이티가 얼마나 그를 사랑하는지와 그의 결정을 존중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이로 인해 둘의 관계는 드라마틱하게 변화했으며, 정직과 투명성이 더욱 중요해졌다. “무엇이 사실인지 혹은 대안적 현실에서 살고 있는 것이 아닌지 스스로에게 질문해본 적 있나요?” 그녀가 말했다. “저는 우리의 사랑이 사실이고 우리가 서로를 위한 짝이라는 사실에 안착해 있었죠.” 그들은 케이티가 포틀랜드로 돌아가기 전 3~4주 동안 짐을 정리했다. “만약 그가 게이라는 사실을 처음부터 말해줬다면 더 나았을까요?” 그녀가 물었다. “제 생각에는 우리의 아이들이 그에 대한 답인 것 같아요.” 덴마크를 떠나기 전 케이티는 다시 임신했다. 둘의 딸인 비(Vi)는 2016년 가을에 태어났다. 그들의 거리감에도 불구하고 비숍 부부는 코펜하겐으로 옮긴 것을 대단한 모험으로 여겼다. 하지만 그들이 메인 쇼핑 스트리트에 있는 넓고 시크한 사무실에 정착하자 금전적 압박이 곧 머릿속을 잠식했다. “사업을 처음 시작할 때부터 우리는 언제나 외부의 자본 파트너가 개입하지 않고 우리끼리 해결해나갈 수 있을지 생각해왔어요”라고 더그 비숍이 말했다. “하지만 우리가 코펜하겐으로 옮기고 나서 곧이어 새 사무실과 다른 기타 비용으로 인해 자금 흐름에 압박을 느끼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이런 금전적 스트레스는 아주 빠르게 늘었죠.”

    이런 자금 압박은 외부 투자자를 찾아나서게 만들었고, 다사다난한 개인사와 엮여 결국 비숍 부부와 케이티는 자신들의 지분을 전부 내놓고 <킨포크>를 떠나 다른 프로젝트를 찾아나서기로 했다. 이 과정은 아주 고통스러웠고, 스트레스와 갈등은 윌리엄스와 더그 비숍의 우정을 망가트렸다. “더그는 저의 베스트 프렌드였죠. 모든 일에 함께했어요. 레오의 일도 우리 집 소파에서 5주나 보내며 고통을 함께했죠. 우리만 홀로 두고 싶지 않아 했거든요. 결국에는 사업이 이렇게 만들었어요. 그저…” 잠시나마 그의 목소리가 떨렸고 스스로를 추스르기 위해 잠시 말을 멈췄다. “일이 우리를 괴롭힌 거죠.” 그들은 그들의 파트너십을 해체하는 서류에 서명하고 나서부터 더 이상 말을 나누지 않았다.

    사람들이 바뀐 것처럼 <킨포크>도 바뀌었다. “핵심 주제인 창의성, 공감, 커뮤니티는 그대로 남았어요.” 편집장인 존 클리포드 번스(John Clifford Burns)가 말했다. “그러나 접근법은 <킨포크>의 이전 역사에서보다는 덜 엄격해졌죠.” <킨포크> 최근 호에는 유토피아 건축에 관한 특집 기사, 음울한 분위기의 인디 가수 샤론 반 이튼(Sharon Van Etten)의 프로필, 카라바조, 톰 하디, 영화 <Call Me by Your Name>이 표현한 복숭아에 대한 500단어 이내의 단상을 다루고 있다. 이미지 하단에 작게 나오는 브랜드 정보 같은 글자를 제외하고는 패션 화보는 흐릿한 누벨바그 영화의 아웃 테이크 같은 느낌이었다. 아보카도 토스트나, 에디슨 전구 같은 것은 일절 보이지 않았다.

    현재 다섯 명인 비숍 가족은 서던캘리포니아에 살고 있다. 현재 더그는 비즈니스 전략·마케팅 컨설턴트로 일한다. 케이티는 현재 포틀랜드에서 세살 난 비와 함께 NGO를 위한 보조금 유치 및 컨설턴트 활동을 하고 있다. 그러나 포틀랜드에서 개인적 상실감을 한층 더 느낀다. 지난봄 그녀의 새로운 파트너가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윌리엄스와 케이티는 여전히 좋은 관계를 유지하지만, 윌리엄스가 이제 함께 마음을 나누는 사람은 남자 친구였다. 그리고 비록 새로운 투자자가 새로운 프로젝트를 맡고자 하는 그의 욕구를 지지하지만, 윌리엄스는 결국 자신이 <킨포크> 자체의 한계를 넘어서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캐나다 서점 체인 ‘인디고’의 CEO가 그에게 접촉해왔을 때 저항하기 힘들었다. “10년이 넘는 동안 <킨포크>를 스타트업에서 잘 굴러가는 기업으로 키웠어요. 직접 실무를 한 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났죠. 저는 이제 새로운 것에 도전할 준비가 되었어요.”

    <킨포크>는 여전히 코펜하겐의 세련된 갤러리 공간에서 분기별로 발행하고 있으며, 발행 부수는 7만5,000, 온라인 조회 수는 29만5,000건이다. 하지만 직원은 더 줄었다. 덴마크에서는 세 명의 정규직과 세 명의 파트타임 직원이 일하며, 세계 다른 지역에서는 네 명이 일한다. 윌리엄스는 여전히 <킨포크>의 파트너로 남아 있지만, 6월에 인디고의 CCO(Chief Creative Officer)로 계약해 남자 친구와 함께 토론토로 이사했다. 그는 현재 지난 1년 동안 600만 명 이상의 고객을 확보하고 전국 199개 매장을 보유한 기업의 브랜드 아이덴티티를 디자인하는 일을 맡고 있는데, 이 매장 중 상당수는 선물, 가정용품, 전자제품, 패션 아이템 등을 판매하는 대형 매장이다. 윌리엄스와 덜 ‘킨포크다운’ 공간은 상상하기 힘든 조합이다.

    하지만 윌리엄스는 이 조합이 잘 맞는다고 여긴다. 그는 이렇게 설명했다. “우리는 포커스 그룹 인터뷰를 통해 우리의 고객에게 문제점이 무엇인지 물어봤습니다. 정확히 <킨포크>의 타깃이더군요. 사람들은 ‘디지털로는 연결이 잘되어 있는데, 진짜 인간관계에서는 결핍을 느껴요. 어떻게 밸런스를 찾아야 할까요? 어떤 커뮤니티를 찾아야 할까요?’라고 말하더군요.” 인생의 여러 부분에서 윌리엄스를 억압해온 여러 중요한 문제가 있었다. 이를테면 모르몬교에 대한 그의 의구심, 그의 성적 정체성, 그의 슬픔 같은 것이다. 심지어 지금조차 그가 신중하고 느린 말투로 사람들의 고통 해소를 돕는 브랜드를 설명하고 무엇을 파는지 얘기할 때도 당신은 네이선이 얼마나 많은 고통을 스스로에게 허락했는지 궁금할 것이다. 하지만 최근에 알 수 있는 것은 네이선 윌리엄스가 진정성을 추구하는 데 진실하다는 것이다.

    그가 한 세대의 미학을 정의하는 데 도움이 될 잡지를 창간하기 전부터, 아니 <킨포크>가 대량으로 출판되고 세련된 디너 파티, 수작업으로 테일러링한 옷, 완벽한 인스타그램 필터를 적용하기도 전부터, 윌리엄스는 그가 자란 캐나다 작은 마을의 서점에서 친구들과 놀곤 했다. 이 경험과 현재 일하는 회사는 같은 느낌을 갖고 있다. 지리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집에 돌아온 느낌이라는 것이다. “그는 매우 행복해 보여요. 이제 자금 문제도 없고 사랑하는 아름다운 남자를 만났고 전 세계를 여행하게 되었죠. 한 편의 좋은 안데르센 동화 같은 이야기예요”라고 그의 친구인 렌츠 안데르센이 말했다.

      포토그래퍼
      조제핀 슐레(Josephine Schiele)
      글쓴이
      리사 아벤드(Lisa Ab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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