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그> 에디터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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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그> 에디터의 책

2020-10-22T11:29:56+00:00 2020.10.21|

<보그> 피처 에디터 김나랑이 그동안 써오던 글을 모아 에세이집을 냈다.
<누구나 한 번쯤 계단에서 울지>는 매일 한 컵의 고됨을 마시는 직장인들의 이야기다.

나도 그런 적이 있었나. 20~30대를 저자와 같은 마감 노동자로 보낸 나는 계단에서 울고, 옥상에서 울고, 화장실에서 울었다. <누구나 한번쯤 계단에서 울지>. 이렇게 처량한 기억을 되살리는 제목이라면 분명 누군가의 과거나 현재를 위로하기 위해 쓴 글이 아닐까. 책의 저자이자 <보그> 피처 에디터인 김나랑은 이렇게 답했다. “저를 위로하기 위해서였어요.” 의외였다. “대학 졸업 후 지금까지의 시간이 허망하다고 느낀 적이 많아요. 1년 정도 주말마다 카페 소파에서 이 글을 쓰면서 위로받았고, 누군가 공감해준다면 더 큰 위로가 될 것 같았어요. 일종의 보상 심리로 낸 책이에요. 너무 이기적인가요?(웃음)”

<누구나 한 번쯤 계단에서 울지>는 매체에 기고한 기존 칼럼과 책을 위해 새로 쓴 글을 묶은 에세이집이다. 남들을 적당히 의식하며 살아가는 30대 여성의 ‘지금 여기’에 대한 이야기이자, 신랄한 직장인 칼럼, 거품 뺀 에디터 입문서이기도 하다. 저자 스스로는 이 책을 어떻게 정의할까. “부제가 ‘평범한 어른이 오늘을 살아내는 방법’이에요. 우리는 생계와 노후를 위해 일하지만 거기서 성취감도 얻고 싶고, 또 누구보다 잘 놀고 싶고, 자기를 치유하기도 해야 하고… 할 게 너무 많죠. 2020년 한국에서 일하며 사는, 물려받을 재산이 10억원 이하인 사람들을 위한 책이에요.” 이 직구 스타일의 솔직함. 나는 한때 직장 동료였던 김나랑의 이런 면모를 흠모해왔다. 선천적으로 느끼한 것을 참지 못하는 그는 자신의 삶을 적당히 미화할 줄도 모른다. 직장 동료 험담을 점심 반찬 삼고(프로 미워러), 낮은 연봉에 자존심 상해 하고(월급의 흑역사), 세상에 치여 인간을 대상화하다 보니 엄마에 대한 감정마저 고갈되었다는 속내(엄마, 같이 걷자)까지 내비친다. 이건 진짜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정말 심한 건 편집자가 거둬냈다”고 웃는 그에게 톰 포드의 <녹터널 애니멀스>(2017)처럼 당신을 괴롭힌 자들에게 이 책을 보내면 어떻겠느냐는 실없는 농담을 던졌다.

“어차피 그들은 이게 자기 이야기인 줄도 모를 거예요.”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괴롭히는 쪽의 사람들은 기억력이 아주 형편없다. 곁에서 지켜본 그는 에디터의 운명을 타고난 사람처럼 유능하고 상냥하다. “감정이 메마르다 못해 기계처럼 되어버렸다”고 입버릇처럼 말하지만, 함께 일하던 시절 나는 그를 ‘천사’라 불렀다. 이처럼 여유롭고 능숙해 보이는 그도 나름의 부침을 겪으며 익힌 태도가 있다. “예의는 차리되 굽실대지 말 것.” 그건 무슨 의미일까. “대화를 마치고 뒤돌았을 때 내가 초라해지는 말이 있잖아요. 상대에게 잘 보이기 위해 하는 말. 그건 친절과는 달라요. 가짜 얘기는 그만하고 싶어요.” 솔직함을 미덕으로 삼는 그는 책의 머리말에서 이렇게 고백한다. “어른이 될수록 비밀이 많아지는 것 같다. 함부로 열 수 없는 검은 방이 늘어난다. 이 책에선 그나마 슬쩍 열 수 있는 적당한 아픔을 공유하고 싶다.” 공유하는 용기는 공감을 부르고 또 감정의 연대로 이어진다. “사람 사는 건 다 비슷하게 허름할 수밖에 없다”고 말하는 이 책에 적지 않은 위로와 용기를 얻었다고 하면 그는 느끼하다며 또 몸서리를 치겠지. 애석하게도 이번만큼은 저자의 의도가 빗나갔다. ─ 김현민(영화 저널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