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 화보

패션계 F4를 소개합니다

2021.05.13

by Anna

    패션계 F4를 소개합니다

    LVMH와 케어링 그룹, 루이 비통과 디올, 구찌와 생로랑.
    니콜라 제스키에르와 마리아 그라치아 키우리 그리고 알레산드로 미켈레와 안토니 바카렐로.
    당대 패션 제국의 첨탑에 서서 승리의 깃발을 날리는 패션 디자이너 4인을 <보그>가 만났다.

    디올의 마리아 그라치아 키우리.

    아베 마리아

    디올의 수장이 된 지 4년째인 마리아 그라치아 키우리는 눈부실 정도로 성공적인 커리어와 함께 페미니즘적 성공을 같은 맥락에서 보여준다. 그 속에는 권력, 유혹, 열정, 본능, 지성, 연약함, 이 모든 것이 뒤섞여 있다. 플래티넘 블론드 헤어에 짙은 아이라인, 강한 이탈리아 억양의 디올 크리에이티브 디렉터가 자신이 신뢰하는 가치와 오늘날 패션에 대한 생각을 <보그>에 전한다.

    WRITER SYLVIA JORIF

    마리아 그라치아 키우리(Maria Grazia Chiuri)는 공동체 의식을 지닌 인물이다. 디올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가 된 것은 4년 전 7월이었다. 그녀는 메종(Maison)이라는 단어를 더욱 고결한 것으로 만들기로 결심했다. 또 여성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서 ‘여성들의 연대’라는 주제에도 매료되었다. 처음부터 그녀는 페미니스트로서 연대를 유지해왔으며, 쇼와 전시, 최근에는 팟캐스트에서도 여성의 연대에 대한 대담을 나누는 등 가능한 모든 수단과 시도를 통해 여성들에 대한 지지를 표명해왔다. 동시에 브랜드에서는 ‘노하우’로 일컫는 것들에 대한 뜨거운 애착도 가지고 있다. 마리아는 각 분야의 장인들, 발굴해낸 기술, 희귀한 자수 기법이나 정성 들여 만들어내는 직물에 대해 몇 시간이고 얘기할 수 있었다. 최근에 열린 2021 크루즈 컬렉션에서는 완전히 근본으로 돌아가 새롭게 시작했다. 코로나19가 창궐하는 환경에서 역사상 유례없는 형태의 패션쇼를 만들었다. 이탈리아 풀리아주에 있는 도시 레체(Lecce)의 두오모 광장에서 패션쇼를 개최한 것이다(7월 22일 온라인으로 상영했다). 패션쇼의 모든 것은 이탈리아 풀리아주의 도시에서 영감을 얻었다. 이 컬렉션은 그녀가 자신의 아버지에게 헌정하는 매우 개인적인 쇼이기도 했다. 동시에 코로나 사태로 치명적 타격을 받은 지방 도시를 지원하는 방법이었다. 실낱같이 전해 내려오는 전통을 되살리는 것은 “극히 드문 아름다움과 섬세함을 간직한 작업”이라고 그녀가 말했다. “단순한 자수를 넘어서 하나의 예술 작품 같아요.” 이런 장인들을 지키기 위해, 자수 기술자부터 음악가에 이르기까지 모든 유능한 인력을 끌어모았다. “점점 더 기회가 적어지는 시기를 살아가는 젊은 세대에게 그들이 지닌 것으로 무언가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강력한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어요.” 이 당차고 능력 있는 여성이 먼저 담론을 재조명하고 이끌며, 동정이 아닌 공감을 모두와 나누려 한다. 디올이라는 패션 브랜드를 이끄는 여성 리더이자 한 가족의 가장이 보여주는 힘인 것이다.

    최근의 이 독특한 시기를 어떻게 보냈나요? 자가 격리하는 동안 이탈리아에 있었는데, 상황이 아주 심각했죠. 그 기간에 사회 전 계층의 연대를 훌륭히 보여준 모국이 굉장히 자랑스러웠어요. 정부부터 프라다와 아르마니 같은 브랜드도 많은 활동을 했고, 이탈리아 국민도 이번 위기를 맞으며 박애 정신을 발휘했습니다. 우리는 서로 돕는다는 기독교적 전통이 몸에 아주 깊이 배어 있거든요. 서로뿐 아니라, 누구보다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 노인들을 지원하기 위해 애썼어요. 이탈리아에서 특히 남부 지역이 더 걱정이 많았는데요. 이탈리아 남부와 북부는 정말 다르거든요. 아버지가 남부 출신이라 저도 잘 알죠. 예를 들면 학교 문제가 있어요. 컴퓨터가 없는 집에서는 아이들이 어떻게 계속 수업을 받을 수 있을까요. 또 교황청이 로마에 있다는 것도 중요하죠. 우리 모두 열성적인 가톨릭 신자는 아니더라도, 교황청이라는 강력한 존재가 최근에 의지가 많이 됩니다.

    크리에이티브의 관점에서, 당신은 지금 이 시기를 어떻게 보내고 있나요? 디올에서 일하면서 몇 달간 디올 디자인을 고찰하기 위해 프랑스 그랑빌(Granville)에서 몇 달 머물렀다고 들었어요. 요즘 디자이너들은 잘 모르는 방식 같군요. 지난 40년 동안 제게 로마는 쉬러 가는 곳이었어요. 제가 태어난 도시와 저 사이의 관계가 조금 달라졌죠. 저는 일에 대한 생각이 굉장히 전통적인 사람이에요. 매일 사무실에 9시까지 출근하고 7시에 퇴근하는 것이 잘 맞고 좋아요. 그리고 팀원들과 여러 가지를 공유하는 것이 아주 중요한 부분이죠. 이 직업의 가장 좋은 부분은 창의적 교류를 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지난 두 달간 집에 홀로 있다는 것이 몹시 이상하게 여겨졌어요. 이런 유례없는 시기를 보내다 보니, 제가 처음 패션계 일을 시작하던 때를 회상하게 되더군요. 꽤 어린 나이인 스물두 살에 일을 처음 시작했죠. 당시에는 여름과 겨울 딱 두 가지 컬렉션만 있었어요. 한 컬렉션을 준비하는 데 6개월을 투자할 수 있었죠. 패션이라는 것은 일종의 가족 사업이라 오늘날의 럭셔리 비즈니스와 매우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저는 과거의 방식으로 돌아가고 싶었어요. 크로키를 하고, 자르고, 붙이는 것처럼 몸으로 직접 무언가를 하며 작업을 풀어내는 방법 말이죠. 저는 제 주변에 종이가 많아야 해요. 요즘 들어 가장 어렵다고 느끼는 것은 화상회의예요! 종종 연결 상태가 좋지 않아서 큰 소리로 말해야 해요. 너무 웃겨요. 이탈리아 사람이 받아들이기엔 너무 이상한 수단 같아요.

    이번 코로나 사태로 패션쇼 대부분이 온라인 진행으로 바뀌었습니다. 지금 일어나는 일은 정말이지 역사상 유례가 없었죠. 이전에는 쉬웠어요. 다 정해져 있었거든요. 제 팀에 걱정거리가 생겨도, 모든 것이 계획되어 있어서 딱히 불안하지 않았어요. 이제 저는 변화를 맞이할 준비가 되었어요. 이런 상황에 적응하는 것이 그렇게 어렵지는 않아요. 모든 종류의 대안을 준비하고 있어요. 하지만 다시 말하지만, 저는 전통적 방식의 사람이에요. 현재 패션계는 많은 비판을 받고 있죠. 하지만 패션업계의 시스템, 패션쇼의 원칙 같은 것이 지역과 경제에 많은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세계의 수많은 기업과 협업하죠. 특히 프랑스와 이탈리아에서요. 그래서 우리는 그런 기업을 지원해야만 합니다. 어느 한 가지 전통을 유지한다는 것은 전체의 균형을 맞추는 것이기에 중요합니다. 아무도 혼자서 완벽하지는 못하니까요. 종종 심한 비판을 받기도 합니다. 우리는 어떤 상황은 바꿔나갈 수 있고, 그 환경에서 일하죠. 이런 것들을 전부 없애버려서는 안 됩니다. 패션이라는 것은 우리의 문화이기도 해요. 우리는 지속 가능한 발전과 함께 일을 해나갑니다. 코로나 관련 통제가 더 강화되었고, 공장과 아틀리에의 근무 환경은 현재 좋은 상태라고 확실히 말할 수 있어요. 이런 기조로 더 진행해나갈 생각입니다.

    신의 디자인이나 장식에는 그동안의 페미니즘적 발언과 대치되는 성향이 종종 보입니다. 섬세하고, 여리고, 매력적인 실루엣을 강조하는데요. 이 양면성에 대해 설명해주세요. 맞아요. 여성들은 두 가지 면모를 갖고 있다고 생각해요. 여성들은 곧고, 강하죠. 동시에 약하기도 해요. 하지만 이런 식으로 모든 사람을 특징지을 수는 없겠죠? 이번 코로나 위기를 통해 이런 양면성이 더 부각되었다고 봐요. 코로나 위기는 여성들에게 더 의미가 있죠. 엄청난 능력을 발휘해야 하거든요. 일하면서 아이들의 학교도 챙겨야 하고, 가정과 일의 균형을 맞춰야 하죠. 이전에 비해 더 강해졌으면서, 더 약해지기도 했어요. 제 작업에 이런 변화를 반영했죠. 제 에고를 과시하기 위해 작업하는 것이 아닙니다. 창작자의 접근법도 아니고요. 그저 제가 패션에서 좋아하는 부분이, 전 세계 여성들의 담론이라는 것입니다. 저는 다만 이 기회를 살릴 뿐이고, 디올이 저를 따라 이 프로젝트를 지지한다는 것이 대단히 자랑스럽습니다. 이렇게 명성이 높으면서 잘 알려진 브랜드를 통해 목소리를 낼 수 있고 담론을 제시할 수 있다는 것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멋진 일이죠. 이번 시기를 통해 이런 가치를 전달할 수 있겠다고 여겼습니다. 다른 분야의 아티스트, 단체, 문화적 적응을 위한 공간을 제공하고, 여성들을 위한 목소리를 내기도 하고요. 이는 패션이 현대의 삶, 우리 사회, 지금 사는 공간, 우리를 둘러싼 모든 것에 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디올의 첫 여성 디렉터가 되었습니다. 어떻게 그 악명 높은 유리 천장을 부술 수 있었나요? 솔직히 말하자면, 저 스스로를 그런 식으로 정의하고 싶지 않군요. 한 여자가 디올의 수장이 되었다? 저는 마리아 그라치아 키우리예요. 그게 전부죠. 저는 제 직업을 잘 알고 있어요. 하지만 제가 이 자리에 온 후 이런 반응을 종종 들으면서 다른 것을 깨달았죠. 저는 굉장히 평범한 가정환경에서 자랐어요. 제가 패션계에 발을 들였을 때 지인이라고는 전혀 없었어요. 한 계단씩 제가 올라갈 수밖에요. 이 자리에 제 인생의 중반인 52세가 되어서야 왔고, 잘된 일이라고 여깁니다. 어떤 역할을 맡는다는 것은 좋지만, 제 지위에 집착하지는 않아요. 펜디에서 10년을 일했고, 발렌티노에서는 17년을 보냈죠. 제가 관심 있는 것은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것이에요. 젊을 때부터 같은 생각으로 일해왔어요. 단순히 그것이 제 열정이기 때문이에요. 이전에는 단순하던 것들이 이제는 더 직접적인 방향으로 바뀐 것이죠. 안나 펜디(Anna Fendi)와 5분 정도 인터뷰한 것이 생각나요. 프랑코 모스키노(Franco Moschino)를 만날 때와 똑같았어요. 그때도 그를 정말 만나고 싶었거든요. 모스키노에게 제 서류를 보여주니 이렇게 말했어요. “원하신다면 지금이라도 바로 시작하죠.” 제가 이제야 느끼는 것은 열정에 따라 사는 것이 정말 어렵다는 겁니다.

    당신은 협업하는 분들에게 지원을 아끼지 않죠. 최근 크루즈 컬렉션에서는 젊은 디자이너인 그레이스 웨일스 보너(Grace Wales Bonner), 파테오(Pathé’O)와도 함께 일했습니다. 당신의 힘을 젊은 디자이너들과 순수하게 공유한 것이라고 봐도 될까요? 웨일스 보너와 ‘문화적 귀속’에 대해 흥미로운 대화를 나눈 적 있어요. 그녀가 아주 중요하게 다루는 주제이기도 하죠. 이 주제에 대해 패션계는 굉장히 격렬한 비판을 받고 있어요. 하지만 저는 창작에 국경이 없다고 믿습니다. 이 대화를 통해 우리는 패브릭이라는 공통적인 관심사를 발견했죠. 특히 요즘 제가 관심을 갖는 것은 아프리카 날염 패브릭 왁스(Wax)죠. 보너가 그러더군요. “우리와 함께 작업할 수 있는 몇몇 아프리카 기업을 소개해드릴 수 있어요.” 저는 코트디부아르에 갔을 때 아주 유망한 디자이너인 파테오를 만난 적 있습니다. 그는 프랑스 패션에 대해 더 알고 싶어 했고, 제가 그를 디올로 초대해 협업했죠. 정말 좋은 경험이었어요. 진짜 왁스 패브릭을 판매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는 얘기를 그때 들었습니다. 가짜가 아주 많다고 하더군요. 디올의 모조품이 많은 것처럼요. 패션과 럭셔리 이면의 것들을 봐야 합니다. 럭셔리 제품은 부유층만 위한 특권적 제품이 아닙니다. 구매할 돈이 없어도 아름다운 그림을 좋아할 수 있죠. 저에게 이번 마라케시 컬렉션은 콜라보레이션을 더 늘리고, 이런 패션을 재조명하는 수단이었어요. 로컬 아티스트와 소통하며 다양한 로컬 문화를 공유할 수 있었죠. 이런 과정을 통해 우리 자신에 대해 더욱 잘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접촉이 패션에도 좋은 영향을 미친다고 봅니다. 저는 서로 돕는 것이 좋아요. 이런 공동 관심사에 대한 지식을 더 심화시킬 수도 있고요. 서로를 비난하기보다 전 세계적으로 우리가 함께할 수 있는 것에 대해 대화할 수 있는 것이 중요합니다. 마라케시 컬렉션은 이런 화합의 장을 상징합니다.

    이러한 발상으로 디올의 상징적인 바(Bar) 재킷을 그레이스 웨일스 보너에게 맡긴 건가요? 그렇죠. 크리스찬 디올을 그녀만의 방식으로 재해석하기를 바랐어요. 저와 다른 문화권, 다른 세대의 여성이 해주길 바랐죠. 이 꾸뛰르 정장 재킷은 디올의 상징적 유산과 같아요. 이 모든 요소를 모아 조화롭게 만든 거죠. 좋은 상징물이 되었습니다.

    그럼 당신과 크리스찬 디올의 공통점은 뭔가요? 전통을 중시한다는 거죠. 동시에 다양성에 매료되었다는 것도요. 둘 다 맞아요. 어떤 의미에서는 이런 생각을 통해 우리의 문화적 전통에 관심을 더 갖게 됩니다. 제 경우에 특히 더 그렇고요. 예를 들면, 이탈리아에 있을 때 기억으로는 우리 가족 모두 재봉을 할 줄 알았거든요. 하지만 이 기술을 잃게 되었고 다음 세대에 전할 수 없었죠. 어머니는 제가 공부한다는 것에 굉장히 집착하셨어요. “나처럼 되어서는 안 된다.” 그렇게 말씀하곤 하셨죠. 어머니는 다른 선택이 없었거든요. 그래서 제가 디자인 스쿨에 들어가기로 한 것이 꽤 충격이셨을 거예요. 좋은 직업을 갖지 못할 거라고 여기셨어요. 그래도 저는 직접 몸으로 하는 것의 가치를 믿었습니다. 이 일은 창의적이고 모든 의상은 각기 다른 것이거든요. 한 장의 크로키, 제작 과정이 가지는 의미가 다 다르기 때문이죠.

    이런 정신을 동료들에게도 요구하시나요? 물론이죠. 젊은 세대는 커뮤니케이션을 좋아하죠. SNS를 어떻게 운영할까 하는 그런 것을요. 젊은 직원들은 제게 컴퓨터로 다양한 실루엣과 이미지로 가득 찬 무드보드를 보여주곤 합니다. 그것도 좋지만 저는 이렇게 말하죠. “데생은 어디 있어요?” 이에 대해서만큼은 대단히 엄격합니다. 가끔은 가짜로 크로키를 하는 것인지 알아보기 위해 깜짝 시험을 볼 때도 있어요. 잘 아시겠지만, 제가 까다롭기로 유명하죠. 이렇게 배우는 시간이 때때로 괴롭겠지만 그들이 미래에 더 성장하는 밑거름을 마련해준다는 것이 제 큰 자부심이기도 합니다. 특히 디올 같은 하우스에서 이러한 전통을 유지하는 것은 더욱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패션은 사람들을 꿈꾸게 합니다. 하지만 패션이란 단순한 이미지가 아니에요. 열정이죠. 그게 패션이라는 일입니다.

    딸 레이첼에 대해 얘기해주실 수 있나요? 당신의 창작 작업에서 딸은 어떤 중요한 역할을 하나요? 제 딸도 그렇지만, 아들인 니콜로도 정말 큰 영향을 미치죠. 무엇보다 제 자식들이잖아요! 아이들과 있으면 세대 차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정말 당황스러운 순간이 있어요. 아이들은 배달 앱을 쓰거든요. 일식 시켜 먹자! 이런 식으로요. 그런데 저는 이탈리아 여자거든요! 배고프면 요리해서 먹죠. 아들의 경우에는 요즘 프라이버시를 지키는 데 집착하고 있어요. 저는 그 어떤 사소한 비밀을 지키는 것도 어려운데 말이죠! 하지만 이런 것은 제가 젊은이들에게 전달하려는 메시지에 대한 레퍼런스가 되기도 하죠. 레이첼은 열여섯 살이 되었을 때 런던으로 갔어요. 그 아이가 받은 교육은 제가 받은 교육과는 다르죠. 저보다 재능이 많아요. 특히 언어적 측면에서요! 그뿐 아니라 오늘날 사회적 변화를 이해하는 데도 많은 도움을 줍니다. 레이첼은 지금 예술뿐 아니라 장르에 대한 세부적인 공부를 하고 있어요. 제가 자랄 때는 그렇게 공부할 기회가 많지 않았어요. 딸이 대학에 입학할 때 같이 갔다가, 저도 런던에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죠.

    구찌의 알레산드로 미켈레.

    내 마음의 보석 상자

    알레산드로 미켈레는 손가락마다 반지를 끼고 있었다. 오래된 보석을 만끽하는 것처럼. 그는 자신만의 새로운 상식을 만든다. 5년간 구찌 아트 디렉터는 손대는 모든 것을 황금으로 바꿔놓았다.

    WRITER FABIENNE REYBAUD

    윤기 나는 긴 생머리에 안경을 쓴 알레산드로 미켈레(Alessandro Michele)는 새로운 부류의 히피 같았다. 그가 들고 있는 검은 부채는 환경 운동가 혹은 현자처럼 보이는 모습보다 미켈레를 감싸고 있는 열기를 증명하는 수단 같았다. 5년 전 미켈레는 구찌라는 어마어마한 브랜드를 캐시카우로 바꿔놓았다. 케어링 그룹의 짐 같았던 구찌는 지난해 96억 유로의 매출을 올리며 13%의 성장률을 기록했다. 2015년부터 구찌를 지휘한 이래 언론의 찬사를 받아오던 그는 PR 담당자를 대동한 채 상냥하게 미소 띤 얼굴을 코로나19로 필수가 되어버린 화상회의 화면에 비쳤다. 직접 만지고 착용함으로써 친근감을 느낄 수밖에 없는 주얼리라는 것에 대해 샅샅이 분석하듯 이야기하는 것은 미켈레의 열정을 보여주는 주제여서였다. 그는 주얼리를 사랑해 마지않는다. 전 패션계를 통틀어 유일하게 이 40대 이탈리아인은 구찌의 첫 번째 파인 주얼리 컬렉션을 만들어 2019년에 선보였다. 그는 현재 두 번째 컬렉션을 작업하며 순수한 열정을 불사르고 있다. 미켈레가 모든 일을 진행하는 방식처럼. 구찌 안에서 행복을 느끼는 이 남자와 대화를 나눴다.

    어떤 계기로 주얼리에 관심을 갖게 됐죠? 아주 어릴 때부터 주얼리를 좋아했죠. 할머니를 닮은 것 같아요. 많은 주얼리를 수집하는 애호가셨거든요. 큰 반지, 커프스 장식, 볼드한 액세서리 같은 것을 엄청나게 좋아하셨어요. 거기서 영향을 받기도 했고, 저 역시 오래된 것이나 과거의 것도 좋아했죠. 성장하면서 지질학자가 지층을 연구하듯 서로 다른 시대, 다른 스타일의 주얼리를 모으기 시작했어요! 용암 속에서 형성된 카메오 주얼리나 영국 빅토리아 시대의 주얼리, 이탈리아 네오클래식 스타일의 마이크로 모자이크 주얼리도 있고. 저는 이탈리아 주얼리 장인 카스텔라니(Castellani) 스타일의 제품을 참 좋아했는데, 그 후 좀 무난한 디자인의 주얼리도 찾기 시작했어요. 보석 자체에 대한 관심도 엄청나게 많아요. 하지만 그중 제가 가장 좋아하는 건, 아트워크 그 자체예요. 다른 시대를 되살려낸다는 것 자체가 좋아요. 보석은 조그마한 예술 작품이라고 할 수 있죠. 이런 작은 물건이 마법 같은 힘을 가진다는 것이 제게 큰 열정을 주었죠.

    그런 열정으로 지난해 첫 파인 주얼리 컬렉션을 론칭한 건가요? 당연하죠! ‘호르투스 델리키아룸(Hortus Deliciarum)’, 가능한 한 폭넓은 컬렉션이 되길 바랐어요. 저만큼 주얼리에 집착하는 한 남자나 여자의 금고를 여는 상상을 하며 작업했죠. 클래식 음악을 합창하는 여러 목소리를 표현했다고나 할까요. 나폴레옹 3세 시대 같은 느낌을 넣었죠. 영국식 주얼리 디자인과 모더니즘에서 영감을 받은 반지 같은 것을 말하는 거예요. 정말 많은 것을 해볼 수 있었어요. 각 제품의 독특함과 낯선 느낌은 각 요소의 부조화한 대칭성, 디자인한 보석의 종류와 색상에서 비롯된 겁니다. 이 불완전함이라는 느낌이 좋아요. 사실 좀 특이한 DNA를 가진 오래된 보석을 찾고 있다고 봐야죠.

    당신 목표를 실현할 수 있을까요? 저는 디테일에 미친 사람이에요. 그리고 파인 주얼리라는 것은 디테일의 예술이죠. 럭셔리의 정수라 할 수 있는 노하우를 보여주는 것은 가방, 신발보다 역시 주얼리예요. 제 머릿속에 있는 어떤 종류의 미적 감각을 완성하는 방법이죠. 진심으로 제가 이 세상을 열정과 사랑으로 채우고 있다고 믿어요. 이 파인 주얼리라는 것이 그것을 생산하는 몇몇 유명 브랜드에만 국한된 분야일 수도 있는데, 저의 경우에는 특별한 주얼리를 반드시 착용하고 싶은 애호가로서도 접근합니다.

    당신은 어떠한 기준도 따르지 않는다고 했죠. 그러나 구찌에서 당신이 구현해내는 미적 기준은 아주 강한데요. 뭔가를 하게 되면 모순도 함께 생겨나기 마련이죠. 불행히도 그게 패션의 태생이고 근본이며 특징이에요. 뭔가 놀랍고, 전례 없는 것을 만들어내면 그것이 브랜드가 되고, 코드가 되고, 더 나아가서는 어떤 규범이 되죠. 여기서 의문점이 생겨요. 어떤 옷이나 액세서리의 조합을 보면서 이렇게 생각할 수 있겠죠. ‘봐, 엄청 특이한데 구찌 같다!’ 벼룩시장에서 막 사온 것 같은 옷을 부르주아 느낌의 유명 브랜드, 스트리트웨어 같은 것과 믹스 매치하는 하이브리드 착장은 이젠 거의 하나의 룰이죠. 생각지도 못한 것을 조합하는 것이 오늘날의 구찌를 의미합니다.

    보석이 인간의 좋은 점을 보여준다고 하셨죠. 무슨 의미인가요? 이 작은 기적을 만들어내는 장인들이 있는 곳에는 정말 강력한 무언가가 있어요. 보석 바이어부터 보석 세공사까지 그런 강력한 기운을 뿜는 곳은 다른 어디에도 없을 거예요. 원석을 좋아하기 때문에 그렇게 재탄생시킬 수 있는 것 같아요. 이런 원석은 자연에서 채취해 1,000번도 넘게 연인에게나 해줄 법한 특별한 케어를 통해 가공하죠. 골드 액세서리는 에로티시즘을 내뿜죠. 사람들은 액세서리를 착용해보고 또 이리저리 다루어본 뒤 구매합니다. 보고 만지는 행위에서 기쁨을 느끼는 거죠. 이런 행위로 얻는 기쁨이 엄청나게 크다는 점에서도 에로티시즘이 연상됩니다.

    주얼리에도 성별이 있다는 말씀인가요? 여러 성별을 지니고 있죠! 여성성도 있고 남성성도 있고 때로는 뒤섞여 있죠. 주얼리에 하나의 성별이 있다면 그건 아주 타락한 성이겠죠. 지난 수 세기 동안 주얼리는 금전 교환의 수단이었으니까요.

    다음 컬렉션은 어떤 것일까요? 마무리 단계에 있습니다. 우주를 테마로 삼았어요. 그중에서도 별이에요. 엄청나게 작은 우주를 상상해봤어요. 그리고 그 안에 원석으로 된 아주 작은 별자리가 있는 거죠. 그 가운데에는 여러 행성이 있고, 이것들이 모여서 하늘을 이뤄요. 조금 이상한 태양계를 여행하는 거라고 생각하시면 돼요. 지금 거의 마무리 단계지만, 이런 별은 아직 어둠에 파묻혀 있어요. 언제 나올지는 모르겠군요. 이 파인 주얼리 컬렉션은 제가 무언가를 완결 짓고 싶다는 욕심에서 시작된 것이거든요. 일종의 임신 같은 단계라고 할 수 있어요. 그리고 아이가 태어나는 거죠. 제가 그 아이의 아버지고, 첫걸음마 떼는 것을 주의 깊게 보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독립해서 집을 떠나고…

    당신의 철학 중 하나는 아름다움은 오래가야 한다는 것인데요. 일시적일 수밖에 없는 패션이라는 것을 더 오래가게 하기 위해 어떻게 하나요? 패션이란 영화와도 같죠. 어떤 새로운 것을 경험한다는 점에서. 어떤 패션 아이템을 만들면, 이것들은 구입하는 사람들의 욕망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우리가 하는 일에서 스스로를 인식하고 있다는 것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제가 하고 싶은 것은 우리의 고객들이 더 오랫동안 우리의 옷을 입게 하고, 그런 옷이 진짜 그들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게 함으로써 향후 10년간은 더 입고 싶게 하는 겁니다. 패션이란 것은 늘 더 알고 싶지만 잘 알 수 없는 것이에요. 저는 엄청 큰 옷장을 갖고 있는데, 어느 정도냐 하면 신발을 찾을 수도 없을 정도인데요. 제가 아주 애착을 가진 것들이 있는데 맨날 그것들을 입고, 계속 사고, 제가 계속 만들기까지 하죠. 결국 패션이라는 것은 사랑이에요. 언제 시작될지, 언제 끝날지 알 수 없어요. 이 사실이 제기하는 문제도 인식하고 있죠. 패션은 계속 탄생하고, 또 쇄신해야 합니다. 동시에 저는 서랍장에 있는 모든 것을 잘 간직하고 싶습니다. 지금 던진 질문은 어떤 질문보다 어려운 것 같네요.

    코로나19 사태로 바뀐 게 있나요? 집에 갇혀 있으면서 저와 일 사이의 관계를 생각해봤어요. 제가 패션에 대해 갖고 있는 거대한 사랑을 숙고해봤다고 하는 게 더 옳을까요? 두려웠어요. 사랑이 식기 전에 최선을 다하고 싶었거든요. 아침, 점심, 저녁, 늘 보고 싶은 마음이랄까… 더 이상 끌어안을 수가 없어요. 패션쇼가 더는 없으니. 하지만 러브 레터 정도는 남아 있는 상태죠.

    당신의 컬렉션은 다양한 의미를 품고 있습니다. 그중에서 알레산드로 미켈레의 진정한 취향은 어떤 거죠? 저는 포르노 작가처럼 일해요. 포르노라는 것은 모든 게 허용된 범위지만, 악취미로 구성된 분야죠. 저 알레산드로 미켈레도 패션에 이런 포르노의 개념을 가져오는 것을 좋아하는 인물로 보면 됩니다. 마음 깊은 곳에는 여성들의 섹시한 모습을 좋아하면서 흉한 모습을 좋아하기도 하고, 남자들이 매력적인 것을 좋아하면서도 그렇지 못한 것도 좋아하죠. 저는 상의를 탈의하고 길을 걷는 것을 좋아하는데요. 파격적이면서도 멋진 것들을 좋아해요. 제가 생각하는 인생이 그런 것이고, 저 자신도 그렇고. 불가능해 보이는 이야기를 좋아합니다.

    당신의 손이 닿는 것마다 황금이 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정말 처음 들어봐요! 제가 질문하고 싶군요. 제가 하는 모든 것에는 제 안에 잠재된 필요성, 절박함이 있어요. 이 진정성을 사람들이 느끼는 것 같습니다. 제가 하는 것에 어떤 마케팅이 있다고 생각지 않는 것 같아요.

    패션 일을 하지 않았다면, 무슨 일을 했을까요? 고고학자나 미술 비평가요. 프로이트 역시 고고학에 관심을 가졌죠. 프로이트처럼 됐을 것 같은데요.

    대상을 분석하는 정신분석학자가 됐을까요? 바로 그게 제가 하고 싶었던 겁니다!

    만약 내일 모든 것이 멈춘다면 어떨 것 같나요? 제가 멈추지 않기 때문에 세상은 멈추지 않을 겁니다. 제가 흥미를 가지는 것이 있기 때문에, 어쨌든 행복할 것 같군요.

    사람들이 당신에 대해 무엇을 기억하기를 바라나요? 계속 살아남는 작품이라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나요? 제 열정의 흔적을 남기고 싶어요. 나는 내가 가진 사랑과 사랑에 빠진 완전히 미친 사람으로 기억되길 원해요. 즐거운 사람이었다고 기억되는 것도 좋겠군요. 이것들이 제가 패션과 같은 무생물과 잘 맞는 이유죠. 생명을 불어넣기 위해서는 많은 기쁨과 환희가 필요하거든요. 저는 그들이 대화할 수 있도록 하나로 모으는 역할을 하죠.

    더 하고 싶은 말은 없나요? 없습니다. 뒤에 보이는 붉은 천장이 마음에 드네요.

    생로랑의 안토니 바카렐로.

    그 남자의 진정성

    디자이너 안토니 바카렐로는 생로랑 창립자의 자유로운 코드를 현대적으로 해석함으로써 이 패션 브랜드에서 자신감의 힘을 증명해 보인다. <보그>가 이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와 긴장감을 향한 그의 찬양에 대해 대화를 나눴다.

    WRITER ANDERS CHRISTIAN MADSEN

    생로랑 2020 F/W 패션쇼가 끝난 뒤 백스테이지에서 헤일리 비버와 친구 하나가 멋지게 치장한 Z세대 팬터마임에 등장하는 캐릭터들처럼 으슥하고 칠흑같이 어두운 공간을 여기저기 더듬고 다녔다. 그들은 축하 인사를 건네려고 이 브랜드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를 찾아다닌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대표적인 프랑스 패션쇼에 왔다는 것을 잘 모르고 있었다. 생로랑에서 ‘불쑥 들르다’라는 말은 없다. 위대한 신을 걸고 장담하는데, 결코 없다. 줄지어 기다리고, 으스스한 침묵에 적응하고, 카트린 드뇌브나 베티 카트루 같은 전설적인 인물들이 스쳐 지나갈 때 꾸벅 인사하고, 다시 자리를 잡고 서기 마련이다. 결국 이 유명한 새내기들은 검은 커튼 앞에 줄지어 있는 패션쇼 리뷰어의 대열에 정중히 합류했다. 그러자 어두컴컴한 휘장 뒤에서 그가 나타났다. 안토니 바카렐로(Anthony Vaccarello)와 그의 자신감이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제가 사랑하고 비즈니스적으로 존경하는 누군가가 저더러 예상이 안 되는 사람이라고, 미스터리한 사람이라고 말했죠. 저는 그런 게 마음에 들어요.” 올해 38세의 내성적인 이 디자이너가 2월에 열린 패션쇼 이후 몇 달이 지나 곰곰이 생각했다. “저는 여기저기에 있고 싶지 않아요. 제 삶의 모든 것을 이야기하고 보여줘야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그는 자신에 관한 루머만큼이나 유명한 그의 자리를 둘러싼 어쩔 수 없는 루머를 어떻게 다루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저는 그런 소문에 전혀 신경 쓰지 않아요.” 가장 파리다운 브랜드 생로랑에서는 가십의 향기가 늘 매력적인 분위기를 더 증폭시켜왔다. 이브 생 로랑은 동시대 브랜드와 열심히 경쟁했고, 옛 시대에 누리던 기분 좋은 자부심이 이 위대한 브랜드(Grande Maison)에 스며들어 있다.

    4월 말 코로나 바이러스 위기에 대한 대응 차원에서 생로랑은 파리 가을 패션 위크에서 철수하기로 한 첫 유명 브랜드가 됨으로써 자부심 넘치는 결단력을 보여줬다. “생로랑은 컬렉션 발표 속도를 통제하고, 모든 일정을 재편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리고 생로랑은 나름의 리듬을 이끌어갈 것입니다”라는 성명을 발표했다. “‘변화’에 대해 말만 할 뿐 실질적인 결단이 이뤄지지 않는 것을 지켜보는 게 이제 힘들더라고요.” 바카렐로가 설명했다. “저희는 이런 일이 일어날 걸 알았어요. 오히려 잘된 거죠.”

    1982년 브뤼셀에서 이탈리아계 부모님 슬하에 태어난 바카렐로는 이브 생 로랑이 선도한 현대 혁명에서 진화된 여장부 스타일의 슈퍼모델 패션 문화에 몰두한 채 10대 시절을 보냈다. 이 브랜드의 창립자가 탄생시킨 패션 유산이 활성화시킨 책임감 있는 여성성과 포스트모던 섹스어필이 1990년대 <멜로즈 플레이스(Melrose Place)>, 마돈나, 머라이어 캐리에 의해 구체화되었고, 어린 안토니는 그들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말았다. 라 캄브르(La Cambre)에서 공부한 이 디자이너는 2009년 자신의 이름을 딴 (현재는 폐업한) 브랜드를 론칭했다. 과감하고 간소한 스타일을 향한 미니멀하고 공예적 접근 방식이 특징이었던 그 브랜드를 통해 그는 생로랑에서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자리를 얻었고, 그 자리를 통해 파리에서 가장 선망의 대상이 되는 패션 레거시 중 하나를 얻었다. 이곳에서 그는 이브 생 로랑의 영원한 코드 ‘소란스러운 10대의 활력 넘치는 패션을 향한 꿈, 굉장히 섬세한 테일러링, 노출 많은 칵테일 드레스와 아찔할 정도로 높은 하이힐’에 자신만의 해석을 시도했다.

    부드럽게 말하는 바카렐로의 태도를 용기 부족으로 오해해서는 안 된다. “저는 다른 브랜드에서 무엇을 하는지 신경 쓰지 않아요. 브랜드마다 나름의 비전과 타당한 이유를 갖고 있다고 확신해요. 솔직히 저희는 서로 존중해야 하고, 같은 업계의 일원이라는 사실을 의식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저희가 느끼는 방식이 옳다고 스스로를 표현할 자유는 누리면서 말이죠.” 그가 말했다. 몇 시즌 동안 파리 런웨이 무대에서 부르주아 스타일을 제안한 후, 이번 2020 F/W 컬렉션에서 바카렐로는 1960년대 후반과 1970년대 이브 생 로랑의 리브 고슈 라인과 1967년 영화 <세브린느(Belle de Jour)>의 카트린 드뇌브를 위해 이브 생 로랑이 직접 디자인한 의상과 관련된 DNA를 다시 주장하는 듯했다.

    센강 건너편에서 섬광 조명으로 빛나는 에펠탑이 위엄 있는 그림자를 드리우는 바르소비 광장(Place de Varsovie)에 설치된 당당한 검은 구조물에서 열린 생로랑의 패션쇼는 생동감과 활기로 넘쳤다. 그곳에 도착해 아이폰으로 무장한 10대 청소년들을 뚫고 보안 검색대를 지나 넓은 계단을 오르자, 블랙으로 차려입은 유명 인사들이 모인 곳에 이르렀다. 그들 중에는 스팽글 턱시도와 핫팬츠를 입은 앰버 발레타, 그곳의 모든 플래시라이트를 빨아들이는 케이트 모스, 컷글라스(Cut-Glass) 하이힐을 착용하고 길고 늘씬한 각선미를 자랑하는 바카렐로의 친구 안야 루빅이 있었다. 이것이 바로 바카렐로가 생로랑에서 만들어낸 어마어마한 세계였다. 심지어 쇼는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말이다.

    밤처럼 어두운 공간에서 황금빛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다리 긴 젊은 모델들이 생로랑 고유의 테일러링, 커다란 리본이 달린 블라우스와 큐롯을 광택 나는 보디수트, 치마, 라텍스 부츠 등과 함께 스타일링한 옷을 입고 런웨이를 성큼성큼 걸어 나왔다. 부르주아적 페티시의 판타지 같은 분위기를 풍기며 말이다. “이브 생 로랑의 부르주아에 대한 비전은 아주 독특했죠. 그는 그것을 거의 거부하다시피 했죠. 저는 실제로 그런 긴장감에 자극받았죠. 그래서 자세히 보면 생로랑이 부르주아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될 거예요. 싫어하기 때문에 부르주아층을 조롱하죠.” 바카렐로가 설명했다. “우리는 다시 후퇴하는 시대에 살고 있어요. 분노에 차서 과거를 돌아보고 있죠. 사람들은 마음을 안정시켜주는 과거의 단편을 지니고 싶어 하죠. 그렇지만 생로랑은 부르주아가 얼마가 터무니없을 수 있는지 보여줄 뿐이죠.”

    무대가 끝난 후 바카렐로가 검은 커튼 뒤에서 등장했을 때, 인터뷰할 때마다 따라다니는 ‘섹시함’과 ‘짧은 스커트’에 대한 질문이 쏟아졌다. “매번 저는 ‘짧음’이 제게 자유를 의미할 뿐 ‘섹시함’이나 그 무엇도 아니라고 답합니다.” 그가 분명히 말했다. “저는 늘 옷을 짧게 만들어왔어요. 저는 여자의 몸을 사랑해요. 왜 패션이 꼭 지적이거나 섹시해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겠어요. 그 중간은 없이 말이죠. 한 여성이 꼭 둘 중 하나만 추구할 필요는 없어요. 둘 다 될 수 있으니까요. 그리고 지식인이라고 해서, 그녀가 꼭 머리부터 발끝까지 자신을 포장할 필요도 없죠. 저는 관련성을 생각하지 않아요. 그것은 진부한 방식이고, 우리가 사는 시대에는 맞지 않죠.” 바카렐로의 군더더기 없이 훌륭한 작품은 패션계의 신선한 얼굴들이 런웨이에서 주로 선보이고 있다. 그렇지만 그는 이렇게 말했다. “패션쇼에만 너무 중점을 두지 마세요. 그것을 넘어서면 각기 다른 몸과 나이가 보이죠. 나이는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될 거예요.” 그는 베티 카트루, 빈센트 갈로, 레니 크라비츠, 케이트 모스 같은 인사들이 등장하는 홍보 이미지를 의식하며 말했다. “제게 패션쇼는 조금 다른 의미가 있어요. 실루엣을 보여주는 또 다른 방법이죠. 저는 다른 패션 디자이너들처럼 하고 싶지 않아요. 패션쇼에 온 관람객들을 즐겁게 함으로써 소란을 떨고 싶지는 않죠.” 이브 생 로랑처럼 바카렐로 역시 자신만의 방식에 자신감 넘치고 유쾌할 정도로 ‘프랑스답게’ 풀어가고 있다.

    그는 2019년 말리부에서 열린 패션쇼에서 1966년 이브 생 로랑이 선보인 스모킹을 오마주한 ‘Smoking Forever’라 적힌 신발을 선보였다. 그리고 쇼가 끝난 후 모든 게스트에게 생로랑 브랜드 라이터를 선물했다. 요즘 대부분의 브랜드가 정략적으로 옳은 일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 흡연 관련 선물을 절대 주지 못할 것이다. “그럼 촛불을 어떻게 켜라는 거죠?” 바카렐로가 농담을 던졌다. “뭐 눈에는 뭐만 보이듯, 때로는 판단하는 사람의 시각에 따라 나쁜 의도가 담긴 것처럼 보이기도 하죠. 저는 진정성을 믿어요. 저는 ‘정략적으로 옳다’, ‘저항적이다’ 등의 이유로 특정 행동 방식을 취하지는 않아요. 앞으로도 결코 그렇게 하지 않을 거고요. 너무 기회주의적이잖아요.”

    루이 비통의 니콜라 제스키에르.

    재앙에 맞선 사람들

    지난봄, 시간과 그에 따른 사회상을 기념하기 위해 계획한 패션쇼는 패션의 한 시대가 막을 내리는 순간과 더불어 절정을 상징하는 것으로 끝났다. 실제로 며칠 뒤 전 세계는 봉쇄 조치에 들어갔다. 우리는 재발견된 아름다움과 미래에 대해 논의하기 위해 그날의 두 주인공을 (온라인으로) 한자리에 모았다.

    WRITER FRÉDÉRIC MARTIN-BERNARD

    시대와 스타일을 통한 시간 여행, 갑작스러운 봉쇄의 징후와 함께 상징적으로 정점을 찍는 동시에 패션의 한 시대가 막을 내린 잊지 못할 패션쇼. 이 예측할 수 없고 극적이며 집단적인 삶의 순간에 이 분야에서 이전과 이후를 나타내는 순간이 있다면 그것은 이 컬렉션의 발표다. 3월 3일 루브르 박물관에서 열린 루이 비통의 ‘Time Clash’. 돌려 보면 기자와 고객이 가득 찬 객석의 청중에게 엑스트라 200여 명으로 구성된 ‘타블로 비방(Tableau Vivant, 살아 움직이는 그림)’이 점차 그 모습을 드러낸다. 역사적인 코스튬(1400년대부터 1950년대에 이르는)을 입고 독특한 만화경을 이룬 이들은 처음에는 디지털인 듯 보이지만 사실 이들은 살과 피를 가진 진짜 사람들이다. 이 거대한 합창단은 오스카상을 네 번 수상한 이탈리아의 코스튬 디자이너 밀레나 카노네로(Milena Canonero)가 기획했다. 그 앞으로 니콜라 제스키에르(Nicolas Ghesquière)가 디자인한 컬렉션이 퍼레이드를 이룬다. 그로부터 몇 시간 뒤 이탈리아와 유럽은 봉쇄 조치에 들어가 멈출 것이다. 현재 패션 분야가 조심스러운 재개를 시도하는 동안 <보그>는 온라인상으로 그때 이후로 서로 만난 적도 없고 제스키에르의 경우처럼 봉쇄 조치가 시행되는 동안 어떤 발언도 한 적 없는 이 쇼의 주인공들을 모았다. 그때 중단된 것들을 기억하고 향후 우리를 기다리는 것은 무엇인지 논의하기 위해서다.

    ‘Time Clash’와 이러한 시간 여행에 대한 아이디어는 어떻게 탄생한 건가요? NG 처음에는 서로 다른 여러 시대를 포용하고 발전시켜 같은 공간에 무대를 마련하고 싶었어요. 어제, 오늘, 내일 사이에 시대와 시간의 충돌을 만들어내길 원했죠. 합창단과 밀레나의 모든 캐릭터는 컬렉션을 구해냈고, 내 머릿속에서는 현재를 상징하는 것이었죠. 반면에 대중은 인간의 손안에 있는 시간의 한 조각인 미래였고요. 저는 루이 비통 쇼의 전형적인 공연의 의미가 한 번쯤은 기술이나 테크놀로지가 아닌 인간의 퍼포먼스에 바탕을 둔 것이기를 바랐어요. 무대 디자인은 수개월 전에 미리 고안했는데 팬데믹이 그 윤곽을 선명하게 해주었죠. 저는 이 쇼가 전 세계적으로 시즌의 마지막 쇼가 될 거라고는, 아마도 이러한 유형의 마지막 쇼가 될 거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어요. 이러한 중요성을 가진 다른 쇼를 만들 자유를 다시 누릴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라지만 그동안 자기 자신을 재창조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인물 200여 명의 의상 제작은 많아야 50개 정도의 룩을 선보이는 보통의 패션쇼에 비해 엄청난 일입니다. 어떻게 해내신 겁니까? MC 저와 제 팀에게는 200명이 특별한 숫자는 아니에요. 물론 좋은 결과를 얻기 위해 일정한 과정과 시간, 충분한 양의 의상이 요구되지만. 준비 과정은 파리에서 드레스 리허설 3주 전에 시작되었어요. 최종적으로 무대에 올릴 의상을 자유롭게 구성하려면 두 배의 의상이 필요했죠. 조수들과 함께 우리는 꼭 유럽이 아니더라도 서로 다른 시대의 여러 작품을 골랐어요. 200명에게 옷을 입히고 의상부터 헤어스타일과 메이크업까지 토털 룩을 만드는 것은 배우와 엑스트라 모두를 살펴야 하는 영화에 비해 즐거운 경험이었어요. 때로는 단일 시퀀스에 수백 명이나 될 때도 있거든요! 며칠 동안 5,000명이 동원된 두 개의 세트가 기억나는군요. 특히 군중이 있는 장면은 힘들어요. 비록 오늘날 수천 명의 사람들이 들어가는 방대한 스케일의 장면이 있을 때에는 일부를 디지털로 재구성하는 것이 도움이 되긴 하지만요. 그러나 매번 우리는 이 모든 작업이 편집 과정에서 잘리지 않기를 기도드리죠. 그런 일은 안타깝게도 자주 일어나거든요.

    이번 프로젝트는 루이 비통의 다른 콜라보레이션과 어떻게 다른가요? MC 연극 경험과 비슷했어요. 시나리오도, 특별한 등장인물도 없었지만요. 제 행동은 완전히 자유로웠죠. 엑스트라가 나타나면 저는 코스튬으로 그들을 변신시켰어요. 그들의 진정한 본질을 구현하면서요. 저는 이런 변신이 좋았어요. 동시에 니콜라를 위해 사진을 찍었죠. 물론 저는 니콜라가 ‘타블로 비방’ 연출을 위해 선택한 유명한 감독 프란시스코 네그린과 함께 라이브로 작업했고, 색상과 인종, 시대가 서로 거리를 두도록 합창단 위치를 정했죠. 저는 니콜라의 창의적 컨셉에 제 의견을 제공하는 것이 정말 좋았어요. 또 다른 모험을 위해 우리가 다시 모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요즘 패션계의 주제가 낙관주의와 행복입니다. 두 사람에겐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MC “행복은 이미 소유한 것을 계속 소망하는 것이다”라고 했던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말씀을 인용하는 것으로 대신하겠습니다. NG 우리의 자유를 그렇게 심하게 제한한 최근 몇 주를 보내면서 저를 둘러싼 세상이 얼마나 견고한지 깨달을 수 있었어요. 이제 저에게 행복은 사랑하는 사람들과 일상을 나누는 것이에요.

    두 사람은 격리 기간을 어떻게 보냈나요? MC 저는 패션쇼가 끝난 뒤 로마로 돌아왔고, 며칠 뒤 격리 상태로 들어갔지요. 다행히도 스카이프와 왓츠앱, 인터넷이 제공하는 모든 것 덕분에 ‘타블로 비방’의 다큐멘터리를 공동 연출한 로리스 라이와 뛰어난 스토리 편집자인 클라우디오 쿠트리와 함께 원격으로 작업을 계속할 수 있었고 8분짜리 짧은 버전인 ‘This Side of the Tableau’를 루이 비통에 제출했어요. 지금은 쿠트리가 50분짜리 버전으로 이미 편집을 끝냈고요. 백스테이지에서 하는 작업, 준비와 실전, 이런 일을 다시 보는 것은 멋진 일이에요. 이러한 새로운 기술은 가까이 다가와서 가족, 친구, 나머지 세계와 하나 됨을 느끼게 도와주죠. 물론 제 작업은 느려졌지만 창의성은 한 번도 멈춘 적이 없어요. NG 패션쇼가 끝나자마자 저는 크루즈 컬렉션, 멧 갈라, 엠마 스톤의 결혼식을 위해 캘리포니아로 떠났어요. 모두 취소되었죠. 그러고 나서 프랑스로 돌아왔을 때 시골집에서 지냈어요. 전에는 시골집에 있는 시간을 한 번도 제대로 활용해본 적이 없었는데, 비상 상황 때문에 거기서 보낸 몇 개월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에 둘러싸여 지내며 정말로 즐거웠어요. 그러다 4월 셋째 주부터 활동을 재개하기 위해 스튜디오로 돌아와야 했어요. ‘이전’으로 돌아가지 않는 게 좋겠지만, 일종의 관성이 있다고 할까요.

    두 사람은 뭘 바꾸고 싶나요? MC 이번 재앙이 그럼에도 무언가 좋은 것을 가져오길 바랍니다. 우리는 함께하면 긍정적인 힘이 되죠. 그러나 인류를 더 좋게 바꾸는 것이 가능할까요? 저는 공동체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벌새에 대한 아프리카 전설을 믿으면서도 강한 의구심이 듭니다. 숲에 화재가 나서 모든 주민이 도망가는데, 작은 벌새가 그 불을 끄려고 하죠. 다른 동물들이 벌새를 조롱합니다. “네가 혼자 불을 끌 수 있다고 생각해?” 그러자 벌새가 대답했어요. “난 내 역할을 할 뿐이야.” 이를 이해한 동물들이 벌새를 따랐고 그를 도와 불을 껐죠. NG 사실 많은 것을 바꾸고 싶죠! 멈추어야 한다는 단순한 사실, 특정 프로젝트를 생각할 시간이 더 많다는 단순한 사실이 비상 상황에서 일하는 것이 결코 생산적이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었어요. 그러니까 저는 더 많은 시간을 일을 더 잘하는 데 바치고 싶습니다. 게다가 이미 몇 년 전부터 우리는 직업의 변화에 직면했습니다. 우리 분야가 생태적으로나 윤리적으로, 인간적으로 책임감이 있어야 한다는 말을 우리는 듣고 또 들어왔죠. 오늘날 더 이상 선택의 여지가 없어요. 팬데믹이 우리에게 속도를 늦추도록 강요했지만 인식을 높이는 가속장치가 되어주기도 했습니다.

    두 사람은 시간의 흐름에 대해 어떤 관점을 가지고 있나요? MC 안타깝게도 점점 더 빠르게, 앞으로만 나아갈 뿐이죠. NG 시간에 대한 저의 인식은 일 때문에 왜곡되어 있어요. 30년 전부터 달력에서 한두 시즌 앞서 있는 일종의 마라톤을, 끝도 없는 경주를 하고 있어요. 이런 리듬에 너무 익숙해져 종종 인내심을 잃을 때가 있는데, 그건 또 제 사생활과 결코 양립할 수 없는 것이죠. 저는 기회가 되면 시간을 갖고 깊이 탐구하는 데 기쁨을 느끼기 때문에 더더욱 조심해야 해요.

    최근 패션의 리듬, 패션쇼의 빈도 등을 비판한 아트 디렉터가 많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세요? NG 우리의 크리에이티브는 최근 15년 동안 현저히 증가한 수요에 대응해야 합니다. 제품을 연구하고 제품이 매장에 도착하기까지 시간이 단축되었어요. 매장에는 아름답고 새로운 상품을 항상 비치해야 하죠. 그러나 무엇보다 이벤트 빈도와 그에 따른 스트레스가 컬렉션 제작에 부담을 줍니다. 저는 우리 패션 산업을 손상시킨 세일에 대한 논쟁에 참여한 적도 있습니다. 다행히 루이 비통과 그런 일은 없는데, 세일을 하지 않으니까요. 루이 비통이 유효한 경제 모델인 이유는 이것 때문이기도 합니다.

    영화 산업도 가속화 문제를 겪었습니다. MC 어떤 면에서는 디지털이 많은 것을 변화시켰기 때문에 전보다 더 빠르게 진행되지요. 그러나 그 리듬은 가차 없고 즉각적인 답변을 지향하며 훨씬 더 상업적 패션의 리듬보다는 느린 것이에요.

    현대의 패션이 당신에게는 영감의 원천인가요? MC 가끔 인터넷으로 패션쇼를 봅니다. 하지만 저에게 더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보그> 같은 잡지의 패션 사진이에요. 이미지 뒤에 강렬한 테마가 있고 사진이 훌륭할 때 그 이미지는 제게 영감을 주죠.

    과거는 어떤 식으로 상상력을 자극하나요? NG 일종의 마법이에요. 과거는 우리가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해주지만 그 누구도 우리에게 과거를 정확하게 말해줄 사람은 없어요. 우리는 과거를 바꾸어서는 안 되지만 우리가 원하는 대로 과거를 자유롭게 해석할 수는 있지요. 코스튬의 역사는 우리에게 다양한 가능성과 행동할 수 있는 광범위한 장을 제공합니다. 제가 발렌시아가의 오마주 컬렉션으로 이미 시작한 이 시간 여행은 루이 비통으로 훨씬 더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당신에게 특별히 자극을 주는 스타일리스트가 있나요? NG 저는 이세이 미야케, 아제딘 알라이아, 장 폴 고티에의 풍부한 작품에 매료되었어요. 또 잘 알려지지 않은 재능 있는 사람들이 있죠. 제가 특히 예민하게 느끼는 크리스토발 발렌시아가의 발자취를 따른 제프리 빈처럼. 최근에는 비교적 짧은 경력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시대를 깊이 새긴 헬무트 랭이 생각납니다.

    전체적으로 볼 때 ‘Time Clash’라는 제목이 당신의 스타일을 잘 표현하나요? NG 그렇습니다. 그러나 파문을 일으키려는 의도는 제게서 먼 생각이에요. 저는 제가 참고한 것을 재해석해 오늘날의 프리즘으로 전달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훈련은 아니에요. 쉽사리 테마에서 벗어나거나 시간을 다투게 될 수도 있어요. 우리는 현학적이어서는 안 되며 순간을 포착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작업의 가장 중요한 문제죠.

    시대를 통한 이러한 관점의 개괄이 디지털 쇼에 생명을 불어넣을 수 있을까요? 디지털 쇼는 두 사람이 고려하는 형식인가요? NG 우리는 7년 동안 모든 쇼에 대해 그런 생각을 해왔어요.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라이브 방송을 팔로우하고 있으며, 쇼가 끝나고 매장을 위해 만든 영화를 보는 사람들은 훨씬 더 많아요. 밀레나의 작업은 탁월한 숭고함과 세련미, 심오함이 있었기에 이 갤러리의 초상화 각각을 화면에 표현하고 싶었어요. 디지털을 사용했더라면 우리는 ‘시대의 충격’을 더 많이 보여줄 수 있었겠지요. 디지털은 중요하죠. 패션쇼에는 단지 소수의 행복한 사람들만 있으니까요. 즉 에디터, 바이어, 고객으로 이루어진 기본 청중이 소수니까요. 물론 이들의 의견이 제게는 매우 중요하고요. 쇼의 상업적 성공에 영향을 미칠 수 있지요. 그러나 디지털 쇼는 실제 쇼를 대체하지 못해요. 그 반대도 마찬가지고요. 이 둘은 다 필요하고 상호 보완적이에요.

    새로운 기술이 코스튬 디자이너의 작업도 바꿔놓았나요? MC 작업 속도를 높이고 드로잉에 사실감을 더하기 위해 저는 포토샵과 드로잉을 함께 사용하지만, 이것은 양날의 검이에요. 다른 사람들도 똑같이 할 수 있는 것이고 그래서 어떤 이미지를 탄생시키는 데 우리의 창의성을 방해할 수도 있을 테니까요.

    비디오로 컬렉션을 발표하는 것이 가능한가요? NG 격리 기간에 우리는 해냈고, 어느 정도 효과가 있었어요. 저는 스튜디오의 모든 디자이너에게 본질적인 것에 초점을 맞추고, 서로 다른 제안 여덟 개 대신 자신이 생각하는 가장 적합한 두세 개만 제시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우리는 소규모의 매우 정교한 컬렉션을 줌을 통해 작업해 7월 초에 발표했어요. 크루즈 컬렉션은 아니지만 여전히 훌륭한 시즌의 출발이었죠. 그런 다음 우리는 의상 리허설에 이르렀고, 거기서 원단과 핀 같은, 가상이 아닌 현실 세계가 필요했어요.

    사람들은 인터넷에서 구입한 옷이나 액세서리에는 애착이 덜 갈까요? NG 그렇다고 생각해요. 특히 핏을 걱정할 필요 없이 입기 더 쉽고 간단한 스포츠웨어의 경우에 더 그렇죠. 동시에 저는 엄청난 성공을 거두는 매우 세련된 빈티지 사이트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발렌시아가 시절의 제 작품 중 일부는 자주 온라인으로 제공되고 오래 남아 있지도 않아요. 이들은 그런 모델에 애착을 가지고 있고, 큰돈을 쓸 준비가 되어 있는 고객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패션의 미래를 어떻게 보나요? NG 환경, 생산, 공급 등 해결해야 할 문제가 많습니다. 더 좋은 품질에 집중함으로써 소비를 줄여야 해요. 이것은 그저 간단히 덜 낭비하는 것을 의미하죠. 이러한 이유로 우리의 산업은 고객이 사고 싶은 제품이 시간이 지나도 오래갈 수 있다는 분명한 확신을 갖도록, 제품 개발에 자리를 더 내주어야 합니다. 이제 봉쇄로 인한 활동의 중단은 쉼 없이 앞으로 나아가는 시대에 길지만 필요한 럭셔리 제품 개발 시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저는 창조 과정의 이러한 부분을 줄이지 않고 늘림으로써 잘 관리하는 것을 보고 싶어요. 이 시간부터 모든 예술적 표현이 강화될 거라 봅니다.

      에디터
      남현지
      Sylvia Jorif, Fabienne Reybaud, Anders Christian Madsen, Frédéric Martin-Berna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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