웰니스

21세기 콘돔

2020.11.05

by 이주현

    21세기 콘돔

    비건, 크루얼티 프리, 논 케미컬, 페어 트레이드. 그리고 ‘여자’라는 가치가 추가된 21세기 콘돔에 대하여.

    (위부터)화려한 1.65캐럿 다이아몬드가 기하학적 ‘V’ 형태를 뽐내는 ‘레이디 스타더스트’ 반지는 스티븐 웹스터(Stephen Webster), 꼬임이 특징인 ‘리듬’ 컬렉션 반지와 팔찌, 컬러 스톤이 촘촘히 박힌 ‘필 더 닷츠’ 컬렉션 팔찌와 심플한 디자인의 ‘론드’ 컬렉션 실버 팔찌는 젬앤페블스(Jem&Pebbles), 보라색 크리스털이 중앙에 자리한 ‘라이언 헤드’ 반지는 구찌(Gucci), ‘3웨이’ 반지와 ‘트위스트’ 팔찌는 포트레이트 리포트(Portrait Report), 얇은 스트랩의 모던한 ‘간치니’ 시계는 페라가모 타임피스 by 갤러리어클락(Ferragamo Timepieces by Gallery O’clock).

    2020년 10월 7일. 정부가 67년 만에 낙태법 개정안을 발표했다. 임신 14주까지 산모의 자유의지에 따라 낙태를 허용, 여성의 자기 결정권을 보장하라는 헌법재판소의 요구다. 여전히 임신중절을 범죄로 못 박은 반쪽짜리 변화이기에 다양한 이해관계가 엇갈리지만, 단지 엄마라는 이유로 짊어져야 했던 죄와 벌의 싹이 거두어졌다.

    그러나 불안의 씨앗은 도사리고 있다. 헌재에서 수호하려던 여성의 자기 결정권 투쟁의 시작점은 아이러니하게도 ‘피임’이다. 한국은 OECD 국가 중 콘돔 사용률 최하위다. 서울시보라매병원 비뇨기과 박주현 교수 팀이 성인 여성 5만 명을 조사한 ‘한국 여성의 성생활과 태도에 관한 10년간의 간격 연구’에 따르면 2004년 35.2%에 이르던 콘돔 사용률이 2014년 11%로 떨어졌다. 응답자 61.2%가 답한 1순위 피임법은? 질외 사정이다. 반대로, 비슷한 시기에 성인 남성을 대상으로 집계한 질병관리본부 보고서에도 콘돔을 ‘자주’ 사용한다고 말한 사람은 9.8%에 불과했다. 심지어 성관계 중 상대방 동의 없이 피임 도구를 제거하는 ‘스텔싱(Stealthing)’ 범죄까지 걱정해야 하는 시대다. 우리가 외면한 이 1g짜리 방어막은 원치 않는 임신과 성병 전염의 위험에서 벗어날 최후의 보루다. 피임의 부재, 소식 없는 ‘그날’은 여인들을 천국과 지옥의 갈림길에 세운다. 하지만 ‘노콘노섹’을 지켰다고 과연 그곳이 천국일까? 대다수의 콘돔에서 발암물질이 발견되고 있다면? 남자 친구보다 믿음직하던 콘돔에 이토록 쓰라린 이별 통보를 받게 될 줄이야.

    2014년 WHO는 콘돔 제조사에 “콘돔 원료인 라텍스 가공 시 니트로사민 방출을 최소화하라”고 권고했다. 니트로사민. 이미 한차례 고무풍선에서 검출되어 한반도가 몸살을 앓았던 2급 발암물질이다. 국내 식약처 규정상 36개월 미만 영유아가 입안에 넣거나 넣을 가능성이 있는 완구는 니트로사민류가 10ppb 이상 발생할 경우 판매 금지다. 하지만 미국에서 활동하는 시민 단체 CEH(Center for Environmental Health)가 자국에 유통되는 콘돔 23개를 분석한 결과 그중 70%에 니트로사민류가 포함되어 있었고, 한국에도 시판되는 한 제품은 무려 440ppb라는 악랄한 수치를 드러냈다. 2017년 한국소비자원도 시중 콘돔의 절반 이상에서 니트로사민류를 확인했다. 이마저도 일반 콘돔의 이야기다. 온갖 향과 색이 난무하고 남성의 절정까지 유보하는 특수형 콘돔은 프로필파라벤, 메틸파라벤, 노녹시놀-9, 벤조카인, 탈크, 합성 착향료와 착색료 등 이름만 들어도 무시무시한 화학 성분이 얼마나 들어 있는지 명백히 밝히지 않은 상태로 규제 없이 판매된다. 이 또한 이미 예상했겠지만, 그 유해성은 신체 구조상 남자보다 우리 여자들에게 무려 42배 치명적이다. 여리고 예민한 Y존 피부의 경피독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혈관과 림프관이 발달한 질 내벽은 외부에서 유입된 화학물질을 여과 없이 순환계로 흘려보낸다.

    그렇다면 일부 콘돔만의 문제일까? “대부분의 콘돔은 국제 표준 규격에 맞춰 생산돼요. 10년 전 WHO에서 공표한 156쪽 분량의 ‘남성용 라텍스 콘돔 가이드라인’에 명시되어 있죠. 안타까운 사실은 굉장히 낮은 기준이 요구된다는 점입니다. 피임의 목적을 다하되 단기적으로 특별한 질병을 일으키지 않는 안전 규정 수준이에요. 콘돔을 1·2등급 의료 기기로 분류하는 미국 식품의약국(FDA) 기준서에도 최소 길이와 두께, 최대 너비는 명시되어 있지만 니트로사민을 포함한 화학 성분 허용치에 대한 언급은 없습니다.” 성 평등과 다양성을 지지하는 밀레니얼 핑크 패키지로 무장한 친환경 비건 콘돔, 세이브 프리미엄 콘돔으로 국내에 신드롬을 일으킨 세이브앤코 박지원 대표가 우려를 표했다. “그러니 적법한 절차와 검사를 통과한 제품조차 유해 성분 논란의 대상이 될 수 있죠.” 결국 우리가 직면한 콘돔의 진실은 이윤 극대화에 눈이 먼 몇몇 회사의 만행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콘돔을 거부할 수만은 없다. 고무나무에서 추출한 천연 라텍스는 현존하는 가장 안전한 콘돔 원료다. 쭉쭉 늘어나는 고무로 만드니 폴리우레탄이나 폴리이소프렌 등의 합성 화합물 덩어리인 ‘초박형’ 콘돔 이상으로 내구성이 뛰어나 잦은 마찰로 찢어지는 불상사도 피할 수 있다. 합성 라텍스가 방출하는 양보다는 적지만, 이를 가공할 때 생기는 니트로사민만 깨끗하게 세척하면 친환경 콘돔으로 재탄생한다. 다만 라텍스 자체에 알레르기 반응이 있다면 사용할 수 없고(그렇다고 천연 라텍스 외 자연에서 얻는 유일한 원료인 램스킨, 즉 양의 창자로 만든 콘돔은 정자보다 작은 바이러스가 마음껏 드나들 수 있는 미세한 구멍 탓에 성병 예방이 불가능하다), 화학 성분으로 완성한 콘돔의 얇은 두께를 구현할 수 없으며, 획기적인 기능 개선의 연구가 폭넓지 않다. 일례로 스웨덴 성인용품 회사 레로(Lelo)가 2017년 개발한 ‘헥스 콘돔(Hex Condom)’은 350개 육각형으로 이뤄진 구조 덕분에 공기처럼 가볍고 뾰족한 핀으로 찔러도 구멍이 나지 않을 만큼 견고하다.

    한편 화장품 성분에 능통한 K-뷰티 여인들은 한 번쯤 콘돔 표면에 묻은 윤활제에 의구심을 품었을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상대적으로 안전하다. WHO와 FDA에서 콘돔의 윤활제로 공인한 실리콘 오일은 몸에 흡수되지 않은 채 그대로 배출되고 수용성 윤활제는 흔적 없이 휘발된다. 5년이라는 유통기한 안에는 (특수형은 2년) 콘돔이 성관계 중 손상되지 않도록 보호하는 역할도 수행한다. 그럼에도 마음 한구석이 불편하다면 동물실험을 하지 않는 비건 윤활제나 Y존을 약산성 환경으로 보호하고 대표 질염 세균인 칸디다균과 트리코모나스균을 억제하는 항염, 항균 윤활제를 사용한 콘돔까지 다채로운 선택지가 준비되어 있다. Y존 건강을 우선하고 안전한 성생활을 지지하는 콘돔 브랜드의 활약도 눈부시다. ‘세이브 프리미엄 콘돔’, ‘바른생각’, ‘이브 콘돔’ 같은 국내 제품은 물론 서스테인 내추럴(Sustain Natural), 글라이드(Glyde), 페어 스퀘어드(Fair Squared) 등 해외 기업도 여성 인권을 필두로 유해 성분 제로에 비건, 크루얼티 프리, 공정 무역 등 MZ세대가 열광하는 단어를 앞세운다.

    보수적인 성 문화와 콘돔에 대한 부족한 인식으로 몸살을 앓는 한반도가 2000년대 초반까지 세계 1위 콘돔 생산국이었던 이력을 알고 있는지. 인건비가 올라간 탓에 현재는 동남아 국가에 타이틀을 내줬지만 당시를 호령하던 콘돔 제조사 중 세 곳이 지금도 남아 있다. “남성 중심 사고와 가성비를 따져 생산하던 국내 콘돔 시장도 서서히 변화를 맞고 있어요. ‘세이브 프리미엄 콘돔’도 해로운 성분이 담기지 않도록 제작 전 과정을 꼼꼼히 확인하고 황색포도상구균, 살모넬라균을 포함한 5종 균 검사를 실시하는 등 콘돔 제조사와 철저한 검수 단계를 구축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특별히 노력하는 것처럼 비치지만, 따지고 보면 명백한 시장 논리예요. 믿을 수 있는 콘돔을 찾는 수요가 있으니 가능하죠.” 세이브앤코 박지원 대표의 말처럼 최대 콘돔 수출국에서 가장 안전한 콘돔 제조국 타이틀을 거머쥘 날이 머지않았다.

    미국 콘돔 구입자의 성비는 ‘40 대 60’으로 여성 수요가 낮은 편이지만, 15~18%에 지나지 않는 한국의 실정을 떠올리면 부러운 수치다. 이마저 기혼 부부가 생필품과 함께 지출했기 때문이고 미혼 여성이 스스로를 위해 콘돔을 준비하는 경우는 턱없이 부족하다는 분석이 힘을 얻고 있다. 콘돔의 주체가 남성에서 여성으로 이동하는 것은 중요한 문제다. 그리고 이 콘돔의 원료가 무엇인지, 제조 과정에서 유해 성분이 담기지 않았는지 낱낱이 살피는 주체적인 움직임도 필요하다. 거대 콘돔 회사의 다음 타깃이 건강한 삶을 지향하지 않는다면 안전한 콘돔도 없다.

    “콘돔보다 비행기가 중요할까?” 역사학자 데이비드 에저턴은 저서 <낡고 오래된 것들의 세계사>를 시작하며 이렇게 질문한다. 콘돔은 19세기 가장 획기적인 발명품으로 꼽히지만 발전 속도는 턱없이 느리다. 한 달에 한 번 먹어도 효력을 발휘하거나 남자에게도 피임권의 자유를 선사하는 경구피임약이 개발되고 있는 2020년. 쾌락과 만족을 넘어선 안전한 콘돔을 부르짖는 외침은 ‘섹슈얼 웰니스(Sexual Wellness)’의 시작이다.

    에디터
    이주현
    포토그래퍼
    차혜경
    패션 에디터
    허보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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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선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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