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 화보

Adieu

2023.02.26

by VOGUE

    Adieu

    이토록 아름답고 숭고한 2020년과의 작별 예식.

    갈비뼈처럼 입체적인 텍스처를 가미한 블랙 슬리브리스 톱과 새틴 롱스커트, 치아 모양 귀고리는 스키아파렐리(Schiaparelli).

    회화적 요소와 오브제가 회화의 평면 공간을 물리적 공간으로 확장하는 박경률의 작품 ‘당신을 환영합니다’. 소매의 볼륨이 특징인 멜리타 바우마이스터(Melitta Baumeister)는 벨벳 재킷과 기다란 홀터넥 드레스.

    이우성의 천 그림 시리즈 중 ‘늘 생각하고 있습니다’. 얼굴을 그래픽적으로 표현한 컬러풀한 퀼팅 패딩과 인조 모피 코트는 샤를 드 빌모랭(Charles de Vilmorin), 더비 슈즈는 느와 케이 니노미야(Noir Kei Ninomiya).

    이불의 2005년 작 ‘키아즈마’. 기술 발전을 통해 도달하려는 유토피아적 욕망과 디스토피아적 실패를 동시에 담고 있다. 양어깨 라인에 기린 패치워크를 더한 구조적인 시스루 케이프와 튜브 톱 미니 원피스, 힐은 구오 페이(Guo Pei).

    전통 건축의 격자 프레임을 통해 그림을 보고 그 그림은 외부 풍경을 품는다. 이우성의 작품 ‘좋은 하루 되세요’. 옆얼굴과 하트를 담아낸 구스다운 패딩은 샤를 드 빌모랭(Charles de Vilmorin).

    전통 건축의 격자 프레임을 통해 그림을 보고 그 그림은 외부 풍경을 품는다. 이우성의 작품 ‘늘 생각하고 있습니다’. 실루엣 드레스는 윈도우센(Windowsen). 과감한 컷오프 디자인과 풍성한 러플 테일이 어울린 드레스로 단아한 한옥 온돌방에 어울렸다.

    최고은의 ‘오페쿨러’는 덕수궁에 존재하는 굴뚝과 소화전의 원형을 가져와 대량 유통되는 대리석 판석재를 재가공한 조각 작품이다. 미래적이면서도 위트 가득한 하트 실루엣의 아레아(Area) 실버 드레스가 어울렸다. 앵클 부츠는 오프화이트(Off-White).

    네덜란드 디자이너 클라에스 이베르선(Claes Iversen)의 꾸뛰르 드레스는 거대한 러플 디테일 소매와 비즈 장식을 더해 독특하다.

    덕수궁 석어당 앞마당에는 올해로 사백오십 살이 넘은 살구나무가 있다. 아득한 역사로 남은 대한제국의 황궁. 원래는 경운궁으로 불리던 이곳이 덕수궁(德壽宮)이 된 건 조선의 마지막 왕 순종에게 왕위를 물려준 고종이 이곳에 머물면서 ‘고종의 장수를 빈다’는 의미로 개칭한 것이다. 조선의 왕 중 환갑을 넘긴 경우라 해봐야 태조와 정종, 숙종, 영조, 고종까지 다섯이니 그 이름값은 한 셈이다. 하지만 이미 쇠락한 나라의 명운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한국 근대사의 중심이자 새 시대의 희망이었고 슬픔이기도 했던 덕수궁에선 지금 동아시아 현대미술의 오늘을 이야기하는 전시가 열리고 있다. 사단법인 서울정동동아시아예술제위원회와 중구청이 주최한 ‘Art Plant Asia 2020’의 출발을 알리는 첫 행사 <아트 플랜트 아시아 2020: 토끼 방향 오브젝트(Hare Way Object)>다. ‘AP 아시아 2020’은 동아시아를 무대로 예술가와 시민들이 교류할 수 있는 매개의 장을 만들고자 팬데믹 시대에 가능한 예술의 생산과 유통을 고민한 주제 전시를 지난 10월 23일부터 덕수궁 궁궐 안팎에서 선보이고 있다. ‘토끼 방향 오브젝트’라는 이 깜찍한 전시 제목은 덕수궁이 위치한 정동(貞洞)과 발음이 같은 정동(正東) 방향을 뜻하는 옛말 묘방(卯方·토끼 방향)에서 따왔다. 공교롭게도 고종이 덕수궁 함녕전에서 승하한 시각 역시 1919년 1월 21일 묘시(卯時)였다. 이름만 보면 동아시아 전설에 등장하는 옥토끼(달토끼)도 연상된다.

    둥근 달과 잊힌 제국의 옛 황궁. 그 오랜 전설과 역사의 상징적 장소에서 펼쳐지는 현대미술 전시다. 이우환, 윤형근, 이불, 양혜규 등 한국 대표 작가의 작품을 볼 수 있는 기회일 뿐 아니라 함녕전 행각과 전각이 장지문을 모두 들어 올리고 일반 관객에게 내부를 훤히 공개하는 건 흔치 않은 일이다. 게다가 요즘 덕수궁은 단풍이 한창이다. 전시는 고종 황제의 침전이었던 함녕전을 중심으로 곳곳에서 열린다. 함녕전 남쪽과 동쪽을 에워싼 이 행각들은 황제의 시중을 들던 내관과 궁녀들이 머물던 거처 겸 창고로 짐작된다. 전시가 시작되는 함녕전 마당에는 우한나 작가의 패브릭 오브제가 주렁주렁 걸려 있는데 이 중 하나를 골라 착용한 채 전시를 관람할 수 있다. 자신의 신장 한쪽이 기형적으로 유실되었다는 사실을 안 작가가 인간의 장기 모양을 모티브 삼아 만든 탈착 가능한 장기-의복-장치다. 입는 순간 관람객은 움직이는 오브제의 일부가 되어 익명의 타인들과 함께 퍼레이드를 벌인다. 헤드폰도 대여품 중 하나다. 기묘한 음악 소리와 엉뚱한 안내가 시시때때로 흘러나오는 이 장치는 오디오 가이드 형식을 빌린 임영주 작가의 작업이다. 심수봉의 노래로 유명한 번안곡 ‘백만송이 장미’가 라트비아 원곡과 러시아어, 일본어, 한국어 버전으로 나오는데 유서 깊은 전통 한옥과 대한제국 시절의 서양식 건물, 근래 만들어진 각종 시설물과 증축물이 혼재된 궁 안을 이 노래를 들으며 거니는 기분이 꽤 묘하다.

    함녕전 행각에서는 한국 전후 미술과 1970년대 한국 미술, 차세대 한국 작가들의 작업을 조명한다. 먼저 근현대방에서는 박수근과 그가 주축이 된 미술 단체 ‘주호회’를 비롯, 그 주변 작가들을 파리에서 앵포르멜을 직접 경험한 김환기, 김흥수, 남관 등과 겹쳐두고 이를 다시 동시대 작가 김혜련의 작업과 병치한다. 1970년대에 등장한 이우환, 박서보, 윤형근, 김창열 등의 단색화와 김홍주의 극사실 회화가 나란히 놓이고, 지난해 베니스 비엔날레 본전시에서 주목받은 강서경 작가의 화문석 작업이 또 다른 방 한쪽을 차지한다. 한지를 바른 초록색 문짝을 활짝 열어젖힌 이 수십 개의 방은 비슷한 듯 조금씩 다르다. 혁오 밴드의 뮤직비디오 애니메이션 작업으로 익숙한 박광수의 검은색 스케치 작업, 그래픽 디자이너 슬기와 민의 ‘그레이스케일’ 시리즈, 박경률의 설치 작업과 이우성의 천 그림이 차례로 이어진다. 각기 다른 방식으로 표현된 이 풍경, 전혀 풍경처럼 보이지 않을지라도 얼마든지 풍경으로 해석 가능한 이 이미지는 외출도 쉽지 않은 코로나 시대에 벽과 지붕으로 막힌 공간 안에서 그린 일종의 상상 속 풍경화다.

    구동희의 부력을 활용한 야외 조각 ‘비상-수평선’과 덕수궁의 가을. 빨간 카네이션 꽃밭을 표현한 듯한 케이프와 샤 소재 스커트, 블랙과 레드 가발로 그러데이션을 표현한 슬리브리스 원피스는 느와 케이 니노미야(Noir Kei Ninomiya).

    디스코 걸을 연상시키는 실버 메시 드레스와 슈즈는 버버리(Burberry). 크리스털 프린지를 더해 화려하다. 귀고리는 스키아파렐리(Schiaparelli). 불규칙적으로 부착된 다양한 크기의 방울과 동물 털을 연상시키는 울퉁불퉁한 외형의 조각은 양혜규의 ‘소리나는 깜깜이 털투성이 포옹’.

    거대한 러플 디테일과 모노톤 비즈 장식으로 완성한 클라에스 이베르선(Claes Iversen)의 원 숄더 점프수트. 모노톤의 비즈 문양은 우리 한옥의 정갈한 담장을 닮았다.

    사물과 사진적 재현 사이에 생겨나는 미세한 균열을 표현한 장미 15송이의 초상. 정희승의 ‘Rose is a rose is a rose’ 연작 중 ‘무제’. 유연한 곡선으로 어우러진 튜브 톱드레스는 안토니오 그리말디(Antonio Grimaldi), 샌들 힐은 알렉산더 맥퀸(Alexander McQueen).

    블랙과 레드 가발로 모피 같은 텍스처를 살린 슬리브리스 원피스와 플라워 모티브 케이프는 느와 케이 니노미야(Noir Kei Ninomiya).

    또 창과 마루를 통해 자연이 집의 일부가 되는 한옥의 특성상 작품이 놓인 공간의 특성에 따라 뜻밖의 풍경이 더해지기도 한다. 예를 들어 작은 방 천장에 대롱대롱 매달린 양혜규의 조각 시리즈 ‘소리나는 깜깜이 털투성이 포옹’은 창 너머의 붉은 단풍과 대조를 이루며 바람이 불 때마다 서로 살랑살랑 흔들린다. 야외 전시이다 보니 행각에 설치된 작품은 빛과 구름의 이동에 따라서도 느낌이 달라진다. 변화가 제일 드라마틱하게 드러나는 건 즉조당에 자리한 정희승의 장미 사진 연작이다. 유난히 볕이 잘 드는 툇마루엔 거트루드 스타인의 유명한 시구를 차용한 15송이의 낭만적인 장미 초상(‘Rose is a rose is a rose’)이 만발해 있다. 장미 액자에 내려앉은 햇살뿐 아니라 정희승 작품 특유의 맑고 담백한 이미지와 즉조당의 밝고 선명한 단청이 이루는 조화도 인상적이다.

    그 옆 석어당에는 이불의 설치 작품 ‘키아즈마’가 공중에 매달려 있다. 석어당은 임진왜란 후 환도한 선조가 승하할 때까지 사용한 건물로 1904년 덕수궁 화재 이후 복원한 것이다. 후대의 왕들이 선조를 애도하고 임진왜란을 잊지 않기 위해 단청을 하지 않은 채 백골집을 유지했다. ‘키아즈마’는 감수 분열로 염색 분체가 X자 형태로 꼬인 새로운 조합을 이루게 되는 상황을 뜻하는데, 관람객의 눈에 보이는 이 거대한 흰색 덩어리는 마치 박제된 사이보그 혹은 잘못된 시공간에 갖힌 아름답고 슬픈 괴생명체 같다. 백색의 빛과 처마의 그림자가 만드는 서정성이 더 그런 분위기를 자아낸다. 덕수궁에서 가장 오래된 살구나무는 바로 이곳 마당에 있다.

    고종이 외국 사신을 맞이하던 준명당 스크린에선 싱가포르 작가 호추니엔의 ‘노맨 II’를 볼 수 있다. 이번 전시에는 호추니엔 외에도 최근 주목할 만한 아시아 작가들이 참여했다. 동남아시아의 역사를 비판적으로 추적해온 호추니엔의 ‘노맨 II’에서 온라인 오픈 소스에 기반하여 알고리즘으로 생성된 50여 개 형상은 거울 위를 유령처럼 떠돈다. 짐승, 사이보그, 해부학 모형 등 그 출처가 모호한 형상은 인류가 만들어낸 상상 속 존재들이다. 야외 전시의 특성상 어두워야 화면이 잘 보이다 보니, 이들은 해 질 무렵에야 살아나 옛 궁을 어정거린다. 준명당은 덕혜옹주를 위한 우리나라 최초의 유치원으로 사용되었다. 고종이 커피를 즐기던 러시아식 건축물 정관헌에서는 여성 국극을 소재로 ‘2018 올해의 작가상’을 수상한 정은영의 ‘유예극장’과 김희천, 차재민의 영상 작품을 만날 수 있다. 중화전 일원에서는 안정주 & 전소정의 ‘오토매틱 오토노미’가 반복 상영된다. 무용수의 신체에 부착된 카메라와 24시간 궁 안을 샅샅이 비추는 CCTV 푸티지를 활용한 것으로 너무도 사소해 우리가 미처 인식하지 못했던 익숙하고도 낯선 풍경이 흐른다.

    비슷한 의미로 어떤 작품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덕수궁의 일상적 풍경과 뒤섞인 나머지 작정하고 찾지 않으면 전시의 일부인지 눈치채기 어려울 수 있다. 궁 내부의 굴뚝과 소화전을 석탑 양식으로 복원한 최고은의 ‘오페쿨러’나 정지현의 천연덕스러운 해태 조각 같은 경우다. 상상의 동물을 디오라마 석재로 제작하는 정지현은 중화전 앞 계단의 난간석으로 자리한 해태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연못으로 향하는 길목에 나른하게 반쯤 누운 포즈의 색다른 해태를 완성했다. 최고은의 작업은 중고 에어컨과 같은 백색 가전의 몸체를 해체한 9점의 야외 조각으로도 볼 수 있는데 이 빛바랜 쇳덩어리들은 덕수궁이라는 역사적이고 전통적인 장소와 어울리지 않는 매우 이질적 사물임에도 원래부터 그 자리에 있던 나무나 석상처럼 전혀 위화감이 없다.

    야외 연못에는 오리 대신 구동희의 조각 작품이 둥둥 떠다닌다. ‘비상-수평선’이라 명명된 알록달록한 조각이다. 구동희는 덕수궁에 인공적으로 조성된 연못의 기억과 공공 미술이라는 이름으로 방방곡곡에 세워진 수많은 ‘비상’의 의미를 중첩시켰다. ‘비상’은 공공 미술품의 제목 중 가장 흔한 예다. 어디선가 한 번쯤 봤음직한 날지 못하는 비상이다. 형광색 미니어처는 연못의 수려한 자연과 하나가 되어 꽤 스펙터클한 경관을 연출한다. 아름다운 환상 동화 속 한 장면 같다

    보라색 벨벳 재킷과 드레스는 멜리타 바우마이스터(Melitta Baumeister).

    스포티즘과 만난 윈도우센(Windowsen)의 꾸뛰르. 운동화의 다양한 부분을 연결하고, 안전벨트 같은 띠를 더한 튜브 톱이 그것. 다양한 채도의 보라색 튤 소재 러플을 믹스해 드라마틱한 실루엣을 완성했다.

    한복처럼 우아한 거대한 러플 디테일 소매와 비즈 장식으로 완성한 드레스는 클라에스 이베르선(Claes Iversen), 컬러 스톤 목걸이는 샤넬(Chanel).

    화려한 스팽글로 완성한 에메랄드 빛깔 드레스는 발망(Balmain), 스포티한 싸이하이 부츠는 GCDS.

      패션 에디터
      손은영
      포토그래퍼
      장덕화
      컨트리뷰팅 에디터
      이미혜
      에디터
      이소민, 허보연
      모델
      배윤영, 김별
      헤어
      김승원
      메이크업
      이영
      장소
      전시 '아트 플랜트 아시아 2020: 토끼 방향 오브젝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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