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

우리의 소녀 시대

2023.02.20

by VOGUE

    우리의 소녀 시대

    지금 이 세상에는 더 많은 소녀들의 이야기가 필요하다.
    소녀 시대를 통과하지 못하면 다음으로 나아갈 수 없기에.

    Carlotta and Esme, 2020 © Chantal Joffe

    그레타 거윅 감독은 <레이디 버드> 투자를 받으러 다니다가 흥미로운 점을 발견했다. 자금을 댈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남자였는데 그들은 여자가 그렇게 싸울 수 있다는 사실 자체를 믿지 못했다는 것이다. 딸이나 여자 형제가 있는 투자자는 영화를 이해했고, 그렇지 않은 투자자는 <레이디 버드>가 영화로 만들 만한 이야기라는 생각조차 못했다. 거윅은 당시 인터뷰에서 말했다. “<보이후드>는 있는데 여자아이들에게는 어떤 영화가 있나요? <400번의 구타>는 있는데, 여자아이들을 위한 영화는 어떤 작품이 있을까요? 소녀들의 인간성이란 무엇일까요?” 거윅은 여자들이 싸우는 장면을 작품에 자주 포함시켰다. <프란시스 하>는 두 친구가 워싱턴 스퀘어 파크에서 말다툼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레이디 버드>에서 시얼샤 로넌은 어느 학교에 진학할 것인가에 관해 엄마와 말다툼을 벌이다가 달리는 차 문을 열고 그냥 뛰어내린다. 여자들이 얼마나 목숨을 걸고 싸우는가에 대해서는 역사적으로 수천, 수만 고증이 있다.

    물론 나 역시 살아 있는 증인이다. 한 반에 50명, 한 학년이 18개 반으로 이루어진 여자중학교에서는 늘 모래 비린내가 풍겼다. 대체로 우리는 걷기보다 뛰었고 속삭이기보다는 괴성을 질렀다. 싸움에 관해서라면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나는 장면이 있다. 두 친구는 복도에서 살짝 언쟁을 벌이고 있었다. 잠시 후 한 친구가 어깨를 밀쳤고 곧 날아오르듯 오른쪽 다리를 들어 상대의 배를 걷어찼다. 복부를 강타당한 친구는 복도 끝에서 끝까지 날아갔다. 구경꾼들의 고개는 날아가는 친구와 함께 포물선을 그렸다. <오렌지 이즈 더 뉴 블랙>처럼 감옥에 살지 않아도 여자들은 싸운다. 여자들이 싸운다는 사실을 믿지 못했다는 건 소녀들이 생각하고 욕망하고 행동하는 주체적 존재임을 부정한다는 의미다.

    사전은 소녀를 “아직 완전히 성숙하지 아니한 어린 여자아이”로 정의한다. 부모를 포함한 사회는 이들이 ‘성숙’할 때까지 재단하고 훈육할 의무를 정당하게 부여받는다. 소녀는 정치적으로 주체적으로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없다는 암묵적 합의 역시 되어 있다. 대중문화는 깨끗하게 맑게 자신 있게, 청순가련, 국민 여동생, 롤리타, 요정, 걸 크러쉬, 알파 걸로 ‘소녀상’을 견고히 하고 있다. 오늘도 너에게 설렜다고 춤추고 노래하는 소녀들과 외모 콤플렉스에 시달리다가 메이크업으로 여신이 되는 소녀가 전파를 타고 있다. 소녀의 이미지는 대상화되거나 주목을 끌기 위해 여러 가지 용도로 소비되지만 거윅이 토로한 것처럼 이 시대를 사는 대다수 소녀들의 서사만큼은 생략되어 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자기 방식대로 해내는 소녀들. 당연히 싸우기도 하는 소녀들이다.

    소녀기에 대해 영화 프로그래머 조혜영은 공저 <소녀들>에서 “이미지는 과잉되지만 그 이미지의 소녀의 주체는 주변화된다. 자신의 이미지로부터 가장 소외되는 이들이 아마 소녀일 것이다”라고 썼다. 시몬 드 보부아르는 <제2의 성>에 적었다. “소녀기는 주체이며 능동체인 채로 자유롭기를 갈망하는 그녀의 선천적 욕구와 또 한쪽에서는 그녀에게 피동적 존재이기를 원하는 색정적 경향과 사회적 압력 사이에 격심한 투쟁이 일어나는 시기이다”라고.

    나 역시 언젠가 소녀였지만 학생으로 억압이 더 강력하게 작용했다. 돌이켜보면 오직 성인 여자가 되기 위한 준비 기간이었다. 성인 여자가 되기 위해서는 대학에 가야 했다. 그 시절 소위 공부만 잘하면 놀라울 정도로 많은 것이 허락되었다. 좋은 대학에 진학하는 학생 숫자를 늘려야 하는 학교의 입장, 어떤 문제도 일으키고 싶어 하지 않는 교사의 입장, 무엇보다 자식이 잘되었으면 하는 부모의 입장을 모두 파악하고 있는 소녀들은 사실 그렇게 미성숙하지 않았다. 학교라는 작은 사회가 우리의 작은 일탈을 용인하면 할수록 자신감은 올라갔다. 사회가 원하는 소녀상은 식물형이었지만 실제 우리는 공격성이 강한 동물형에 가까웠다. 늘 며칠 굶은 개처럼 먹어댔고 입시라는 목표에 걸리적거리는 소년들을 거추장스러워했다. 학원물 속 여주인공과 달리 사랑은 큰 관심사가 아니었고 공포물 속 여주인공처럼 전교 1등을 옥상에서 밀어버릴 만큼 사리 분별력이 없지도 않았다. 보이 밴드를 사랑했고 노래방에서 그들의 노래를 목 터지게 불렀으며 수업 시간에는 대체로 엎드려 잤다. 곧게 뻗은 친구의 다리를 내심 질투했고 친구네 집 아파트 평수를 비교도 했다. 하지만 그때만큼 스스로의 욕구와 욕망에 집중하던 시기도 없었다. 이런 우리의 마음을 살피는 어른은 없었다. 모든 것은 그 시기 미쳐 날뛰는 호르몬 탓으로 돌리면 서로 편했다.

    얼마 전 리만머핀 갤러리에서 나는 그 시절 나와 내 친구들의 얼굴을 봤다. 샹탈 조페(Chantal Joffe)가 그린 ‘Teenagers’ 시리즈 속 소녀들은 대체로 ‘그냥’ 있었다. 그냥 있을 때 우린 주변이 환해지도록 웃지도, 분노하며 화를 내지도 않는다. 심드렁하게 자신만의 생각에 빠져 있다. 외롭거나 고민이 많지만 대부분은 그 자체로 평온하다. 육체도 정신도 다 자랐지만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유가 없던 소녀 시절 우리는 다소 무기력했다. 패션모델, 포르노 배우 등 여자들의 초상을 그려온 샹탈 조페는 딸 에스메(Esme)를 낳고부터는 자화상에 집중하는 한편, 딸과 딸의 주변인들을 기록하듯 그렸다. 조페의 담담하고 단단한 붓질은 텅 비어버린 듯했던 소녀기가 분명히 존재했음을 긍정하고 있었다.

    여성 문학 연구가 김은하는 공저 <소녀들>에서 우리가 어린 시절을 망각하듯 소녀기 역시 망각의 어둠 저편에 던져져 있다고 지적한다. 그리고 소녀기가 주목받지 못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소녀기는 인생의 한 부분에 불과한 일시적 시기, 즉 이행성을 특징으로 하기 때문에 그다지 중요한 위상을 부여받지 못한다. 소녀는 성인 여성에게는 애도되지 못한 채 자기 안에 살고 있는 낯선 유령이다.”

    내 안에는 무력감에 지배당하던 소녀 유령이 여전히 살고 있다. 그런데 요즘 변화가 생겼다.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소리를 내지르는 소녀들을 발견할 때마다 내 속의 유령이 즐거워하는 게 느껴진다. 사회는 소녀들을 타자화하지만 소녀들을 자기 자리로 돌려놓는 이 역시 소녀들 자신이다. 한 명도 똑같지 않은 그들이 천편일률적 소녀 이미지를 바꾼다. 세상에는 더 많은 소녀들의 이야기가 필요하다. 우리의 소녀 시대를 긍정해야 다음으로 나아갈 수 있다.

    한 해가 바뀌었다. 생각하고 욕망하고 행동하는 소녀들에게는 해야 할 이야기가 가득하다.

    에디터
    조소현
    이미지
    Courtesy of the artist and Victoria Miro / Presented by Lehmann Maupin, Seo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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