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든글로브의 최대 실수? 윤여정 유니버스의 확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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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든글로브의 최대 실수? 윤여정 유니버스의 확장

2021-02-22T17:53:10+00:00 2021.02.22|

제78회 골든글로브는 <미나리>를 미국 영화가 아닌 외국어 영화로 규정하면서 미국 영화인의 지탄을 가장 많이 받은 시상식으로 기억될지 모른다. 브래드 피트가 대표로 있는 영화사가 제작한 영화가 외국어 영화가 된 이유는 아주 단순하다. 영어가 아닌 외국어, 다름 아닌 한국어가 영화의 주된 언어이기 때문이다. <기생충>으로 골든글로브 외국어 영화상을 받은 봉준호 감독이 “1인치 (자막) 장벽을 뛰어넘으면 더 많은 영화를 즐길 수 있다”고 소감을 말한 뒤 1년여 후에 벌어진 해프닝이다. <미나리>는 미국 영화임에도 오히려 1인치 자막으로 인해 자국을 자국이라 부르지 못하는 홍길동의 서자 설움에 버금가는 상황에 직면했다.

<미나리>의 외국어 영화 논란은 진화 중인 미국 영화의 다양성을 오히려 미국 제도가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적어도 아카데미 시상식은 영화 제작 각 분야에 인종과 성별 쿼터를 만들어 이를 지켜야만 출품할 수 있다는 규정을 발표하며 시대에 발맞추는 행보를 보인다. 그러나 골든글로브는 이민자의 국가에서 영어만 미국 언어라는 편견을 드러냈다. 후보작을 발표하던 날, 아시아계 문화 인사들과 신문/잡지/방송 등 유수의 매체는 목소리를 높여 “<미나리>는 미국 영화”라고 강력하게 주장하기 시작했다. 다양성이란 백인, 흑인, 아시아인이 고루 등장한다고 지켜지는 가치가 아니라 언어와 문화를 반영해야 한다는 각성이 미국 전역에 퍼졌다.

배우 윤여정의 골든글로브 여우조연상 후보 탈락 또한 논란거리가 되었다. 지난 연말에 각종 비평가 협회에서 2020년 최고의 조연 여우로 칭송을 받았고, 전미비평가협회에서도 최고의 조연 여우에 등극했지만 골든글로브에선 이름조차 언급하지 않았다. 물론 다른 후보들도 훌륭한 배우들이고, 꼭 골든글로브 후보가 되어야만 명배우로 인정을 받는 건 아니다. <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로 미국에 대대적으로 존재를 알린 영국 배우 올리비아 콜맨을 두고 영국인들이 ‘영국의 국보’라고 자랑스러워했던 것처럼, 한국인에게도 윤여정은 국보이자 전설이고 국민 배우다. 다시 한번 봉준호 감독이 남긴 명언 “오스카는 지역(Local) 시상식”을 상기해보자. 골든글로브나 아카데미나 세계 유수의 시상식 중 미국 ‘지역’에서 시상하는 상이 아니던가.

그러나 그 지역에서 아시아계 배우가 시상식 후보가 되는 것은 꽤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윤여정은 골든글로브보다 더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미국배우조합상(SAG Awards)에서 한국 여자 배우로는 처음으로 여우조연상 후보에 올랐다. <바벨>의 기쿠치 린코가 아시아계 후보로 오른 적이 있으나 수상으로 이어지진 못했다. 윤여정이 상을 받는다면 한국 배우의 쾌거를 넘어 미국 내 아시아계 배우로는 처음 수상하는 역사적인 기록을 세운다. 이는 미국 지역민들에게 인종 간 유리 천장을 시원하게 부수는 사건이다. 한국인으로서 평생을 보고 자란 브라운관 고모님 같은 존재가 큰 상을 받게 된다니 가족처럼 뿌듯한 마음과 함께, 아시아 이민자로서는 미국의 다양성 척도 확립에 한국 배우가 크게 기여하고 있어 더 큰 박수를 보내고 싶은 마음이다.  <센스8> 캐스팅 당시 비중이 작아서 거절하려다 “한국에 당신 같은 배우가 있다는 걸 외국인에게 보여주고 싶다”는 말 한마디에 출연을 약속했다는 그의 도전이 드디어 빛을 보는 듯하다.

윤여정 팬에게 <미나리>는 늘 똑 부러지게 할 말을 하는 쿨한 중년 여자 같은 이전 역할과 달리 수수한 모습을 목격하게 되는 흥미로운 작품이기도 하다. 딸을 만나기 위해 처음 미국 땅을 밟은 할머니는 군밤을 입으로 까서 손자에게 건네고, 화투를 치며 한국의 찰진 욕설을 전수한다. 오줌싸개 손자를 놀려서 창피를 주기도 하지만, 몸이 약한 그에게 세상에서 가장 강한 아이라며 격려도 아끼지 않는다. 윤여정이 연기하는 할머니 순자는 아무것도 없던 물가에 미나리를 심어 이민자의 상징과 같은 미나리밭을 선사하고 가족의 화합을 돕는 존재다. 손자 데이빗의 성장에 맞춰 분절적으로 전개되는 이야기는 할머니의 면면을 훑는 대신 단편적인 에피소드로 진행되지만, 비약적 전개에도 윤여정은 누구나 자신의 할머니를 떠올리게 만들 만큼 캐릭터를 생생하게 빚어내는 데 성공한다. 여느 한국 감독이었다면 선뜻 그에게 제안하기 힘들었을 귀엽고 평범한 할머니의 모습을 한국계 미국인 정이삭(리 아이작 정) 감독이 충실하게 담아냈다. 덕분에 우리는 <돈의 맛>과 <디어 마이 프렌즈> 같은 작품에서는 볼 수 없던 할머니를 보며 세계 관객과 함께 감동의 눈물을 흘릴 수 있게 되었다. 할머니에 대한 기억으로 미국 관객을 단합시키고 있는 이런 윤여정의 행보를 단순히 ‘미국 진출 성공’으로 평가하기엔 부족한 감이 있다. 진출보다는 윤여정 유니버스의 ‘확장’이라고 말해야 옳지 않을까?

윤여정에 대한 열광은 아시아계 배우에 대한 시선과 낯선 언어에 대한 태도가 몇 년 사이 완전히 바뀌었음을 시사하기도 한다. 가장 큰 이유는 <내가 사랑했던 모든 남자들에게>, <블랙 썸머>, <김씨네 편의점>, <서치>, <센스8> 등 한국계 캐릭터가 중심인 콘텐츠가 꾸준히 등장했기 때문이다. <기생충>의 오스카 수상 이후엔 <킹덤>과 <스위트홈>이 넷플릭스에서 한국 콘텐츠의 인기를 세 배 이상 올려놓는 역할을 수행했다. 애플의 OTT 플랫폼인 애플TV+는 이민진 작가의 베스트셀러 <파친코>를 시리즈로 만들고 여기에 또 윤여정이 합류한다. 마블의 <이터널스>에선 무려 마동석이 활약할 예정이다. 재능 있는 아시아인들이 미국 콘텐츠에 뛰어들어 세상의 다양성 지수를 높이며 역사를 바꾸는 시대다. 이 시점에서 한국의 보물과 같은 배우들이 한국 밖으로 나가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데 일조한다 말하면 심한 오버액션일까. 골든글로브? 아카데미? 더 큰 세계가 열리고 있는 시기에 한국 배우들에겐 그런 외부의 인정이 더 이상 절박하지 않다. 이렇게 살짝 설레는 와중에 걱정이 있다면? 늘 보던 배우들의 해외 출장이 잦아져 앞으로 스크린과 드라마로 자주 만나기 쉽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