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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요 속의 생리 빈곤(Period Poverty)

2021.02.23

by VOGUE

    풍요 속의 생리 빈곤(Period Poverty)

    생리 중에도 공부하고 일하는 일상은 이어져야 한다. 그런 요구는 사치가 아니다.

    시간이 흘렀지만 쇼핑몰에서 생리대를 살 때면 여전히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에서 생리대를 훔치던 케이티(헤일리 스콰이어 분)의 얼굴이 떠오른다. 두 아이를 돌봐야 하는 그녀는 아이들을 위한 빵은 간신히 살 수 있었지만 생리대는 그러지 못했다. 그녀의 행동을 의심하며 뒤따라온 경비원이 뒤진 케이티의 주머니에서는 몰래 넣은 생리대와 여성용 제모기가 후드득 떨어졌다. 케이티는 나에게 노동으로 돈을 벌어 스스로를 건사하는 삶이 무너졌을 때 과연 무엇부터 포기할 것인지 질문을 던졌다. 배가 고파 하늘이 노랗게 흐려지는 순간 나는 과연 라면 한 봉지를 선택할까, 자궁에서 흘러나온 검붉은 점막을 처리해줄 생리대를 선택할까. 생리대 대신 라면을 선택해 하체가 생리혈 범벅이 된다면 그 치욕은 견딜 수 있는 성질의 것일까. 근본적인 것을 감당할 수 없다는 당혹감은 생을 향한 의지를 즉각적으로 앗아간다. ‘팩트’는 분명하다. 월경을 하는 여자는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 남자보다 돈이 많이 든다. 평생 2,000만원쯤. 우리나라 생리대 평균 가격 331원으로 계산기를 두드려 나온 금액이다.

    ‘생리 빈곤(Period Poverty)’이라는 용어가 있다. 2017년 영국에서부터 널리 알려졌는데, 월경하는 동안 생리용품을 구입할 형편이 되지 않는 상태를 뜻한다. 생리 빈곤을 전 세계에 널리 알린 건 당시 열일곱 살 아미카 조지(Amika George)다. 신문에서 생리대를 사지 못해 결석하는 여학생 13만7,000여 명의 현실을 접한 아미카는 해시태그 #freeperiods를 만들어 개인의 문제로 치부되어온 생리 빈곤으로 인해 누구나 누려야 할 학습권이 침해받는다고 주창하며 공감을 얻었다. 그리고 같은 해 12월 붉은 의상을 맞춰 입고 시위를 하며 런던 한복판을 피바다로 물들인 인원은 2,000명이 넘었다. 아미카는 외쳤다. “생리 빈곤은 여성의 어린 시절을 빼앗고 있습니다. 생리대가 없어서 결석하면 교육적으로 뒤처치고 결과적으로 사회적 고립으로까지 이어집니다. 생리는 생존과 관련된 것입니다. 생리대에 세금을 부과하지 말고 저소득층 청소년에게 무상으로 생리대를 지급해주세요.” 그리고 2년 만에 영화 같은 일이 일어났다. 영국은 중·고등학생과 대학생에게 생리대 무상 지급을 결정했고, 유럽연합을 탈퇴하면서 생리용품에 부과하던 탐폰세를 폐지했다. 2020년 스코틀랜드에서는 더 큰 변화가 일어났다. 연령, 소득에 관계없이 생리용품을 무료로 지급하기로 한 것이다! 그렇게 스코틀랜드는 최초의 무상 생리대 국가가 됐다.

    우리의 경우 국민일보의 운동화 깔창 생리대 보도로 생리 빈곤이 알려졌다. (여성용품에 부과되던 부가가치세 10%는 2004년에 폐지되었다. 그럼에도 생리대가 독보적으로 비싼 이유는 생리대 회사만 알 것이다.) 당시 성남시에서 저소득층 청소년 생리대 지원 사업을 시작하며 생리대 기부의 막이 올랐다. 이후 선거철마다 표를 얻기 위한 단골 공약으로 쓰였고 성과가 없지 않았다. 기부 물품 리스트에 식료품과 동등하게 등장했고, 청소년은 물론 노숙자, 다문화 가정 소녀까지 시선을 넓힌 자선단체도 생겼다. 그리고 드디어 여성가족부에서 저소득층 여성 청소년을 위해 생리대 바우처 제도를 도입했다. 강남구는 초·중·고에 생리대 자판기를 설치했고, 경기도 여주시는 지자체 가운데 최초로 만 11~18세 모든 여성 청소년에게 무상 생리대를 지급하는 조례를 통과시켰다. 생리를 쉬쉬하던 과거를 떠올린다면 실질적이고 즉각적인 변화다. 하지만 조건을 정해서 돕는 정책은 조건, 즉 가난을 증명해야 하는 숙제를 남겼다.

    월경권 보장을 위해 1인 시위에 나섰던 한 고등학생은 가난하다고 말해야만 생리대를 받을 수 있는지 되물었다. 정말 돈이 없어서 생리대를 지원받아야 하는데 담당자를 여럿 거쳐야 할 때, 특정 화장실에 가야만 생리대를 구할 수 있을 때 찾아오는 수치심에 대한 문제 제기였다. 생리대 지급은 학습권, 기본권, 건강권을 지켜줄 수 있는 당연한 권리로서 존재해야 한다. 더 단순하게 말해 월경을 할 때도 월경을 하지 않을 때와 마찬가지로 공부하고 일하며 일상을 보낼 수 있는 권리 말이다. 나는 현직 중학교 교사에게 생리대로 곤란을 겪는 학생이 있느냐고 물어본 적이 있다. 보건실에 요청하면 제공될 테지만 생리는 창피하다는 인식 때문에 생리용품을 요구하지 않는 아이들도 분명 있으리란 우려를 비쳤다. 정신적으로 아프거나 와병 중인 보호자와 함께 생활한다면 지원 제도가 있다는 사실 자체를 모를 수도 있다고도 했다. 제도를 갖추고 있지만 이를 알리고 지원해주는 어른이 있는가는 복불복에 맡겨야 하는 현실. 생리대를 선별적 복지가 아닌 보편적 복지로 고민해야 하는 이유다.

    지원 대상에서 빠져 있는 만 11세가 되지 않은 초등학생의 상황은 더 좋지 않다. 요즘 초등학생 딸을 키우는 부모 중에 성조숙증을 걱정하지 않는 경우가 오히려 드물다. 성조숙증은 신장 등 성장에 영향을 주기도 하지만 초경을 앞당긴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 생리를 시작할 경우 혼자 생리대 처리를 힘들어해서 쉬는 시간에 보호자가 학교로 달려가는 경우도 빈번하게 생긴다. 이때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알려주는 어른이 없다면 아이의 하루는 얼마나 고통스러울까.

    유튜브에서 <그날>이라는 단편영화를 본 적이 있다. 수학여행 가라고 엄마가 준 5,000원을 들고 편의점 생리대 코너에서 한참을 망설여야 할 정도로 경제적으로 어려운 주인공은 화장실 칸에 앉아 있다가 친구들의 대화를 듣는다. “걔는 왜 만날 생리대를 빌리기만 해? 거지 새끼면 생리대를 쓰지 말든가.” 선택한 적도 바란 적도 없지만 여자의 신체로 태어났기 때문에 한 달에 한 번 몸에서 흘러나오는 액체. 원리나 이유를 묻지 않은 채 그저 처리에 급급해온 사회는 생리를 알아서 처리해야 하는 것이고, 그렇지 못할 경우 비난해도 되는 것으로 만들어버렸다.

    생리대를 빌려야 하는 상황이 ‘거지 새끼’ 탓이 아님을 신경조차 쓰지 않는 사회에서 느낄 수 있는 감정은 무기력함과 불행뿐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생리에 대한 담론이다. 조지타운대학교 학생이자 <보그 코리아>에서 인턴으로 근무했던 이주영은 얼마 전 ‘Jules×PERIOD’ 프로젝트를 시작했다는 소식을 편집부에 전해왔다. ‘Period’라고 적힌 핑크 크루넥 티셔츠, 회색 후디, 베이식한 야구 모자 그리고 파우치, 에어팟 케이스를 만들었는데 그야말로 탐나는 굿즈의 모습이다. 그리고 여느 의류 쇼핑몰과 다를 바 없이 니삭스, 데님 진 등을 스타일링해서 착용 샷을 찍었다. 비영리단체 ‘Period(Period.org)’에서도 활동 중인 이주영은 “생리 정도는 참으면 되지 않느냐”는 DM이 여전히 오는 현실에서 월경에 대한 잘못된 편견이나 부정적 인식을 개선해야겠다는 생각으로 프로젝트를 시작했다고 말했다. 판매 수익금은 물론 생리대 기부로 이어지지만 나는 이 프로젝트가 무의식적으로 강화하는 건 ‘월경의 일상성’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부끄럽거나 더럽거나 나쁜 것이 아니라 티셔츠에 적혀 있어도 아무렇지도 않은, 우리 모두가 겪는 보편적인 현상으로서다. Period라는 글자를 보는 횟수가 늘어갈수록 생리는 당연한 일이 될 것이다.

    ‘Menstrual Movement’ 창업자이자 청소년 사회운동가 나디아 오카모토(Nadya Okamoto)는 커뮤니티 ‘August’를 통해 월경을 하나의 라이프스타일로 보자는 메시지를 전한다. 인스타그램(@itsaugust)에는 생리혈이 묻은 흰색 속옷을 입고 심드렁하게 앉아 있는 모습, 피로 물든 수영복과 원피스, 생리대가 붙어 있는 팬티를 내린 채 변기에 앉아 있는 모습 등 나에게 일어나지만 결코 본 적 없는 광경으로 가득하다. 치부를 들켜버린 듯 생경한 감정 한가운데 지난해 팬톤이 ‘Period’라고 이름 붙인 붉은 색깔을 발표하며 내놓았던 설명이 기억이 났다. “우리가 월경에 대해 공개적으로 이야기할수록 월경의 불평등을 더 잘 해결할 수 있습니다.” 강남구에서 생리대 자판기를 설치할 때 가장 힘들었던 점은 생리는 내밀하고 개인적인 일인데 국가의 지원은 과도한 복지라는 시선을 바꾸는 일이었다고 한다. 담당자는 한 인터뷰에서 화장실에 가면 휴지가 있듯 월경도 원하지 않아도 나오는 현상이니 누구나 쓸 수 있게 힘을 보태야 한다고 했을 때 비로소 설득할 수 있었다고 전했다. 사람들은 월경보다 더 시급한 문제에 나랏돈을 써야 한다고 말하지만 월경에 비견할 만큼 어찌할 수 없고 긴급한 일은 아무리 생각해봐도 먹고, 자고, 배설하는 일뿐이다.

    물건을 중심으로 여성의 사회적 역할의 발달 과정을 기록한 책 <100가지 물건으로 다시 쓰는 여성 세계사> 중 생리대 챕터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생리대와 탐폰의 역사는 여성의 삶에서 하나의 전환점을 상징한다. 생리대 발명 이전에 여성들은 생리 기간 동안에 여행을 가거나 운동하는 것을 두려워하기 일쑤였다.” 나뭇잎, 풀, 헝겊 조각, 토끼털 등 생리혈을 막기 위해 무엇이든 사용했던 역사는 양말, 운동화 깔창, 둘둘 만 휴지, 헌 옷 등을 써야 하는 누군가의 현재와 일치한다. 환경오염을 막기 위해 물에 녹는 생리대 기술까지 개발된 지금, 경제적인 이유로 생리대를 사용하지 못하는 현실은 인류 역사의 퇴행이다. 최초로 일회용 생리대가 개발된 지 101년이 지났다. 나는 라면과 생리대 중에서 택일하고 싶지 않다. 우리는 다시 생리대를 이야기해야 한다.

    에디터
    조소현
    포토그래퍼
    Victoria Jones(Alamy Stock Pho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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