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 화보

지춘희의 20년 그리고 40년

2023.02.26

by VOGUE

    지춘희의 20년 그리고 40년

    미스 지 혹은 지춘희라는 여자의 20년 그리고 40년.

    Portrait of a Lady
    40여 년간 ‘미스지 컬렉션’ 세상을 펼쳐 보인 디자이너 지춘희.

    가능하다면, 지금으로부터 40여 년 전 명동을 떠올려보자. 청담동과 한남동, 홍대와 가로수길이 없던 시절의 그곳은 한반도의 유일무이한 패션 거리였다. 당시 난다 긴다 하는 서울 멋쟁이들은 모두 명동을 들락거렸다. 충무로 은막의 스타도, 섬에서 상경한 꿈 많은 가수도, 자극을 찾는 유한마담도 죄다 그곳에 모였다. 새로운 작품을 위해, 무대를 위해 혹은 계절에 맞춰 옷을 ‘해 입는 것’이 중요한 행사였으니까. 디자이너 지춘희가 명동 사보이호텔 맞은편에 ‘미스지 컬렉션’ 부티크를 연 것도 명동 시대다. 1979년 스물일곱 살의 재기 발랄한 아가씨는 옷이 좋아서 거침없는 도전을 시작했다.

    Black Swan
    짧은 재킷과 풍성한 미디스커트는 미스지 컬렉션의 시그니처 중 하나다. 등 뒤의 리본 장식이 인상적인 스커트 수트는 2020년 S/S.

    “그냥 해야겠다는 마음밖에 없었어요.” 그로부터 40여 년이 흐른 뒤 역삼동 <보그> 촬영장에서 나와 마주 앉은 지춘희는 담담하게 과거를 추억했다. “물론 주위에서 젊은 여자가 저렇게 큰 상점을 열고 어떻게 일을 하겠느냐는 시선을 받기도 했어요. 그래도 그냥 옷을 만들고 싶고, 누구보다 근사한 옷을 만들고 싶다는 욕심으로 견뎠죠.” 덕분에 그녀는 시대를 풍미했던 파리의 디자이너도, 거대한 자본을 등에 업은 대기업의 브랜드도 쉽게 해내지 못하는 40년 이상의 패션 아카이브를 보유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디자이너 자신은 ‘기념’하는 일이 어색하다. “기념하는 건 체질에 맞지 않아요. 지나간 사람 같잖아요. 어제나 오늘이나 꾸준히 일하는 건 변하지 않습니다.” 한국 패션계에서 그토록 유명한 ‘미스지 애티튜드’, 그러니까 늘 우아한 태도와 세련된 발성으로 소신 있게 디자이너가 말했다.

    기념일을 챙기지 않는 건 하루하루가 소중하다고 믿는 디자이너의 신념과 어울린다. “세상 사람 모두 아는 디자이너가 되어야지! 몇 년 뒤엔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해야지! 이런 치밀한 계획은 딱히 없었어요. 그저 하루가 쌓이고 다시 또 하루가 쌓여 여기까지 온 거죠.” 그럼에도 나는 ‘디자이너 지춘희’라는 존재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된 당시 풍경이 궁금했다. 처음 성공이란 단어가 어렴풋이 보인 건 호텔에서의 ‘디너 패션쇼’였다. “당시엔 특급 호텔에서 가수 디너쇼처럼 ‘디너 패션쇼’를 열곤 했어요. 마침 조선호텔에서 저를 초청했죠. 일주일 동안 열린 패션쇼에 장안의 유명한 사람들은 다 왔어요. 앙드레 김 선생님께서 오신 것도 기억나고, 조용필 씨, 최불암 씨도 방문했죠.” 그리하여 “옷 참 잘한다”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하면서 명동의 ‘미스지’는 서울 패션에 변화의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명동이라는 경계를 너머 전국적으로 이름이 알려진 건 1990년대 청담동 시대부터다. 한 편의 드라마가 전국을 지배했기에 고현정, 심은하, 이영애가 작품에서 입고 나오던 ‘미스지’ 옷은 그 시절을 정의하는 명백한 유행이자 영향력 있는 스타일이 되었다. 특정한 여성이 가장 아름다워 보일 수 있게 하는 능력, 말하자면 패션 디자이너의 힘(바꿔 말하면, 여자들끼리의 공감과 연대감)을 증명해 보인 사례였다.

    “디자이너와 배우가 일대일로 하나의 스타일을 만들어가던 시절이었어요. 덕분에 자연스럽게 배우의 매력이 더 빛나게, 배우가 돋보이게 할 수 있었죠.” 때로는 완전한 스타일 변화를 제안하기도 했다. “사실 제게 진짜 큰 영향을 끼친 뮤즈는 가수 나미였어요. ‘인디안 인형처럼’이라는 노래에 맞춰 의상을 완성하기 위해 뉴욕까지 출장 가서 구슬과 깃털 가게를 찾아다녔어요. 그녀만의 ‘소울’에 제 색깔을 더한 경험은 결코 잊지 못할 거예요.” 영화 <청연> 등을 함께했던 故 장진영, 지금도 함께하는 이나영 역시 지춘희에겐 빼놓을 수 없는 뮤즈다.

    나는 그녀가 디자이너로서 한반도 지축에 견고히 뿌리내릴 즈음 해외 진출에 대한 고민도 있었을 것이라 짐작했다. 진태옥, 이신우, 이영희 등으로 구성된 ‘1세대 글로벌 디자이너’가 파리와 뉴욕으로 향하던 시절, 분명 지춘희의 마음에도 봄바람이 불었을 것이다. “고민이 많았어요. 실제로 소호에 반년쯤 지내면서 뉴욕 패션계를 직접 겪었죠. 솔직히, 좀 더 어린 시절에 막무가내로 도전했어야 한다고 느꼈어요.” 무엇보다 그녀를 망설이게 한 건 ‘명분’을 위한 해외 진출이었다. “파리와 뉴욕에서 컬렉션을 발표해 그 유명세로 패션 비즈니스를 전개하는 건 싫었어요. 차라리 제 작업에 집중하는 게 옳다고 느꼈습니다.”

    A Perfect Fit
    디자이너의 일상이 그대로 담긴 드레스. 줄자를 모티브로 한 드레스는 2013년 F/W.

    대신 그녀는 지난해로 딱 20년을 맞은 서울 패션 위크에 처음부터 함께했다. 매 시즌 빠지지 않고 자신의 컬렉션을 선보이는 건 정말이지 쉬운 일이 아니다. “결국 제 삶이 그대로 제 컬렉션에 담겨 있어요. 오죽하면 지인들은 제가 런웨이에 발표한 옷으로 제 속마음까지 읽어내겠어요.” 말하자면, 6개월 동안 다녀온 여행지, 즐겨 먹은 음식, 만났던 인물들이 미스지 컬렉션에 담겨 있다는 얘기다. “예를 들어 처음 제 아이들이 스키를 배웠을 때, 저는 스키장 가는 게 그렇게 좋았어요. 스키는 무서워 타지도 못하면서 스키 타는 사람들을 지켜보는 게 좋았죠. 결국 아이들 성화에 스키를 배웠고 그해 겨울 컬렉션엔 눈에 관한 모든 것이 들어갔어요. 그야말로 얼음 세상이었죠.” 다소 엄격해 보였던 검정 뿔테 안경 너머 그녀의 눈빛에 온기가 돌았다.

    사실 지춘희의 인생에서 여행은 큰 비중을 차지한다. 아프리카 사파리의 나무 아래, 이탈리아 시골 마을 골목, 인도 어딘가의 호텔을 거닐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힘이 솟는다고 그녀는 말한다. “밤마다 지도를 봐요. 여기를 어떻게 가고, 어디서 자고, 어디서 먹고, 어떤 루트로 다닐지 상상하다 보면 시간 가는 줄도 몰라요.” 팬데믹이 닥쳐오기 직전이었던 지난해 1월에는 파타고니아에 머물고 있었다. “그곳에서 지인의 전화를 받았는데, 순간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왜 나는 24시간 넘도록 비행기를 타고 타국의 산속에 찾아온 걸까. 대체 이 에너지는 어디서 비롯되는 거지?” 자기 성찰을 통해 얻은 답은, 호기심이 에너지의 근원이었다. “보지 못했던 곳에 대한 호기심, 알지 못했던 것에 대한 호기심이죠.” 디자이너의 표정에 더 여유가 생겼다.

    Navy Seal
    해군 장교 스타일을 표현한 코트와 팬츠 수트. G 로고 장식을 더한 룩은 2021년 S/S.

    산과 호수가 아름다운 충주에서 자란 그녀에게 알지 못하는 세상과 뒤에 숨겨진 풍경은 두려움의 대상이 결코 아니었다. 상상력을 견인해 새로운 관점을 선사하는 커다란 선물이었다. “저 언덕 뒤에 있는 철쭉이 너무 예쁜데 그걸 못 보면 안타깝지 않아요?” 물론 지금처럼 급변하는 세상 풍경 역시 디자이너에겐 흥미로운 대상이다.

    “인스타그램으로 쇼핑도 하고, 쿠팡으로 이것저것 시켜보기도 해요. 사람들이 옷을 소비하거나 마주하는 방식도 신속히 바뀌고 있으니까요.” 그러한 맥락에서 좋은 옷을 한 벌 장만해 오래오래 자신의 정서를 담아가며 입던 시절이 그리운 것도 사실이라고 내가 말하자 그녀는 명쾌하게 대답했다. “그거야말로 친환경 패션이죠.”

    그렇다면 여행은 물론 관객을 초대한 패션쇼도 없던 지난 1년을 이 패션 마에스트로는 어떻게 보냈을까. “오히려 스스로에게 충실할 수 있었어요. 제 자신을 잘 알아가는 기회를 가진 거죠.” 이 노련한 디자이너에게도 여전히 몰랐던 자신의 어떤 부분이 있다는 얘기일까? 미뤄둔 일을 시도하는 것으로 그녀는 자신과 더 가까워졌다. 세상의 모든 장아찌를 담그고, 청국장을 띄워 고추장을 만들었다. 효모를 직접 키워 빵 굽는 일에도 빠졌다. “전 세계 밀가루를 다 구해 빵을 구웠어요. 그래서 집 곳곳에 밀가루 포대가 쌓여 있죠.”

    Pure White
    미스지 컬렉션 특유의 순수한 매력이 돋보이는 드레스. 어깨 실루엣이 인상적인 화이트 코튼 드레스는 2020년 S/S.

    얼마 전, 성수동 어딘가에 새로운 일터(블루보틀이 자리한 갈색 벽돌의 건물은 성수동 전성시대를 예고했다)를 마련한 후에는 일상이 더 소중해졌다. “매일 성수대교를 건너며 보는 하늘색이 그렇게 예쁠 수가 없어요. 그 하늘을 보며 또 상상에 빠지는 거죠.” 그 서울 하늘과 함께 그녀가 지구를 여행하며 봤던 세상의 모든 하늘이 다음 시즌 미스지 컬렉션의 주제가 될지도 모르겠다.

    Traveling Mind
    여행을 즐기는 디자이너의 취향과 꼭 어울리는 지도 드레스. 모피 소매를 더한 벨벳 재킷과 드레스는 2010년 F/W.

    Swinging Step
    모즈 룩을 비롯한 1960년대 스타일 역시 미스지 컬렉션에 종종 등장하는 테마. 새틴 칼라를 더한 미니 드레스, 벨벳 소재 코트와 부츠는 2017년 F/W.

    Painter’s Touch
    어린 시절부터 자연에서 영감을 얻어온 디자이너의 역사가 담긴 드레스. 풍경화를 프린트한 드레스는 2011년 F/W.

    Gee Style
    봉긋한 어깨, 프린세스 칼라, 리본 장식에까지 미스지 컬렉션의 여성스러움이 담겼다. 블랙 점프수트는 2014년 S/S.

    A Creator’s Dream
    미스지 컬렉션의 세계로 들어간 모델 신현지와 디자이너 지춘희. 몸매가 드러나는 블랙 드레스는 2014년 F/W.

      패션 에디터
      손기호
      포토그래퍼
      조기석
      에디터
      이소민
      모델
      신현지
      헤어
      장혜연
      메이크업
      유혜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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