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히 영화뿐인 문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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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영화뿐인 문소리

2021-03-26T11:52:19+00:00 2021.03.25|

재미있는 건 여전히 영화뿐인 문소리의 다른 질감의 인생.

레드 페이즐리 패턴 원피스는 에트로(Etro).

과실나무, 화초, 야생화를 곁에 두고 지냈는데 지난해에 호숫가로 이사를 갔다. 호수가 알려주는 계절의 변화가 있나. 호수는 계절마다 다르기도 하지만 한 계절의 날씨에 따라 엄청 다르다. 봄을 앞둔 요즘 아침에는 만두 찔 때 나오는 하얀 김이 가득 찬 듯 아무것도 안 보인다. 더 위로 올라가면 버드나무가 쭉 있는데 그 모습도 좋다. 이곳에 이사 온 후 산책하기 좋아 매일 나가고 있다. 인공 호수지만 자연을 곁에 두고 지낸다.

영화 <세 자매> 이야기를 담은 책 <세 자매 이야기>가 출간됐다. 포토 현장 에세이를 직접 썼는데 책은 김선영, 문소리, 장윤주 세 배우와 각자의 딸 사진으로 시작한다. 촬영하면서 셋이 집안 이야기도 하고 선영이 딸 예은이와 우리 딸 연두가 동갑이라 같이 놀았다. 윤주는 리사가 한창 손이 많이 갈 때라 위로도 해줬다. 딱 꼬집어 이야기할 순 없겠지만 우리의 상황이 이런 작품을 하겠다고 뛰어든 것에까지 미치지 않았을까.

<세 자매>는 기혼 여성의 서사를 그린다. 개인적으로 그들의 일상이 내 삶과도 맞닿아 보는 내내 힘들었다. 영화가 세다는 생각을 하지 않고 찍었는데 날카롭고 불편한 무언가가 튀어나와 계속 짓누르는 것 같은 느낌이 있었다. 어떻게 세냐의 차이인데 사실 나는 사람이 죽고 피가 많이 나오는, 자극적으로 흘러가는 영화는 잘 못 보지만 감정적으로 센 영화는 좋아한다. 우리 영화는 설정이 세기보다 감정의 깊이가 깊을 뿐이다. 그런데 관객이 별로 겪지 못한 종류라 덜컥하는 분도 있었다. 이를테면 김선영 씨가 자해하던 얼굴이 무섭다는 반응도 있었다. 초짜 프로듀서로서 당시에는 그 연기가 그저 너무 좋았다. 못 보던 연기였고 나도 저런 연기를 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영화를 극장에서 내리고 VOD로 방영하는 지금도 여러 생각을 한다. 최근까지도 감독님, 피디님과 이야기를 나눴다. 약하게 풀었다면 더 좋은 영화가 나왔을까? 다른 방법이 있었을까? 아직 명확하게 정리되지 않았다. 지금은 결산 중이다.

화려한 시상식 드레스를 연상케 하는 오프숄더 드레스는 에트로(Etro).

때로 우리는 현실을 직시하기보다 회피하기 위해 영화를 보기에 나오는 반응 아닐까. 이창동 감독님과 영화를 시작해서일까. 사실 연극할 때부터 즐거운 건 중요하지 않았다. 작품이 끝나고 생각할 게 있고 질문이 있고 ‘저 사람이 나한테 뭘 물어봤지?’가 없으면 무대에서 아무리 즐거웠어도 돈이 아까웠다. 먹고 마시고 그냥 정신없이 노는 거랑 똑같잖나. 무대는 정말 많은 재능과 정신을 써서 이야기를 하고자 만든 것이다. 사실 관객으로서도 영화로 무언가를 회피하거나 마음을 놓고 있어본 경험이 별로 없다. 나에게 영화는 엄마 손잡고 <이티>를 보러 갔는데 너무 행복했다가 아니다. 영화는 치열했고 임무였다.

영화란 여러 사람에게 다른 의미다. 물론 여러 기능도 하고. 코엑스에서 <세 자매> 시사회를 마치고 나왔는데 벽에 글자가 보였다. 아쉬가르 파라디 감독이 한 말 “관객에게 답을 주는 영화는 극장에서 끝날 것이다. 하지만 관객에게 질문을 던지는 영화는 상영이 끝났을 때 비로소 시작한다”였다. 그 글을 보면서 나는 쉽게 답을 주는 영화를 좋아하지 않았구나 생각했다. 물론 남편과 가끔 맥주 한잔하다가 그냥 재미있는 영화 볼까 하고 켤 때도 있다. 영화에는 그런 기능도 충분히 있지만 다른 기능도 있다. 20대에 영화가 그렇게 나한테 와서 그런 것 같다.

“이런 영화가 한국에 있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세 자매>의 제작자, 배우로 참여했다”고 말했다. ‘이런 영화’의 의미가 궁금했다. 아픔을 얘기하는 방식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따뜻하게 안아주거나 말로 하는 위로도 있지만 잘 알고 있다는 것만 보여줘도 찾아오는 위로가 있다. 이승원 감독은 ‘내가 네 아픔을 잘 알아’라는 방식으로 적나라하게 무언가를 드러내고 결과적으로 위로한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별로 없는 것 같았고 한국 영화에 이런 방식도 있으면 괜찮겠다 싶었다. 그리고 기혼 여성의 서사 역시 드물었다. 가정 폭력이나 가부장제에서 아버지 이야기가 케케묵은 것 같지만 그래서 우리가 제대로 이야기한 적 있나 싶었다. 어제 ‘희숙’한테서 자기 엄마를 봤다는 리뷰를 봤다. 극장 바닥에 드러누워서 울고 싶었다고 했다. 그 리뷰를 읽는데 나도 눈물이 났다. 이렇게 위로받고 치유받으며 강하게 접속되는 사람도 있었다.

홀터넥 슬리브리스 드레스는 에트로(Etro).

가부장제의 폭력은 단지 과거에만 일어난 일이 아니다. 이 영화는 실제로 너무 많은 사람이 그 영향을 받았음을 확인시켰다. 기혼 여성 서사를 보며 우리의 이야기를 놓치고 있었단 생각도 찾아왔다. 가장 비어 있는 구역은 어딜까. 혼자 사는 40대 친구는 혼자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없다고 말한다. 그런데 사실 독립영화에는 계속 있었다. 최근에 <잔칫날>과 <이장>을 봤는데 두 편 다 재미있었다. 작은 영화에서는 다양한 사람을 다루는데 기획되는 큰 영화에서 캐릭터가 다양하지 않을 뿐이다. 하지만 한국만의 일도 아니다.

그나저나 당신이 연기한 ‘미연’에게 의문이 하나 있다. 학교로 남편을 찾아간 장면에서 왜 폭력으로 되갚아주지 않았나. 나도 이 얘기를 언젠가 하고 싶었다. 돌이켜보니 신기하게도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해본 적 없었다. 그 사람을 너무 불쌍하게 여겼을 뿐 나쁜 놈이다, 혼나야 한다 생각하지 않았다. 난 걔를 놔주지 않을 거라서(웃음). 미연이 집에서 한 짓을 알기에 그 사람이 얼마만큼 기를 못 펴고 살아왔는지 잘 안다. 원래 좋은 집안도 아닐 것이고 공부만 좀 잘해서 번듯하게 살아보려고 숨도 못 쉬고 살았을 거다. 이미 내 밑으로 들어와서 인생이 너덜너덜한데 뭘 더 때리나(웃음).

배우 김선영은 처음에 캐릭터의 언더웨어 색깔까지 정하고 임한다고 들었다. 김선영은 목표물을 정조준해 갈고리를 딱 거는 스타일이라면 나는 그것보다 조금 더 이래저래 배회하다가 어느 순간 들어간다. 그러고 보니 지금 입은 이 니트를 ‘미연’을 위해 샀다. 내가 생각하는 ‘미연’은 명품 옷을 살 사람은 아니었다. 명품 카피지만 원단은 좋은 옷을 믹스 매치할 것 같았다. 그래서 아나운서들이 잘 이용할 법한, 미시들이 많이 찾는 온라인 쇼핑몰을 찾아내서 몇 벌 주문했다.

빈티지한 색감과 패턴의 셔츠 드레스는 에트로(Etro).

<배심원들> 때는 여자 판사들을 만났고 <세 자매> 때는 김선영 배우의 친언니를 청해서 만나지 않았나. 모두 이래저래 배회하며 캐릭터를 만들어가는 과정인가. 그물을 짜가는 과정이다. 그물을 짜다 보면 어느 순간 내가 거기에 걸려든다. 한 가지로는 잘 안 된다. 강박증처럼 캐릭터에 대한 생각을 놓지 않는다. 그런데 그 생각에는 이유가 다 생겨야 한다. 막연히 ‘이 인물은 이걸 좋아하지 않을까?’가 아니다. 사실 우리가 어떤 한 가지를 좋아할 때 이유가 없어 보이지만 몸과 마 음과 관계와 환경, 역사가 다 연결되어 있다. 그 캐릭터에 대해서 고리를 만들어가면서 생각을 많이 해보면 더 치밀하게 쌓인다. 그래서 계속 내가 그 생각을 할 수 있게 환경을 만들고 그 인물의 심리 상태나 인물과 관련된 것들을 꾸준히 채운다.

<여배우는 오늘도> 감독에 이어 <세 자매>에서는 공동 제작자이자 배우였다. 공동 제작자로서 작업은 어떤 시각을 선사하나. 이번에도 많이 배웠다. 현장에 있는 걸 좋아하는데 이제 경력이 좀 있다 보니 내 신도 아닌데 지켜보고 있으면 부담스러워하는 분위기가 있었다(웃음). 이번에는 피디니까 당당히 한구석을 차지해서 좋았다. 현장에 있을 때 행복하고 재미있다. 프로듀서로서 예산, 배우와 스태프의 상태 등을 고려해야 하니 여러 가지로 공부가 많이 됐다. ‘영화를 만드는 데 어떤 게 더 중요한 문제인가’ 계속 고민했는데, 배우만 할 때는 좋은 연기를 끌어내기 위해 오히려 그런 생각을 안 했다. 홍보 전선에 뛰어들면서 마케팅이 참 어려운 것도 봤다. 다들 얼마나 힘든지 잘 알게 되어 더 좋은 연기자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웃음). 하지만 재미있었다. 이승원 감독과 김상수 프로듀서와 셋이 마음이 잘 맞았다. 마음 상하는 일 없이 소통도 역할 분담도 잘됐다. 돈을 못 벌어서 우리가 아름다웠을 수도 있다(웃음).

차기작은 오피스 활극 <미치지 않고서야>다. 전기회사 생활가전사업부 인사팀 팀장 역이다. 드라마가 오랜만이라 이것저것 생각 중이다. 해고하는 역할이라 조지 클루니 주연의 <인 디 에어>라는 영화도 보고 감독님이 <뉴 암스테르담>의 분위기를 좋아한다고 들어 찾아봤다. 정도윤 작가님이 <마녀의 법정>에서 여자 검사 이야기를 용감하게 썼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이번에도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분명했다. <미생> 드라마가 무척 좋았는데 나이 있는 직장인들 이야기도 의미가 있지 않을까 싶기도 했다. 더 풍전등화일 수 있으니까. 여성 직장인도 충분히 이야기할 수 있겠다 싶었고 내가 다가갈 수 있는 캐릭터인 것 같았다.

최근에 장르물이 주를 이루다 보니 시청자로서 일상극에 갈망이 생긴다. 그러고 보니 내가 장르물을 참 안 했다. 장르물에서 캐릭터는 굉장히 타입화되기 쉬워서 더 잘해야 한다. 그래서 이상하게 연기하면 더 재미있을 텐데 이상하게 하는 걸 내가 참 잘한다. 나 지금 감독님들에게 영업하는 거다(웃음). 말은 이렇게 하지만 장르물이 어려운 지점이 확실히 있다.

캐주얼한 재킷과 데님은 에트로(Etro).

젊은 감독이 연출한 <메기>에 불쑥 출연하고 <보건교사 안은영> 같은 실험적인 작품에선 공기마저 기묘하게 바꿔놓는다. 돌이켜보면 <박하사탕>으로 한순간에 주연배우로 떠올랐음에도 희한한 길로 갔다. 행보가 <효자동 이발사>, <사과>, <가족의 탄생>으로 이어졌으니. 다들 리스크가 좀 크다(웃음). 그런데 내가 재미있어하는 것들이 안정적인 것들이 아니었다. 사람들이 다 잘될 거라고 하는 작품에 큰 흥미를 못 느꼈다. 좀 위험한 것에 도전 의식을 느꼈다.

남들과 다르게 만들어낼 수 있을 것 같다는 느낌도 함께였나. 그런 생각 안 한다. 며느리도 모른다고 생각해야 한다. 재미있으니까 나쁜 결과는 안 나오겠다 여겨야 한다. 물론 나쁜 결과를 얻지 않으려고 꽤 노력하지만. 여전히 내 관심사는 영화다. 그런데 내가 나이가 꽤 됐더라. 그래서 새삼 나이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 난 정말 중년을 별로 생각하지 않았는데 곧 노년이 오게 생겼다(웃음). 인생의 거의 절반을 살았는데 뭔가 다르게 살아볼까 생각도 든다. 25세까지는 크느라 정신이 없었고 그다음 이십 몇 년도 이리저리 배우고 헤매느라 정신없었다. 이제 좀 정리된 정신과 몸으로 영화에 대해 생각하고 만드는 재미를 놓치지 않고 살았으면 좋겠다. 나이를 생각하는 게 슬프지는 않고 다른 질감의 인생이 되겠다 그런 느낌이 든다.

어떤 질감일까. 20~30대에는 두려웠지만 용감하게 경험하려는 타입이었다. 허우적대더라도 무조건 뛰어들어서 끝까지 가보고 안 되면 스스로를 긁고 상처 내면서도 경험해보는 게 공부였고 사는 방식이었다. 지금은 뭔지 모르지만 끝까지 간다기보다 내가 아는 것을 더 차근차근 알아가는 식이 되지 않을까.

배우에겐 의상도 캐릭터를 보여주는 하나의 장치다. 문소리를 읽을 수 있는 패션 아이템은 뭔가. 첫사랑이 연상되어 좀 그렇지만 흰 원피스와 흰 운동화를 좋아한다. 어릴 때부터 좋아했는데 지금도 여전하다. 여름엔 진짜 흰색 옷이 많고 그러고 보니 수건도 다 흰색이다. 아, 내 이름 한자도 ‘흴 소’ 자다. 내 패션은 극단적인데 트레이닝복, 레깅스를 또 그렇게 좋아한다. 레깅스에 관대한 편이라 레깅스 입으면 비행기 못 타게 한다는 기사를 보고 격분한 적도 있다(웃음). 사실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 끝나고 너무 징글징글해 운동복 비슷한 느낌은 다 버렸는데 다시 레깅스를 입는다. 요즘 애슬레저 룩이 트렌드라 얼마나 기쁜지. 얼마 전 제주의 서점 사인회에 벨벳 조거 팬츠에 재킷을 걸치고 비니를 쓰고 갔는데 남편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왜 트레이닝복에 마이를 걸쳤습니까?”라고 말했다(웃음). 얼마 전에는 죽을 때 뭐 입을지 정했다. 결혼할 때 한복을 한 벌 맞췄는데 아이 돌잔치할 때 입고 한 번도 입은 적이 없다. 해마다 꺼내서 상태만 확인하고 다시 넣어두고 있는데, 수의를 맞춰놓고 여름마다 온 방 가득 널어 말리고 다시 넣던 우리 시어머니 같았다. 수의를 해놓으면 더 오래 사신다고 하지 않나. 죽을 때 결혼할 때 맞춘 한복을 입고 가는 게 좋겠다고 그랬더니 남편이 좋은 생각인 것 같다고 자기도 입혀달라고 했다.

화려한 페이즐리 패턴 로브는 에트로(Etro).

코로나로 인해 영화계가 강제적 숨 고르기 중이다. 먼 미래에 지금 이 시대를 뭐라고 부를까. 마스크 못 벗던 시절이 있었지, 그럴 것 같다. 거의 전쟁을 겪은 거나 마찬가지다. 모여서 연극을 못 보는 세상은 나에겐 화성에 가서 살라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계속 생각한다. 다시 돌아올 거야, 없어지지 않을 거야. 코로나 타격이 크긴 크지만 블록버스터 영화만이 아니라 오히려 더 다양한 영화가 나올 수 있는 시기로 만들었으면 좋겠다. 너무 아픈 시기지만 더 작은 영화도 많이 만들고 상영할 수 있는 시기가 될 순 없을까 생각한다. 하지만 다들 살기 힘들기에 정말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