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별 고정관념을 깨는 파격 캐스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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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별 고정관념을 깨는 파격 캐스팅

2021-05-11T23:03:41+00:00 2021.05.12|

해군 장교 출신 덴마크 공주가 된 햄릿, 여성 노학자 파우스트, 모차르트의 천재성을 질투하는 여자 살리에리. 성별 고정관념을 깨는 파격 캐스팅.

베스트 드레스는 렉토(Recto), 튤 스커트는 보카바카(VocaVaca), 브로그는 시몬 로샤×에이치앤엠(Simone Rocha×H&M), 이어커프는 르이에(Leyié).

“착한 여자는 천국에 가지만, 나쁜 여자는 어디든 간다.” 적어도 무대 위에서는 그렇다. 충무로의 신스틸러 배우 이봉련은 온라인 연극 <햄릿>에서 검투에 능한 해군 장교 출신의 덴마크 공주 햄릿을 연기했다. 왕위를 지키기 위해 운명과 맞서 죽음도 불사하는 복수의 화신이다. 김성녀가 연기하는 연극 <파우스트 엔딩>의 파우스트는 또 어떤가.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고자 악마와 거래한 이 고령의 여성 지식인은 신의 구원을 받는 원작과 달리 자신의 행동을 책임지기 위해 스스로 지옥행을 택한다. 모두 국립극단의 최신작이다. 2월 28일 막을 내린 또 다른 연극 <아마데우스>에서는 차지연이 다른 남자 배우들과 함께 살리에리 역에 캐스팅되며 화제였다. 탄탄한 여성 서사로 2018년 초연 당시 각종 뮤지컬 시상식을 휩쓸었던 <베르나르다 알바>도 올 초 정동극장에 다시 올랐다. 여성 배우 10인만 출연하는 작품으로 극 중 자매들의 환심을 사는 젊은 청년 뻬뻬 역할 역시 여성 배우의 몫이다.

배우의 성별에 관계없이 배역을 정하는 ‘Gender Free Casting’이 흔해지고 있다. 배우가 자신의 성별과 다른 성별의 역할을 연기하는 크로스젠더 액팅은 과거에도 존재했다. 셰익스피어가 살았던 1600년대에는 여성이 무대에 설 수 없어 여성 역할을 남자 배우가 연기했고, 중국의 경극이나 일본의 가부키 역시 마찬가지다. 최근 경향은 반대다. 성 역할의 고정관념과 소수자에 대한 편견을 깨는 대안이 된 것이다. 2017년 영국 로열셰익스피어극단에 취임한 예술감독 미셸 테리는 성별과 인종, 장애 유무에 상관없이 기회를 주기 위해 젠더 블라인드 캐스팅, 컬러 블라인드 캐스팅 등을 적극 시도했다. 여성 햄릿, 남성 오필리아가 심심찮게 등장했고, 1960년대 오필리아로 명성을 떨쳤던 글렌다 잭슨은 반세기가 훌쩍 지난 2019년 브로드웨이 최초의 여성 리어왕으로 이름을 올렸다. 영화 <철의 여인>의 감독으로 유명한 영국 연출가 필리다 로이드는 여성 배우만의 셰익스피어 3부작(<줄리어스 시저>(2012), <헨리 4세>(2014), <템페스트>(2016))을 선보였다.

한국도 마찬가지다. 지난해 70주년을 맞은 국립극단은 여성을 전면에 내세운 라인업을 예고했다. <파우스트 엔딩>, <햄릿> 외에도 여성 캐릭터 아홉 명으로 구성된 <화전가>를 올렸고, 비록 코로나로 인해 끝내 공연은 취소 되었으나 앞서 언급한 관습적 성 역할의 전복에 앞장서온 영국 로열셰익스피어극단의 신작 <말괄량이 길들이기>, 맨부커상을 수상한 한강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벨기에 연출가의 <채식주의자>도 주요 라인업 중 하나였다. 이성열 국립극단 예술감독은 당시 인터뷰에서 여성 서사가 각광받는 시대적 흐름과 함께 “연극계에 여성 작가와 연출진이 대단히 많다”는 점을 여성 캐릭터 증가의 이유로 꼽았다. 실제로 이번 <햄릿>은 주목받는 여성 연출가 부새롬이 맡았다. 인간의 심연을 꿰뚫는 농밀한 연출과 배우 이봉련의 광기 어린 연기는 135분이라는 러닝타임을 잊게 만든다. 무대에는 여성도 남성도 아닌 고뇌하는 한 인간만 존재할 뿐이다. 마흔셋 레즈비언 만화가와 가족의 이야기를 담은 뮤지컬 <펀홈>의 국내 초연을 이끈 박소영도 떠오르는 연출가 중 한 명이다. 그는 제인 오스틴의 고전 연애소설 <오만과 편견>을 2인 21역의 연극으로 재탄생시키기도 했다. 무대의 두 배우가 성별과 나이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연극 <오만과 편견>은 큰 호응을 받으며 지난해 다시 관객을 만났다.

이 같은 여성 연출가 계보의 첫 시작은 이지나일 것이다. 여전히 국내 공연계에서 독보적 위치를 점한 그는 2001년 여성 1인극 <버자이너 모놀로그>와 2002년 컬트 뮤지컬 <록키 호러쇼>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그리고 젠더 이슈를 담은 연극 <거미여인의 키스>, 뮤지컬 <라카지> 등을 연이어 발표했다. 이지나의 캐스팅 방식은 성별 이분법적 세계관에서 벗어난 지 오래다.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의 연출을 맡았을 땐 정치적이고 교활한 헤롯왕 역에 아이돌 가수 조권(2013년)과 여성 배우 김영주(2015년)를 캐스팅했다. 쇼 스토퍼 역할을 하는 헤롯왕은 드래그 퀸처럼 현란한 퍼포먼스 를 선보였고 이 작품은 퀴어 뮤지컬 <제이미>에서 열연을 펼친 조권의 뮤지컬 데뷔작이다. 2017년 초연한 <광화문연가>에서는 월하 역에 정성화와 차지연을 더블 캐스팅했다. 음역대가 다른 남녀 배우가 같은 배역을 소화하는 건 뮤지컬계에선 이례적인 일이었다. 반응은 뜨거웠다. 연이어 차지연은 뮤지컬 <더데빌>에서 남성 배우들과 함께 X화이트, X블랙 역으로 캐스팅됐고 얼마 전 <아마데우스>에서는 살리에리를 연기했다. 역시 이지나 연출작이다.

사실 국내에서 여성이 남성 캐릭터를 연기하는 건 새로운 유행이 아니다. <파우스트 엔딩>에서 주인공 파우스트 박사로 분한 김성녀는 과거 천막 극장에서 마당놀이를 하던 시절 틈만 나면 남녀 성별을 넘나들며 놀았다. <홍길동전>에서 신출귀몰한 홍길동을 연기했을 뿐 아니라 2016년 배우 유인촌이 햄릿을 맡았던 이해랑 탄생 100주년 기념 공연 <햄릿>에선 호레이쇼를 연기했다. 당시 재상 플로니어스 역은 박정자로, 중성적 저음이 인상적인 박정자는 2001년 연극 <에쿠우스>에서 다이사트 박사를 맡았다. 국내에서 여성 다이사트는 박정자가 처음이자 마지막일 것이다. 창극과 마당놀이로 공연계에 입문한 김성녀는 <파우스트 엔딩>의 캐스팅 관련 인터뷰에 서 “평생 롤모델이 있다면 그건 사람이 아니라 판소리”라며 한 작품에서 춘향부터 변사또까지 모든 걸 소화해야 하는 국악이 자신의 연기와 소리의 토대라고 말했다.

1인극 형식의 판소리에서 출발한 한국 공연 예술은 인물별 역할이 정해진 창극으로 넘어오면서 여성 국극을 탄생시켰다. 1948년 결성된 여성국악동호회는 해방 이후 남성 국악인이 중심이 되는 현실에 반발해 여성 국악인 들이 만든 단체로 1950년대에 선풍적인 인기였다. 여성 국극은 소리 중심의 기존 창극과 달리 소리와 춤, 연기, 황홀한 볼거리를 제공하는 무대장치를 곁들인 공연 예술로 남성 역할까지 여성이 해낸다는 점이 독특했다. 뮤지컬 <베르사이유의 장미>로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107년 전통의 일본 다카라즈카 가극단처럼 말이다. 지금도 다카라즈카 가극단은 미혼 여성으로 구성되어 있다. 기록에 의하면, 남성 역할을 주로 맡았던 임춘앵 등 일부 배우들의 인기는 엄청나 “임춘앵이 손만 한 번 들어도 탄성이 터져나왔고 발걸음을 한 번만 내디뎌도 환호성이 울렸다”(반재식·김은신 공저, <여성국극왕자 임춘앵 전기>)고 한다. 그러나 여성 국극은 남성 중심의 산업화 시대를 거치며 거의 사라진 상태다.

전쟁 직후 여성의 경제 활동을 필요로 하면서도 뿌리 깊은 봉건적 사상은 변함없던 시대 분위기 가운데 여성들은 자신이 할 수 없는 수많은 일을 거침없이 행하는 무대의 남역 배우들을 보며 대리 만족을 느꼈을 것이다. 분방한 삶, 사회적 성공, 대담한 애정 표현… 그야말로 꿈같은 일이었다. 미술가 정은영은 이러한 여성 국극 배우들의 삶을 10여 년간 추적하며 이 작업으로 2018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상을 수상했다. 작가는 과거 여배우들이 ‘완벽한 남성’으로 변신하는 과정에서 느꼈을 성별에 대한 의문과 의구심 등을 지금의 사회 젠더 문제로 끌고 온다. 미투 운동 이후 공연계의 여성 서사는 시작 단계다.

젠더 프리 캐스팅은 기존 성 역할을 전복시켜 카타르시스를 전한다기보다 수백 년 전 이야기를 현대화하는 데 의미가 있다. 고전은 시대를 꿰뚫는 힘이 있지만 그럼에도 셰익스피어의 시대와 여성 극작가와 연출가들이 활약하는 오늘의 상황은 다를 수밖에 없으니까. 햄릿이나 파우스트처럼 시대를 초월해 인간의 심연을 대변하는 여성 캐릭터의 탄생을 기다린다. 그리고 그러한 공연이 무대에 오를 날이 우리가 곧 목도할 미래가 되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