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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시작된 아시아적 가치를 인정하는 흐름

2023.02.12

by 조소현

    드디어 시작된 아시아적 가치를 인정하는 흐름

    꼭 이성적이고 독립적이고 합리적이어야만 할까? 서구 문화의 강요를 받아들이는 대신, 투박하면 투박한 대로 감정적이면 감정적인 대로 우리의 아시아적 가치를 인정하는 흐름이 시작됐다.

    수묵화의 붓질처럼 연출한 눈썹이 모델 최소라의 고유함을 보여주는 듯하다.

    “경외하길 멈추고 기억하길 시작하면서부터.” 정이삭 감독이 영화 <미나리>의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한 건 미국 소설가 윌라 캐더(Willa Cather)의 이 문장을 읽으면서부터다. 그는 어린 시절 기억 속 부모님을 떠올렸고, 당시 할머니를 생각했다. 한국계 미국인으로서 그 기억을 이야기해야겠다고 여겼다. 부모님의 헌신, 미국에서 어렵게 꾼 꿈 그리고 미나리 말이다. 어떤 사람들은 <미나리>가 그렇게 특별한 이야기가 아니라고 말한다. 사실 이건 우리에게 너무도 익숙한 이야기다. 자식을 위해 척박한 곳에서 고생하는 부모의 이야기, 그 부모를 위해 또 희생하는 그들의 부모, 그리고 아직은 부모의 마음을 모르는 철없는 아이들. 순자(윤여정)가 한국에서 싸온 고춧가루와 멸치를 꺼내고, 모아둔 돈을 딸에게 건네고, 아픈 손자를 위해 한약을 달이고, 몸에 좋은 미나리를 심는 행동은 우리에게 매우 익숙하다. 심지어 이 가족의 부조리한 실패, 억지 같은 노력마저 익숙하다. 다른 게 있다면, 미국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는 거다. 윌라 캐더의 저 문장을 더 구체적으로, 노골적으로 완성해보자면 이렇게 쓸 수 있을 것이다. “서양의 문화를 경외하길 멈추고 우리의 것을 기억하길 시작하면서부터.” 보통 이성적이고, 독립적이고, 합리적이라고 불리는 서구의 것을 따르는 대신 때론 투박하고 비이성적이고 감정적으로 보여도 우리의 것을 기억하고 우리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 것이다.

    SF 작가 켄 리우(Ken Liu)의 <종이 동물원>이라는 단편이 있다. 이 단편에는 너무 착한 엄마가 등장한다. 주인공 화자는 영어를 못하는 엄마, 스타워즈 장난감이 아닌 중국식 종이접기 인형을 만들어주는 엄마가 창피하다. 미국 사회에 동화되고 싶었던 그는 어린 시절 자신을 위로해준 엄마의 종이접기 인형, 중국 음식, 중국식 명절, 중국어를 무시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낡고 착해빠진 동양의 세계에서 빠져나와 새롭고 매끈한 서양의 세계로 진입하려고 한다. 자세한 건 말할 수 없지만, 이 단편에서 우리를 눈물 흘리게 하는 것은 결국 중국어, 중국 음식, 중국식 명절, 중국식 종이접기 인형, 즉 아시아적 가치와 문화다. 아시아인이라면 공감할 거다. 이 이야기가 우리 모두의 이야기라는 것을. 그리고 이 이야기를 더 이상 잊어버리면 안 된다는 것을. 중국계 미국인 켄 리우는 SF 소설 안에 동아시아 역사와 동아시아 언어를 대담하게 담아낸다. 그는 스팀펑크 대신 동아시아의 역사를 무대로 ‘실크펑크’라는 장르를 새롭게 규정하고 고전 <초한지>를 재해석했다. 서구의 시선을 비틀고 그 안에 아시아적 가치를 드러낸 것이다.

    우리는 부모 세대처럼 외국에 여행 갈 때 햇반과 김, 깻잎, 콩자반을 싸가지도 않았다. 우리는 서양인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려고 애써왔다. 아침에 밥과 국 상차림 대신 간단한 빵과 커피를 먹었으며 온돌바닥에 이불을 깔고 눕는 대신 북유럽 스타일 가구와 조명으로 집을 채웠으며 서늘한 눈과 납작한 코를 인정하는 대신 쌍꺼풀 있는 눈과 오뚝한 코를 닮으려고 했으며 무엇보다 쿨하게 사고하려고 애썼다. 베트남계 미국인인 작가 비엣 타인 응우옌(Viet Thanh Nguyen)은 지난해 6월 <타임>에 기고한 글에서 우리의 무의식을 지배한 ‘모범적 소수민족 신화’를 지적한다. 백인 사회에 성공적으로 안착하기 위해, 백인들에게 성실한 시민이자 선량한 이웃으로 보이기 위해 아시아인들은 “우리가 으레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면서 대부분의 상황에서 눈에 안 띄려고 노력했다”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 덧붙인다. “우리는 우리를 이국적으로 보이게 하는 모든 것을 창피해했다. 우리의 음식, 우리의 언어, 우리의 헤어스타일, 우리의 패션, 우리의 냄새, 우리의 부모.” 그런 무의식적 사고가 결국은 백인 사회의 은밀한 인종차별적 구조를 공고히 했다는 것이다. 에릭 남도 지난 3월 <타임>에 비슷한 경험을 털어놓았다. “우린 다른 사람들처럼 받아들여지고 환영받고 싶었다. 발음하기 쉬운 이름을 써야 했으며, 부모님 언어로 말할 수 없었다. 학교에 우리 음식을 가져가도 안 됐다.”

    우리는 여기서도 서구의 시선을 의식하고 서양인들에게 잘 보이려고 애써왔다. <윤식당>, <윤스테이>, <어서와~ 한국은 처음이지?> 같은 TV 프로그램 속 ‘서양인들에게 잘 보이려는 낯 뜨거운 노력’은 오리엔탈리즘을 우리 안에서 자연스럽게 체화한 결과물이다. 서양의 것이 더 우월하다는 가치관이 무의식적으로 반영된 것이다. 켄 리우는 놀랍게도 이런 통찰을 보여준다. “아시아인은 서구 문화를 받아들이고 자신의 문화에 흡수하는데, 서구인은 아시아 문화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저항한다.” 홍콩에는 중국요리와 서양식 차와 빵을 모두 먹을 수 있는 ‘차찬텡’ 문화가 있고, 서양 음식 문화를 변형한 돈카츠와 단팥빵의 예에서 익히 알 수 있듯 일본에는 ‘일본식과 서양식을 절충한다’는 의미의 ‘화양절충(和洋折衷)’이라는 말도 있다. ‘경양식(輕洋食)’이라는 말도 ‘간단한 서양식 일 품요리’라는 뜻이다. 반대로 생각해보자. 서양에서 단순히 동양 문화를 소비하는 것 말고, 동양의 것을 받아들여 자신들의 문화로 만든 게 있었나? 아시아인에 대한 심리적 저항과 교묘한 인종차별은 미국 국적의 정이삭 감독이 만든 영화 <미나리>와 미국 국적의 룰루 왕(Lulu Wang) 감독이 만든 <페어웰>을 미국 영화가 아닌 외국어 영화라고 분류하기에 이르렀다. 아시아인에 대한 그들의 무지와 무신경은 스티븐 연의 4월호 미국 화보에서도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그들은 <미나리>의 한국적인 이야기에 너무 감명받은 나머지 그에게 ‘굳이’ 카우보이 복장을 입혔다.

    인종차별을 당하지 않기 위해 목소리와 냄새를 최대한 감추려고 노력했던 아시아인들이 목소리와 냄새를 적극 드러내기 시작했다. 게으른 백인들이 변하지 않는다 해도, 우리 스스로의 시각을 바꾸면 새로운 문화와 가치가 탄생한다. 켄 리우는 <제왕의 위엄>을 통해 미국 역사를 동아시아 철학으로 재해석하면서 오리엔탈리즘을 거꾸로 뒤집는다. 정이삭의 <미나리>는 미국의 서부 개척 시대에 대한 일종의 아시아적 비틀기다. 비엣 타인 응우옌은 소설 <동조자>를 쓴 이유에 대해 “미국인이 아시아인과 베트남인을 부정확하게 재현하는 방식에 화가 났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백인 사회에서 그들의 기준에 맞춰 열심히 적응하며 인정받고 성공하는 것, 그건 이제 구시대적 가치가 됐다. <미나리>와 <종이 동물원>이 위대한 건 <미나리>가 미국에서 100개 넘는 상을 받아서도 아니고, <종이 동물원>이 휴고상, 네뷸러상, 세계환상문학상을 모두 석권해서도 아니다. 그 누구의 시선도 의식하지 않은 채 자신의 이야기를 해서다.

    아시아인은 존재 자체만으로도 의미가 있다고 그들은 말한다. 영어를 못해도, 냄새 나는 음식을 먹어도, 지나친 희생을 감수하면서까지 자식을 끔찍하게 아껴도, 몸을 혹사하면서까지 일을 해도, 때론 비합리적이고 비이성적으로 보여도 말이다. 아니, 오히려 서구인과 다른 그 특성 때문에 존재의 의미가 있다. 쌍꺼풀이 없는 눈이고 납작한 코이기 때문에 가치 있고, 그들이 이해할 수 없는 언어이기 때문에 가치 있고, 세련된 팝 진행 중 발라드 신파 부분이 섞여 있기 때문에 가치 있는 거다. 다르기 때문에 존재 가치가 있으며 다르기 때문에 아름답고 다르기 때문에 자신의 이야기를 할 수 있으며 다르기 때문에 그 이야기가 소중하다. 다르기 때문에 그 작은 이야기가 담고 있는 확장성과 보편성이 어마어마한 반향을 일으킨 것이다. 정이삭, 켄 리우, 룰루 왕, 비엣 타인 응우옌 덕분에 ‘우리 안의 아시아적인 것’을 비로소 인정하고 사랑할 수 있게 됐다. 윌라 캐더의 말로 시작했으니, 노자가 <도덕경>에서 한 말을 인용하면서 이 글을 멋있게 끝내는 게 좋겠다. “아주 곧은 것은 굽은 듯 보이고 매우 뛰어난 기교는 서툰 듯 보인다(大直若屈 大巧若拙).”

    피처 에디터
    조소현
    패션 에디터
    남현지
    포토그래퍼
    강혜원
    나지언(디지털 미디어 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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