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 트렌드

꽃보다 아트 2

2016.03.17

by VOGUE

    꽃보다 아트 2

    미술관이 캣워크로 쳐들어왔다! 이제 우리 여자들은 예술가의 작품, 혹은 예술품이 된 옷을 입고 돌아다닐 수 있다. 걸어 다니는 갤러리가 된다는 사실을 매력적으로 느낀다면, 떠오르는 의문 하나. “내가 입은 옷이 패션인가, 아트인가?”

    Gallery 2
    EXHIBITION <타이포그래피 타임>

    마크 제이콥스가 파리 한복판에서 유서를 썼다! 대체 이 무슨 청천벽력 같은 소리? 자신의 마지막 루이 비통 쇼를 위해 스테판 스프라우스의 필체로 낙서한 모델 에디 캠벨의 몸을 보며 짓궂은 패션 기자들이 농담 삼아 표현한 말이다(삼각팬티만 입은 그녀를 메이크업 스태프 17명이 무려 6시간을 들여 블랙 스와로브스키로 꾸몄다). 보시다시피 그는 루이 비통 고별 컬렉션에 ‘Louis Vuitton Paris’란 의미심장한 타이포그래피를 남겼다. 이건 일회용 퍼포먼스가 아닌, 올봄 거리에서도 즐길 수 있는 타이포그래피다. 시퀸으로 장식한 검정 스타킹도 준비되어 있으니까.

    제이콥스 외에 여러 디자이너들이 타이포그래피를 통해 각자의 패션 시국선언을 발표하고 있다. 물론 한쪽에선 계절의 여왕인 봄을 맞아 꽃무늬가 만발하는 중. 그러나 전에 없이 패션에 흥분을 불러일으키는 현대미술의 유행을 등에 업고, 타이포그래피가 꽃무늬에 대항할 새로운 문양으로 자리잡았다. 활자 서체 배열을 그래픽 디자인으로 해석한 바로 그 기법 말이다. 그리고 이번 시즌 패션에서 타이포그래피는 브랜드의 로고 플레이는 물론 그래피티까지 아우른다.

    볼거리에 읽을거리, 이야깃거리까지 곁들인 디자이너들의 활자 중독은 뉴요커들로부터 시작된다. 알렉산더 왕과 DKNY는 로고 열풍을 다시 일으키기로 작심한 듯 자신의 이름을 패턴화해 눈에 띄도록 조치했다. 패션에서 구시대 유물로 취급되는 2000년대 초반 유럽의 모노그램 참 장식이나 프린트 로고 따위는 알렉스에게 필요 없다. 페이스북 세대의 최첨단 디자이너답게 레이저 컷아웃 기법을 써서 자기 이름을 구멍 뚫거나 기퓌르 레이스로 정교하게 짜 넣었다(‘Helvetica Neue LT STD’ 폰트를 좁은 간격으로 사용했다). 또 자신이 만든 옷을 입는 소녀들과 아가씨들을 위해 ’Parental Advisory’, 그러니까 ‘부모의 지도를 필요로 함’이라는 경고성 메시지를 서비스로 곁들였다.

    도나 카란의 경우 관광객에게 자유의 여신상과 함께 뉴욕의 또 다른 픽토그램이나 마찬가지인 DKNY 상표로 트랙 수트를 도배했다(좀더 정확히 묘사하자면 DKNY를 약간 수평으로 늘린 ‘Helvetica Neue Light Bold’ 폰트). “우리가 이 폰트를 선택한 이유는 뉴욕의 고층 빌딩과 그래픽적인 교차로의 길쭉하고 날씬한 실루엣을 닮았기 때문이다.” DKNY 디자인 팀의 설명이다. 맨해튼의 마천루를 쏙 빼닮은 타이포그래피를 응시하며 올해로 DKNY의 25주년을 맞은 도나 카란이 감격에 찬 듯 이렇게 덧붙였다. “이 글자들을 볼 때마다 DKNY가 탄생하던 시절이 떠오른다. 지금과 얼마나 다른지….”

    알렉산더 왕처럼 요즘 젊은 디자이너들은 2000년대 초를 휩쓴 로고 전성시대에 패션을 배웠다. 또 인터넷이 지닌 신속성과 광역성을 통해 문자와 문장의 파급력을 충분히 체험하는 중이다. 그런 면에서 소셜 미디어 패션 세대들에게 패션 타이포그래피는 볼거리 이상으로 꽤 영향력 있는 장치다. 캐서린 햄넷이나 비비안 웨스트우드의 90년대 컬렉션이 참고서라도 된 듯, 겐조는 사회성 짙은 메시지를 옷에 휘갈겼다. 물고기 남획에 반대하는 캠페인 ‘No Fish No Nothing’ 슬로건이 그것. 자선단체 ‘블루 마린 파운데이션’과 맺은 파트너십의 결과라 그런지, 겐조의 타이포그래피 티셔츠는 어딘지 환경보호 포스터처럼 보인 것도 사실이지만.

    한편 고등학교 생물 수업을 주제로 컬렉션을 구성하던 크리스토퍼 케인은 ‘Flower’라는 단어에 꽂혔다. ‘Helvetica Neue’ 폰트 덕분에 견고한 멋을 띠지만, 낱말 그 자체로 타이포그래피를 표현한 방식은 프레야 베하의 몸에 쓰인 타투처럼 자신의 주장을 짧고 분명하게 전달하기에 제격이다. 단호한 타이포그래피에 있어선 언더커버만 한 것도 없다. 사실 누구도 준 타카하시에게 세속적인 메시지를 기대하진 않는다. 그래서 그의 디자인 결과물엔 늘 아리송한 어떤 것이 포함된다. 이번에 타카하시는 새비지스의 포스트펑크 앨범 Silence Yourself>의 노래 가사로 분위기를 띄웠다. “과거 세계는 조용했어. 지금은 너무 많은 목소리가 있지.” 언더커버 쇼가 열린 팔레 드 도쿄에 울려 퍼진 노래 가사다. “그리고 그 소음은 끊임없이 정신을 산만하게 하지.” 그리하여 앞면에 ‘silent’, 뒷면엔 ‘listen’이라고 쓰인 실크 오간자 블라우스 등이 탄생했다.

    현대미술에 일가견이 있다고 소문난 라프 시몬스에게 타이포그래피는 차원 높은 은유다. 셰익스피어의 <맥베스>에서 발췌한 ‘The Primrose Path’부터 보자. 파리로 향하는 라에르테스가 햄릿을 경계하라고 여동생 오필리아에게 충고하자 그녀의 대답 가운데 낀 문장이다. 또 ‘The Ultraviolet Mouth’ ‘Alice Garden’ ‘Hyperrealness in the Daytime’ ‘Always changing, Forever Now’ ‘Convallaria Majalis: Sweetly Poisons’ 등의 문장이 범죄 현장에 두른 테이프에 각인된 것처럼 ‘Lucida Bright’ 폰트로 옷에 표기됐다. 또 자수가 놓인 21번째 드레스의 ‘The Aliceblue Eyes’ ‘Whisper Yellow’ ‘Hyperrose’ ‘Silentwhite’, 36번 드레스의 ‘Colour, Both Imagined and Real’ ‘Jet Black Cat the Celadon Eyes’ 등등. 물론 달고 오묘한 문장을 숨은그림찾기 하듯 발견하는 재미가 쏠쏠했지만, 라프 시몬스의 머릿속에 들어가보지 않는 한 해독은 쉽지 않을 듯(90년대에 헬무트 랭과 제니 홀저의 협업도 이런 감흥이었다).

    똑 부러진 타이포그래피는 이태리 니트 명가에 의해 좀더 ‘아티스틱’하게 변형됐다. 미쏘니가 V자 지그재그를 로고의 철자와 결합한 타이포그래피는 98년 가을 컬렉션에 처음 소개된 것을 모티브로 한다. 이게 꽤 맘에 들었는지 안젤라 미쏘니는 시그니처로 밀어붙여 2014년 가을 컬렉션에도 등장할 거라고 귀띔했다. 셀린 쇼에서는 모델들이 삽시간에 휙 지나치는 통에 원색의 붓 자국만 눈에 띄었을 뿐 타이포그래피가 곁들여졌다곤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나 쇼룸에 들러 눈에 불을 켜고 살펴보니 몇몇 옷에서 깨알 같은 타이포그래피를 발견할 수 있었다. 신문 칼럼이나 방대한 서류의 일부처럼 보이는 글자들이 캔버스 역할을 한 것. 이를 본 누군가는 “디지털 시대가 도래하기 전, 종이로 된 신문과 책을 향한 향수가 아니냐?”며 감흥을 드러냈다. 이런 ‘언플러그드적’ 매력은 어덤에게도 해당된다. 손으로 쓴 연애편지, 미국 시인 에밀리 디킨슨, 월트 휘트먼의 산문, 영국 공립학교 여학생 등에게서 영감을 얻은 디자이너는 손으로 쓴 긴 문장을 가리켜 “여주인공이 영문학 시간에 배웠을지 모르는 문학 작품이다”라고 설명했다.

    이처럼 타이포그래피는 디자이너의 메시지를 전할 확성기이자 신문이다. 무엇보다 꽃무늬의 대체 패턴이다. 그래픽 이미지로 인해 더없이 현대적으로 보이니 누가 타이포그래피를 마다할까? 덕분에 이번 시즌 패션계에서 타이포그래피는 수많은 예술적 기운 사이에도 단번에 눈길을 끈다. 때론 과도하게 쓰여 눈을 지치게 만드는 것도 사실이다. 대체 무슨 소린지 이해하기 힘든 문장도 있다. 하지만 디자이너의 의도를 굳이 파헤쳐 속내를 알아야만 타이포그래피 패션을 즐길 수 있는 건 아니지 않나. 패션은 영혼 없이 느끼는 것도 가능하다. 보이는 게 전부일 때도 있으니까.

    Gallery 3
    EXHIBITION <키스! 키스! 키스!>

    가수 비의 정규 6집 에서 첫 번째 타이틀곡 ‘30 Sexy’를 위한 첫 티저 광고 이미지의 압권은? 누가 봐도 그의 쌍꺼풀 없는 눈매가 아닌, 볼에 찍힌 여자의 입술 자국이었다. 우연인지 비의 그 이미지가 발표되기 이틀 전, 어느 일간지 주말판엔 ‘키스의 역사’에 대한 기사가 대대적으로 실렸다(참고 문헌을 보면, 키스가 애정 표현을 뛰어넘는 걸 알 수 있다. 장 클로드 볼로뉴 <키스>, 오토 에프 베스트 <키스의 역사>, 셰릴 커센바움 <키스의 과학> 등등). ‘키스를 부르는 입술’이라는 립스틱 광고 문구도 있듯이, 결국 키스는 입술로부터!

    그나저나 예술에 일가견이 있는 팬들 중엔 비의 티저 이미지가 살바도르 달리의 입술 소파에서 비롯된 건 아닌지 궁금해하는 사람도 있을 듯하다. 아니면 비의 새 앨범 기획자들의 안목과 취향이 대단히 수준급이라 만 레이의 입술 구름에서 영감을 얻은 건 아닐까? 그것도 아니면 언젠가 꿀벌이 달라붙은 어빙 펜의 입술 사진을 <보그>에서 본 걸까? 혹은 앤디 워홀의 입술 판화가 측근들의 집에 걸려 있어서? 패션에 민감한 비의 팬이라면 이번 시즌 현대미술 트렌드에서 발췌된 거라고 추측할 수 있겠다. 빙고!

    입술은 올봄 패션의 현대미술 트렌드에서 화룡점정이다. 연인들이 좋아죽겠다는 투로 상대를 응시할 때 눈동자만큼 입술에 집중하듯(당장 삼켜버리겠다는 듯) 올봄 패션도 여인의 입술을 탐닉하며 침을 꼴깍 삼키고 있다. 생로랑 쇼에서 새빨간 입술이 툭 튀어나왔을 때, 그건 고전적인 동시에 현대적인 신호였다. 리틀 블랙 드레스에 장식된 새빨간 입술의 전형적인 색채 대비는 물론 이브 생로랑 71년작의 에디 슬리먼식 재해석이기도 했으니까. 그게 맘에 들어 입술을 오물거린 관객들은 몇 주 전 런던에서 열린 자일스 쇼도 자연스럽게 떠올렸다. 여자가 턱을 치켜 올린 채 누군가를 향해 노골적으로 유혹할 때 보이는 바로 그 입술. 특히 앞니가 벌어진 치아까지 함께 묘사돼 영락없이 자일스디컨의 오랜 스타일리스트 케이티 그랜드가 연상됐다(바비 브라운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겸 패션 일러스트레이터로 인스타그램에서 이름을 날리고 있는 도날드 로버트슨의 재치 있는 솜씨).

    위에서 사례를 나열했듯, 옛날 옛적부터 우리가 거장으로 칭송하는 작가들은 여자의 ‘입술’에 시시때때로 매료된 채 예술품으로 승화시켰다. 그리고 이번 시즌 생로랑과 자일스 무대에서 입술을 삐죽 내밀기 전, 스텔라 맥카트니는 2014 리조트 컬렉션에서 비즈나 레이스로 꾸민 입술을 옷에 장식했다. 또 프라다가 2000년대에 레이디라이크 시대를 열며 짠 하고 공개한 입술 무늬 스커트나 꼼데가르쏭의 2008년 가을을 위한 입술 모양 컷아웃 장식을 어찌 잊을까. 또 다이앤 본 퍼스텐버그가 앤디 워홀이 표현한 자신의 입술을 패턴화해 사용한 광고 역시 아트에서 시작된 패션 입술의 명장면!

    그러니 곧 있을 밸런타인과 화이트데이에 ‘서프라이즈’를 원한다면? 입술 의상에 투자하는 게 효과적이다. 또 올봄 출시될 립스틱 광고와 홍보를 위해 머리를 쥐어짜야 할 화장품 브랜드 관계자가 있다면? 글로시와 매트, 컬러와 패키지 사이에서 숙고하는 것도 좋지만, 생로랑과 자일스, 맥카트니 등의 입술을 사랑스럽게 바라보는 게 먼저다.

      에디터
      디지털 에디터 / 신광호(SHIN, KWANG HO)
      기타
      kim weston arnold, james cochrane, courtesy phot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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