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 트렌드

예술 과식증

2016.03.17

by VOGUE

    예술 과식증

    21세기 패션은 예술계에 끊임없이 러브콜을 보내왔다. 아티스트와의 콜라보레이션으로 탄생한 백, 아트를 표방한 옷, 아트 피스 그 자체인 구두. 아트 페어는 제2의 패션 위크로 꼽힐 정도다. 예술을 향한 패션의 열렬한 구애, 혹은 과민 반응.

    “고액 자산가들이 넘치는 그곳에선 셀린 겨울 컬렉션의 거의 모든 스웨터와 가방, 네모난 힐의 부츠, 반스 스타일 스니커즈가 눈에 띄었다. 아제딘 알라이야의 흔들리는 블랙 드레스들과 크리스토퍼 케인의 플라워 드레스들과 바이커 재킷도 넘쳐났다.” 지난해 10월 런던에서 <보그> 패션 칼럼니스트 사라 무어는 세상에서 가장 세련된 옷차림을 살펴보고 있었다. 패션 위크 직후 열린 런던의 ‘프리츠 아트 페어’에 전 세계 멋쟁이들이 모인 것. VIP들을 상대로 열리는 ‘프리뷰 데이’엔 라프 시몬스, 드리스 반 노튼, 리카르도 티시, 사라 버튼 등 당대를 대표하는 디자이너들이 예술품 쇼핑에 나선 모습도 눈에 띄었다. 그로부터 한 달 뒤 뉴욕 크리스티 경매장. 예술품 사상 경매 최고가를 기록한 프란시스 베이컨의 그로테스크한 회화와 제프 쿤스의 익살스러운 풍선 강아지 옆으로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프라다의 푸른색 깅엄체크 코트를 입은 마크 제이콥스, 할리우드 갑부 애인 팔짱을 낀 전 지미 추 소유주, 타마라 멜론 등. 그들은 자신의 구입 목록을 확인하는 중이었다.

    최근 런던과 뉴욕으로 이어진 예술 행사에서 마주친 패션 피플들의 모습은 현재 패션과 예술의 긴밀한 관계를 증명하기에 충분하다. 이제 패션 디자이너들을 만나기 위해선 갤러리와 아트 페어로 향해야 하고, 대형 브랜드들은 아트 페어를 후원하기 위해 줄을 섰다. 2013년 프리츠 아트 페어는 알렉산더 맥퀸이 후원했다. “리(맥퀸의 애칭)는 컬렉션이 끝나고선 꼭 이곳을 찾았죠”라고 사라 버튼이 이유를 밝혔다. 10월 24일 뉴욕에서 열린 휘트니 뮤지엄의 갈라 파티는 루이 비통이 주최했다. 12월 초 마이애미에서 열린 아트 바젤에서 루이 비통은 르 코르뷔지에의 조력자였던 샬롯 페리앙을 추억하는 전시를 준비했다. 그뿐인가. 지난달 <보그 코리아>가 취재한 LA의 두 가지 파티 역시 패션과 예술의 만남이었다.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뮤지엄(LACMA) 파티는 구찌가 후원을 맡았고, 새로 오픈한 월리스 애넌버그 공연 예술 센터의 오프닝 파티는 살바토레 페라가모가 직접 준비했다. 이제 대형 패션 브랜드로서 제대로 된 뮤지엄 갈라 파티 하나 없으면 섭섭할 상황.

    “현대건축의 신전이자 세계적인 문화 예술 기관인 구겐하임 미술관과 함께할 수 있어 기쁩니다.” 디올의 라프 시몬스 역시 재빨리 뮤지엄 후원 파티를 선점했다. 지난해 11월 6일과 7일 연속으로 뉴욕 구겐하임에서 열린 인터내셔널 갈라의 후원을 디올이 맡은 것. “특히 제임스 터렐과 크리스토퍼 울이라는 기념비적인 작가들의 여정을 기념하는 자리에 디올이 함께한 건 큰 영광입니다.” 같은 날, 구겐하임으로부터 불과 서른 블록 정도 떨어진 모마에서는 또 다른 패션과 예술의 만남이 있었다. 틸다 스윈튼의 생일을 맞아 모마와 샤넬이 함께 파티를 연 것. 모마의 영상 부문 자선 파티에 맞춰 샤넬이 틸다를 주인공으로 추천하면서 가능했던 일이다. 칼 라거펠트는 틸다의 생일 파티를 모마라는 예술의 전당에서 열게 된 이유에 대해 설명했다. “그녀는 훨씬 더 깊이 있는 스타일을 지니고 있습니다. 평범한 곳에서의 생일 파티는 어울리지 않죠.”

    마크 제이콥스가 뉴욕의 다운타운 아티스트였던 스테판 스프라우스와 함께 루이 비통 모노그램 백 위에 낙서를 자행한 2001년 이후, 21세기 패션의 가장 커다란 화두는 예술이었다. 16년 동안 머물렀던 루이 비통에서 마크의 가장 큰 업적 역시 패션과 예술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대담함. 이브 생로랑의 몬드리안 드레스 이후 이 정도로 예술을 자유자재로 동시대인의 입맛에 맞게 활용한 디자이너는 없었다. 스프라우스를 비롯해 무라카미 다카시, 리처드 프린스, 야요이 쿠사마, 다니엘 뷔렌에 이르기까지 당대 아티스트들은 기꺼이 제이콥스와 손을 잡았다. 덕분에 동시대 현대 아티스트들도 다양한 패션계의 러브콜에 여유롭게 응하기 시작했다. 라프 시몬스는 디올에서의 첫 번째 컬렉션에 아티스트 스털링 루비의 프린트를 사용했고, 알렉산더 맥퀸은 데미언 허스트의 해골 프린트 컬렉션을 선보였다. 또 허스트는 최근 미우치아 프라다와 함께 카타르 사막에 텐트를 세우고 그곳에서만 판매하는 백을 디자인했다.

    이쯤 되면 아예 ‘입을 수 있는 예술품’을 파는 이들도 등장할 법하지 않나. 아닌 게 아니라 영국의 온라인 쇼핑몰 ‘네타포르테’는 오뜨 꾸뛰르와 예술품을 결합한 프로젝트를 발표했다. 지난여름 꾸뛰르 기간 동안, 아티스트들이 디자인한 단 한 벌의 ‘꾸뛰르 예술품’을 선보인 것! 마리나 아브라모비치, 빅 뮤니즈, 테렌스 코, 조지 콘도, 마킬렌 토마스 등 당대 아티스트들이 입을 수 있는 예술품을 디자인했고, 구입 의사가 있는 고객들은 특별히 준비된 네타포르테 팀에게 연락을 취했다. “예술이기도 하고 패션이기도 합니다. 만약 입고 싶다면 충분히 입을 수도 있습니다.” 네타포르테는 새로운 프로젝트의 실체를 이렇게 정의했다. 하지만 과연 누가 아브라모비치의 나일론 점프수트를 입고 다닐 수 있을까? 걱정되는 것도 당연하다. 패션과 예술의 경계를 애매하게 오가는 이 작품은 예술품으로 가격을 매겼기 때문. 추측하건대 9월에 판매가 시작된 이 작품들은 지금 네타포르테에서 가장 비싼 2만1,785달러짜리 발렌티노 레이스 드레스보다 훨씬 비싼 가격에 팔려 나갔을 게 분명하다.

    굳이 함께 컬렉션으로 탄생하지 않더라도, 예술과 패션의 관계는 어느 때보다 끈끈하다. 이 밀월 관계를 가장 잘 확인할 수 있는 예는 디자이너와 절친임을 자처하는 아티스트들. 지방시의 리카르도 티시와 마리나 아브라모비치의 깊은 관계는 이미 잘 알려져 있고, 스텔라 맥카트니 쇼의 관객석에서 제프 쿤스를 찾아보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마크 제이콥스 쇼 역시 뉴욕 아티스트들의 집합소. 신디 셔먼부터 레이첼 파인스타인, 존 커린 등은 마크 제이콥스의 신상으로 빼입고 쇼장을 찾는다. 젊은 뉴욕 아티스트들인 애런 영, 라이언 맥긴리 등은 프로엔자 스쿨러, 알렉산더 왕, 오프닝 세레모니 등의 디자이너들과 파티를 즐긴다. 한마디로, 요즘 잘나가는 디자이너들치고 친한 예술가 한 명 없는 사람은 없다.

    디자이너들이 예술가들과 어울리면서 예술에서 영감을 얻은 스타일이 등장하는 건 자연스러운 수순. 덕분에 옷 자체가 하나의 예술 작품을 떠올리게 하는 ‘아트 스타일’은 이번 시즌 최고의 트렌드로 떠올랐다. 예술 작품을 차용하거나 모방한 스타일이 런웨이를 지배한 것. 셀린, 맥퀸, 캘빈 클라인 등에서 만난 회화적인 옷들은 당장 뉴욕 다운타운의 갤러리에 걸려도 어색하지 않다. 밀라노의 아퀼라노 리몬디는 아예 고갱의 목가적인 회화 작품을 새틴 드레스에 그대로 담았다. 또 미우치아 프라다는 벽화 예술가 네 명과 일러스트레이터 두 명에게 이번 컬렉션을 위한 포트레이트 시리즈를 부탁했고, 이들이 그린 여성들의 얼굴은 모피 코트부터 스포티한 드레스, 백과 슈즈까지 다양하게 변주된 채 컬렉션을 채웠다. 당연히 디자이너들은 백스테이지에서 자신에게 영감을 주거나 자신이 끌어들인 아티스트들 이름을 주문 외우듯 기자들에게 술술 불었고, 기자들은 그 이름들을 검색하고 조사하느라 바빴다. 그야말로 패션 속 예술의 홍수 시대!

    이쯤 되니, 한마디씩 툭툭 던지는 말이 정곡을 찌르는, 패션 황제 칼 라거펠트가 가만있을 리 없다. “모든 것은 요즘 예술에 과민 반응하는 사람들에게서 비롯되었습니다. 좀 너무하지 않나요?” 매 시즌 거대한 파리그랑 팔레 공간을 자신의 아이디어로 채우는 그는 그런 세태를 꼬집기 위해 이번에는 가짜 샤넬 갤러리를 준비했다. 샤넬에 기본을 둔 예술 작품 75점을 준비한 것. 바닥까지 늘어진 거대한 더블 C 로고 목걸이, 넘버 파이브 향수병 로봇, 컬러풀한 스트라이프 채색 마드모아젤 샤넬의 동상 등등. 이건 모두 라거펠트의 머릿속에서 탄생해 샤넬 아틀리에의 힘으로 완성된 새로운 예술 작품이다. “저는 책을 모으기도 바쁩니다. 예술 작품 따위를 모을 공간은 없습니다. 아~~트. 아~!” 아트라는 단어만 들어도 질리는 듯 라거펠트가 외쳤다. 그동안 수많은 아티스트들의 패러디 대상이었던 샤넬의 수장이 직접 완성한 예술품들은 흠잡을 데 없었다. 그리고 이들을 완성하기 위해 아티스트들도 필요 없었다. 동시대 예술가보다 더 예술가적 기질이 풍부한 라거펠트만으로 충분했으니까.

    그렇다면, 라거펠트의 비꼬기에 뜨끔했을 디자이너들과 브랜드들 이 잠시 예술과 거리를 두게 될까? 그럴 것 같진 않다. 루이 비통은 프랭크 게리가 디자인한 루이 비통 예술 재단의 아트 센터를 완공하느라 바쁘고, 프라다는 카타르와 베니스를 오가며 예술 사업을 펼치느라 분주하다. LVMH와 케어링 그룹 회장님들이 세계에서 손꼽히는 아트 컬렉터라는 사실만 봐도 예술을 향한 패션계의 러브콜은 쉽게 끝나지 않을 듯. 게다가 샤넬과 루이 비통 등의 전 세계 매장을 디자인하는 건축가 피터 마리노는 새로운 매장을 열 때마다 현대 작가들에게 매장만을 위한 작품을 의뢰하며 브랜드들의 예술 욕심을 채워주는 중. 예술계가 패션의 대중성과 거대한 자본을 필요로 하고, 패션계는 예술의 대담성과 통통 튀는 아이디어를 필요로 하는 한, 이 밀월 관계는 쉽게 끝나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결코 셀린 티셔츠나 백을 함께 만들지 않을 겁니다.” 지난 11월 중순, 셀린 하우스의 수장이 된 후 처음으로 아티스트 이사 겐즈켄의 뉴욕 모마 전시를 후원한 피비 파일로가 설명했다. “그녀에게 이 후원은 별 의미가 없는 듯해요. 하지만 그런 게 좋습니다.” 런던의 잘나가는 갤러리스트를 남편으로 둔 파일로는 자신이 아티스트와 ‘절친’이 되거나 함께 백을 디자인할 의도는 없음을 분명히 밝혔다. 대신 좋아하는 예술가를 후원하는 것에 만족한다. “그녀의 작품을 몰랐던 사람들에게 그녀를 소개하는 것, 아티스트 스스로 고귀함을 지킨다는 사실이 좋습니다. 그녀의 가치가 셀린의 그것과 어울린다고 생각했을 뿐이죠.” 예술에 대한 광적인 애정 없이 조용히 취향만을 드러내는 것. 이것이야말로 예술을 향한 패션의 멋진 태도 아닐까?

      에디터
      패션 에디터 / 손기호
      기타
      Illustration / Hong Seung Pyo

      SNS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