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터테인먼트

<웹툰 예고살인>의 이시영과 엄기준

2016.03.17

by VOGUE

    <웹툰 예고살인>의 이시영과 엄기준

    검은 물이 흐르는 이시영의 손이나 면도칼을 품은 엄기준의 눈은 물풀처럼 디지털 화면에 달라붙었다.
    <보그>가 영화 <웹툰; 예고살인>에 출연한 이 다이내믹하면서도 고요한 두 배우를
    데이비드 린치 스타일의 나른한 공포 속으로 밀어 넣었다.

    엄기준의 흰색 라펠의 도트 재킷은김서룡 옴므(KimseoryongHomme), 셔츠는 질 샌더(Jil Sander).이시영의 타프타 소재 옆트임롱 드레스는 톰 포드(Tom Ford),PVC 소재 메리제인 슈즈는 샤넬(Chanel).

    엄기준의 흰색 라펠의 도트 재킷은김서룡 옴므(KimseoryongHomme), 셔츠는 질 샌더(Jil Sander).이시영의 타프타 소재 옆트임롱 드레스는 톰 포드(Tom Ford),PVC 소재 메리제인 슈즈는 샤넬(Chanel).

    흰 셔츠는 살바토레 페라가모(Salvatore Ferragamo),검정 리넨 베스트는 문영희(Moon Young Hee).

    흰 셔츠는 살바토레 페라가모(Salvatore Ferragamo),검정 리넨 베스트는 문영희(Moon Young Hee).

    퍼프 소매의 레이스 톱은 돌체앤가바나(Dolce&Gabbana),목걸이로 연출한 진주 티아라는 샤넬(Chanel).

    퍼프 소매의 레이스 톱은 돌체앤가바나(Dolce&Gabbana),목걸이로 연출한 진주 티아라는 샤넬(Chanel).

    이시영, 아름다운 승부욕

    배우의 절반은 눈이다. 이시영은 눈이 좋은 배우다. 그녀가 공포를 느낄 때, 그녀의 망막이 지르는 침묵의 비명에서 우리는 데이비드 린치나 히치콕의 영화에서처럼 일상적인 공간이 순식간에 흉기가 되는 듯한 압박을 받는다. 그건 꽤 놀라운 경험이다. 姑 장진영이 <소름>에서 보여준 극단적인 자기 파괴, 염정아가 <장화 홍련>에서 보여준 고압적인 히스테리, 김혜수가 <분홍신>에서 보여준 신경쇠약 직전의 눈동자처럼, 이시영은 ‘자기 불안의 뇌관’을 혈관과 신경세포에 골고루 장착시킬 줄 안다. 그녀의 몸에서 혈흔 가득한 아득한 비명 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손에 잉크를 묻힐 때부터 뭔가 느낌이 왔어요”라고 이시영은 말한다. 그건 마치 복서가 손에 글러브를 낄 때부터 제 경기는 시작이지요,라고 말하는 것처럼 들렸다. 이시영과 매니지먼트에서는 복서 이시영과 여배우 이시영이 오버랩되는 것을 매우 조심스러워 하지만, 그건 이시영에게서 왼발과 오른발의 스텝을 분리시키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다.

    평소 이시영은 기능성 트레이닝복을 입고 다닌다(그녀는 현재 르까프 모델이다). “이렇게 입을 수밖에 없어요. 항상 운동 중이거든요”라고 그녀가 말했다. 가까이서 보면 70년대 전설적인 여배우 정윤희를 꼭 빼닮은 여자가 파마 머리를 묶고 트레이닝복을 입고 있는 모습은 약간 만화적이다. 그리고 트레이닝복을 입었을 때는 운동 선수 같지만, 드레스로 갈아 입으면 온몸에서 빛이 나는 여신이 된다. 지난달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우승했을 때, <보그>는 그녀에게 러브콜을 보낸 적이 있다. 하이패션과 권투를 접목한 다이내믹한 패션 화보를 기획했었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아쉽게도 불발됐다. “복싱에 관해서라면 모든 게 조심스러워요. 제가 연예인이라서 복싱이 도구화되거나 희화화될까봐 걱정이죠. 저는 정말 복싱을 사랑하고 선수들을 존경해요. 그런데 혹시나 저라는 존재가 연예인이라서 예능 프로나 화보에서 복싱이 가볍게 다뤄지거나 웃음거리가 될까봐 신중하게 돼요.” 이시영은 한번 더 기회를 달라고 귀엽게 징징댔다.

    이제까지 <위험한 상견례>나 <남자 사용설명서> 같은 가벼운 로맨틱 코미디 영화가 이시영을 설명하는 필모그래피였다면, 6월에 개봉하는 <웹툰: 예고살인>은 심리적 파장이 강렬한 공포 영화다. 전작 <분홍신>에서 김혜수를 세공해서 ‘잔혹 동화’ 신드롬을 불러일으켰던 김용균 감독이 ‘웹툰’의 광풍을 시대적으로 포착한 공포 영화에 이시영을 끌어들였다. 그녀는 이번 작품에서 ‘자신이 그리는 대로 살인 사건이 펼쳐지는 웹툰 작가’ 역할을 맡았다. 감독은 이시영의 몸과 마음이 끓어올라 터지기 직전의 임계점을 잘 포착해냈다. “배우에겐 정말 그런 감독이 필요해요”라고 그녀가 ‘캔디’ 같은 미소를 지었다. 공포 영화는 남자 중심의 영화계에서 유일하게 여배우가 자신의 육중한 존재감을 드러낼 수 있는 장르다. 엄정화나 김윤진 같은 여배우는 타고난 모험심과 스태미나로 여전히 스릴러 장르에서 독창적인 에너지와 긴장감을 유지하고 있다. 그것은 영화 전체를 짊어지려는 정신력과 육체적 배짱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링이라는 고독한 현장에서 육체적 한계에 맞서 싸워온 이시영 같은 여배우에겐 더할 나위 없는 기회인 것이다.

    이시영의 레이스 원피스는 돌체앤가바나(Dolce&Gabbana),브래지어와 새틴 뷔스티에는 아장 프로보카퇴르(AgentProvocateur). 엄기준의 러플 셔츠는 장광효 카루소(ChangKwang Hyo Caruso), 재킷은 버버리 브릿(Burberry Brit),수트 팬츠는 질 스튜어트 뉴욕(Jill Stuart New York),레이스업 구두는 버버리 프로섬(Burberry Prorsum).

    이시영의 레이스 원피스는 돌체앤가바나(Dolce&Gabbana),브래지어와 새틴 뷔스티에는 아장 프로보카퇴르(AgentProvocateur). 엄기준의 러플 셔츠는 장광효 카루소(ChangKwang Hyo Caruso), 재킷은 버버리 브릿(Burberry Brit),수트 팬츠는 질 스튜어트 뉴욕(Jill Stuart New York),레이스업 구두는 버버리 프로섬(Burberry Prorsum).

    나는 그녀가 지난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김다솜과 싸우는 장면을 보고 잭 런던의 권투 소설 <스테이크 한 장>을 떠올렸다. 이시영은 서른한살이었고, 김다솜은 열아홉 살이었다. 공이 울리자 두 사람은 각자의 코너에서 앞으로 나왔다. 1라운드는 완전히 김다솜의 독무대였다. 김다솜은 무수히 펀치를 날리며 이시영을 압도했고, 이시영은 가리고 막고 클린치하는 것으로 만족했다. 김다솜이 가진 청춘의 거품이 빠져야만 노련한 아웃 복서 이시영이 반격할 기회가 오기 때문이다. 3라운드가 되자 이시영은 효율적인 움직임으로 비축한 체력을 이용해 사자가 앞발을 휘두르듯 번개처럼 유효타를 날렸다. 그리고 아껴왔던 힘을 상대에게 남김 없이 퍼부었다. 최종적으로 국가대표 타이틀은 이시영이 차지했다. 그건 한 편의 짧은 영화였다. 그녀는 현재 인천시청 소속 복서이며, 소속팀 선수들과 함께 합숙소 생활을 하고 있다.

    “저는 지금 제가 좋아서 두 가지 일을 동시에 하고 있어요. <웹툰>을 찍을 때도 국가대표 선발전을 준비할 때여서 육체적으로 굉장히 힘들었어요. 47kg의 체중을 유지하면서 파워를 조절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죠. 영화적으로는 예민한 정서 상태에 있었고요. 그런데 저에겐 승부욕이 있어요. 그 승부욕은 남에게 이기고 싶은 마음이 아니라 나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기고 싶은 욕망이에요. 완전히 녹다운됐을 때, 코치님이 저를 다그치죠. ‘진짜 할 수 없는지 너 자신에게 물어봐!’ 그러면 저는 할 말이 없어요. 주저앉았다가는 다시 일어설 수밖에 없어요. 물 속에서 허우적대도 죽기 전까진 지푸라기 잡을 힘이 있잖아요. 그 힘으로 다시 일어서는 거예요. 연기도 권투도 원리는 다 같아요. 시합에 지거나 영화가 흥행이 안 되면 처음엔 남 탓을 하게 되죠. 하지만, 나한테 물어봐요. ‘죽을 만큼 최선을 다했나?’

    드라마틱한 네크라인의 드레스는미스지 콜렉션(Miss Gee Collection).

    드라마틱한 네크라인의 드레스는미스지 콜렉션(Miss Gee Collection).

    권투라는 말에는 언제나 야생의 냄새가 느껴진다. 러셀 크로가 나온 <신데렐라 맨>과 힐러리 스웽크가 나온 <밀리언 달러 베이비>는 매우 잔인한 동시에 아름다운 영화였다. 사각의 링 위에 선 러셀 크로와 힐러리 스웽크는 원형 경기장에 들어선 검투사 같았다. 무기만 들지 않았을 뿐, 그와 그녀는 살기 위해 싸운다. 공이 울리면 튕기듯이 나아가 흥분된 관객들의 터질 듯한 고함 속에 펀치를 날리고 훅을 맞는다. 가드 올리고 잽을 날리고, 눈이 검게 멍들고 눈썹이 찢어지고, 복부에 피가 고인다. 링은 바다처럼 넓어진다. 내동댕이쳐진 그와 그녀의 어깨는 정직하고 단순했다. 혼자서 감당하는 자의 빛나는 어깨였다. “저는 연기를 권투하면서 많이 배웠어요. 카메라 앞에 서는 거나 링 위에 서는 거나 똑같이 고독한 거예요. 온몸을 던져 과감하게 연기하는 것도 권투를 해봤기 때문에 할 수 있는 것 같아요. 감정도 그래요. 전 제가 받은 상처는 빨리 잊어요. 그래야 다시 웃으면서 일어설 수 있어요.”

    이시영은 데뷔 4년 차 배우다. 복싱을 시작한 지는 2년 됐다. 스물여덟의 늦은 나이에 배우가 된 그녀는 배우가 되기 전까지, 다양한 삶의 경험을 했다. 원단 회사에서는 외국 거래처까지 완벽하게 파악해서 매출을 증가시킨 영리한 ‘미스 리’였고, 아이스크림 가게에서는 하루에 키위 50개를 까서 생과일 아이스크림을 만든 후 자발적으로 주변에 배달 서비스를 시작한 못 말리는 직원이었다. “매장 아이스크림의 절반을 제가 먹은 게 문제였지만요. 하하.” 드라마 <꽃보다 남자>와 <바람의 나라>에 출연할 즈음, 직접 오픈한 찜질방 매점이 클라이맥스였다. 음료수와 속옷 등의 비품을 동대문 시장과 음료수 도매상을 오가며 사입하는 과정과 찜질방을 찾는 다종다양한 인간 군상을 상대했던 그녀의 경험을 드라마 작가가 들었다면 시트콤이나 단막극 한 편은 충분히 나왔을 것이다. “찜질방에서 가장 많이 배웠어요. 도둑질하는 아이들, 유혹하는 아줌마들, 이상한 남자들, 시비 거는 사람들, 구경꾼들….” 이야기를 하는 내내 그녀의 언어는 살아 있었고, 표정은 활기가 넘쳤다. 링 위에 있을 때나 카메라 앞에 있을 때나 생활의 현장에 있을 때나 성패에 상관없이 최선을 다하고 웃는 사람에게서 볼 수 있는 개운한 훈기. 그녀가 복싱을 시작한 것도 드라마 때문이었다. <부자의 탄생> <장난스러운 키스> 등에서 재벌집 딸 같은 여성스러운 캐릭터만 맡으면서 갈증에 시달리던 이시영은 자신의 보이시한 성격을 보여줄 만한 ‘복서’역을 제안 받고 5개월 동안 집중 훈련에 들어갔다. 아쉽게도 그 드라마는 중도에 무산됐지만 이시영은 꽃무늬 원피스를 입은 인형 같은 여배우에서 자기 주도적인 복서로 변신했다.

    “매기가 저 문으로 들어왔을 때, 용기 이외엔 아무것도 없었네. 그녀가 원하는 기회라는 것이 이 세상엔 없었지. 프로가 된다는 건 꿈도 못 꿨어. 그런데 일 년 반 만에 그녀는 세계 챔피언십에서 경기를 했네. 자네가 그렇게 해줬어. 해낸거야. 사람들은 매일 죽는다네. 바닥을 닦고 접시를 닦다가 말일세. 그들의 변명이 뭔지 아나? 자긴 기회가 없었다고 하지. 자넨 매기에게 기회를 줬어.” 나는 <밀리언달러 베이비>에서 매기의 사고로 괴로워하는 프랭키에게 했던 친구 에디의 말에 권투의 진실이 있다고 믿었다. 도전 혹은 기회 같은 단어만으로 인간은 기어코 일어설 수 있다.

    “스물여덟 살이면 포기할 만한 나이인데, 저는 그렇게 늦게라도 배우가 되고 싶었어요. 때로는 복싱도 좀더 일찍 했더라면 하는 생각도 들죠. 하지만 뒤늦게라도 연기자로 데뷔하면서 복싱을 알게 된 것만으로도 행운이에요.” 그녀는 4년 만에 <웹툰:예고살인>에서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자기주도적인 여배우가 됐고, 2년 반 만에 국가대표 권투 선수가 됐다.

    “저는 제 성격이 제가 하는 일에 미치는 영향력이 좋아요. 저는 쓸데 없는 정의감도 강한 편인데, 연기에서도 그게 드러나요. 이번 영화에서도 아끼는 장면은 마을 사람들이 한 여자를 위협할 때, 제가 칼을 들고 구해내는 장면이에요. 저한텐 감정이 솟구쳐 오르는 신이었죠. 저는 솔직하고 뜨겁고 다이내믹한 사람이에요. 저의 그런 면이 앞으로 연기할 때 계속 드러났으면 해요.” 확실한 게 하나도 없는 세계에서 스포츠와 엔터테인먼트가 획득한 성취와 위로는 문란할 만큼 심사를 흔드는데, 여전히 이시영은 자기와의 싸움이라는 원시적 세계로 입성한다. ‘아름다운 승부욕’이라는 천진한 좌우명을 양손에 쥔 채. 쏟아져버릴 것 같은 찬란한 웃음을 담은 우리들의 챔피언.

    셔츠는 질 스튜어트 뉴욕(Jill Stuart New York),리넨 베스트와 줄무늬 팬츠는김서룡 옴므(Kimseoryong Homme).

    셔츠는 질 스튜어트 뉴욕(Jill Stuart New York),리넨 베스트와 줄무늬 팬츠는김서룡 옴므(Kimseoryong Homme).

    엄기준, 고요 속의 파동

    뮤지컬 연기와 영화 연기는 다르다. 무대 사이즈와 극장 사이즈가 다르듯이. 그게 평면적이고 입체적인 플롯의 차이인지, 배우가 분출하는 에너지의 차이인지 정확히 계측할 수 없지만. 그리고 드라마와 뮤지컬과 영화라는 장르에 동시에 출연할 수 있는 배우가 있다면 그 사람이 엄기준이다. 분명 미소가 머물러 있는데도, 미간에 시한 폭탄을 심은 사람처럼 그에겐 ‘선과 악’이나 ‘적과 동지’의 구분을 와해시키는 전조가 있다. 그가 OCN의 <더 바이러스>와 영화 <웹툰>에서 냉철한 수사관을 연기한 후라서가 아니라, 그 고요 속에 내재된 에너지 파장 때문에 다가가기 조심스러워지는 남자다.

    엄기준의 눈은 햇빛 아래 면도칼처럼 날카롭고, 입은 얼음 조각을 문 것처럼 쿨하다. 그는 3년 전 만났을 때보다 더 마르고 더 과묵해졌다. 당시 그는 <파괴된 사나이>에서 김명민의 딸을 유괴하는 사이코패스 역할을 맡았었다. 육중한 카리스마로 빛나는 ‘연기 본좌’ 김명민 옆에서 테너로 속삭이듯 이야기했고, <보그> 스튜디오에서 담배를 피우고 유리를 깨는 장면을 촬영했다. 그때와 변함없이 지금도 고요하게 비주얼 스토리에 맞는 자기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한마디로 그는 뜨거워진 온도를 내리는 쿨한 사나이며, 격한 상황을 조절하는 이성적인 남자다.

    “솔직히 저는 공포와는 큰 관계가 없습니다. 웹툰 작가의 예고 살인을 수사하는 형사니까요.” 내가 영화 <텔미 섬씽>의 한석규 같은 역할이냐고 묻자, 그는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었다. “그럴지도 모르죠. 하지만 알고 보면 더 큰 반전이 있습니다.” 역동적이고 에너지가 넘치는 이시영과는 달리, 선명한 설계대로 고요하게 움직이는 엄기준을 보면 이 영화가 아주 절묘한 캐스팅으로 이뤄졌다고 짐작할 수 있다. 예전에 엄기준의 얼굴에서는 <살인의 추억>에서 용의자였던 박해일의 항변하는 듯한 수수함과 <그놈 목소리>에서 유괴범이었던 강동원의 억눌린 무참함이 풍겨 나왔는데, 지금은 습자지를 가르는 펜촉처럼 더 섬세하고 표정의 동요가 없었다. “영화에서와는 달리 <보그> 스토리에서는 엄기준 씨가 애드거 앨런 포우 같은 현대적인 작가고, 이시영 씨는 당신이 그린 악몽 속의 인물이에요. 알았죠?”라고 설명하며, 원고지로 만들어진 으스스한 무덤 속에 그를 집어넣었을 때도, 그는 “눈을 감고 있어도 되겠군요”라고 한마디 했을 뿐이다. 그는 오랜 뮤지컬 ‘앙상블’ 생활을 하면서 동요하지 않는 법을 배웠다고 했다. ‘캐릭터’를 사는 사람과 ‘역할’을 사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후자 쪽이다.

    어쨌든 뮤지컬과 영화 사이에서 엄기준이라는 개인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극을 테크니컬하게 매만지는, 주연과 조연의 자존감을 동반 상승시키는, 그 공존의 진실이 앙상블의 힘이라는 듯. “저는 술자리에서도 리드하는 사람이 아니라 가만히 앉아 술잔만 비우는 사람이죠. 하지만 어떤 자리에서든 독단적이고 이기적인 사람은 못 참죠. 내가 나가든 그를 내보내든 저는 그걸 저지해요. 모든 건 앙상블이거든요.”

    엄기준은 1995년 데뷔해서 2000년도에 뮤지컬 무대에서 첫 주연을 맡았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김종욱 찾기> <몬테 크리스토 백작> <삼총사> 등등. 그동안 테너였던 목소리 톤을 베이스로 바꿨기 때문에 그가 웃으며 말할 때는 한석규처럼 차분한 온기가 흘렀다. “노래할 때도 즐겁고 연기할 때도 즐거워요. 그런데 뮤지컬 영화는 아직 잘 모르겠어요. 영화 <물랑루즈>에서 이완 맥그리거가 갑자기 노래를 부를 때 생경한 느낌을 받죠. <레미제라블>은 다 좋은데, 오튜 튜닝이 좀 덜 됐더군요.”

    18년의 연기 경력은 그에게 주눅들지 않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분명 그는 좌절보다는 작은 성공들을 더 많이 기억하는 사람이다. 인생이든 무대든 어쩌면 똑같다. 프로들은 균형 감각이 좋고, 주눅들지 않으며, 잘 물러서는 법을 알고, 슬쩍 힘을 뺀다. “저는 롤모델도 한 사람으로 정해두지 않았어요. 오달수 선배의 릴랙스한 연기나 최민식 선배의 카리스마 넘치는 연기나 다 배우고 싶죠.” 하지만 그는 목소리뿐 아니라 선이 가는 외모와 찢어진 눈, 연기 스타일도 한석규와 많이 닮았다. 그의 소망대로 한석규의 나이가 되면 <뿌리 깊은 나무>에서 보여준 냉온시스템이 완비된 연기를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이시영이 현장에서 보여준 연기에 대한 승부욕에 대해 진심을 다해 칭찬했다.

      에디터
      피처 에디터 / 김지수
      포토그래퍼
      HYEA W. KANG
      스탭
      스타일 에디터 / 김미진, 헤어 / 박선호, 메이크업 / 류현정, 세트 스타일링 / 다락(Da;rak)

      SNS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