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팝 아티스트, 카스텔바작

2016.03.15

by VOGUE

    팝 아티스트, 카스텔바작

    충격과 혁명의 팝 아티스트 장 샤를 드 카스텔바작이 서울에 캔버스를 깔았다. 6월 서울에 머무르며 완성한 전시 〈내일의 그림자(Shades of Tomorrow)〉는 올해 65세인 그가 새로운 르네상스를 꿈꾸며 바라본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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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랑스의 디자이너이자 팝 아티스트 장 샤를 드 카스텔 바작은 국내에서도 꽤 친숙한 남자다. 70년대 앤디 워홀, 키스 해링, 장 미셸 바스키아등과 교류하며 패션과 미술 분야에서 충격적인 작품을 연달아 발표하던 그는 한때 우디 앨런의 영화 의상으로 스크린을 누볐고, 마돈나의 전설적인 테디 베어 드레스로 타블로이드지를 도배했으며, 근래엔 레이디 가가의 개구리 코트로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케이티 페리, 비욘세 등 팝 아티스트들과의 작업도 꾸준하고, 2년 전엔 칸예 웨스트와 함께 리사이클 의자를 만들어 발표하기도 했다. 동시에 그는 프랑스 공무원들의 유니폼, 교황과 추기경의 예복도 제작하곤 하는 별종의 아티스트다. 한국 방문도 잦아 장 샤를 드 카스텔바작은 2013년 국내 한 방송사의 패션 프로그램 <패션왕>의 패널로 출연한 적이 있으며, 2014년부턴 형지그룹과 함께 골프 웨어 브랜드 ‘카스텔바작’을 운영하고 있다. 프랑스 전통 가문의 귀족 자손임에도 이웃집 아저씨에 더 가까운 행보다. 그리고 6월 10일부터 28일까지 서울 블루스퀘어 네모(Nemo)에서는 전시 <내일의 그림자>가 열린다. 80년대 홀로 아픔에 잠겨 그렸던 드로잉 작품부터 현대의 새로운 가치를 궁리하며 완성한 ‘신귀족’ 시리즈, 서울과 교류하며 받은 인상으로 그려낸 회화 등으로 구성된 ‘장 샤를드 카스텔바작의 2막’과도 같은 전시다. 오프닝을 하루 앞두고 장 샤를 드 카스텔바작을 만났다. 강남의 한 카페에 레지던시 작업실을 차리고 거주 중인 그는 “서울이 주는 영감이 신나고 재미있다”고 했다. 이번 전시에서 그는 세월호 사건을 접한 뒤 받은 느낌을 바탕으로 ‘I Am Your Father’도 그렸다. 애잔하지만 유머와 익살스러움을 포기하지 않은,혁명의 시대를 살아온 남자가 그린 희망의 그림이다.

    VOGUE KOREA(이하 VK) 전시의 제목을 ‘내일의 그림자’라 정했다. 어떤 컨셉으로 구상했나.
    CASTELBAJAC(이하 CA) 지금까지 다양한 전시를 해봤지만 이렇게 내 인생의 다양한 시기에 그린 작품을 한데 모아 보여주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패션일을 시작한 지 40년이 넘었는데 항상 생각하고 있는 건 리스크다. 위험 요소가 없는 일엔 별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 그래서 이번엔 전시 기획사 아트 딜라이트 최은주 이사에게 레지던시를 준비해달라고 했다. 서울에서 지내며 작업을 해보고 싶다고. 강남의 알베르라는 카페 지하 층을 빌려주셨고 그곳에서 작업을 했다. 샹들리에가 달린 991㎡(300평) 규모의 공간이다. 일단 요즘 서울 대학생들이 사는 원룸의 면적을 알아본 뒤 그 크기의 캔버스를 주문했다. 5×5 크기다. 거기에 그림을 그렸다. ‘신귀족’ 시리즈랄까. 용기나 명예 등 기존의 가치관이 오늘날은 어떤 가치로 대체되었는지 생각해보고 싶었고, 중세 서양의 문장(紋章)을 변용해 현대의 문장을 만들어보고 싶었다. 노빌리티(Nobility)에 새로움(New)를 붙인 ‘뉴빌리티’의 작품들이다. 오래전에 그린 구작들과 함께 공개될 거다.

    VK 세월호 사건을 연상케 하는 배를 그린 거대한 작품이 있다. 제목을 ‘I Am Your Father’라 붙였더라.
    CA 한국에서 배와 관련한 사고가 있었다는 얘기를 듣고 강한 인상을 받아 완성한 작품이다. 세상이 돌아가는 방식에 대한 은유적 표현으로 그리고 싶었다. 약간 노아의 방주 같달까? 그림 속에는 다양한영화, 만화 캐릭터들이 타고 있다. 어린아이들의 순수함의 흔적을 싣고 지나는 화물선이다.내겐 아들이 둘 있는데 그들 덕에 <스타워즈>문화에 빠져 살았다. 두 아들과 함께 <스타워즈>를 보러 간 적이 있는데, 다스 베이더가 루크 스카이워커의 아버지란 사실이 처음으로 드러나는 대목에서 그들이 고개를 들어 신비로운 눈빛으로 나를 쳐다봤다. 지금도 잊지 못할, 내 인생 최고의 순간이다.

    VK 서울에 거주하며 작품 활동을 하는 건 파리에서 작업하는 것과 어떻게 달랐나.
    CA 나는 키스 해링에게 그림을 배웠다. 그는 바닥에 캔버스를 놓고 그리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근데 일단 그렇게 하면 육체적으로 매우 힘들다. 거의 복싱 경기를 하는 것 같은 느낌이다. 하지만 이번에 서울에서 그렇게 작업하는 중 꽤 감동적인 순간이 있었다. 건축가 백지원, 그래픽디자이너 찰스 장 등 젊은 아티스트들이 찾아와주었고, 내가 요즘 인스타그램 중독이라(웃음) 작업하는 걸 SNS에 곧잘 올렸는데 그걸 보고 찾아와준 젊은이들도 있었다. 한국에 더 자주 오고 싶어졌고, 더 많은 젊은 작가들과 교류하며, 교류의 장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VK 이번 전시에선 이혼 이후 혼자 집에 틀어박혀 그렸다는 그림들도 처음 공개된다.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것 같은데 어떤 마음이었나.
    CA 사람 사는데 좋은 일만 있다면 아마 매우 지루할 거다. 분명 어두운 작품들이지만 나쁜 기억은 아니다. 그 그림들은 지어진 지 800년 넘은, 오지에 위치한 카스텔바작 가문 성에 보관되고 있었다. 근데 아트 딜라이트 최은주 이사가 놀러 와 우연히 발견했고 매우 좋아했다. 판도라의 상자를 연 것같다고 하더라. 확실히 그 그림들은 매우 개인적인 작품들이고, 감정적으로 힘든 시기에그린 것들이다. 나는 이혼을 했고, 키스 해링이 죽었고, 말콤 맥라렌이 죽었다. 패션은산업화되면서 침체기를 겪었다. 2년 동안 문 닫고 그림만 그렸던 것 같다. 거의 엑소시즘을 하듯 그렸다. 근데 이제는 공개해도 괜찮겠다 싶었다. 그리고 장소는 한국이 좋을 것같았다. 좀 멀리. 먼 땅에서 새로운 탄생을 준비하듯이 말이다.

    VK 망설임은 없었나.
    CA 고민은 했지만 잘한 일인 것 같다. 팔리는 것도 나쁘지 않겠고.(웃음) 당신도 가끔은 어깨를 짓누르고 있는 유령들을 보내주는 느낌으로 한숨을 돌려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VK 관객 참여를 유도하는 길거리 벽화 작업을 한다. 어떤 건지 좀 알려줄 수 있나.
    CA 먼저 오프닝 퍼포먼스부터 얘기하고 싶다. 이번에 인천공항에 도착하니 모두가 마스크를쓰고 있었다. 뱅! 이건 메시지구나 싶었다. 6개월 전 나는 팝의 바이러스가 되겠다고 공식 선언했기 때문이다. 이걸 아이디어로 써야겠다 생각했다. 오프닝 퍼포먼스는 바이러스, 전염병 아이디어에서 영감을 받은 작품이다. 다섯 명의 여자 모델에게 마스크를 씌우고, 흰옷을 입힐 예정이다. 모두에게 팝(Pop)의 바이러스를 전염시킨다는 취지다. 조심하라. 지금 당신 앞엔 거대한 전파자가 앉아 있다.(웃음) 그리고 전시 기간 내내 관객들이 자유롭게 벽화를 그릴 수 있는 프로그램도 진행될 거다.

    VK 항상 분필을 지니고 다니며 벽에 그림을 그린다고 들었다. 서울에서 남긴 낙서가 있나.
    CA 벌써 한 50개는 그린 거 같다. 카페 알베르 근처, 호텔 부근, 갤러리 주변 등. 다들 구경은 하는데 말리지 않아 아주 좋다. 어차피 분필로 그린 거니까 금세 지워질 거고. 나는 빈 공간을 보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그리고 싶어진다. 두 아들은 싫어하지만 여기 저기 천사를 그리고 다닌다. 아마도 바람이 실어 나를 거다.

    VK 천사와 함께 당신 작품 속엔 유령도 자주 등장한다.
    CA 친구 중에 먼저 세상을 떠난 사람들이 많다. 그들을 모시고 다닌다는 느낌으로 산다. 내가 젊을 때인 70년대엔 로큰롤 라이프스타일이 유행이었다. 굉장히 극단적인 생활 방식을 고집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조심하거나 두려움을 갖지 않는 게 당시 세대의 특징이었다. 런던에서 말콤 맥라렌을 처음 만났을 때 그는 닭 뼈로 티셔츠를 만들고 있었다. 다 먹은 닭의 뼈를 씻어 말려 작업의 재료로 쓴 거다. 당시 걸레로 옷을 만들고 있던 내 입장에선(웃음) 매우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러니까 이런 시대의 인연들인 거다. 우리는 언제나 보이지 않는, 투명한 것들과의 경계선 근처에서 살아간다. 우리가 진정한 의미의 예술인이라면 무당과도 같은 존재일 것이다. 현실 이면의, 혹은 그 이상의 존재들과 소통할 수밖에 없는 운명인 거다. 보이지 않는 세계로의 문은 항상 열려 있다. 그 문을 완전히 통과해버리진 않는 게 중요하다. 가끔 그 문을 넘어버리는 건 아닐까 위협을 느끼는 순간이 있는데, 나는 수호천사의 개념을 믿는다. 당신에게도 수호천사가 둘이 있고, 그 천사들을 잘 모시고 유지하는 건 당신의 역할이다. 우리가 사랑했고, 우리를 사랑하던 사람들은 육체적으로 떠났어도 실제 떠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요즘같이 물질적인 것이 차고 넘쳐나는 시대라면 좀 물질적이지 않은, 추상적인 것에 대해 이야기해볼 필요도 있지 않나.

    VK 칸예 웨스트, 레이디 가가, 건축가 백지원 등 젊은 디자이너들과 꾸준히 콜라보레이션을 하고 있다. 당신이 협업을 하는 기준은 무엇인가.
    CA 내 작업 안에는 무언가 다음 세대에 물려주려는 정신이 담겨 있는 것 같다. 알베르에서 작업하는 동안 열여섯 살 남자 아이가 찾아왔다. 내가 멘토라며 작업을 지켜보기에 깁스 중인 팔에 무지개색 그림을 그려주었다. 마치 어떤 성소와 같은 그런 열정이 내게 있다. 30년 전 나는 키스 해링에게 그림을 부탁해 인비테이션을 만들었고, 신디 셔먼, 로버트 매플소프 등의 사진으로 작업을 했다. 괴짜들을 항상 좋아했던 것 같다.

    VK 당신의 작품은 옷이든 그림이든 일단 혁명적이라는 느낌을 받는다. 하찮은 것을 하찮지 않은 자리에 놓거나 고정된 아름다움 밖의 것들을 과감하게 충돌시키면서 보는 이를 놀라게 한다. 당신에게 아트의 기준은 뭔가.
    CA 나는 누군가 내 작품을 보고 “아, 예쁘다”라고 말하는 데는 관심이 없다. 사람들이 놀랐으면 좋겠다. 레이디 가가와는 8년 전부터 함께 작업을 하고 있는데 첫 콜라보레이션으로 완성한 개구리 코트를 보고 사람들은 경악했다. 레이디 가가와 나는 잡지 <피플>이 ‘1년 중 최악의 룩’으로 우리 옷을 고른 걸 보고 정말 기뻐했다. 예쁜 것도 할 순 있다. 하지만 훨씬 재미없다. 이제는 예술과 패션이 접목되는 게 전혀 새롭지 않지만 70년대 나는 그걸 최초로 했다. 평생을 혁명가, 운동가로 살아온 것 같다. 그리고 이제는 예술의 민주화를 추구한다. 마치 약을 나눠주듯 예술을 공유하는 거다.

    VK 1980년대부터 한국을 찾아 40년 가까이 수십 차례 서울을 방문한 걸로 알고 있다. 당신이 가진 한국, 혹은 서울의 인상은 뭔가.
    CA 한국은 내 일부이기도 하다. 40여 년 동안 내가 변한 것처럼 한국도 함께 변화했다. 그래서 애정을 느낀다. 예전엔 마치 수줍은 여자와 같은, 닫혀 있는 이미지였는데 엄청난 진화 과정을 겪은 지금의 서울은 어마어마한 에너지의 도시다. 어젯밤에 잠들면서 적어도 1년에 두 번은 서울에 와야겠다고 생각했다. 더 이상 파리에서 영감을 얻는 게 좀 어려워졌다. 사회가 점점 폭력적으로 돼가기도 하고. 하지만 서울엔 아직 내가 모르는, 발견할 것도 많고, 과거와 현재, 과거와 미래가 부딪쳐 만들어내는 다양한 결과도 신비롭다. 특히 밤늦게 서울 야경을 도배하는 교회 십자가와 네온사인.(웃음)

    VK 첫 컬렉션을 발표한 지 45년이 됐다. 이렇게 오랜 시간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에너지는 어떻게 얻나.
    CA 나는 열일곱 살에 디자이너 생활을 시작했다. 스물두 살에 미국 <보그> 커버에 처음으로 내 옷이 출연했다. 내가 이렇게 오랫동안 디자이너로 생활할 수 있는 이유는 항상 미래지향적인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도 내 머릿속엔 매우 명확한 창작 과정이 그려진다. 나는 항상 내가 미션을 갖고 태어났다 생각했다. 남들과 다르다 믿었다. 철학자 칼 구스타프 융의 이론 중에 싱크로니시티(Synchronicity)라는 게 있다. 전혀 연결돼 보이지 않는 요소가 어쩌다 한데 모여 딱 맞아떨어지는 타이밍이 있다는 거다. 이런 운명에 때로는 기대면서, 때로는 힘을 내어 살아간다.

      에디터
      정재혁
      포토그래퍼
      CHA HYE KY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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