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의 연인, 김정은

김정은이 돌아왔다. 3년 만이다. 만인의 연인으로 로맨틱 코미디를 수놓던 그녀는 지금 주말연속극의 홈드라마를 종횡무진 중이다.

보디수트는 라펠라(La Perla), 재킷은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슈즈는 쥬세페 자노티(Giuseppe Zanotti), 귀고리는 제이에스티나 레드(J.Estina Red), 반지는 제이에스티나 레드와 미네타니(Minetani), 팔찌는 까르띠에(Cartier).

보디수트는 라펠라(La Perla), 재킷은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슈즈는 쥬세페 자노티(Giuseppe Zanotti), 귀고리는 제이에스티나 레드(J.Estina Red), 반지는 제이에스티나 레드와 미네타니(Minetani), 팔찌는 까르띠에(Cartier).

TV를 켰다 하면 김정은이 나오던 때가 있었다. 아직 그녀가 20대이던 시절 영화 <가문의 영광>의 어리숙한 조폭 가문 막내딸은 극장가를 석권했고, 드라마 <파리의 연인>에서 재벌 2세와의 좌충우돌 로맨스를 그리던 파리 유학생은 TV를 도배했다. 서툰 구석은 많지만 사랑 앞에 솔직한 여자의, 전형적인 신데렐라 스토리였다. 하지만 이후 김정은은 의외의 샛길로 들어섰다. ‘부자 되세요’라 외치며 전국민에게 긍정과 웃음의 에너지를 전파하던 그녀는 어쩐 일인지 다소 시무룩해 보이는 영화에, 때로는 어둠과 절망이 짙게 드리운 극 속으로 들어갔다. <가문의 영광>을 막 끝마치고 그녀가 출연한 영화 <나비>는 80년대 군부독재 시절의 그림자를 바탕으로 하는 로맨스였다. 이후 정지우 감독과 만난 영화 <사랑니>는 학원 강사와 학생 사이의 아슬아슬한 멜로였다. 둘 다 남녀 간의 사랑을 다룬 작품이긴 했지만 그녀의 장기였던 로맨틱 코미디와 비교하면 탁하거나 심심해 보였다. 그리고 김정은은 돌연 핸드볼 선수의 유니폼을 입었다. 역시나 의외의 조합인 문소리와 함께 그녀는 임순례 감독의 영화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에서 아픔과 상처를 가슴에 안고 코트를 누비는 국가 대표 선수를 연기했다. 애교와 눈웃음은 사라졌고, 오기와 절실함이 가득했다. ‘가문의 영광’ 버금가는 성공 뒤에서, 판타지에 가까웠던 파리의 로망 이면에서 김정은은 홀로 꽤 아파했다.

김정은이 드라마 <울랄라 부부> 이후 복귀작으로 고른 건 MBC 주말연속극 <여자를 울려>다. 전직 형사가 사고로 아들을 잃은 뒤 학교 앞에서 밥집을 하며 고군분투하는 이야기를 그린 드라마인데, 김정은은 여기서 여자 배우의 거의 모든 캐릭터를 연기한다. 상대 배우인 송창의와는 알콩달콩 로맨틱 코미디를 주고받고, 시어머니 역할인 김지영 앞에선 붙임성 좋은 며느리를 연기하며, 밥집에 찾아오는 아들 또래 학생들에겐 푸근한 엄마가 된다. “일부러 연예계를 떠나려고 한 건 아니다.(웃음) 그저 타이밍이든 뭐든 잘 맞아떨어지는 작품을 기다리다 보니 이렇게 된 것 같다. <여자를 울려>의 덕인이는 다시금 만날 수 없는 캐릭터라 생각했고, 이걸 하면서 내가 얻는 게 많을 거라 생각했다.” 사실 미니시리즈의 주인공이었던 스타가 오랜만에 돌아와 주말 안방극장에 출연하는 건 그리 화려해 보이진 않는 복귀다. 시청률 숫자와는 별개로 월화, 혹은 수목 미니시리즈가 여전히 스타 배우들의 전형적인 자리라는 인식이 강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미 그 중심에서 스포트라이트를 충분히 누려본 김정은은 외부의 시선 따윈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 “어릴 때였다면 아마도 신경을 썼을 거다. 하지만 주말극이냐, 미니시리즈냐, 그건 사람들 선입견이고, <여자를 울려>가 전형적인 주말극처럼 나오진 않을 거란 생각이 있었다. 원래 무모한 면이 좀 있어서 출처 없는 용기를 낼 때가 있는데, 이번에도 그랬던 것 같다.” 심지어 김정은은 <여자를 울려>에서 매회 한 번 씩 거창한 액션 신도 선보인다. 배우 김정은의 첫 액션 연기다. “스턴트가 있긴 하지만 어느 정도 합이 되는 동작을 만들어야 해서 액션 스쿨에 다녔다. 몸은 힘든데 카타르시스가 있다. 시청자분들도 여자 입장에서 대리 만족을 느끼는 것 같아 기쁘고.” 멜로, 액션, 로맨틱 코미디, 그리고 치정극까지 마구잡이로 뒤섞인 이 드라마에서 김정은은 재주를 넘듯 장르를 오간다. 확실히 그녀는 새로운 에너지를 찾았다.

셔츠는 드리스 반 노튼(Dries Van Noten), 팬츠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슈즈는 쥬세페 자노티(Giuseppe Zanotti).

셔츠는 드리스 반 노튼(Dries Van Noten), 팬츠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슈즈는 쥬세페 자노티(Giuseppe Zanotti).

정지우 감독의 아슬아슬한 로맨스 <사랑니>에는 이런 대사가 등장한다. “그 새벽에 천둥 친 것 알아? 잠자는 사람들은 그걸 몰라.” 그리고 <사랑니>의 여주인공 김정은에게도 대중들이 모르는 비바람이 있었다. 그녀는 <가문의 영광>과 <파리의 연인>의 팡파르 뒤에서 혼자 불안감에 떨었다. “<가문의 영광>이 문제였다. 갑자기 일이 몰리니 다 내 세상이라 생각했다. ‘부자 되세요’라 외치면서, 더 이상 행복할 수 없다 싶었다. 당시 한 인터뷰를 보면 정말 오그라든다. ‘모두가 심은하 선배가 될 순 없잖아요.’ 내가 막 이랬더라.” 그리고 <파리의 연인>으로 잠재돼 있던 불안은 폭발했다. “이미 서커스로 공중 세 바퀴를 돌고 내려왔는데 이젠 또 뭘 하나 싶었다. 집엔 각종 로맨틱 코미디 대본이 쌓여가는데 도대체 이걸 어떻게 감당하나 걱정됐다. 다 써버려 방전된 배터리 같은 기분이 들었고 어디까지 추락할까 겁났다.” 그래서 결국 그녀는 작은 사고를 하나 쳤다. 드라마 <루루 공주>를 촬영하면서 팬카페에 의미심장한 글을 남긴 것이다. 그녀는 드라마 제작 현장에 대한 불만을 표하며 “진심 없이, 이해 없이 연기하는 건 배우로선 정말 죽기보다 끔찍한 일이라는 걸 깨달았습니다”라고 썼다. 대중의 환호성과 카메라 플래시 한복판에 있던 스타 배우가 남긴 글로는 꽤나 돌발이었다. “자고 일어났더니 내가 방송계의 잔 다르크가 돼 있더라.(웃음) 사실 그냥 지쳐서 도망친 거다. 당시 소속사와 문제도 좀 있었고, 자꾸 별로 하고 싶지 않은 작품에 계약을 해야 하는 상황이 이어졌다. 촬영장 가는 게 즐겁지 않았다. 그래서 정말 유서 쓰는 심정으로 글을 썼다. 그리곤 분당 이모네로 도망갔지만.(웃음)” 김정은은 에둘러 당시의 용기를 그저 나약하던 배우의 어리광이라 설명했지만 분명 그녀에겐 브레이크를 밟고 주위를 돌아볼 여유가 필요했을 거다. 모두가 잠든 새벽, 사람들은 잘 모르지만 잠시 천둥소리를 끄고 스스로를 돌아볼 시간 말이다.

“한 바퀴 크게 돌아온 느낌이다.” 김정은은 올해 마흔이다. 데뷔 19년째. 그리고 그녀는 그 시간의 큰 뼘을 한 바퀴 돌아왔다는 말로 자주 표현했다. 영화 <사랑니> <나비>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 그리고 여배우로선 매우 버거운 고문 신 촬영이 연일 계속된 <한반도>로 이어지는 다소 의외의 길. “당시엔 치기 어린 마음으로 찍은 게 많았다. 내가 (로맨틱 코미디 말고) 다른 것도 할 수 있거든? 그런 마음이었다. 근데 그쪽으로 막상 가보니 내가 갖고 있는 것이 소중하다는 걸 깨닫게 되더라.” 그렇게 한동안 김정은은 로맨틱 코미디의 울타리를 벗어나려 애썼다. 당시의 스타덤을 생각하면 괜한 객기였다 할 수 있겠지만 결코 소득 없는 외도는 아니었다. 그녀는 그 울타리 밖에서 대중 스타로서의 김정은이 아닌, 그저 연기를 좋아하는 김정은의 본심을 깨달았고,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왔다. 벌써 10년이 지난 작품이지만 김정은은 <사랑니>를 여전히 앓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게 의외의 영화를 해보지 않았다면 내가 로맨틱 코미디에 소질이 있다는 것, 내 캐릭터가 소중하다는 걸 깨닫지 못했을 거다. 그리고 <사랑니>는 아직도 숨겨진 자식 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날 애틋하게 하는 작품이다. 정지우 감독님 연으로 임순례 감독님의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을 하게 됐고. 그 선택의 인연이 매우 귀하다.”

베스트는 아크네 스튜디오(Acne Studios), 재킷은 앤 드멀미스터(Ann Demeulemeester), 체크 팬츠는 발맹(Balmain), 안에 입은 톱과 슈즈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오른쪽 링은 베켓(Becket), 왼쪽은 미네타니(Minetani), 귀고리는 베켓.

베스트는 아크네 스튜디오(Acne Studios), 재킷은 앤 드멀미스터(Ann Demeulemeester), 체크 팬츠는 발맹(Balmain), 안에 입은 톱과 슈즈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오른쪽 링은 베켓(Becket), 왼쪽은 미네타니(Minetani), 귀고리는 베켓.

5월 현재 7회까지 방영된 <여자를 울려>의 평균 시청률은 18%다. 동 시간대 시청률 1~2위를 다투는 숫자다. 김정은의 시청률 파워는 약효를 잃지 않았다.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건 그녀가 이제 배우로서 사춘기를 졸업하고 다시 씩씩하게 걷기 시작했다는 것일 거다. 그녀는 요즘 <여자를 울려> 촬영 틈틈이 성신여대에서 강사로 학생들에게 연기를 가르치고 있다. “몇 년 쉬면서는 솔직히 이보다 더 바닥으로 내려갈 수 있을까 싶었다. 광고, 드라마를 미친듯이 찍다 챕터를 하나 넘겼는데 다음 장이 백지인, 아무 것도 없는 기분이랄까. 근데 오히려 마음이 편하다. 좀 관망하게 되고, 이전까진 혼자 막 달려갔는데 이젠 사람들 얘기를 듣게 됐다.” 김정은은 서른 문턱에 <사랑니>를 만났다. 그리고 지금 그녀는 마흔 문턱에 다다랐다. 스타의 어둠도, 성공의 외로움도 알아버린 그녀는 이제 새로운 챕터를 넘긴다. 김정은은 지금 다시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