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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벽의 여인

2016.03.17

by VOGUE

    적벽의 여인

    세계적으로 거대한 흥행신드롬을 몰고온오우삼 감독의 필생의 역작 〈적벽대전〉.〈보그〉가 조조와 주유를 오가며 전쟁을‘발화’시키고‘종료’시킨‘적벽의 여인’,강렬한 기품으로 단번에 월드 스타가 된대만 배우 린즈링을 만났다.

    (이미지)실크 드레스는 살바토레 페라가모, 네크리스는 샤틀리트, 팔찌와 반지는 스와로브스키.

    장이모우는 〈붉은 수수밭〉으로 공리의 생명력을 알렸고, 왕자웨이는 〈화양연화〉로 장만옥의 관능을 추출했으며, 이안은 〈와호장룡〉으로 장쯔이의 시대를 예고했다. 그리고 마침내 오우삼은 〈트로이〉와 〈영웅본색〉을 영민하게 혼혈시킨 전쟁서사시 〈적벽대전〉으로 린즈링(LinChiling)을 탄생시켰다. 칼을 쥐어 본 적 없으나 칼바람을 일으키고, 지략을 써본 적 없으나 한 잔의 차로 북서풍을 동남풍으로바꿔버린 〈삼국지〉의 설화적 여인. 한중일 삼국에서 8백억을 출자해 만든 영화 〈적벽대전〉에서 린즈링은 주유(양조위)의 연꽃같은 아내 ‘소교’ 역을 맡았다.

    영화의 스펙터클은 장엄해서 안개에 잠긴 빈 배의 거죽에10만 개의 화살이 꽂히고, 바다 위로 거친 동남풍이 휘몰아치고,수천 대의 함선이 불타오른다. 스파르타의 레오니다스 왕의 전투를 그린 〈삼백〉이후, 나는 그토록 처절한 전투를 본 적이 없다. 군사들은 말의 군단을 거느리고 지층과 쇠붙이와 바람과 물과 불의 안쪽으로 진입하려 했지만, 마침내 해가 뜨자 살아남은자는 몇 되지 않았다. 창과 활과 칼이 순식간에 육체를 시체로만들어버리는 그 아수라장 속에서 갑옷을 입지 않은 이는 단 두사람. 유비의 책사 제갈량 역을 맡은 금성무와 소교 역을 맡은린즈링이었다. 영화 속에서 린즈링의 육체는 난초처럼 길고 여렸지만, 전쟁을 멈추기 위해 홀로 조조의 진영을 찾아갈 때 백만군사들은 그녀 앞에서 홍해처럼 갈라진다.

    린즈링을 촬영하기로 한 날은 아침부터 눈이 내렸다. 쏟아지는 눈을 피해 스타일리스트와 어시스턴트는 지방에서 공수해온 황금빛 투구와 칼, 근사하게 반짝이는 중세 갑옷 등 군사 장비를 나르느라 고속터미널과 스튜디오를 분주하게 오갔다. 투구와 칼과 갑옷… 그녀가 한 번도 입어보지 못한 군사용 전쟁 장비. 육체적으로 린즈링의 중국 유전자는 연약한 피부에 조각한듯한 기다란 콧날, 그리고 서구적인 달걀형 얼굴로 개량됐다.그녀의 목은 아주 길었고, 어깨는 직각으로 절도 있게 떨어졌으며, 허리는 날씬했고, 팔다리와 몸의 곡선은 강인하면서도 가늘었다. 브라보! 그녀를 무장시키기 위한 우리의 준비가 헛되지않을 것 같다. 린즈링의 대만 측 프로모터는 헤어 장식대에 놓인 꿩 털과 칼과 투구를 보고 기겁해서, 중국말로 황급히 국제전화를 걸었다. “안 돼요! 대만 에이전시에서 린즈링은 ‘연약한미녀’로 어필해야 한다는 방침이 떨어졌다구요.”

    나는 단 한 편의 영화로 세계적인 주목을 받게 된 이 30대여배우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린즈링! 난 오우삼 감독을썩 좋아하진 않아요. 그는 내가 좋아하는 섬세한 예술가 타입은아니에요. 〈영웅본색〉이나 〈첩혈쌍웅〉은 낭만적인 홍콩 누아르지만, 그 영화 속에서 무기력하게 남자에게 의지하는 여자 캐릭터는 아주 별로였거든요. 하지만 〈적벽대전〉은 달라 보였어요.당신은 무기를 들지 않았지만, 굉장히 강해 보였어요. 그 끔찍한영웅들의 지옥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아는 현명한 여성이었어요.” 그녀는 약간 놀란 듯했지만, 이내 자신이 무엇을 해야할지를 결정했다. 그리고 화가 난 듯 발을 동동 구르는 대만 매니저와 상관없이 사진 촬영은 놀랄 만큼 순조롭게 진행됐다. 그녀는 아주 강인하고 대담한 8년 차 프로모델이었다. 의상과 조명을 점검하고 드레싱룸에서 예행 연습을 하고 적절한 동작을결정한 후에도 사진작가 앞에 서서 물었다. “어떤포즈를 취할까요?” 길다란 꾸뛰르 드레스를 입은 채 한쪽 어깨에 은색 갑옷 견장을 달고 그녀가 허리를 틀었다. 황금 투구를 썼을 땐 ‘잔다르크’ 같은 용맹한 표정을 지었다. 칼은 그녀의 체구에 비해 길이가 작아 포기해야 했다. 사진 촬영 후 그녀는 모니터를 체크하며 “괜찮나요? 이 모델, 여기선 괜찮아 보이는데 저쪽사진에선 포즈가 어색하군요”라고 제3자의 입장에서 말해 우리를 웃겼다.

    배우에게도 운명이 있는 걸까? 장이모우가 공리를, 왕자웨이가 장만옥을, 이안이 장쯔이를 서구 영화계에 자랑스럽게 내보였듯, 오우삼은 린즈링을 발탁했다. 그녀는 배우가 될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토론토 대학에서 미술사를 공부하고 대만으로 귀국해서 학교와 예술 기금에서 일했다. 우연히모델 일을 시작했을 때도 그녀는 세계적인 톱 모델로 커리어를 이어가지 못했다. “모델 치고는 키도 작은 편이었고 이웃집 언니 같은 친근한 이미지였죠. 파리에서 랑방 쇼에 한번 선 걸 빼고는 모델로 계속 가지 못했어요.” 대신그녀는 패션 쇼 백스테이지를 취재하는 리포터로 전직했다. 칼 라거펠트, 존갈리아노 같은 디자이너에게 마이크를 들이대며 “이번 쇼의 영감은 어디서받으셨나요?” 같은 질문을 퍼붓는. 2008년 가을, 〈적벽대전1; 거대한 전쟁의시작〉이 공개된 후, 그녀는 아시아 게스트 자격으로 파리 샤넬 쇼에 초대됐다. 칼 라거펠트는 그녀의 손을 잡고 카메라맨과 프레스 인파를 헤쳐나갔다.“칼, 너무 많은 사람들이 우리를 쳐다보고 있어요”라고 그녀가 당황해서 외치자 칼이 낄낄거리며 웃었다.“당연하지. 린즈링! 모르겠어요? 당신은 유명인사라구!”

    나는 이 여주인공을 순수한 종족이라 부르고 싶다. 그녀는 오우삼, 양조위, 금성무, 장첸 등과 전 세계 프로모션 투어에 참석하고 있지만, 사람들이 자신에게 보여주는 엄청난 반응에 대해 아직도 의구심을 갖고 있다. 하지만〈적벽대전〉의 소교 역은 아직까지도 논란이 많다. 〈적벽대전〉은 오우삼이〈영웅본색〉이후 18년간 꿈 꾸던 영웅적인 야심작이며, 할리우드에서 〈페이스 오프〉등으로 성공한 후 다시 중국으로 돌아와 만든 회심작이기도 하다.그는 서구와 아시아를 동시에 이해시키기 위해 ‘소교’ 역을 〈트로이〉의 헬렌처럼 각색했다. ‘오리엔탈 트로이’로 서구에 소개된 〈적벽대전〉에서 조조는 주유의 아름다운 아내 ‘소교’를 탐하기 위해 지옥 같은 전쟁을 일으킨다. 나는 그녀에게 오우삼 감독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감독님이 그러셨어요. 예전에 내 영화는 폭력 영화였다. 이제는 평화를 전달해야 한다는 사명감이 생겼다, 그 역할을 당신이 해주었으면 좋겠다,라구요.” 오우삼 감독은평화주의자로 린즈링을 선택했고, 결과적으로 그 선택은 옳았다. 전쟁을 멈추기 위해 임신한 그녀가 조조의 적진으로 들어갈 때, 재난에 처한 인간을 위해 그 재난의 한복판으로 달려드는 여성은 어떤 영웅보다 고독하고 용맹해보였다. 그의 남편이자 또 한 명의 전쟁 영웅인 주유는 마음으로 외친다. ‘살려서 돌아오라, 그리고 살아서 돌아오라.’ 인간만이 인간을 구할 수 있고, 인간만이 어리석게도 모든 것이 파괴된 후에야 깨달을 수 있다는 그 단순 명료한 무력의 진실이 적벽의 바다에 남았다.

    “감독님은 소교의 설정이 화려한 절세가인이지만, 정말 중요한 건 생활속에서 헤쳐 나가는 모습이라고 했어요. 왜 싸워야 하는지 생각할 수 있는 결정적인 쉼표가 되길 바랐죠.” 린즈링은 오우삼의 이전 영화들에 대해서도 애정을 갖고 있다. “〈페이스오프〉는 사람의 익명성을 내면적으로 잘 보여줬죠.〈첩혈쌍웅〉이나 〈영웅본색〉은 남자의 의리를 다뤘지만, 영화 속에서 총격전이 있을 때 어린아이한테 헤드폰을 씌워주는 장면이 있어요.” 모든 영웅적인야망에도 불구하고 오우삼은 항상 어떻게 해야 영화가 흥행에 성공하는지를잘 알고 있다. 거대한 스케일과 힘든 제작 과정 중에도 배우들은 우정과 단결을 중시하는 오우삼에게서 안정감을 느꼈다. 그리고 그녀는 그 처절한 전쟁이 벌어지는 영화 현장이 얼마나 천진하고 아름다웠는지를 회고했다. “영화는 봄부터 겨울까지 찍었어요. 여름엔 러닝 위에 갑옷을 입고 겨울엔 갑옷 안 에 누가 누가 더 많은 내복을 입나 내기를 하며 고통을 견뎠죠. 전 몸 안에 사탕을 숨겨서 나눠주곤 했어요.” 이야기를 나눌수록 나는 린즈링이 외유내강형 대만 여자라는 게 몸으로 느껴졌다. 나는 그녀에게 당신이 가장 사랑하는‘중국의 역사 속 여성’ 이야기를 듣고 싶다고 청했다. “아름답기 때문에 이야기가 되는 게 아니라, 이야기 속에서 아름다운 여성이었으면 좋겠어요. 중국의 전설적인 여황제인 ‘측천무후’나 수나라 때 아버지 대신 남장을 하고 군대에 가서 공을 세운 여장부 ‘뮬란’ 같은 배역을 하고 싶어요.” 나는 그녀의 대답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하지만 며칠 후 중국 영화 〈뮬란〉의 주인공으로 〈적벽대전〉에서 남장으로 출연했던 조미가 캐스팅됐다).

    나는 그녀의 조국인 대만을 이해해 보려고 애썼다. 영화 〈비정성시〉를만든 후샤오시엔의 나라, 〈애정만세〉를 만든 차이밍량의 나라, 〈고령가 소년살인 사건〉을 만든 에드워드 양의 나라. 거대한 중국 대륙에도, 서구화된 홍콩에도 속하지 않은 대만 뉴웨이브 영화 속에서 마치 이민자들이 모인 서울의 위성도시처럼 스산하고 쓸쓸했던 대만. 엄밀히 따져보면 위, 촉, 오로 삼분할 되었던 〈삼국지〉라는 전쟁의 중국사는 마오쩌둥의 중국과 영국 식민지의 홍콩과 장개석의 대만으로 삼분할 되었던, 중국의 아픈 근현대사로 또 한번 재현되었다. “서구인들을 만나면 꼭 〈비정성시〉의 대만을 묻고는 해요. 하지만 지금은 달라졌어요. 중국과 홍콩과 대만은 서로 통해 있고 같이 움직이면서 다양성과 포용력이 커지고 있어요.” 린즈링의 목소리가 한층 높아졌다.“무엇보다 우리에겐 더 나아지고 싶은 열정이 있죠.” 그러고는 마지막으로 신중하게 덧붙였다. “전쟁이 끝난 후, 주유가 이런 말을 해요. “우리 모두 졌다!”전 그 말이 가슴에 와닿았어요. 전쟁은 그 자체로 절대로 일어나서는 안 되며, 작은 희생을 해서라도 평화를 유지해야 하는 거죠.” v

    (위이미지)드레스는 김동순 울티모, 글러브는 디올, 슈즈는 스티브 매든.

      에디터
      김지수
      포토그래퍼
      강혜원
      스탭
      메이크업/이지영, 헤어/한지선, 스타일리스트/박명선
      브랜드
      살바토레 페라가모, 샤틀리트, 스와로브스키, 디올, 스티븐 매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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