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터테인먼트

다니엘 헤니, 슈퍼 히어로!

2016.03.17

by VOGUE

    다니엘 헤니, 슈퍼 히어로!

    다니엘 헤니가 세계적인 블록버스터 <엑스맨 탄생;울버린>으로 돌아왔다. 드라마 <내 이름은 김삼순>으로 ‘한국 배우’타이틀을 단 지 4년만이다. 우리 시대의 돌연변이, 진정한 슈퍼히어로 다니엘 헤니가 쓴 2년간의 할리우드 촬영 일지를 <보그>가 독점 공개한다.

    그레이 컬러의 베스트는 루이 비통(Louis Vuitton), 블랙 팬츠는 질 샌더(Jil Sander).

    2005년 드라마 〈내 이름은 김삼순〉에서 다니엘 헤니의 촬영 첫 대사는 “Hello~.” 압구정동 거리에서 려원에게 건네는 ‘헬로우’ , 단 세 음절 발음하기 위해 그는 카메라 앞에서 몇 시간을 떨었다. 그리고 그가 ‘엄마의 나라’ 한국에 던진 수줍은 첫인사 “헬로우”는 한국 여자들을 매료시켰다. 헤니 신드롬이 일었고, 그는 순식간에 스타가 되어 한국에서 몇 편의 드라마와 영화의 로맨틱한 타이틀 롤을 맡았다. 그가 한국에서 찍은 마지막 영화는 입양아 애런 베이츠의 이야기를 다룬 실화 〈마이 파더〉. 친부모를찾기 위해 주한미군으로 한국에 왔지만, 22년 만에 만난 아버지가 교도소의사형수였다는, 이 가슴 아픈 스토리에서 다니엘은 절도 있으면서도 호소력강한 정극 연기를 보여주었다. 첫 시사회가 열리던 날, 입양아였던 애런 베이츠는 입양아였던 엄마를 둔 다니엘을 끌어안고 눈물 젖은 “땡큐”를 보냈다.그리고 다니엘은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한 자신의 엄마와 함께 부산의 고아원 자리를 찾아가서 그곳의 돌멩이 한 개를 주워왔다. 어느날 인간적인 돌연변이 배역을 찾던 할리우드의 〈엑스멘〉 제작진은 우연히 〈마이 파더〉를 본후 만장일치로 외쳤다. “This is the guy!!” 미팅이나 오디션은 없었다. LA폭스 영화사에서 계약서에 오케이 사인을 한 순간, 할리우드의 캐스팅 디렉터는 다니엘에게 물었다. “인생을 바꿀 준비는 되어 있겠지?”

    블랙 컬러의 베스트는 서상영(Suh Sang Young), 슬림한 팬츠는 질 샌더(Jil Sander), 레이스업 앵클 부츠는 앤 드멀미스터(Ann Demeulemeester).

    2008.01.30 개빈 후드를 만나다 감독과 미팅이 있었다. 개빈 후드 감독은 6월에 있을 배우 파업(actor’s strike)에 대비해 최대한 빨리 찍기 위해 마지막 단계에 확정해야 할 일이 많아졌다고 했다. 지금 관리해야 할 사람들도 3백 명이 넘어 균형 있게 움직이려고 노력 중이라고. 어제 휴 잭맨(Hugh Jackman)과 리브 슈라이버(Liev Schreiber)가 도착해 그는 더 바빠졌다.

    개빈 후드 감독은 〈엑스멘〉에서 각 배우로부터 원하는 게 확실했다. 내가 소화할 에이전트 제로 역할에 대한 설명도 자신감 있고 세심했다. 돌연변이 파워(Mutant Power)를 가지고는 있지만 가장 중점을 두어야 할 부분은 인간으로서의 에이전트 제로와 돌연변이로서의 에이전트 제로, 그로 인한 내면의 갈등이라고. 너라면 잘 표현해줄 거라 믿는다며 부담도 줬다. 영화에서주인공인 로건(휴 잭맨)과 에이전트 제로의 히스토리가 중요하다는 것. 그들이 왜 서로를 증오하게 되었는지 설명을 들었다. 에이전트 제로는 군인 스나이퍼 출신이며 정돈된 헤어 스타일, 완벽주의적인 태도, 차갑고 오만하며 실수를 용납할 수 없는 인물이다. 그런데 에이전트는 콩고 내전에 투입되었을때 실수로 민간인을 살해하게 되고, 그 장면을 목격한 로건과 틀어지게 된다. 실수를 인정할 수 없는 에이전트 제로 입장에서는 본인보다 우월하고 선한 모습을 보이는 로건이 싫을 수밖에. 〈본 슈프리머시〉의 맷 데이먼이 연상된다. 내가 소화할 배역에 깊이가 생긴 것 같다. 특히 클라이맥스 장면도 나무에 깔리는 것에서 헬리콥터 안으로 신이 바뀌었는데, 그 과정에서 내 감정 라인을 잘 살리고 싶어 했다.

    내일부터 본격적으로 배우들의 출연 장면이 들어간다. 감독은 작가 파업때문에 어떤 대사도 추가로 작성할 수는 없지만(참 대단하다. 이미 정해져 있는 시스템을 어기지 않으려고 하는 노력이) 촬영 전과 촬영 때 직접적인 디렉팅으로 잘 이끌어 나갈 거라고 약속했다. 이번 주말에 감독과 더 많은 얘기를 나누게 될 것이다. 영화를 찍으면서 캐스팅할 때 만나보지도 않고 배역을 확신한 케이스는 이번이 처음이라고 한다. 나를 향한 믿음이 강하게 느껴졌다.

    2008.02.01 내 이름으로 된 트레일러를 갖다 오전 9시에 숙소에서 1시간30분쯤 떨어진 파라다이스 로케이션(Paradise Location)으로 출발했다. 창밖으로 펼쳐진 멋진 경치에 눈을 뗄 수 없다. 날씨는 구름이 많이 끼고 비가보슬보슬 내리고 있다. 촬영장에 도착하기 10분 전부터 도로엔 ‘필름 크루(Film Crew)’란 팻말과 속도를 줄이라는 사인이 보였다. 촬영장에는 가드가차량들을 단속하고 있었고, 들어가자마자 한 곳에 모여 있는 메이크업 트레일러가 보였다. 트레일러마다 이름이 붙어 있다. Producer/ Director/Agent Zero/AD… 나는 내 이름이 쓰여진 트레일러로 자리를 옮겨 뒷머리와 옆머리를 조금 더 다듬었다. 프로듀서가 어제는 날씨가 무척이나 좋아서 휴 잭맨과 좋은 장면들을 건질 수 있었다고 전했다. 점심을 먹기 위해 모든 스태프들이 모여 있는 농구장만한 텐트로 갔다. 여기선 배우가 먼저 먹도록 양보해준다던가 그런 게 없다. 랄프 윈터(Ralph Winter)란 폭스 소속 라인 프로듀서와 나란히 앉아 점심을 먹으며 얘기를 나눴는데, 그가 피터 맥도날드 감독(2nd Unit 감독으로 〈베트맨〉과 〈람보〉 등을 만들었다)을 소개시켜줬다. 식사를 하고 어제 찍은 부분과 앞으로 내가 촬영할 부분에 대해 컴퓨터로 만든 시놉을 보여주겠다고 해서 숲속 촬영장으로 자릴 옮겼다. 액션 신이다 보니컴퓨터로 미리 시놉을 정리해놓는데, 한 편의 만화영화를 보듯 신들이 컴퓨터 모니터에 나타났다. 에이전트 제로와 주인공 로건과의 추격 신과 결투, 헬리콥터 신이 더욱 흥미롭게 느껴졌다. 지금까지는 작가 파업 때문에 스크립트도 없이 진행되고 있지만 촬영 전 대화를 통해 잘 풀어나갈 계획이란다. 감독이 자신의 생각이나 대사를 곧바로 글로 옮겨 쓸 수 없다는 사실, 그리고 그 규칙을 철저히 따른다는 사실이 놀랍게 느껴졌다. 비가 생각보다 많이 내려서 오늘 촬영은 중단되었다.

    테이핑 장식의 블랙 셔츠는 레주렉션(Resurrection by Ju Young), 블랙 팬츠는 앤 드멀미스터(Ann Demeulemeester), 슈즈는 디올 옴므(Dior Homme)

    2008.02.02 휴 잭맨과의 조우 드디어 휴 잭맨을 만났다. 감독과 PD와 함께 자리한 근사한 디너도 아니었고, 대본 리딩이 있는 폭스 스튜디오도 아니었다. 우리가 만난 장소는 촬영장의 메이크업 트레일러 안. 헤어 담당이 내 머리를 다듬고 있는데 휴 잭맨이 불쑥 걸어 들어왔다. 간단히 악수를 나누고 각자 의자에 앉아 헤어 스타일리스트에게 머리를 맡겼다. 그는 내게 이번 영화의 출연 결정을 내려줘서 고맙다고 했다. 2002년도에 한국에 왔었던 얘기도 들려줬다. 월드컵 때 한국대표팀 유니폼을 입고 한국팀을 응원했다고. 아시아에서 한국이 가장 기억에 남고 멋진 나라라는데 동감했다. 한국 영화시장의 급성장도 잘 알고 있고, 지금은 할리우드가 일본보다 한국을 더 큰 마켓으로 보고 있다고 말했다. 할리우드도 좋지만, 본국으로 돌아가 좋은 작품을하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라는 격려까지. 그리고 2002년도에 홍보하러 왔던〈X-MEN〉이 일본의 박스오피스보다 몇 배나 더 큰 성과를 거둬서 놀랐다는 얘기, 작년 12월 20일 무렵까지 호주에서 니콜 키드먼과 〈오스트레일리아〉촬영을 마치고 한 달간 휴식을 취한 후 촬영에 합류했는데, 벌써부터 한국 방문이 기다려진다는 얘기. 이번에 가게 되면 아예 가족들과 함께 휴가를 내서 넉넉히 머물고 싶다고 해 나는 그때 가이드가 되어주겠다고 약속했다. 오후엔 SUV 운전 연습과 총기 다루는 법을 배운 후 숙소로 향했다. 저녁 땐 배우들만 조촐하게 저녁을 먹었다. 나, 휴 잭맨, 리브 슈라이버, 린 콜린스.

    2008.02.03 배우들과의 프라이빗 디너 낮에 퀸스타운 시내에서 한 한국팬이 2층 발코니에 있는 나에게 테디 베어 인형을 던지며 사인을 해달라고했다. 나는 사인을 해서 다시 팬에게 던졌는데, 이 광경을 본 스태프들이 한국 팬들은 정말 열성적이라며 신기해했다. 저녁엔 배우들과 감독, 프로듀서들이 함께했다. 한국에선 배우와 스태프들이 함께할 수 있는 자리가 자주 있는 편인데 여기선 좀 특별한 자리 같다. 주요 배우 4명(나도 포함됐다!)과 감독과 그의 와이프, 카메라감독, 수석 조감독과 라인 프로듀서 등 20여 명이자리했다. 감독이 모두에게 감사의 멘트를 한 후, 이번 작품에서 프로듀서까지 맡은 휴 잭맨이 멘트를 했는데, 그가 내 이름을 다시 언급하며 고맙다고 말해 쑥스러웠다. 〈마이 파더〉라는 영화에 대한 칭찬이 이어졌다. 에이전트 제로에 적합한 배우를 찾고 있을 때 내가 연기한 〈마이 파더〉의 트레일러를 감독과 휴 잭맨, 프로듀서들이 보게 되었고, 한목소리로 “This is the guy!!”라고 소리쳤다고. 내가 오케이 했다는 소식을 듣고 모두들 너무 기뻤다고 했다.지금 이 자리에 있기까지 한국에서의 작품 하나하나가 큰 도움이 된 셈이다.첫 할리우드 작품까지 연결시켜줬다고 생각하니 감격스러울 뿐이다. 언젠간나도 휴 잭맨처럼 첫 주자로 와인 잔을 들며 영화에 함께 참여하게 되는 배우들과 스태프들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전할 날이 왔으면 좋겠다.

    2008.02.04 점점 자신감이 붙다 내 촬영 분량은 없었지만 헬기 폭파 준비과정도 경험할 겸 촬영장으로 향했다. 많은 사람들이 분주하게 일하고 있었다. 큰 헬기모형에 케이블을 연결해 폭발물을 싣고, 카메라 7대가 셋업 되고,4시간이 넘도록 준비를 한 후에야 촬영에 들어갔다. 찍을 수 있는 횟수가 한번밖에 없기 때문에 더욱 정교하게 진행됐다. 헬기가 100km/h 의 속도로 공중에서 떨어졌고, 세 번의 큰 폭발음과 함께 땅에 곤두박질 치면서 두 동강이 났다. 모두가 박수를 치며 환호성을 질렀다. 무사히 성공적으로 촬영이 끝났다. 폭스 스튜디오의 이그제큐티브 프로듀서 제프도 처음으로 1백20만 달러짜리 대작을 하게 돼서 흥분된다고 말했다. 폭발 장면이 끝나고 자연스럽게휴 잭맨과 감독과 나는 헬기 주변에 모여서 내일 있을 장면을 1시간이 넘도록재연하고 대사도 만들며 의논했다. 할리우드 실력파와 함께하고 있는 그 순간들이 꿈만 같았다. 점점 자신감도 생겼다. 이 작품이 나의 두 번째 할리우드 작품의 초석이 되기를.

    가죽 점퍼와 선글라스는 디올 옴므(Dior Homme), 블랙 팬츠는 프라다(Prada)

    2008.02.05 드디어 첫 촬영! 드디어 나의 첫 촬영이 있었다. 이번 영화엔 수많은 배우들이 출연한다. 나는 휴 잭맨, 리브 슈라이버, 대니 휴스턴, 린 콜린스 다음으로 캐스팅되었다. 그래서 항상 Call Sheet에 보면 #5옆에 이름이 적혀 있다. 아침 일찍부터 움직여야 하기에 어젯밤에 푹 자려고 따뜻한 우유까지 먹었는데 별 도움이 안 됐다. 새벽에 잠이 들어 3시간밖에 못 잤다. 촬영장에 도착해서 바로 의상을 갈아입고, 아침식사를 간단히 한 후, 특수 분장에 들어갔다. 클라이막스 장면을 찍기에 얼굴에 상처와 피 분장이 필요했다. 공중에서 떨어져 파괴된 헬기 안에서 부상당한 에이전트 제로. 울버린은 자기를 죽이기 위해 악착같이 쫓아다니는 에이전트 제로가 있는 헬기로 터벅터벅 다가온다. 제로의 헤드폰에서는 본부에서 “로건(울버린)은 어디 있나?”란 목소리가 들려오고. 제로는 “난 부상당했다. 도움 요청한다”는 말을 반복한다. 그러는 사이에 울버린은 제로에게 다가와 헤드폰을 빼앗아 들고 분노한다. 사랑하는 여자도 죽고, 자신을 죽이려는 제로와 빅터 등에게도 질린 울버린은 “로건… 등 돌리지마. 우린 팀이었어”라고 외치는 제로를 뒤로하고 날카로운 손등 병기로 땅을 긁으며 불꽃을 튀긴다.

    먼저 나의 클로즈업 샷(심하게 부상 당한 제로의 고통, 울버린에 대한 감정,지금까지 느껴보지 못한 두려움)을 먼저 찍었다. 배우 위주로 찍는 감독이고예산도 커서 필름을 아끼지 않고 마구 찍어댔다. 배우의 느낌을 살려주기 위해 중간에 컷을 하지 않고 계속 필름을 돌리며 지시를 했다. “방금 느낌도 아주 좋았어. 그런데 이번엔 약간 불쌍한 모습이 아닌, 분노에 찬 모습에 소리를 더 질러보자구!”라며 배우를 격려하며 잘 이끌어주는 개빈 후드.

    폭스 관계자들도 나와 있었지만 감독은 자신의 의지대로 장면을 만들어가고 있었다. 그 누구도 참견하지 않았다(영화사, 투자자들이 촬영장에 나와감독이나 PD에게 불필요한 압박을 하기도 하는 한국과는 달랐다). 모니터 뒤에는 폭스 PD들과 폭스 프로덕션의 임원들이 나와 내 연기를 주의 깊게 지켜보고 있었다. 그들과 감독의 입에서 “Excellent Danny!!”라는 말이 연속터져 나와 뿌듯했다. 자신감이 붙기 시작했다.

    나도 연기에 몰입하기 위해 준비하는 과정이 있지만, 휴 잭맨도 본인이더 화가 나도록 카메라가 돌아가기 직전까지 스스로에게 욕을 하며 소리를 질러댔다. ‘컷’ 소리도 못 듣고 필름이 끊기기 직전 본인이 만족할 때 촬영이 끝났다. 이번 영화의 등급은 PG-13이라 ‘Fuck’이란 욕이 한 번 이상 나오면 안 되는데, 휴는 ‘Fuck’을 수백 번은 더 내뱉은 것 같다. 촬영이 끝나고 감독이 PD와 폭스 제작자에게 저 욕들은 다 쓸 게 아니라 배우가 느낌을 살리는데 도움을 주려고 한 것뿐이라고 해서 모두가 웃었다. 모니터링 하러 오면서도 휴는 장면에 몰입되어 흥분한 모습을 추스리지 못했다. 문득 〈마이 파더〉에서 나도 그랬던 생각이 났다.

    2008.02.06 단백질 브라더스 처음 휴 잭맨을 만났을 때 건장한 키와 몸에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나보다 큰 배우를 만난다는 건 한국에서는 흔한 일이 아니었는데. 나도 몸을 만들고 싶은데, 살을 찌우고 싶어도 체질상 어렵다고 털어놨더니 휴가 개인 영양관리사에게 앞으로 내 것도 자기 것과 같은 식단으로 짜서 전달해 주라고 했다. 다음날 3시간마다 촬영장에 도착하는 두접시의 음식들. 하나는 휴 잭맨 것, 또 하나는 내 것. 3시간마다 40g의 단백질 가죽과 중간에 이어지는 단백질 음료. 나란히 앉아서 맛은 없지만 역할에 충실하기 위해 단백질 덩어리를 함께 먹고 있자니 그와 진짜 브라더가 된 느낌이다.

    리넨 소재의 점프 수트와 블랙 앵클 부츠는 앤 드멀미스터(Ann Demeulemeester)

    2008. 02.09 유령마을 어제 던딘이란 곳으로 배우들과 헬리콥터로 이동했다. 유령마을처럼 조용한 곳. 작은 도시는 아닌데 미국의 시골 구석 같은 느낌이다. 이곳엔 유명한 대학교가 있어서 학생들이 있을 때는 북적거린단다. 월요일에 있을 촬영을 대비해 리허설과 피팅, 카메라 테스팅, 총기 훈련등이 있었다. 이곳 날씨는 꽤 쌀쌀하다. 역시 유령 마을답다.

    2008.02.11 한국 가는 날 비가 부슬부슬 내렸다. 촬영이 혹시 지연되거나 최소될까 내심 걱정했다. 감독의 리드로, 그리고 하늘의 도움으로 비가 그치고 비교적 빨리 신들을 찍어나갔다. 나의 슈퍼 파워, 총을 빨리 뽑고 쏘는 장면들을 연출했고, 아주 멋지게 나올 것 같은 예감이 든다. 새벽에 한국으로 출발해야 해서 저녁에 호텔로 돌아와 짐을 쌌다.

    2008.02.27 PG 13등급의 비애 어제에 이어 이틀째 밤샘 촬영이다. 여전히 날씨가 흐린데 다행히 촬영 시작할 즈음에는 오던 비도 그쳤다. 음산한 분위기가 촬영 무드와 잘 어울리는 것 같다. 오늘은 중요한 콩고 신이다. 콩고의 마을 주민들이 도망가려 할 때 돌연변이 팀원들은 도망치는 사람들을 가만두지 않는다. 울버린은 팀에서 이탈하게 되고 나머지 돌연변이들은 그런울버린을 증오하게 된다. 에이전트 제로도 도망가는 여인을 쏘려다가 울버린이 태클을 걸어서 넘어진다. 휴 잭맨이 나를 덮치는 장면. 넘어지면서 총을 쏘는 장면이 근사해야 되는데. PG13등급이라는 꼬리표 때문에 이 영화에선 불가능한 일이 많다. 욕도 안 되고, 내 주무기인 총을 쏘는 것도 많이 제한을받는다. 〈캐리비언의 해적〉에서도 총 쏘고 사람들이 죽는 장면이 나오지만,그 영화는 판타지라서 허용된단다. 피도 너무 붉거나 진한 것은 보여줄 수 없다. 솔직히 걱정이 됐다. 열심히 총 쏘는 모습을 훈련했는데 총도 못 쏘게 되면 어쩌나. 제로의 주무기는 총인데 그럼 뭘 해야 하지? 혹시 신들이 많이 잘려 나가는 건 아닌지.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총을 쏴서 사람을 죽이는장면이 많이 나오면 악역 이미지만 세질 텐데 자연스럽게 절제가 되니 다행이라고. 감독이 지금 촬영장에서는 찍고 싶은 장면들을 못 찍더라도 CG로 완성할 거라고 안심시켜줬다. 지금 시간은 새벽 4시. 밖에는 귀뚜라미 소리가요란하고 멀리서는 박쥐들이 퍼드득거렸다.

    2008.02.28 할리우드 노동조합 어제 밤샘 촬영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오니 아침 7시였다. 많이 피곤했는지 오후 5시까지 잤다. 프로덕션 노동조합 법규에는 ‘Turn Around’란 조항이 있다. 하루 일을 끝마치고 적어도 12시간은일하지 않도록 보장해줘야 한다는 것. 어제 새벽 6시 30분에 사인 아웃을 했다면 당일 저녁 6시 30분까지는 일을 시작하면 안 된다. 법규에 따르면 해외에서 촬영하게 될 경우에는 도착하는 날은 무조건 일할 수 없다. 내가 한국에서의 일정상 21일에 시드니에 도착했는데, 그렇다면 21일은 원래 일하면 안되는 날. 그러나 불행하게도 21일에 트레이닝이 있었기에 내가 촬영장에 놀러 와서 내 의지대로 트레이닝에 참여하도록 각본(!)을 짰다. 선진 시스템이좋긴 하지만, 무조건 밀어붙이는 한국 시스템이 더 편리할 때도 있다.

    2008.03.01 카메라가 꽉찬 날 오늘은 비가 많이 왔다. 어제 찍은 분량의 마지막 장면으로 시작했다. 울버린이 더 이상 팀에 합류하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떠나는 신. 카메라에 팀 전원의 모습이 화면에 꽉 차게 잡혔는데 꽤 멋있었다. 위에서는 번개가 치고 모두들 떠나는 울버린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2008.03.02 파파라치가 떴다 오늘 촬영하기 전에 스태프들이 배우들에게파파라치가 떴다고 알려줬다. 우와! 이런 시골까지도 파파라치가 찾아오는구나. 7시에 세트에 도착해 아침을 먹고 밤을 새워 촬영했다. 아프리카 콩고신이기 때문에 흑인 엑스트라 30명 정도가 모여 있었다. 여기서는 배우를 먼저 챙겨주는 분위기는 아니지만, 촬영 중일 때는 철저하게 배우 위주다. 서로의 시선이 필요할 때 한국에서는 주로 조감독의 주먹이 시선 처리의 초점이되는데, 여기선 휴 잭맨이라도 상대 배우의 시선을 위해 카메라 옆에 서 있어줘야 한다. 반대로 컷 소리가 나면 각자의 트레일러에서 쉴 수 있다. 나도 트레일러에서 한국 팬이 보내준 만화로 된 한국 역사책을 읽고 있다. 외국인들에게 한국의 역사나 관습, 철학을 설명해주고 __??竇”C孑?楯f싶으니까.

    2008.03.03 나는 밤샘 도사 이곳 스태프들과 배우들은 밤 촬영이 죽을 맛인가 보다. 극한까지 몰아붙였을 때의 육체적인 피곤함은 경험해보지 못한 듯. 그러나 나는 이미 한국에서 그걸 경험했기 때문에 거뜬하다. 〈봄의 왈츠〉〈미스터 로빈 꼬시기〉〈마이 파더〉 등의 작품을 하면서 밤을 지새우는 데는 도사가 됐다. 3일 동안 한숨도 못 잤는데도 에너지가 넘치니 말이다.

    블랙 컬러의 베스트는 서상영(Suh Sang Young), 블랙 팬츠와 레이스업 앵클 부츠는 앤 드멀미스터(Ann Demeulemeester).

    2008.03.05 뉴질랜드 액션 뉴질랜드에 도착했다. 날씨가 많이 추워졌다. 산에는 눈으로 덮인 곳도 있다. 시드니에서의 촬영은 잘 마쳤다. 나머지 배우들을 뒤로한 채 나만 뉴질랜드로 와서 2nd unit와 액션 신을 찍는다.

    2009.01.16 6개월 만의 추가 촬영 〈엑스멘〉의 최종본 추가 촬영에 들어갔다. 마지막 촬영 이후 6개월 만에 휴 잭맨과 배우들을 만나니 감회가 새로웠다. 트레일러로 찾아온 PD가 에이전트 제로의 슈퍼파워를 보여주는 추가 촬영 장면을 설명해줬다. 에이전트 제로는 미션을 받고 전쟁터에 미리 투입되어 Team X를 기다리고 있는 상대편을 처리한다. 높은 담을 단번에 뛰어올라 공중에서 쌍권총을 뽑아 하늘 위로 던져 발포되는 총알, 그리고 권총이 떠 있을 때 발목에서 다른 총을 꺼내 상대편 수십 명을 처리하는 장면. 예상치도 못한 추가촬영에 내 배역도 한몫을 차지한다는 것과 이 영화 자체에 대한 완성도가 높아지고 있다는 사실에 더욱 기대가 된다.

    2009.01.20 아크로바틱 권총액션 내 추가촬영분을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 놓은 영상을 확인했다. 공중으로 아크로바틱하게 날아올라 총알들을 교묘하게 피하면서 쌍권총을 지그재그로 발사한다. 우와! 멋있다. 폭스가 계속 스토리 변화를 주고 있어 울버린의 엔딩 신도 바뀔 거라고 한다.

    2009.01.24 배려 깊은 할리우드 배우들 오늘은 배우들 거의 모두가 들어가는 메가 신 촬영이 있다. 시나리오에 없던 부분인데 각 캐릭터를 소개하는장면이 필요하다는 폭스의 요청으로 팀원 전체가 비행기에 탑승해 대사를주고받게 된다. 나와 휴 잭맨의 앙숙 관계를 암시하는 대화도 찍었다. 풀샷을 찍고 클로즈업으로 한 명 한 명 찍고 나니 밤 11시가 됐다. 클로즈업을 첫번째로 찍은 라이언 레이놀즈(스칼렛 요한슨 남편)가 처음에 찍은 부분이 부자연스러웠다고 다시 한 컷 가고 싶다고 하자, 휴 잭맨을 비롯해, 연장자인 대니 휴스턴까지 모두 흔쾌히 남아서 다시 찍겠다고 했다. 서로를 배려하는 모습이 너무 감동적이었다.

    독특한 커팅이 돋보이는 블랙 재킷은 레주렉션(Resurrection by Ju Young), 팬츠는 프라다(Prada), 블랙 컬러의 로퍼는 디올 옴므(Dior Homme).

    2009.01.25 HURRY HURRY 할리우드에 이런 일이! 촬영 대기를 하고 있어도 연락이 없길래 세트장에 갔더니스턴트맨들은 와이어에 매달려 있고, 감독과 PD는 의견을 조율하지 못해 난처해하고 있다. 촬영 막바지에 치달으면서 예산도 압박이 오고 PD들은 한국에서처럼 “Hurry Hurry”만 외친다.

    2009.01.28 한국팬들과 함께 밤을 지새우다 〈엑스멘〉에서 에이전트 제로가 가장 멋져 보일 액션 장면을 촬영했다. “제로, 네가 해치워라”는 명령에 내가 Weapon X 팀을 뒤로한 채 홀로 뚜벅뚜벅 앞으로 걸어가 스릴 넘치는 25: 1의 총격전을 벌이는 장면. 촬영은 밤을 지새우고 아침 7시에나 끝이 났다. 클로즈업과 CG 작업이 필요한 부분들(눈과 바람이 심해서)은 내일과 모레스튜디오 안에서 다시 찍기로 했다. University of British Columbia에서 로케이션 촬영을 했는데, 1백 명 정도 되는 팬(한국과 아시아 학생들!)이 촬영장을 에워싸고 환호성을 질렀다. 할리우드 스태프들은 영화 촬영을 많이 했지만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고 신기해했다. 이 중 30명 정도는 나와 현장에서 꼬박 밤을 함께 지새웠다. 쏟아지는 눈 속에서도 팬들은 편지도 써다 주고, 명절 떡도 갖다 주고, 나는 줄 수 있는 게 없어 안아주고 대화하고 사인을 해주었다. 눈까지 와서 촬영을 마치지는 못했지만 참 행복한 밤이었다.

    〈엑스멘〉은 다니엘의 할리우드 진출의 멋진 포문이 됐다. 〈엑스멘〉 이전에도 여러 편 할리우드 영화 제의가 있기는 했지만, 〈엑스멘〉은 A급 배우와 스태프들과의 작업, 전형적인 아시안 배역이 아니라는 데 신뢰가 갔다. 촬영이후 다니엘 헤니에게 쏟아지는 할리우드 영화사와 드라마 제작사의 주연급러브콜은 지금 상상을 초월할 정도다. 그는 현재 할리우드 시스템에서 생활한다. 〈엑스멘〉 한국 개봉을 위한 홍보가 시작되는 전날까지 피츠버그에서 메디컬 파일럿 드라마 〈Three Rivers〉를 찍었다. 미국의 제작진은 ‘주인공으로 시즌 6를 모두 촬영해야 한다는(6년간 묶여있다 보면 영화를 병행할 수가 없다!)’계약 조건을 파격적으로 바꿔가며 다니엘을 적극 캐스팅했다. 심장 이식 전문의 역할을 맡은 다니엘은 환자의 머리 위에서 가슴이 열리고 닫히는 광경을 견학했고, 다음날 폭풍우가 쏟아지는 활주로를 가로질러 심장이든 컨테이너 박스를 들고 뛰는 장면을 찍었다. 〈Three Rivers〉는〈ER〉이나〈그레이 아나토미〉보다 훨씬 테크니컬한 의학 심리 드라마가 될 것이다.

    그리고 어제 새벽 서울로 돌아와 〈엑스멘〉을 위해 방한한 휴 잭맨과 ‘브라더’가 되어 하루를 보냈다. 서울 시내에서 사이렌을 울리며 리무진을 타고가면서 호주 배우 휴 잭맨과 한국 배우 다니엘 헤니는 손을 맞잡고 말했다.“믿겨지니? 우린 꿈꾸던 삶을 살고 있는 거야.” 다음 날 성수동 창고에 마련된 〈보그〉촬영장으로 달려온 그에게 나는 ‘당신이야말로 우리 시대의 돌연변이, 슈퍼 히어로’라고 말해주었다. “다니엘! 우리의 주인공은 바로 너야.”〈엑스멘〉을 위해 뉴질랜드에 날아간 첫날 밤 다니엘은 스타일리스트에게 에이전트 제로가 신을 부츠를 달라고 했다. 그날 밤 다니엘 헤니는 아무도 없는 퀸스 거리를 밤이 새도록 에이전트 제로의 부츠를 신고 걸어 다녔다.

      에디터
      김지수, 김미진
      포토그래퍼
      Hyea W.Kang
      브랜드
      루이비통, 질샌더, 서상영, 앤 드멀미스터, 레주렉션, 디올 옴므, 프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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