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래퍼의 즐거운 인생

2016.03.17

래퍼의 즐거운 인생

결혼을 하고 아이를 가진 한 남자의 안정감, ‘술 취한 호랑이’의 본능이 유동적으로 얽히는 삶. 드렁큰타이거는 보여주고 싶던 도전자에서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꾼으로 변모하고 있었다. 이제 이야기의 새로운 챕터가 시작되었다.

그는 자신에게 이상하고 무모한믿음이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바로‘내가 하면 된다.’큰 덩어리의 선택을 해야 할 때 그는망설임이 없다. 촬영 의상과헤어 스타일을 정하는‘작은일’앞에선몇 번을 고민했지만. 의상은모두 버버리 프로섬, 슈즈는 발리.

얼마전 드렁큰타이거는 주말 저녁의 ‘국민방송’에 등장했다. 웃통을 벗고 마이크를 씹어먹는 모습이 아닌, 익살맞게 ‘유재석 GO 재석 GO’를 외치는 모습으로. 99년 데뷔한 이래 발바닥에 땀나도록 ‘풋 유어 핸즈업’을 외쳐도 ‘그들만의 힙합 킹’이었던 드렁큰타이거는 요즘 지상파 방송의 힘을 체득하고 있다. “전 10여 년동안 연예 오락 프로그램에 별로 나가보질 않았어요. 재치꾼들 사이에서 굳이 나 같은 인간이 껴 있을 필요가 없기도 했고, 드렁큰타이거는방송에 등장해도 자막으로 등장하는 정도였어요(웃음).

〈무한도전〉과〈놀러와〉덕분에 이제 길거리 나가면 어르신들이 절 알아봐줘요. 신기하고 기분 좋아요. 이제야 좀 딴따라가 돼가고 있는 것 같아요. 나쁜 의미가 아니라, 좀더 많은 사람들이 반가워 해주는 그런 존재요. 저는 제무대를 보러 찾아오는 사람들에게만 즐거움을 줬는데, 방송 출연으로그 외의 사람들에게도 즐거움을 줬나 봐요. 그것도 나쁘진 않은 것 같아요.” 랩만으로도 음악이 된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던 ‘반항아’는 이제중견 가수가 되었다. 힙합 신의 불모지였던 대한민국에 나타나, 어느새 8집까지 낸 중견 가수.2년 만에 앨범을 낸 그에게 사람들이 궁금해하는 부분은 비슷하다. 모름지기 연예계에서 커플이 탄생하면, 대중은 물론 아침에 방송되는 주부 대상 프로그램들까지 달려들어 관심을 보이는 법이다.

한무대 위에서 커플이 함께 랩을 하는 풍경은 물론 여태 우리가 보지 못했던 특이한 그림이다. 그러나 평소 ‘내 행동이 또 잡음을 낳거나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진 않을까’하는 생각, ‘가족과 무브먼트에 대한 책임감’이 뇌에 반반씩 자리 잡고 있는 듯한 그는 역시나 곱씹기에 들어간 것 같다. 그와 윤미래와 아들이 회자되는 것을 두고 ‘가족 마케팅’이라는 시선을 보내는 부류가 생기자, 혹시나 비슷한 행동을 다시 했다가오해를 사는 건 아닌지 자기 점검을 하는 것 말이다. “예전에는 마이크도 던지면서 막 들이대는 퍼포먼스를 했죠. 짜인 시나리오가 아니라,오늘은 좀 차분해야지 맘먹어도 무대 위에선 제가 변해버리더라고요. 그러다가 무대 아래 내려오면 내 행동을 다시 곱씹으면서 소심해지고(웃음). 이제는 제가 사람들을 도발하고 안 좋은 소리를 들으면 저만 다치는 게 아니라 주위 사람까지 다친다는 걸 알아버렸어요.”

화이트 셔츠와 니트 바지는 필립 림.

무대 위에서 비로소 산화하는 드렁큰 타이거, 무대 아래선 소심하게 생각의 나선을 그리곤 하는 인간 서정권. 그의 이런 캐릭터가 상반된 컨셉의 2 CD로 구성된 이번 앨범의 성격과 묘하게 맞물리기도 한다. 8집 〈Feel Ghood Muzik〉은 ‘Feel good side’와 ‘Feel hood side’로 나뉘어져 있다. ‘Feel good side’에는 앨범 작업을 할 당시 그의 ‘정신 상태’를 고스란히 담았다.

‘난 널 원해’ ‘굿 라이프’를 부를 때의 패기 넘치던 젊은 날을 지나 가족의 죽음과 투병(그는 척수염이라는 병과 싸우느라 한동안 심신이 피폐했다)으로 어둡고 무거웠던 지난 앨범을 거쳐, 결혼을 하고 아이가 생긴 한 남자의 릴랙스 된 기분이 배어 나오는 음악. 그러나 그런 CD 한 장만으로 정규 앨범의 마무리를 짓자니‘술 취한 호랑이’의 본능이 꿈틀거렸다. ‘Feel hood side’에는 드렁큰타이거를 흥분시키는 류의 힙합, 즉 옆으로 새고 싶어 하는 그의 본능을 집적시킨 트랙들이 담겨 있다. 디지털 싱글을 내는 게 보편적 추세인 요즘, 드렁큰타이거의 신보는 그렇게 몇 장의 앨범으로 포장할 수있을 만한 분량의 곡들을 가득 담고서 세상에 나왔다.

“이 곡으로 시작한 이야기의 흐름이 반드시 저 곡에서 끝나야 한다는 머릿속의 생각이 있었어요. 예를 들면 ‘Feel good side’의 첫 번째 트랙에선 나는 아직도 많이 아프다고 솔직히 털어놓다가 기적과 희망을 비추며 곡을 끝내고(‘Feel good music’), 그 다음 마이크를 잡으면 날고 싶어지는 내 심정을 늘어놓아요(‘Jet pack’). 이런 열정은 윤미래와 조단이라는 마법 때문에 가능했죠(‘Magic’). 뒤이어 아들 조단을 위해 만든 곡 ‘축하해’가 이어지는 식이에요.”그가 대학교에 입학할 때 창작문학과를 택했던 사실을 아는가? 드렁큰타이거는 여드름이 화두였던 평범한 10대 때도 수업은 땡땡이 칠지언정 도서관에 가서 책을 읽으며 글을 끄적거리던 아이였다. 비록틀어졌지만, 한때 그의 음악을 가지고 랩으로 다 못 보여준 이야기들을 풀어내는 책도 내려 했다. “저는 말을 잘 못해요.

이야기꾼이 되고싶다면서 이상하죠? 하지만 글로 풀어낼 때가 좋아요. 내 안에 아직 풀어내지 못한 많은 이야기들이 있어요. 이번 앨범도 한 장 한 장 넘겨볼수 있는 책을 펼치는 느낌이 나도록 디자인했어요. 그런데 어느 온라인 사이트에 가보니까 책처럼 만든 이 앨범을 평면으로 쫙 펼쳐놔서특유의 맛이 없어졌더라고요. 앞으로는 디지털 북클렛도 같이 만들어보면 좋겠다 생각했어요.”패기와 객기로 랩을 토해내다가, ‘디스’를 주고받으며 상처가 덧나고 아무는 시기를 거친 후, 웨이트 트레이닝을 하는 대신 무대 위에서하도 손을 위아래로 휘젓는 바람에 일명 ‘풋 유어 핸즈 업 근육’이 생긴힙합 뮤지션을 떠올려보자. 발악처럼 시작한 음악 인생으로부터 어느날 랩 두 소절만 해도 숨이 턱에 차오르는 순간에 이르기까지, 힙합이라는 갱스터 파라다이스에서 그가 쏟아낸 단어와 이야기들은 얼마나많고 또 길까? 드렁큰타이거는 물리적으로 그렇게 많은 양의 단어들을 내뱉었음에도 이젠 ‘이야기’가 고프다.

“죽어서 영웅이 되는 경우도 있잖아요, 그래야 죽기 직전의 이미지로 남으니까. 그런데 저는 제가 쭈글쭈글 늙어가는 모습을 주위 사람들도 같이 즐기면서 갔으면 좋겠어요. 나이 들수록 뭔가를 포기하는 게 아니라 잘 늙고 싶다구요. 젊음을간직할 권리는 누구나 있고, 음악은 젊음을 줄 수 있거든요.” 말 못하는 이야기꾼. 그는 음악 읽어주는 남자가 되려 한다. 보여주고 싶던 도전자에서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꾼으로 변모한 아티스트의 음악은 이제 개개의 음악이 아닌 한 덩어리로 이해 받아야 하지 않을까? 결혼을 하고 아이를 가진 한 남자의 안정감, ‘술 취한 호랑이’의 본능이 유동적으로 얽히는 삶.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의 새로운 챕터가 시작되었다.

    에디터
    권은경
    포토그래퍼
    안지섭
    스탭
    헤어&메이크업/이향미
    브랜드
    버버리 프로섬, 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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