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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지태, 제 3의 사나이

2016.03.17

by VOGUE

    유지태, 제 3의 사나이

    많은 영화 배우들이 팬들의 욕망과 자신의 욕망 사이에서 불안한 환각 상태를 겪는 데 비해, 유지태는 굉장히 독립적이며 현실적인 지각으로 살아간다. 그리고 현재 유지태는 발표를 앞둔 두 개의 작품뿐 아니라 두 여자 사이에서 시소를 타고 있다.

    블랙 재킷과 팬츠는 닐 바렛, 저지 니트는 릭 오웬스, 머플러는 제냐, 슈즈는 루이 비통.

    저지 셔츠와 슬리브리스 톱은 돌체 앤 가바나, 배기 팬츠는 릭 오웬스, 부츠는 제냐, 실버 팔찌는 루이 비통.

    오랜만에 유지태의 얼굴을 보니 갓 짜낸 우유를 마신 기분이다. 과거의 유지태가 불안하고 자기보호적이고 영리하고 개인적이고 가식이 없는 남자였다면, 지금의 유지태는 편안하고 이타적이고 가족을 사랑하고 지적이며 소통이 잘 되는 남자다. 홍상수 감독이 뒤룩뒤룩 살을 찌우고(〈여자는 남자의 미래다〉에서 102kg까지 나갔다), 박찬욱 감독이 올백 헤어를 시키던(〈올드보이〉에서 최민식에게 복수하는 친구였다) 작가주의 시절보다,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훨씬 젊어졌다. 길고 검은 속눈썹, 반짝이는 작은 눈, 하얀 피부, 동그란 입술, 저지방 우유 같은 담백한 미소.

    게다가 4년 전에 만났을 때보다 훨씬 밝고 수다스러워졌다. ‘다세포 소년’이란 타이틀을 달았지만 더 아저씨 같아 보이던 당시 기사의 말미에서 그는 말했었다. “나이가 들면 모든 게 더 좋아질 겁니다. 서른다섯이나 마흔쯤이면 제 얼굴도 좀 멋지게 변하겠지요. 전, 사실 대중에게 기대지 않는 제가 좋습니다. 정말입니다.” 요즘 남자 옷이 너무 작다고 투덜대던 과거와 비교하면, 지금 그는 더 작은 옷을 찾아 다니는 모델처럼 몸에 꼭 붙는 셔츠, 발목까지 오는 깡총한 스키니 팬츠에 모카신을 신은 맵시꾼이다. “실례지만 지금 몇 살이신가요?”라고 내가 물었다. “서른 다섯입니다.” “서른 다섯이라… 사내로서 진정한 매력이 발산되는 나이군요.” “아주 좋은 나이지요.” 우리는 같이 큰 소리로 웃었다.

    그는 언제나 서너 개의 화두를 들고 나타났다. 대학로의 연극 제작자로, 중편 영화 감독으로, 그리고 배우로. 오늘도 그는 휴전선 부근에서 열리는 DMZ 영화제의 공식 트레일러를 만든 감독으로, 그리고 수애와 함께 촬영한 영화 〈심야의 FM〉의 배우로 이 자리에 나타났다. 많은 영화 배우들이 팬들의 욕망과 자신의 욕망 사이에서 불안한 환각상태를 겪는 데 비해, 유지태는 굉장히 독립적이며 현실적인 지각으로 살아간다. 그리고 현재 유지태는 발표를 앞둔 두 개의 작품뿐 아니라 두 여자 사이에서 시소를 타고 있다. 두 여자란, 엄마와 여자 친구 김효진이다. 엄마는 그에게 이성적이고 현실적인 버팀목이며, 김효진은 정서적이고 예술적인 쿠션이다.

    그는 김효진을 ‘오아시스’라고 표현했고, 심지어 이창동 감독이 왜 〈오아시스〉라는 영화를 만들었는지 이제야 알 것 같다고 했다. 사랑하는 여자, 사랑을 주는 여자야말로 남자의 진정한 오아시스라는 깨달음! 예전에 그는 ‘명절날 모자가 둘이 앉아 외롭게 외식을 했다’거나, ‘어머니가 가족의 울타리에 안주하지 말고 독립적으로 살라’고 했기 때문에 ‘혼자 밥 먹고 혼자 돈 벌면서 살았다’는 증언으로 청년기의 스산함을 표현했다. 지금은? 내가 만약 정신 정화 교육을 시키는 힐링 프로그램의 운영자라면 당장 유지태를 전문 강사로 초청하고 싶다. “20대 때는 좋아하는 일에 열정을 쏟았다면, 30대는 밸런스를 찾는 때죠. 꿈, 미래, 사랑을 하루의 시간 안에 녹여내는 겁니다. 하루하루를 정성스럽게 잘 쌓으면 그게 모여 기적이 일어납니다. 저는 그걸 어머니에게 배웠어요.”

    그의 어머니는 40년간 간호사 생활을 했으며, 40년 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고 새벽 4시 30분에 일어나는 패턴을 유지했다. “어떤 역경이 와도 끄떡도 않고 인내하셨죠. 그 결과 지금 8층짜리 노인 병원의 경영자로 일어서셨어요. 결과적으로 저보다 사회 경제적인 기여도가 훨씬 높은 분이죠.”

    그렇다면 여자 친구이자 아름다운 여배우 김효진은 어떤가. 나는 작년에 〈오감도〉라는 옴니버스 영화 개봉 즈음에 김효진을 만나보고 깜짝 놀랐다. 그저 그런 모델 출신의 하이틴 스타로 생각했던 그녀가 세르지오 카스텔라토 감독의 〈빨간 구두〉나 페드로 알마도바르의〈귀향〉, 데이비드 린치의 〈멀홀랜드 드라이브〉, 안드레이 줄랍스키의 〈퍼제션〉등을 줄줄이 외는 영화광이고, 정통파 연기 교수인 최형인 교수의 연극 〈한여름 밤의 꿈〉에 출연하고, 운동과 채식을 즐기고, 헬렌 니어링의 〈소박한 밥상〉을 실천하는 지적인 여배우일 뿐 아니라, ‘연기에 모든 걸 바칠 각오가 되어 있다’는 아주 섹시하고 다부진 영화인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보디 컨셔스가 컨셉인 그날의 화보에서 김효진의 몸은 여자인 내가 봐도 침이 고일 만큼 탐스러웠다. 그날 그녀는 선이 가늘고 유려한 남자의 몸도 사랑한다고 했는데, 아마도 그건 유지태의 몸을 두고 한 말일 것이다.

    “효진이는 연기할 때 멍들고 까지고 살이 움푹 패일 때까지 모르고 몸을 던져요. 효진이나 저나 스타가 되는 작업보다는 인생에서 의미있는 작업을 할 때 행복해 해요. 그게 닮은 점이죠.” 유지태는 남자 친구로서 그녀가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있도록 환경을 만들어주고 싶다고 했다. 오! 믿음직스러워라! 차 안에서 라흐마니노프를 즐겨 듣고, 의기소침하고 화가 날 때도 서로를 보면 얼굴이 환해지는 연인의 특권을 누리는 그들. “나이가 들수록 명예나 성공보다는 가족이 중요해요. 친구만 있으면 된다고 호언장담하던 그룹들도 결국엔 쓸쓸해 하거든요.”

    현재 그는 아주 규칙적인 생활을 하고 있다. 어머니와 같이 사는 대신 옆집에 이웃으로 살고(“전 제 공간에 어머니의 독립적인 공간을 배치할 생각이었는데, 그분이 원치 않으셨죠”), 각자 새벽 4시 30분, 5시 30분에 기상해서 운동을 시작하고, 학원에서 어학 공부를 하고, 집 근처 작업실에서 영화 관련 업무를 보고, 저녁엔 운동으로 하루 일과를 마무리한다. 일요일엔 모자가 함께 교회를 가고, 어머니가 아들을 위해 가까스로 준비한 브런치를 함께 먹는다.

    “저는 릴랙스와 텐션 운동을 하루씩 반복해요. 어느 날은 운동을 더하고 싶을 때도 있지만, 무리하지 않고 자제해요. 운동 강도를 높이면 순간적으로 나를 발전시킬 수 있지만, 피로가 누적되면 훗날 더 나쁜 결과가 오거든요. 차례로 릴랙스와 텐션을 하다 보면 나를 컨트롤할 수 있는 힘이 생기죠. 인생도 그와 비슷합니다.” 그는 지금 엄마와 여자 친구와 좋아하는 영화 일 사이에서 릴랙스와 텐션의 균형을 유지하고 있다. 결혼하면 1, 2, 3층을 나눠서 자신이 중간에 살고 싶다는 꿈까지 꾼다.

    지금까지 일하는 남자로서 유지태는 19편의 영화를 찍었고, 한 편의 드라마에 출연했고, 두 편의 중편 영화와 단편 영화를 감독했다. 나는 그가 감독한 단편 영화 한 편을 보았는데, 굉장히 실험적인 작품이었다. “색감은 무척 좋았는데 내러티브가 혼돈스럽더군요”라고 내가 말했다. 그는 내가 본 영화 제목이 〈선물〉이 아니라 〈초대〉라고 정정해주었다. “그건 크리스 마커 감독의 스타일을 오마주한 페이크 다큐였어요. 102컷으로 이뤄진 사진 영화였죠.” 감독으로 넘어가면 대화는 진지해진다. “저는 장편 영화 감독이 되면 블록버스터보다는 B급 무비를만들고 싶어요. 제가 정우성이나 배용준 같은 대스타들처럼 외부적인 조건을 만들어낼 수는 없어요. 짐 자무시나 기타노 다케시, 우디 앨런처럼 자기 색깔이 강하고 예술성 있는 저예산 영화를 해야겠지요.”

    내 생각에 유지태가 ‘스타성’을 업그레이드 시킬 수 있는 마지막 기회는 최지우의 상대역으로 나온 드라마 〈스타의 연인〉이었다. 나는 그 영화가 성공했으면 유지태가 〈봄날은 간다〉시절의 멜로 왕자로 복귀할 수 있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드라마 대본은 너무 동화적이었고 촬영은 허술해서 도무지 공감이 가지 않았다. 3%가 나온다는 애국가 시청률보다는 약간 높은 7%의 시청률을 기록했다. 그러나 그는 그 경험마저도 시니컬하지 않고 학구적으로 반응했다. “영화는 테이크로 찍어서 벽돌을 쌓듯이 완성하는데, 드라마는 신 단위로 빠르게 찍어가더군요. 가령 영화는 한번 세팅을 바꾸는 데 서너 시간 걸려서 배우가 기다리다 지쳐 뭘 연기했는지 까먹을 지경인데, 드라마는 그냥 배우가 한 바퀴 돌면 저절로 장면이 전환되는 식이죠. 드라마 시스템을 독립 영화에서 배울 필요가 있다고 봐요.”

    그레이 재킷과 롱 글러브는 이브 생 로랑, 니트는 루이 비통.

    예전의 단답형에 가까운 진땀 나는 인터뷰와는 달리 지금 유지태는 거의 대화를 이끌어가다시피 즐겁게 자기 의견을 피력했기 때문에, 나는 준비해온 질문지를 쓰레기통에 버렸다. 그리고 우리의 이야기는 악역에 대한 딜레마로 넘어갔다. 그는 〈심야의 FM〉에서 마지막 고별 방송을 진행하는 라디오 아나운서 수애에게 전화를 걸어 2시간 안에 가족을 살해하겠다고 협박하는 살인마 역을 맡았다. 그는 극 중에서 마치 영화 〈다크나이트〉의 히스 레저처럼 만화적인 표정을 짓고, 하이톤으로 짜증과 욕설을 퍼붓고, 면도칼을 입에 문 것 같은 사악한 웃음을 짓는다. 악역은 과연 배우의 커리어에 이로운 영향을 줄까? 최근〈악마를 보았다〉에서 그가 존경하는 선배 최민식은 살을 찌우고 엽기적인 살인마 역할을 완벽하게 해냈지만, 결과적으로 영화를 본 관객들은 그 배우에게 인간적인 혐오감을 느끼게 됐다. “로버트 드니로가 〈케이프 피어〉를 찍고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그는 자기를 사랑하는 관객에게 욕설을 퍼붓고 몰지각한 행동을 했거든요. 관객과 동행하면서 살아야 하는 배우가 왜 그랬을까? 아마도 그 영화에 빠진 관객들이 로버트 드니로를 실제로도 싫어하고 공격했고, 드니로는 그런 관객의 반응에 비뚤어진 게 아닐까요.”

    여러 사회 단체를 통해 어려운 아이들을 후원하는 있는 그는 다른 부분에서도 직업적인 갈등을 느낀다. “내가 악역 연기를 잘하면 아이들이 화면 속의 날 보고 어떤 영향을 받을까? 그런 걱정이 드는 거죠.” 악역으로 존재감이 커지는 건 현재 유지태에게 심리적으로도 힘겨운 일이다. 그건 마치 항상 웃으면서 서비스를 해야 하는 웨이트리스나 항상 악랄한 통보자 역할을 해야 하는 해고전문가처럼 배우에게 강도 높은 ‘감정 노동’을 요구한다. 우리는 잔인한 영화 일변도인 요즘 영화계가 그걸 부추기고 있다는 데 동의했다. 더 극한대의 자극을 향해 영화와 관객이 서로 경쟁적으로 달려간다고나 할까.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상상력이 필요한 때입니다. 작가주의와 엔터테이닝을 적절히 섞어서 새로운 지점을 보여줘야 하는 거죠. 다행인 건 제 악역이 좀 희화화 돼서 보인다는 거예요. 빨간 바지에 털옷을 입은 귀여운 악인이죠.” 그가 다시 순한 웃음을 지으며 담담하게 말했다. 〈회전목마〉때부터 여배우 수애의 팬이었기 때문에, 그녀의 목을 잡고 휘두르는 연기를 하는 게 몹시 힘들었다고 고백하며.

    사실 나는 유지태가 다시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라고 묻던 멜로 영화의 주인공으로 복귀하길 바라지만, 어쩌면 그건 나만의 몽상일지도 모른다.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라는 질문은 이제 과거 시대의 유물처럼 느껴지기도 하니까. 우리는 유지태를 청춘의 아름다운 유적지처럼 간직해야 하겠지.

    “전 이제 멜로는 조금 버겁습니다”라고 유지태가 머쓱한 표정으로 말했다. “오히려 진 셰르단의 〈나의 왼발〉같은 드라마나, 미하일 하네케의 〈나쁜 교육〉, 고레에다 히즈카로나 라세 할스트롬 감독의 영화 스타일을 좋아해요.” 내가 너무 시네 필적이라고 말하자, 그는 인정했다. “맞아요. 하지만 제 나름대로 전문화되어야 한다는 신념이 있어요.”

    나는 사진 촬영을 진행하는 동안 과거의 유지태와 현재의 유지태 사이에서 잠시 혼돈을 느꼈다. 〈주유소습격사건〉과 〈동감〉과 〈봄날은 간다〉시절의 나른하고 자폐적이고 고집스러웠던 유지태와 대중의 관심의 사정권에서 조금 멀어진 채로 진정한 삶의 작가와 영화 작가로 거듭나고 있는 젠틀하고 지적이고 지혜로운 유지태. 클로즈업을 찍으면서 나는 유지태를 은유하는 아주 절묘한 포즈를 발견했다. 내가 한쪽 장갑을 벗으라고 하자, 그는 자연스럽게 흰 손과 검은 손을 X자로 교차해서 자신의 얼굴을 감쌌다. 선의 손길과 악의 손길이 쓰다듬는 그의 얼굴에 맑고 고요한 영혼이 머물렀다.

    모든 촬영을 끝내고 우리는 유지태와 함께 인터넷을 연결해서 그가 만든 DMZ 영화제 트레일러를 보았다. 아름다운 재두루미 한 마리가 사람의 손이 닿지 않은 청정 비무장지대에 나타나자 남한의 생태사진작가와 북한 병사가 넋을 잃고 바라본다. 카메라 렌즈와 망원경의 렌즈가 교차되자, 점점 시야는 관용적으로 높아지며 마침내 크고 드넓은 푸른 하늘까지 재빠르게 올라간다. 남한의 하늘도 아니고 북한의 하늘도 아닌 그 무한 경계의 하늘에 D라는 그래픽이 떠오르면서 트레일러는 DMZ의 포스터와 오버랩 된다. 스튜디오에 있던 10여 명의 관객의 기립 박수를 받으며, 유지태는 어깨를 한번 으쓱하고 쏟아지는 비를 뚫고 영화제가 열리는 파주의 휴전선 경계 지역으로 떠났다.

      에디터
      김지수
      포토그래퍼
      최용빈
      스탭
      스타일리스트/유현정, 헤어/정원, 메이크업 / 박혜영(VO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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