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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배우들

2016.03.17

by VOGUE

    여배우들

    박정자, 손숙, 김성녀, 윤석화… 대한민국 연극사에서 가장 클래식하고 위엄 있는 여배우들이 들국화처럼 웃고 있다. 눈이 핑핑 돌아가는 공장식 연예산업에서 가장 고귀한 수작업을 해내는 연극배우들이 박정자 연극 50주년을 기념해 모였다.

    로렌스 올리비에는 말했다. “천재성이란 너무 비현실적인 것이다. 연극은 현실적인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나는 연극 배우야말로 천재성을 하찮게 여겨도 되는 유일한 예술 노동자, 장인이라고 생각한다. 반세기에 걸쳐 평생을 배우로 살았고 그래서 대문호의 작품을 더욱 실감 있게 재현해주며, 문예영화와 연극의 수준을 높여준 배우 박정자. 너무도 배우이다 보니 모든 인간사 그 자체가 그녀에게는 연극으로 보이거나 연극의 대상이었다. 따라서 모든 것이 연극을 위한 연구 대상이었다. 그녀의 우정, 연애, 슬픔, 기쁨과 고통… 모든 일상의 감정과 고유한 행동조차도 연극인지 실제인지 구별하기 어려울 정도로. 그녀의 삶 자체가 연극이었다. 그녀가 나누던 말들 “인생은 코미디야!” 혹은 “사랑은 교통사고와 같아!”조차도 마치 연극 대사 같았다. 순식간에 현실을 무대로 스위치 시켜 감상에 젖어 들게 만드는 박정자의 나른한 보컬. 그녀가 하는 모든 연기에는 시작할 때 늘 자신의 본능이 있었다. 그런 다음 외면에서부터 내면으로 연기해 들어갔다. <페드라> <위기의 여자〉 <신의 아그네스> <엄마는 오십에 바다를 발견했다> <19 그리고 80>… 19세 청년과 사랑에 빠진 80세 노인 모드야말로 여자 박정자를 드러내는 전부일지도 모른다. 처음부터 늙었으나, 정작 한 번도 늙은 적이 없었던. 집안일을 할 줄 모르는 억척어멈 같은. 모든 모순이 연극이라는 래빗홀로 빨려 들어가는 박정자는 50년 동안 자신을 ‘광대’라고 부르는 것을 좋아했다.

    손숙 (흰 옷을 입은 박정자를 보고)형님은 오늘 눈부신 하얀 천사가 따로 없네.
    박정자 매번 이런 특별한 날은 난감해. 막상 옷장 열어보면 한숨이 나와. 그래도 오늘 나오면서 동네 미용실에서 화장을 했어. 화장해주는 이가 “선생님, 오늘 <여성OO> 인터뷰 하세요?” 그래서 내가 목소리를 좀 높였지. “이봐요~! 난 <보그> 아니면 안 한다니까.”
    보그 선생님! 그건 영화 <여배우들>에서 윤여정 씨 대사예요.
    윤석화 (윤석화가 <객석> 도서관으로 화려하게 등장한다)아이구~! 우리 선생님, 오늘 청순가련이네그려. 숙이 언니는 빨간 구두? 내가 미쳐 미쳐!
    김성녀 석화야! 넌 머리가 완전 눈밭처럼 하얀 게 패티 김이구나.
    윤석화 성녀 언니! 런던에서는 내가 이렇게 등장하면 뭐라고 하는 줄 알우? 아네트 베닝 같다고 그래. 아네트 베닝!
    김성녀 아우~! 난 패티 김 멋있어서 하는 말이야, 얘는.
    박정자 그런데, 윤석화 영화 <봄눈>은 아이들에게도 선물이겠어. 카피가 딱이네. 엄마라는 이름의 선물… 그런데 죽음의 선물은… 좀 그런가?(다들 우르르 영화 <봄눈> 포스터 앞으로 몰려간다)
    김성녀 (물색없이)석화야! 너 뭐했니? 이게 뭐야?
    윤석화 나 그동안 영화 찍었잖우. 런던에 있다가 한국에 잠깐 나와서… (웃으며 눈을 흘긴다)언니는 그것도 몰랐수?
    박정자 우리 김 선생이 국립창극단 예술감독으로 취임해서 정신이 없었을 거라구….
    손숙 시사회는 언제니?
    윤석화 4월 9일, 해랑 연극상 끝나고 다 오시면 돼요.

    대한민국 연극계를 대표하는 네 명의 연극인이 동숭동에 있는 윤석화의 설치극장 정미소 4층에 위치한 객석 도서실에 모였다. 박정자 연극인생 50주년을 기념해서 <보그>가 마련한 다이얼로그 자리였다. 손숙은 모처럼 연극 <아내들의 외출> 공연이 없는 월요일에 알라딘 팬츠를 입고 등장했다. 김성녀는 새롭게 취임한 국립창극단 예술감독이라는 ‘예술 관료’ 자리에서 잠시 빠져 나왔다. 런던에 사는 윤석화는 24년 만에 출연한 영화 <봄눈>을 위한 프로모션 인터뷰로 빠듯한 내한 스케줄에 귀한 틈을 냈다. 박정자는, 당신을 위해 모인 후배들이 고맙고 쑥스러운 듯했다. 50년 동안 카리스마를 발휘했던 연극계의 대모는 조용히 웃기만 했다. 명절날 수수한 옷차림으로 대처에서 모인 때깔 좋은 며느리들을 맞이하는 종가의 큰형님처럼. 연극 무대라는 성실한 논밭에서 노동요를 함께 불렀던 아낙들처럼, 그들의 웃음은 전염성이 컸다. 멈추지 않는 증기기관차처럼 이야기를 쏟 아내는 윤석화와 빨랫방망이처럼 쫀득하게 장단을 맞추는 손숙, 마당극 계의 소리꾼답게 번갈아 귀명창 역할을 해주는 김성녀의 추임새가 흥겹게 뒤섞이는 가운데, 박정자가 소곤소곤 ‘50주년 행사’ 얘기를 해주었다. 그들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조심조심. 오늘의 주인공은 박정자인데, 정작 그녀가 후배들을 위해 마당을 깔아주고, 그 기쁨의 분량만으로 자신은 조용히 존재하려는 듯(패션 연예계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인데). 배우 박정자의 위대함과 사람 박정자의 인자함이 다르지 않았다. ‘박정자 50년’은 5월 4일부터 13일까지 열흘 동안 삼청동의 한옥 갤러리 아트 링크에서 열린다.

    “윤석화는 그때 런던에 있고, 손숙은 또 공연 중이라, 김성녀 씨만 날 도와주기로 했어요. 한태숙 씨 연출로 <맥베스>를 40분 남짓 만들기로 했는데 정동환, 서이숙, 박상종, 김성녀, 나 이렇게 몇이서 갤러리 한옥 마당에서 낭독 공연을 해요. 해가 어슴푸레하게 넘어갈 적에. 봄밤이니까 좋을 거야. 아주 아날로그식으로 할 거예요. 2부 공연에서는 친구들이 나와주기로 했어요. 최백호, 김정택, 강부자, 장사익, 이효재, 박애리, 유열이 놀고 가는 마당이에요, 날마다… 옛날에 ‘꽃반지’ 부르던 김은희 씨도 나오고, 뮤지컬하는 이경미, 배혜선 씨도, 축제 같을 거야.”

    박정자 세상 살다 보니까 혼자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 특히 연극이 그걸 알려줬지.
    손숙 그러게, 형님 덕에 우리도 이렇게 모이니까 좋으네.
    김성녀 우리처럼 오래 하는 여배우들도 별로 없어요.
    손숙 그게 왜 그런지 알아요? 돈이 없으니까 그래. 하하. 연극판이 돈이 없어서 서로 이렇게 각별하다구.
    박정자 그나저나 석화야, 영화 개봉하는데 우리가 뭐 도와줄 건 없니? (윤석화가 한참 영화 <봄눈>에 대해 설명을 한다. “난 삭발 가장 많이 한 여배우로 기네스북에 오를 판이라우”)
    김성녀 나는 석화를 항상 관객의 입장에서 보게 돼. 쟤는 사람 홀리는 재주가 있다구.
    손숙 석화야! 영국에서 멋진 영감 하나만 소개시켜주라.
    윤석화 오라구! 당장! 거긴 돈 많은 펀드매니저들이 연극배우라면 뻑 가거덩. 숙이 언니 정도면 끝내주지. 근데 우리 다 몇 살이야? 난 57세.
    손숙 너, 참 이쁜 나이다. 난 44년생 68세.
    김성녀 난 예순 셋.
    박정자 난 육십 아홉.

    한 여자가 이룰 수 있는 성취는 어디까지일까. 그녀들 모두 일가를 이뤘다. 연극을 하며 결혼을 하고, 자식을 낳고, 후배를 키워냈다. 57세가 될 때까지 윤석화는 제작자로, 연출가로, 배우로, <객석> 발행인으로, 런던 웨스트엔드까지 뻗어나갔고, 63세가 될 때까지 김성녀는 남편 손진책과 극단 <미추>를 이끌며 마당놀이의 대모 역할을 했고(중앙대학교 국악과 교수를 거쳐 현재는 국립창극단 예술감독), 68세가 될 때까지 손숙은 연극과 방송계와 시민사회를 종횡무진했다(김대중 정부 시절 환경부 장관을 거쳐). 69세의 박정자는 억척스럽게 ‘연극’만 들이팠다.

    윤석화 우리 박 여사님은 참 우리 연극계의 자랑이셔요. 오십 평생 마르지 않는 샘물이셨죠. 그에 비하면 우리는 굴러가는 돌이지 뭐. 숙이 언니랑 나는 농땡이지. 성녀 언니는 무에서 유를 이끌어낸 개척자고.
    김성녀 그런 소리 말아라. 너는 집 팔아서 연극 하는 애잖니?
    손숙 박여사님은 소리 소문 없이 뭘 만들어내는 사람이고. 나는, 내가 만들어내진 않았어. 나는 그냥 걸리는 일만 해치웠지.
    김성녀 숙이 언니는 항상 베푸는 사람이었잖우. 이 언니는 사랑이 너무 많아. 연극계 사람 치고 이 언니한테서 모자든 가방이든 안 받아본 사람이 없어요.
    윤석화 나는 못 받았어. 숙이 언니가 나한테 사랑은 줬지만, 물질은 안 줬다구.
    손숙 얘! 너는 남편이 다 해주잖니? 남편이 얼마나 니 손을 꼭 붙잡고 다니던지.
    박정자 손만 잡아줬나? 빽도 들어줬지!
    김성녀 석화 남편은 연극계 아무개 씨가 하는 옷집에서 밍크도 긴 거 짧은 거 세 벌이나 사줬잖어.
    윤석화 우리 남편이 그런 건 잘 사줘.
    말도 마라. 나는 그때 모피 사자마자 환경부장관이 돼서 입지도 못했다.
    박정자 나는 평생 밍크 코트 한 벌이 없네. 그런데 다들 돋보기 안경은 몇이나 쓰나?
    윤석화 난 1.0.
    손숙 난 2.0 써요. 난 활자 중독증이 있어서 신문을 5개나 보잖아. 라디오 DJ 하니까 또 열심히 봐야 하구.
    박정자 그래서 내가 숙이 보고 철의 여인이라고 하는 거야.
    윤석화 고난을 뚫고 가는 철의 여인, 좋아. 그런데 선생님 고난에 관해서는 묻지를 마세요. 난 고난이 축복이라고 믿기로 했어. 선생님은 아예 고난을 고난으로 믿지도 않지. 휴대폰에다 ‘삶의 절정’이라고 로고를 박는 사람이잖아. 대중의 인기라는 건 지면 그만이지만, 내가 내 삶의 절정이라는데 남들이 어쩔 거야? 선생님은 불특정 다수지만 오래된 팬과의 관계를 보면 아직도 절정이세요. 그건 언니들도 못하는 거야.
    손숙 형님은 한번 인연을 맺은 분들한테 최선을 다해.
    윤석화 어떤 관계든, 숙이 언니랑 나랑은 마음은 있어. 우리는 실천을 못해. 그런데 우리 선생님은 그냥 따박따박 그걸 다 해내시지. 연극인복지재단 이사장 일도 그렇고. 선생님은 칼 뽑으시면 당당하게 가신다구. 박정자라는 배우의 에너지는 무대에서 특히 더 절정이지. 아니, 그냥 그녀의 이름은 박정자가 아니구 배우라고 해야 돼. 그런데 우리 선생님은 일상을 몰라. 살림도 전혀 몰라요. 살림에 아예 관심이 없으시지.
    손숙 이 형님은 진짜 살림을 몰라. 그리고 우리 박 선생님은 절대 남의 흉을 안 봐요. 만나면 항상 사람을 존중하고 칭찬을 하시지.
    김성녀 난 무대에서 최고로 멋진 배우가 선배로 있다는 게 얼마나 좋은지 몰라요. 여배우 역사에서 아주 정점을 찍으셨지. 그리고 박 선배님이 아마 이 중에서 최고로 여성스러우실걸.
    윤석화 최고 절정으로 여성스러우시지.
    김성녀 일상에서도 문자를 아주 시어처럼 보내신다구.
    윤석화 숙이 언니도 글을 잘 쓰지만, 박정자표 글이 있어요. 런던에서 우리 서로 카톡을 하는데, 내가 애들 때문에 힘들다고 하소연을 하니까, 선생님이 그래. ‘인생이 그런 거야… 인생은 코미디, 인생은 미스터리지…’ 이러는데, 아주 나는 그 목소리가 딱 연상이 되는 거야.
    김성녀 연극 속에 살고 연극 속에 죽는 분이니까.
    박정자 그런데 나는 요즘 살면서 자꾸 내가 아마추어 같다는 생각이 들어. 50년을 무대 위에 서왔지만, 나는 아마추어구나, 그런 회한이. 자신 있는 게 하나도 없어.
    더 조심스러워져요.

    박정자가 발음하는 ‘아마추어’라는 어휘는 굉장히 독특한 질감으로 다가왔다. 셰익스피어에서 테네시 윌리암스까지, 시녀에서 수녀원장까지, 억척어멈에서 철부지 엄마까지 수많은 ‘라이프’를 관통해온 칠순의 여자가 ‘나는 아마추어’라고 할 때의 그 정직한 부조리. 스스로에 대한, 연극적 이상향에 대한 무참한 회한. 한평생 자기 삶을 희생한 엄마가 죽기 전에 아이들에게 ‘엄마가 미안해’라고 할 때의, 그 부당한 겸손. 그토록 예민하고 그토록 사려 깊은 자가 갖게 되는 통렬한 모순. 박정자는 후배들과 연극 이야기를 더 나누고 싶어 했다.

    박정자 나는 우리 손숙 선생 연극하는 걸 고려대학교 극회에서 처음 봤어. <삼각 모자>라고. 손 선생이 대학교 1학년 때 작품이었어. 아주 싱그러웠지. 난 아홉 살 때부터 극장에 있는 게 제일 행복했어. 행운이지. 행운이고 말고.
    손숙 저도 박 선생님 연극을 처음 본 게 66년에 극단 자유의 <따라지의 향연>이었어요.
    박정자 김성녀 씨는 극단 〈미추>에서 마당 놀이의 명맥을 이었어요. 손진책(현 국립극장 예술감독) 씨 내조하면서… 우리 중에 교수가 없잖아. 근데 늦게 공부해서 중앙대 교수까지 하고, 국립창극단 예술감독까지 하는 게 얼마나 자랑스러운지 몰라요.
    김성녀 난 그때 <미추> 안살림을 도맡아 하는데, 극단에 돈이 없어 TV 방송에 아르바이트 삼아 출연하면 손진책 씨가 그렇게 싫어했어요.
    박정자 선생님처럼 무게를 지키라고. 난 그게 너무 섭섭했어요. 그때는 극단이 늘 어려워서 연말에 마당놀이 한번 해서 1년을 꾸리던 시절이었거든요. 암튼 난 한편으론 정극을 부러워했지만, 마당놀이하면서 멀티 인간이 됐어요.
    손숙 그럼 그럼, 연극은 할수록 겸손해져.

    보그 이 중에서 교수도 나오고 장관도 나오고… 참 대단하신 분들이세요.
    박정자 그런데 교수 위에 장관 없고, 교수 밑에 장관 없어요. 배우가 최고야.
    손숙 맞아요. 그게 다 배우 하다가 얻어 걸린 거지.
    김성녀 석화야 말로 배우뿐 아니라 기획 제작 연출까지 다 하잖니? 게다가 스타성이 강하니까 뭘하든 사람들을 끌어들인다니까.
    윤석화 언니! 그걸 한 단어로 매력 있다, 그러는 거라우.
    손숙난 정말 스타는 타고난다고 생각해.
    윤석화 존재감 하면 우리 박 선생님을 따라올 자가 없죠. 그런데 이번 ‘박정자 50년’에 함께할 수 없다는 게 너무 미안해. 후배로서, 우리가 다 해드려야 되는 건데.
    박정자 석화가 서울 있었으면 팔 걷어부치고 했겠지… 암, 그맘 안다구.
    김성녀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게 맞아요. 난 이제까지 마당놀이 한다고 떨어져 있어서 선생님 하고 연극 한 편 같이 한 게 없잖아. 그런데 이번엔 내가 선생님과 함께하게 됐으니….

    보그 네 분은 함께 공연한 적이 있으세요?
    윤석화 성녀 언니랑 나랑 <선인장꽃>을 같이 했죠. 내가 90년대 영국에 유학 갔다 와서야. 극단 <민중>에서 그렇게 오라고 해서 들어왔더니, 세상에 개런티를 제대로 안 줘서 거처할 곳이 없는 거야. 눈물 나던 시절이었지. 선배 언니 집에 얹혀 살다가 200만원이 없어서 거리에 나앉게 됐어. 그날 내가 극단에서 기운이 쑥 빠져 있으니까, 성녀 언니가 와서 “얘! 무슨 일 있어? 내가 도울 수 있는 일이니?” 그때 이 언니가 ‘딸라’ 이자를 내왔잖우.
    김성녀 내가 그 사정을 너무 잘 알지. 극단 하면서 손진책 씨랑 돈 급한 일이 오죽 많어. 그런데 돈 빌릴 덴 없지. ‘딸라’ 이자라도 써야지. 급전을 많이 썼거든, 나두.
    박정자 연극하는 사람들은 은행에서 돈을 못 빌려. 대출 그런 게 안 된다구. 4대 보험도 안 되고. 가난해도 열정 하나로 버티는 거지. 아유, 속상해. 손숙 요새도 연극 연습하러 가면 애들이 점심 시간에 그냥 앉아 있어. 밥값이 따로 안 나온대. 그럼, 어떡해? “같이 먹으러 가자” 데리고 나오면 열댓 명. 개런티 받으면 밥값으로 다 쓴다구. 한번은 정자 형님하고 나하고 지방공연 다닐 때, 누가 밥 사준다고 해서 봉고차를 탔는데, 한참을 끝도 없이 가는 거야. 슬슬 겁이 나드라구. 그때 저 형님이 뭐라고 했는지 알아? 침착한 목소리로, “숙아! 난 마늘은 못 까” 이러는 거야.
    윤석화 하하하. 마늘 못 까시지. 살림을 안하셨으니….
    손숙 “차라리 손님을 받으라면 받지.” 그러길래, 내가 한참을 웃었어. 형님, 누가 노인네들 더러 손님을 받으라 그래?
    박정자 <신의 아그네스> 할 때였지? 맞아.
    손숙 어떤 날은 시장 지나다가 “형님! 저 옷 괜찮죠?” 그러니까, 가만히 보더니 “그 옷 아줌마들 입는 옷이야” 그러더라구. 하하. 우리가 아줌만데.
    김성녀 난 박 선배님 공연 중에 <위기의 여자>가 참 좋았어.
    손숙 난 <엄마는 오십에 바다를 발견했다> 하고 <신의 아그네스>. <신의 아그네스>에서 형님이 원장 수녀를 하고 내가 정신과 원장을 했지. 〈그 자매〉에서는 형님이 내 동생 역할을 했잖우. 생각해보면 나는 맨날 비극의 여주인공을 했어. 〈느릎나무 밑의 욕망>에서는 유인촌 씨랑 맨날 키스하고. 그러다 어느 날 <어머니〉에서 어머니 역을 하는데 참 좋더라구.
    윤석화 성녀 언니는 뭐니 뭐니 해도 <한네의 승천〉이지. 소리하는 모습을 보고 저건, 내가 죽었다 깨도 못하겠다, 그랬다니까.
    박정자 김성녀 씨는 〈죽음과 소녀>에서도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줬지.
    김성녀 그때는 갈비뼈 부러진 채로 공연을 했다니까요.
    손숙 성녀랑 같이 <바리데기〉 올릴 때가 생각난다. 그때 첫 대사가 “아무도 없구나~”였는데, 대사를 치고 객석을 보니 정말 썰렁하니 비어 있는 거야. 하하.
    윤석화 나는 숙이 언니랑 선생님이랑 같이 했던 <그 자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가 좋았어. 그건 손숙의 베스트와 박정자의 베스트가 만난 걸작이야.
    박정자 <나는 너다>는 어땠니?
    윤석화 그것도 좋지. 암튼 그 특별한 존재감이 극 전반을 지배해 나가는데… 아우! 그래도 나는 선생님의 최고는 단연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그걸 35년이 지나고 다시 올렸는데도, 좋았어요.
    박정자 35년이 지났다…, 나는 참 옛날부터 나이 먹은 역을 했어.
    윤석화 선생님은 전형적 미인은 아니죠. 여기서 전형적 미인은 숙이 언니. 그런데 선생님은 남자에게 매력이 있나 봐. 박정자 아니야 아냐. 내가 어디가 이뻐?
    손숙 형님은 얼굴보다 태도가 여성스러워.
    윤석화 이지성 감독만 해도 네 살 연하잖우. 그때 연하면 시대를 앞서가는 멋쟁이지.
    손숙 참 용감하셔.
    윤석화 남자 친구도 많으시고…, 선생님 삶은 소설 보는 것 같아. 20대 때 선생님 사진 보면 전도연 닮았더라구. 전도연이 기분 나빠할까?

    윤석화는 박정자를 ‘선생님’, 손숙을 ‘언니’라고 불렀다. 손숙은 박정자를 형님이라고 하고, 박정자는 손숙을 ‘아우님’이라고 했다. 뭐라고 부르든 그들은 연극이라는 피로 묶인 의자매들 같았다. 영화 <여배우들>은 이재용 감독이 여배우들이 함께 모여 ‘무대극’을 올리는 과정을 다큐로 찍으려던 것이 바뀌어 화보 현장이 되었다. 나는 이 네 사람이 함께 모여 연극을 올리는 과정을 다큐멘터리로 만들면 멋지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극판 <여배우들>은 <철의 여인>을 능가하는 여장부 스토리가 되겠지.

    박정자 숙이랑 윤석화가 연극을 그만둔다는 소릴 여러 번 늘어놔서 내가 상심이 많았어. 나한테 동기부여를 해주는 라이벌을 잃는 건 정말 슬픈 일이거든. 요새는 손숙이 얼마나 공연을 열심히 하는지 질투가 나.
    손숙 늦사랑이에요. 환경부장관에서 물러나고 난 후, 연극이 얼마나 귀한 줄 알았어.
    박정자 얘! 우리 이참에 넷이 함께할 수 있는 공연을 찾아보는게 어떠니?
    윤석화 그래, 우리 뭐 하나 같이 올리자! 손숙 뭘 할까? 연출은 젊은 애들 시키자구!
    박정자 난 코미디가 좋아! 코미디가 최고로 어렵지만, 난 잘할 자신 있어. 가만, 우리 이제 사진 찍어야 하는 거 아냐? 석화 너, 7시에 객석 행사 시작하잖니? “우리, 이 사진 정말 기념이겠다! 처음이자 마지막이겠어.”

    대한민국에서 가장 클래식하고 위엄 있는 여배우가 들국화처럼 웃었다. 눈알이 핑핑 돌아가는 공장식 연예산업에서 가장 비생산적으로 보이는 고귀한 수작업이 박정자의 몸을 통해 이어지고 있다. 50년째.

      에디터
      피처 에디터 / 김지수
      포토그래퍼
      차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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