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프 시몬스의 모던 꾸뛰르
라프 시몬스는 오뜨 꾸뛰르가 변화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새롭게 진화된 모던 꾸뛰르 세계에 윌리 반더페르, 테리 리처드슨, 파올로 로베르시, 패트릭 드마슐리에 등 당대 슈퍼 사진가들이 합류했다.
“디자이너로서 주도권을 포기하는 건 아주 어려운 일이다. 일반적으로 컬렉션 시작부터 끝까지 어떤 식으로 이끌고 싶은지 확고한 신념이 있기 때문이다.” 지난 7월, 크리스챤 디올의 가을 오뜨 꾸뛰르 쇼가 끝난 뒤 라프 시몬스(Raf Simons)가 말했다. “하지만 이번 시즌, 세부적인 요소들이 자유롭게 흘러가게 하고, 또 어떤 결과가 나오는지 지켜보면서 엄청난 희열을 느꼈다.” 디올에서 세 번째 꾸뛰르 컬렉션을 준비하는 내내 그의 머릿속을 가득 채운 단어는 바로 ‘자유’다.
꾸뛰르 쇼가 열리는 날 아침, 백스테이지에는 파랑과 흰색 줄무늬, 노랑, 보라, 연분홍까지 각기 다른 색깔의 꽃을 촘촘히 꽂아 만든 네 개의 세트가 마련됐다. 그리고 세계적인 패션 사진가 윌리 반더페르, 테리 리처드슨, 파올로 로베르시, 패트릭 드마슐리에의 모습도 눈에 띄었다. 시몬스가 그들에게 부탁한 건? ‘각자 생각하는 레이디 디올의 모습을 표현하라!’ 네 명의 사진가는 아메리카, 아프리카, 아시아, 유럽을 주제로 한 네 가지 꾸뛰르 룩의 모델들(박지혜, 김성희, 마리아칼라 보스코노, 알렉 웩, 발레리 카우프만 등)을 뷰파인더에 담았다. 몇 시간 후 쇼가 시작되자 그들이 촬영한 작품이 쇼장인 앵발리드 박물관의 흰색 벽면을 통해 실시간 상영됐다. 덕분에 모델들이 자기 사진 앞을 지나가는 장면에서는 독특한 시너지 효과마저 느껴졌다. 결과적으로 시몬스는 사진가들이 어떤 작품을 만들어낼지 알 수 없었지만, 그들의 재량에 이미지를 맡긴 채 불확실성을 즐긴 것이다.
보다 자유로운 컬렉션을 위해 시몬스가 선택한 또 하나의 방식은 전 세계 어디서든 고객이 원하는 아이템을 찾아 자유자재로 스타일링할 수 있도록 기획 단계에서부터 다채로운 룩을 제공하는 것. “고유한 방식으로 패션을 즐기는 여러 대륙의 각기 다른 문화권 여성들에 관한 아이디어에서 시작됐다”라고 시몬스는 설명했다. “파리와 프랑스라는 코드에 국한되지 않고, 세계 여러 나라들과 다양한 패션 문화가 어떤 방식으로 디올 하우스와 나 자신에게 영향을 미치는지 담고 싶었다.” 자유와 평등이 늘 함께인 것처럼 그는 아메리카, 아프리카, 아시아, 유럽이라는 네 가지 주제를 놓고 어느 한쪽에도 치우치지 않은 채 디자인 작업을 했다.
우선 대담하고 활동적인 여성상으로 대변되는 아메리카 테마부터 보자. 그래픽 요소들이 유난히 눈에 띄었는데, 검정과 주홍이 강렬하게 대비를 이루는 줄무늬 드레스를 비롯, 폭이 다른 여러 줄무늬가 두드러졌다. 이는 별무늬 엠브로이더리 장식과 어울려 성조기를 상징하는 듯했다. 여기에 커다란 스카프를 삼각형으로 연출해 서부 카우걸 이미지까지 가미했다. 윌리 반더페르(앤트워프에서 수학하던 시절부터 라프 시몬스와는 친밀했던 사진가)는 각기 국적이 다른 모델들을 가족사진처럼 한 화면에 가득 담았다. 참제비고깔꽃으로 도배한 벽면 앞에 앉아 있는 모델들은 더없이 아름답고 자신감 넘치는 모습! 마사이족의 문화에서 직접적인 영감을 얻은 아프리카 테마는 어떤 모습일까? 컷아웃 디테일로 몸매를 드러낸 드레이핑, 이국적 패턴의 멀티컬러 니트 드레스, 알록달록한 초커, 타투 장식까지 역동성이 담긴 독특한 룩으로 재해석됐다. 테리 리처드슨(그야말로 자유로움의 상징!)은 아무 소품도 없이 노란 금잔화로 만든 벽 앞에 모델들을 세웠다. 그런 뒤 우아한 포즈 대신, 익살스러운 표정과 몸짓으로 에너지를 표출했다. 이런 이미지는 언뜻 꾸뛰르 드레스와 어울리지 않을 듯하지만, 오히려 신선하고 세련된 결과물을 탄생시켰다.
구조적이면서 정교하고 과거와 현재의 균형이 돋보인 아시아 테마의 경우, 복잡한 구조로 재단된 옷들이 주를 이뤘다. 커다란 실크 원단을 래핑해 만든 오리가미 드레스, 앞면과 뒷면을 완전히 다르게 재단한 코트, 여러 조각의 옷감들을 이어 붙인 튜브 드레스 등등. 군데군데 활용한 기모노 모티브와 시보리 염색은 재패니즘에서 영감을 얻은 듯하다. 파올로 로베르시(더 이상의 수식이 필요 없는 빛의대가)는 진주알처럼 은은하게 빛나는 아스틸베 꽃송이 앞에서 특유의 서정적인 톤으로 모델들을 포착했다. 결과는? 시몬스가 꿈꾸는 아시아와 로베르시의 여인상이 만나 몽환적인 이미지가 완성됐다. 마지막 유럽 테마는 디올 역사와의 연결고리에 집중하면서 ‘파리지엔 꾸뛰르’로 상징되는 요소들을 다뤘다. 47년 무슈 디올이 선보인 ‘바 재킷’ 실루엣을 재해석한 드레스의 등장. 결국 시몬스가 유럽 테마에서 보여준 것은 무슈 디올의 여성상을 향한 오마주! 이를 가장 잘 이해하고 아름답게 표현할 사진가는 단연 패트릭 드마슐리에(세상 모든 여성들이 그의 앵글 앞에 서길 원한다). 이미 사진집 <Dior Couture>를 통해 디올 아카이브 드레스들을 촬영한 적 있는 그답게 시몬스의 숙녀들을 더없이 고혹적으로 표현했다.
디올 꾸뛰르 쇼가 열린 곳은 패션 수도 파리. 하지만 아메리카, 아프리카, 아시아, 유럽이 함께 디올 꾸뛰르를 공유했다. 바 재킷과 스포티한 블루종이 번갈아 등장하고, 우아한 이브닝 드레스에는 동양의 시보리 염색을 더했으며, 이국적인 색채와 그래픽 아이디어들이 조화를 이룬 무대였다. 너무 많은 요소로 인해 ‘패션 카오스’ 상태가 되진 않았느냐고? 시몬스의 의도가 ‘자유’였으니, 그야말로 아름다운 혼돈 그 자체! 역사와 전통의 틀에 갇힌 뻔한 꾸뛰르에 발상의 전환과 신선함을 더한 셈이다. “근본적인 질문은 어떻게 현실적인 꾸뛰르 컬렉션을 만들 것인가였다.” 라프 시몬스가 세 번째 꾸뛰르 쇼를 끝낸 뒤 설명했다. “그 해답은 고유한 문화와 개성을 지닌 여성들의 현실적 정체성에 초점을 맞추는 데서 찾았다. 현실 속 여자들에 맞춰 진화하지 않는다면 꾸뛰르는 사라질지 모른다!”
- 에디터
- 패션 에디터 / 임승은
- 포토그래퍼
- Willy Vanderperre, Terry Richardson, PAOLO ROVERSI, PATRICK DEMARCHELI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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