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 화보

파리에서 만난 로저 비비에의 두 파트너

2016.03.17

파리에서 만난 로저 비비에의 두 파트너

전통과 혁신을 하나의 궤도에서 운영하기란 말처럼 쉽지 않다. 그렇기에 로저 비비에는 요즘 더 특별하다.
이 슈즈 명문가를 위해 전통과 혁신의 깃발을 든 채 의기투합한
브루노 프리소니와 이네즈 드 라 프레상주를 파리에서 만났다.

스틸레토의 창시자로 지칭되는 로저 비비에는 60년간 수많은 슈어홀릭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하지만 98년 디자이너가 세상을 떠나자, 브랜드는 감쪽같이 잊혔다. 패션사에 남을 뻔한 이름을 되살린 것은 브루노 프리소니다. 그는 랑방, 크리스찬 라크로와, 지방시, 이브 생로랑 등을 거쳐 2003년 로저 비비에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임명됐다. 지난 10년간 그가 선보인 컬렉션은 특유의 활기 넘치는 디자인 덕분에 오랜 팬들을 다시 불러들였고, 젊은 고객들의 마음까지 사로잡았다. 일련의 과정을 프리소니와 함께하고 있는 파트너는 ‘프렌치 시크’의 대명사이자 한때 샤넬 라거펠트의 뮤즈였던 이네즈 드 라 프레상주. 모델, 스타일리스트, 스타일 아이콘으로 분주한 그녀의 또 다른 직책은 바로 로저 비비에의 홍보대사다. 두 사람의 완벽한 협업 덕분에 로저 비비에 하우스는 이제 제2의 전성기를 맞았다. 전 세계로 플래그십 스토어를 확장하고 있으며, 곧 서울에도 단독 매장을 오픈한다. 이를 기념해 <보그 코리아>는 생토노레 거리에 있는 로저 비비에의 아름다운 부티크를 방문했다. 그곳 2층에는 흰 벽을 배경으로 스케치가 가득한 프리소니의 공간, 그리고 분홍빛 방을 온갖 장식품으로 아기자기하게 꾸민 프레상주의 공간이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 이렇듯 정반대 취향을 보이지만 두 사람이 대화를 시작하자 서로를 얼마나 아끼고 또 닮았는지 알 수 있었다.

VOGUE KOREA(이하 VK) 사무실이 아주 근사하다. 처음 출근한 날을 기억하나?
BRUNO FRISONI(이하 BF) 화창한 날씨라 기분이 아주 좋았다. ‘로저 비비에’라는 역사적인 브랜드명과 방대한 아카이브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상태라 모든 것을 새로 시작해야 했다. 구두가 가득 쌓인 이탈리아 아파트를 발견한 기분? 성공해야 한다는 부담은 있었지만, 아파트의 모든 창이 활짝 열려 있는 것이 내게 무한한 가능성이 열려 있다는 의미로 여겨졌다.
INÈS DE LA FRESSANGE(이하 IF) 창문이 활짝 열린 아파트로 초대됐을 때 나 역시 무척 즐거웠다. 나는 생전의 비비에와 잘 아는 사이인 데다 그의 구두를 매우 좋아했기에 주저 없이 합류했다. 사실 ‘홍보대사’라는 직책은 거창하고 우스꽝스럽다. 그저 프리소니와 함께 일하는 것이 즐거울 뿐.

VK 일단 아카이브를 탐구하는 데 많은 시간을 보냈을 것 같다.
BF 비비에의 작품 세계에 경의를 표하는 87년 회고전에 다녀온 후부터 그의 디자인에 매료돼 있었다. 당시 카탈로그를 소중히 간직하고 있을 정도. 아카이브를 직접 보니 그는 소재, 기술, 주제 등 모든 면에서 남들과 다른 시도를 즐겼다. 그래서 그를 ‘구두의 장인’으로 부른다.

VK 최근 컬렉션에선 버굴힐, 메탈 버클 등 아카이브를 재해석한 요소들이 특히 눈에 띄었다.
BF 아카이브에서 아름다운 것을 발견해 그대로 복제하는 것은 편한 방법이지만 전혀 흥미롭지 않다. 비비에의 영혼과 철학을 살리는 동시에 나만의 시각으로 재해석하려고 노력한다. 그는 늘 자유로운 마음을 유지하길 원했다. 나 역시 전적으로 동의한다.

VK 어느덧 이곳에서 10년째를 맞았다. 당신의 로저 비비에는 어떤 브랜드인가?
BF 재미있고 섬세하며 관능적인! 부티크를 방문하는 고객이 늘 행복하길 바라기 때문에 웃음을 줄 수 있는 구두를 만들고 싶다.
IF 정말 그렇다! 로저 비비에는 모두가 원하는 창의적이고 열정적인 브랜드다. 트렌드에 민감한 패션 피플들부터 나이 지긋한 할머니들까지 로저 비비에 구두를 좋아한다. 굉장한 장점 아닌가. 품질이 뛰어난 제품을 만들 순 있지만 창의적으로 접근하는 일은 쉽지 않다. 물론 뭐니 뭐니 해도 중요한 건 열정이다.

VK 로저 비비에 웹사이트에는 지금 두 사람이 전한 특징들이 그대로 담겨 있다. 일러스트, 영상, 게임 등등 모두가 재미있고 창의적인 아이디어들이다.
BF 웹사이트는 전적으로 이네즈의 솜씨다!
IF 재미있으면서도 세련된 느낌을 원했다. 특히 ‘이네즈의 친구들’이란 카테고리가 인기가 많다. 전 세계 친구들이 각 도시의 재미있는 매장들을 소개하는 코너다. 물론 다른 브랜드의 매장도 소개한다. 진짜 우아함이란 이런 게 아닐까?

VK 웹사이트의 깜찍한 패션 필름을 통해 올 봄여름 컬렉션을 감상할 수 있었다.
BF 모든 컬렉션은 아이디어들의 콜라주다. 사진 작품에서 많은 영감을 얻는데, 이번에는 클림트 작품의 추상적인 꽃무늬와 메탈릭한 모티브에서 시작했다.

VK 얼마 전 공개한 가을 컬렉션은 유난히 눈부신 아이템들이 많았다.
BF 중동의 시장 풍경에서 영감을 얻었다. 보석처럼 반짝이는 것보다 실크처럼 은은하게 빛나는 느낌을 살리길 원했다. 밥 딜런처럼 차려입은 틸다 스윈튼의 모습을 상상하면서 만든 컬렉션!

VK 이번에 론칭한 ‘이네즈 백’에 대해 듣고 싶다.
IF 비로소 내 인생이 완성된 느낌? 가방이 나온 순간, “이제 할 일은 모두 마쳤다!”고 외쳤다.
BF 나의 제안으로 시작된 프로젝트지만 이네즈는 이미 준비하고 있었던 것처럼 완벽하게 해냈다. 그녀를 닮아 아주 클래식하면서도 세련된 디자인이다. 다양한 크기와 소재, 색상으로 선보일 예정이다.

VK 이네즈 특유의 프렌치 스타일이 느껴지는 가방이다.
IF 내가 쓴 <파리지엔 시크>를 읽어보면 누구나 나처럼 스타일링할 수 있다. 당신에게도 한 권 선물하겠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어떤 언어를 사용하나?

VK 당연히 한국어를 쓴다.
BF 하하. 도대체 무슨 질문이 그런가? 그럼 한국에서 일본어를 쓰겠나?
IF 하하. 듣고 보니 그렇다! 사실 한국에 대해 모르는 게 많다. 6월, 서울 매장 오픈 때 꼭 방문하고 싶다.

VK 서울에서 만날 수 있기를! 참, 미팅이 있다고 들었는데 늦은 건 아닌가?
BF 아직 괜찮다. 이렇게 중요한 인터뷰를 위해서라면 미팅 시간은 얼마든지 조절할 수 있다.
IF 우리는 인터뷰에 인색한 편이지만 각 인터뷰에 최선을 다한다. 그런 게 하이패션의 자세 아니겠나? 고급 부티크에서는 많은 고객을 받지 않는 대신 한 명을 위해 최선을 다한다.

VK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다. 이제 ‘로저 비비에 걸’의 일상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그녀는 어떻게 하루를 시작할까?
BF 눈 뜨자마자 시원한 물을 한 컵 마신다.
IF 그다음 아이들에게 뽀뽀한다. 구두를 신은 뒤엔 무슨 옷을 입을지 고른다.
BF 꽤 활동적인 여성일 것이다.
IF 게으르지만 구두를 자랑하고 싶어 어쩔 수 없이 일하러 나가는 여성일 것!

VK 그녀가 자랑하는 구두는?
IF 비비에가 발명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스틸레토! 아무리 심플한 옷을 입어도 스틸레토 한 켤레만 있으면 완벽한 변신이 가능하다. 반드시 뾰족한 힐일 필요는 없다. 단신의 여자들은 높은 구두를 신어야 한다는 편견이 있지만, 이는 잘못된 생각이다.
BF 이브닝 파티엔 플랫을 신는 게 더 좋을 수 있다. 모든 사람들이 높은 구두를 신기에 오히려 낮은 구두가 눈에 띌 테니 말이다.
IF 가끔 자신이 사람이 아니라 옷걸이라고 생각하는 여자들이 있지만 자유로워 보일 때 가장 아름다운 법이다.

VK 개인적으로 킬힐을 좋아한다. 하지만 올가을 컬렉션의 낮은 버굴힐은 한 번쯤 신어 보고 싶었다.
BF 기쁜 소식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패션지에서 근무하는 에디터들부터 킬힐을 과감하게 포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3.5~5cm 정도의 버굴힐은 다리 선을 더 아름답게 만들어준다. 쉼표를 닮은 굽이 관능적인 느낌을 준다.

VK 가방은 어떤가? 여자들이 가방에 집착하는 이유는 뭘까?
IF 사이즈에 상관없이 착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자가 가방을 새로 사는 일은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는 것과 같은 의미다. 합리적인 사고방식이 아니란 건 나도 잘 안다. 하지만 가방 하나로 울고 웃는게 여자다.
BF 이네즈처럼 자유로운 여성조차 가방을 어찌나 중요하게 여기는지! 정말 놀라울 정도다. 그녀는 만날 때마다 새로운 가방을 들고 나오는 것 같다. 솔직히 나는 여름에 한 번, 겨울에 한 번 가방을 바꾼다. 가방에 든 모든 물건을 어떻게 매일 옮기는지!
IF 바로 그 과정이 재미있다. 옷에 어울리는 가방을 찾아 소지품을 차곡차곡 정리해 넣는 과정을 즐긴다. 가방 하나로 그날의 마음이나 태도가 달라진다.
BF 내게 그런 역할을 하는 건 백이 아니라 헤어스타일인 것 같다.
IF 그게 바로 남녀의 차이 아닐까?

VK 그렇다면 로저 비비에의 구두와 가방은 디자인이 어떻게 다른가?
BF 개인적으로 구두 디자인을 더 좋아한다. 구두는 전체적인 실루엣을 바꾸기 때문이다. 구두와 가방이 기능적으로 달라서 만드는 방식은 완전히 다르지만, 기본적인 접근 방식에는 차이가 없도록 노력한다.
IF 구두는 기술적 측면에서 만들기 힘든 아이템이다. 옷은 얼마든 저렴한 가격에 꽤 괜찮은 제품을 살 수 있지만, 구두는 쉽지 않다. 얼마 전 딸이 싸이하이 부츠를 사고 싶어 했다. 정말이지 며칠 동안 모든 온라인 사이트를 뒤졌지만 적당한 것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런 면에서 브루노는 장인 정신으로 제대로 된 구두를 만들고 있다.

VK 구두와 가방 가운데 하나만 살 수 있다면?
IF 단연 구두! 적당한 가방이 없다면 종이봉투를 들고 다녀도 멋질 수 있지만 이상한 구두를 신고 다니는 것보단, 맨발이 낫다.

VK 두 사람의 대화만 들어도 서로 얼마나 아끼는지 느껴진다. 함께 일할 때 가장 좋은 점은 뭔가?
BF 웃음이 끊이지 않는다는 것! 물론 세세한 부분에 있어 서로 의견이 다른 경우도 있다. 하지만 하우스의 비전에는 완벽하게 동의하기에 큰 문제는 없다.
IF 의견이 다를 때도 나는 늘 브루노가 옳다는 생각을 지니고 있다. 마음속으론 동의하지 않았더라도 6개월 후에 돌이켜보면 그가 늘 옳았다. 샤넬 하우스가 라거펠트에게 모든 것을 맡기듯 로저 비비에 하우스는 브루노를 무조건 신뢰하고 따른다.
BF 디자이너들은 대체로 조언을 듣기 싫어한다. 하지만 때론 진심 어린 조언을 듣는 게 필요하다. 이네즈는 내게 많은 이야기를 전해준다. 그것이야말로 내게 큰 도움이 된다.
IF 나 역시 그의 고객이기에 가능하다.
BF 그건 이네즈가 두려움이 없어서다. 이곳에서 나를 어려워하지 않는 유일한 사람이다. 하하.
IF 브루노의 말도 일리가 있다. 하지만 40년간 패션계에서 일한 사람으로서, 뭐든 고객의 입장에서 보는 게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가령, 내가 직접 신어보니 비나 눈이 오는 날에는 로저 비비에를 신기 어렵다는 걸 느꼈다.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브루노는 자신만의 레인 부츠를 뚝딱 만들었다. 그가 창의적인 생각을 할 수 있도록 수시로 다양한 의견을 제시하는 게 내 역할이다.

VK 두 사람이야말로 완벽한 파트너다. 과연 패션계는 두 사람을 어떻게 기억할까?
IF 나를 기억하지 않아도 된다! 어차피 ‘이네즈 백’이 있어 기억할 수밖에 없겠지만. 하하! 이네즈라는 인물이 영원할 필요는 없다. 다만 프렌치 시크는 영원하길 바란다. 돌이켜보면 패션계에서 많은 경험을 했고 꽤 운 좋은 삶을 살았다. 여전히 어딘가는 10대 철없는 소녀지만 이젠 두 딸의 엄마로서 온전히 행복하고 싶다.
BF 구두를 만든 지 30년이 넘었지만 여전히 구두를 만들 때 가장 행복하다. 앞으로도 행복하게 이 일을 하며 주위에 행복을 전할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에디터
    패션 에디터 / 임승은
    포토그래퍼
    Francois Coquerel
    기타
    Courtesy of Roger Vivi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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