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 아이템

무기여 잘 있거라!

2016.03.17

by VOGUE

    무기여 잘 있거라!

    당신이 애지중지하는 구두와 가방이 어쩌다 흉기로 둔갑했을까!
    하지만 우리 여자들의 일상 가운데 하이힐의 굽과 묵직한 가방이
    무기로 돌변해야 할 이유와 상황은 분명히 존재한다.

    (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으로) 골드 프레임 클러치는 알렉산더 맥퀸, 골드 반지와 팔찌는 필립 오디베르, 앵클 스트랩 하이힐은 스튜어트 와이츠먼, 빨간색 스터드 장식 펌프스는 크리스찬 루부탱, 총알 장식 뱅글은 마위, 체인 모양 굽이 특징인 펌프스는 톰 포드.

    가방과 구두. 하나는 주로 드는 물건이요, 나머지 하나는 절대적으로 신는 물건이다. 생활필수품쯤 되는 두 개를 패션의 경계 안으로 끌어들이고 나면 졸지에 격이 달라진다. <보그> 오디언스들의 귀에 대고 가방과 구두의 의미에 대해 설명할 필요는 없겠다. 그들은 패션에 관해선 전문가 뺨치는 사람들이니까. 하지만 한때 ‘요 아이’나 ‘쟤’로 의인화됐던 두 개의 물건이 사람 잡아먹는 흉기로 둔갑한다면? 지금부터 여러분은 가방과 구두의 납량특집 버전을 접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 기사를 읽고 난 후면, 화장대 위에 떡하니 놓인 가방이 예사롭지 않게 보일 듯. 또 현관에 마구잡이로 벗어놓고 온 하이힐 역시 얼른 달려가 가지런히 놓고 싶을지 모르겠다.

    우리는 얼마 전 뉴욕의 어느 엘리베이터 안에서 일어난 폭행 사건을 잊지 못한다. CCTV 영상에 따르면,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긴 드레스 차림의 숙녀와 턱시도 신사가 들어온다. 그런데 뒤따라 들어온 짧은 머리의 또 다른 여인이 남자를 향해 뭐라고 마구 쏘아붙이더니, 속된 말로 ‘개 패듯’ 패는 게 아닌가. 그러자 곁에 있던 덩치가 산만한 경호원이 팔다리를 마구 휘두르는 여자를 말리느라 진땀을 빼는 눈치(놀랍게도 긴 드레스의 여인은 이 싸움에 몹시 태연하다). 그런데 여인이 남자를 사지로 가격할 때 동원된 ‘무기’가 있었다. 나무 몽둥이나 쇠파이프? 골프채? 혹은 45구경 권총? No, 안냐 힌드마치의 클러치, 스튜어트 와이츠먼의 하이힐이다. ‘난 플라스틱 백이 아니라구요!’라는 영어 문구가 적힌 에코백 브랜드? 맞다. 요새 케이트 미들턴, 미로슬라바 듀마, 메릴 스트립 같은 유명 인사들이 자주 드는 클러치로 유명하다. 스튜어트 와이츠먼이라면 자하 하디드와 함께 플래그십 스토어도 낸 구두 디자이너? 그렇다. 케이트 모스도 광고 모델로 등장한 데다 김희애가 <밀회>에서도 신고 나온 구두 브랜드다.

    대판 싸운 남녀는 제이 지와 그의 처제 솔란지, 그리고 남편이 일방적으로 여동생에게 맞고 있을 때 팔짱 낀 채 관망만 하던 여인은 비욘세. 전 세계에서 모르는 사람 빼고 다 아는 ‘처제의 형부 구타 사건’ 주인공은 보시다시피 슈퍼스타들이다. 이 막장 실화의 주인공들 덕분에 덩달아 이름을 날린 게 안냐 힌드마치와 스튜어트 와이츠먼. 대체 고상하기 짝이 없는 하이패션이 어쩌다 무기가 됐고 흉기로 돌변하게 됐을까?

    하이패션의 명예 추락 같은 사건은 현실에서도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다. 뉴욕의 엘리베이터까지 갈 필요도 없다. 6월 초, 세월호 희생자를 추모하는 주말 촛불집회 현장에서도 하이힐이 둔기로 돌변했다. 몇몇 참가자들이 돌발적 청와대 행진을 시도하며 불법 시위로 번질 무렵, 어느 시위 참가자가 의경 두 명의 머리를 구두의 뾰족한 굽으로 내리친 것. 결국 청년 두 명은 머리에 피를 흘리는 부상을 입고 말았다. 하긴 ‘하이힐 폭행녀’ 동영상 때문에 네티즌들이 경악한 적도 있다. 어느 온라인 커뮤니티에 올라온 정확한 제목은 ‘부산 클럽 하이힐 폭행녀’. 제목이 암시하듯, 어느 나이트클럽 화장실에서 두 여인이 머리채를 휘어잡고 대판 싸우는 영상이다. 여자들이 싸울 땐, 삿대질로 시작해 뺨을 몇 대 휘갈긴 뒤 상대의 머리채를 붙잡은 다음 하이힐을 벗어 가격하는 게 순서다(서로 쳐다보는 게 기분 나쁘다는 이유에서 일파만파 커진 사건).

    남자들을 무력하게 만드는 ‘하이힐 폭행녀’들은 곳곳에 도사린다. 심지어 여고생들마저. “SNS 설전이 패싸움으로 번져 여고생이 자신의 하이힐로 상대를 마구 가격해 상처를 입히는 등 닭발집 혈투가 발생.” 수원에서 발생한 하이힐 사건의 기사 제목이다. 평소 별로 친하지 않은 열여섯 살짜리 여고생들은 서로의 페이스북에 ‘뒤룩뒤룩’ 등의 자극적이고 공격적인 댓글을 달며 싸움을 시작했다. 댓글 싸움으로도 충분치 않았는지, 소녀들은 “오냐, 그래! 맞장 뜨자”라는 심정에 어느 닭발집에서 만났다. 소녀 두 명은 머리채를 잡고 얼굴을 할퀴는 것으로도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결국 패싸움으로 번졌다. 이 가운데 어느 여고생이 하이힐로 상대의 귀 뒷부분을 쳤다는 것. 요즘처럼 스터드가 잔뜩 박힌 반지라도 잔뜩 끼고 있었다면 더 끔찍했을 것이다.

    닭발집 하이힐 싸움이 들으면 울고 갈 사건이 또 있다. 수원의 어느 나이트클럽에서 자신과 사실혼 관계의 남자가 딴 여자랑 술이 떡이 되도록 취해 놀고 있는 걸 본 여인이 격분해 12cm짜리 하이힐로 상대 여자를 폭행한 것. 두 사람이 난투극을 벌이던 중 하이힐로 상대를 폭행해 한쪽 눈이 실명한 일도 있었다. 결국 폭력행위 처벌법상 ‘집단 · 흉기상해죄’가 적용돼 징역 2년 6개월 선고(여성의 하이힐도 ‘위험물건’에 해당해 폭행도구로 사용 시 가중처벌해야 한다는 판결). 다들 지상으로부터 여자의 발 뒤꿈치를 높이 떠받들던 하이힐의 위신을 땅바닥으로 추락시킨 사건들이다. 언젠가 어느 포털 사이트의 Q&A에 중 2 학생의 질문이 올라온 적 있다. 수업 시간에 선생님이 떠드는 아이들을 나오게 한 뒤, 하이힐로 학생의 팔을 찍었다는 것. 그러니 교육청에 신고해야 하느냐는 질문이었다. 당신은 그 중학생에게 어떤 대답을 해줄 수 있겠나?

    한편 여자가 남자의 눈을 구두 굽으로 내리찍어 죽게 만든 영화 <위험한 독신녀>식 살인 사건이 미국에서 실제로 발생했다. 남자 친구와 말다툼하던 여자가 분에 못 이겨 하이힐 굽으로 그의 머리와 얼굴을 수십 차례 가격해 살해했다는 것. 언론 보도를 인용하자면 호러 무비가 따로 없을 정도다. “여인은 남자를 꼼짝 못하게 붙잡은 뒤, 그가 저항하지 않았는데도 14cm쯤 되는 스틸레토 구두 굽으로 머리를 내려쳤다. 무려 25차례 이상.” 현장 출두한 경찰의 증언을 덧붙이자면? “피범벅이었던 남자의 얼굴 상태로 보아 총에 맞은 줄 알았다.” 결국 재판장엔 파란색 스웨이드의 하이힐이 증거물로 제시됐다. 여인은 끝내 무기징역. ‘킬힐’이 괜히 킬힐이 아닌 것이다.

    뾰족한 굽을 장착한 구두에 비해 가방의 활약상은 좀 얌전한 편이다. 게다가 괴한이나 치한 앞에서만 무기로 돌변하니 여성 친화적인 흉기다(물론 남자 친구가 속을 썩이면 여자들은 손에 든 가방으로 그를 마구 치곤 하지만). 몇 년 전 세상이 시끄러웠던 강호순 연쇄살인을 계기로 어느 보안경비업체가 여성 신변 보호를 위한 수칙을 발표한 적 있다. 이 수칙 가운데 가장 효과적인 방어 도구가 바로 가방이라는 것. 경비업체 관계자는 “묵직한 가방으로 상대 얼굴을 치면 갑작스러운 반응에 치한이 놀랄 수 있다”며 바로 이때 급소를 공격하라고 덧붙였다. 경찰서에서 계몽하는 여성범죄예방 상식에도 가방은 무기를 자처한다. 새벽 귀갓길엔 꼭 휴대전화를 손에 지니고, 콜택시는 지역에서 지정한 것을 타야 하며, 급할 땐 핸드백을 무기로 사용하라는 것. 혹시라도 범죄자를 만났다면 손에 든 가방으로 상대의 얼굴을 치고 도망가라는 얘기다.

    뉴욕 한복판의 엘리베이터 안에서 일어난 사건 현장으로 돌아가보자. 처제가 형부를 공격할 때 동원된 안냐 힌드마치의 ‘Crisp’ 백은 예상대로 대히트였다. 온라인 쇼핑 사이트인 네타포르테를 비롯해 170만원쯤 하는 가방을 파는 모든 곳에서 매진. “이 클러치가 메트 갈라 이후 핫케이크 팔리듯 팔리고 있다”고 쇼핑 사이트들이 실시간 전했다. 리타 오라, 엠마 왓슨도 똑같은 클러치를 쥐고 공식 석상에 섰지만, 솔란지 사건만큼 ‘완판’을 기록하거나 대기자 명단을 거느린 적은 없었다. 심지어 ‘Worth Fighting For’라는 문구까지 넣은 풍자 광고가 나올 정도. 처제가 형부를 걷어찰 때 신었던 스튜어트 와이츠먼의 ‘Nudist’ 슈즈? 400달러쯤 되는 이 구두 역시 주문 폭주였다.

    지금껏 가방과 구두는 하이패션이라는 탑의 맨 꼭대기에 신성하게 놓인 제물이었다. 그런데도 느닷없이 헐크처럼 돌변할 때가 있어 우아한 외모에 맞지 않게 불명예스러운 것도 사실이다. 가방 역시 소지품 보관을 초월해 ‘잇 백’이라는 면류관까지 하사 받으며 우월한 나날을 즐겼다. 하지만 결정적 순간에 펀치를 날리는 도구로도 쓰인다. 물론 여자들이 치한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고 방어하기 위한 안전장치 겸 호신용품으로 쓰인다면 오케이!

      에디터
      패션 에디터 / 신광호, 스타일 에디터 / 임승은
      포토그래퍼
      HWANG IN WOO
      모델
      최은숙
      스탭
      네일 / 슈애(SuuEtt), ILLUSTRATION / YIM SEUNG Y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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