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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다니엘의 반전

2016.03.17

by VOGUE

    최다니엘의 반전

    요즘 한창 어둠을 배회하며 연기를 하는 중이지만, 최다니엘의 속내는 따로 있다.
    드라마틱한 변화 따위를 생각하면 안 된다. 지금 그냥 평안해서 아름다운 길을 꿈꾸는 그다.

    회색 톤의 패치워크 재킷과 팬츠는 톰 브라운(at 10 꼬르소 꼬모), 검정 니트는 덴함(at 비이커), 미러 선글라스는 리에티.

    이 남자에게 모난 구석을 찾기란 쉽지 않다. 너털웃음 가득한 말투는 가끔 능글맞을 정도로 달달하고, 웃음기 밴 얼굴은 화를 모르는 사람 같기도 하다. 그가 출연했던 작품들을 떠올려봐도 로맨틱한 것들이 우선이다. 여자에 서툴러 연애조작단에 의뢰를 했던 영화 <시라노: 연애조작단>의 ‘상용’이나 밀고 당기기에 지쳐 가슴 아파했던 드라마 <연애를 기대해>의 ‘차기대’ 같은 남자 말이다. 깔끔한 수트나 뿔테 안경이 어울리는 댄디한 룩. 차림도 그리 변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라디오의 남자다. 청취자의 사연을 읽으며 맞장구를 쳐주고, 노래를 골라 듣는 사람의 마음을 달랜다. 지난해 10월부터 방송하고 있는 오전 11시 라디오 프로그램 <최다니엘의 팝스 팝스>는 격의 없이 편안한 방송이다. 듣다 보면 그냥 친구와 대화하는 듯한 기분이 든다. 때로는 장난치고 또 가끔은 위로도 하면서. 최다니엘은 분명 이런 부드러움에 능한 남자다.

    하지만 그가 출연한 작품들이 매번 부드럽고 말랑말랑하진 않았다. 오히려 영화 속 그는 많이 까칠했고 현실적이었으며, 때로는 지질하고 구차했다. 그리고 최근엔 어둠의 언저리를 배회하고 있다. 임창정과 투 톱으로 나섰던 영화 <공모자들>은 갑자기 실종된 아내를 찾기 위해 지옥 불을 서성이는 작품이었고, 6월 방송을 막 마친 드라마 <빅맨>은 아픔을 권위와 욕망으로 가린 채 살아가는 남자의 이야기였다. 7월 크랭크인 한 영화 <악의 연대기> 역시 온화하고 유쾌한 남자와는 거리가 있다. 사소한 사건 하나가 시간이 지나면서 불고 불어나 엄청난 복수로 변해간다. 돌연 선 굵은 연기에, 남자들의 드라마에 빠진 걸까 싶다. 심지어 지난해 출연한 영화 <열한시>에서 최다니엘은 자신의 트레이드마크 같았던 안경을 벗기도 했다.

    대부분의 배우들이 일종의 선전포고를 하듯 필모그래피를 쌓곤 한다. 어디 진출작, 터닝포인트가 될 작품, 회심의 변신 영화 같은 것 말이다. 아무리 연기파 배우라 해도 대중 앞의 연예인은 이미지로 기억되기에 어쩔 수 없이 택하는 전략이다. 잊히지 않기 위해선 명확한 구두점이 필요하다. 하지만 최다니엘이 연기 변신을 위해 이미지 탈피를 노리며 작품을 고르는 타입은 아니다. 그런 셈과는 좀처럼 어울리지 않는다. 2008년 드라마 <그들이 사는 세상>으로 얼굴을 알려 어느덧 6년. 최다니엘은 그저 무심한 듯 심드렁하게 한 작품, 한 작품 쌓아간다. 두루뭉술한 자신의 기질 그대로, 하지만 꽤 많은 질문을 품은 채 말이다. 분명 드라마틱한 재미, 극적인 반전은 없다. 어제가 오늘 같고 내일도 오늘 같을지 모른다. 하지만 진중함, 그리고 여유로움에 대한 믿음이 있다. 모나지 않은 길의 평평함은 꽤 치열한 시간 속에서 만들어지는 법이다. 최다니엘 역시 우리가 보지 못했을 뿐 그런 시간을 살았거나 살고 있지 않을까? 그게 이 느긋한 배우의 전략 아닌 전략일지 모른다.

    컬러 블록 셔츠와 네이비색 팬츠는 우영미, 밤색 구두는 어그, 검정 뿔테 안경은 리에티, 레트로 바 스툴은 인디테일.

    영화 <악의 연대기>가 촬영에 들어갔다고 들었어요. 어떤 영화인가요?
    한 형사의 심리적, 내적 갈등이랄까요. 형사가 실수 하나를 해요. 누구나 할 수 있는 실수인데 그게 시간이 지나면서 일이 크게 번져요. 피해를 봤던 사람의 복수심이 눈덩이처럼 불어나죠. 누가 나쁜 놈이고, 누가 착한 놈이고를 따질 수 없는 영화예요. 상황 자체가 안타깝죠. 선도 없고, 악도 없어요. 그냥 인간만 있어요. 그게 이 영화의 매력이죠.

    근래의 작품 선택을 보면, 평소의 부드럽고 로맨틱한 이미지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게 아닌가 싶기도 해요.
    예전엔 그런 맘이 있었어요. 근데 어느 순간 그런 게 뭐가 중요한가 싶더라고요. 굳이 비유하자면 우리가 처음 만나 김치찌개를 먹었어요. 그리고 또 한 달 뒤에 김치찌개를 먹어요. 그럼 저를 본 상대방은 ‘저 사람 김치찌개 좋아하는구나’ 하겠죠? 근데 일주일 뒤에 스파게티를 먹었어요. 그럼 상대방은 ‘날 배려해준 건가? 뭔가 심경에 변화가 있었나?’ 한단 말이에요. 근데 저는 그 두 번의 김치찌개와 한 번의 스파게티 사이에도 계속 식사를 했어요. 그저 밥을 먹었을 뿐인 거죠. 연기도 마찬가지 아닐까 싶어요.

    얼마 전 종영한 드라마 <빅맨>처럼 좀 악한 연기를 할 땐 준비하는 과정이나 연기하는 톤이 달라지나요?
    일단 <빅맨>의 ‘강동석’은 상류층, 재벌이기 때문에 그걸 가장 중점적으로 생각했어요. 모든 걸 통제하며 살았을 거고, 한계를 느껴본 적은 없을 거고, 항상 높은 위치에 있을 테니 사람을 내려다볼 거고. 그런 걸 보여드리려 했죠. 사실 말투나 눈빛 이런 건 잔가지에 불과해요. 보는 입장에선 그런 게 더 부각돼 보이지만, 하는 입장에선 그런 잔가지는 그냥 놔두면 돼요. 뿌리를 잘 다져야죠.

    준비를 꼼꼼히, 열심히 하는 배우라고 알고 있어요.
    대본을 많이 들여다보지는 않아요. 이것저것 생각나는 것들을 적고 체크해요. 그리고 대본에 없는 인물의 습관, 시간 같은 걸 생각하죠. 가령 화장실 문은 어느 쪽 손으로 열까, 눈을 깜박이거나 입술을 깨물거나 다리를 떨지는 않을까 같은 거요. 이런 디테일이 그 인물이 살아온 삶을 드러내기도 하잖아요. 마치 캐릭터의 자서전을 쓰듯이 공책에 메모를 해요.

    남자 배우들 중엔 운동선수 같은 경쟁의식을 가지고 도전하는 경우도 많지요. 그런데 항상 느긋하고 여유로운 인상입니다.
    저도 그런 걸 가졌어야 했나 봐요. 그래야 더 잘됐을 텐데. 다시 태어나야 해요.(웃음) 그냥 방식이 다른 것뿐이죠. 제 스타일에 어울리는 연기가 있을 거고, 또 다른 분들의 영역이 있는 거고. 다만 저도 제가 소중하다 여기는 것들엔 스스로 떳떳할 수 있을 만큼 열심히 해요.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게 아니라 스스로를 위한 것들이에요.

    ‘올해의 목표는 이거다’ ‘10년 후엔 어떤 배우가 되겠다’ 이런 생각은 전혀 안 해요?
    계획을 잘 못 세워요. 그래서 여행도 잘 못 가죠. 뭐든 즉흥적인 게 커요. 그래서 이러다 나중에 굶어 죽는 거 아닌가 하기도 하죠.(웃음) 빨리 철이 들어야 하는데. 계획한다는 건 아이보다 어른에 가깝잖아요. 근데 전 너무 안 해 버릇해서 잘 못하겠어요. 나중에 후회로 남으면 어쩌죠?

    배우를 평생 직업으로 삼아도 되겠다, 이런 생각은요?
    그런 생각은 별로 안 하고 살았던 것 같아요. 그래서 인터뷰를 할 때면 스스로 ‘난 뭘 하면서 살고 있지?’란 질문을 스스로 던지기도 해요. 제게 배우, 연기는 큰 게 아니었나 봐요. 아, 정정할게요. 물론 큰 거죠. 근데 제 안에서는 그렇지 않았어요. 더 큰 추상적인 게 항상 먼저 있었고, 그거에 비하면 먹고사는 문제는 작은 거였죠.

    추상적인 거라면 뭔가요?
    정말 웃을지도 몰라요. 음… 난 왜 태어났지?

    하하. 죄송해요. 웃지 않으려 했는데. 그래서 지금은 어느 정도 풀린 의문인가요?
    그냥 살면서 찾는 것 같아요. 대부분 이런 질문 같은 건 덮어놓고 살잖아요. 그러다 누구는 결혼생활과 가족에서, 권력과 명예에서, 혹은 재산에서 찾고요. 전 그게 신앙이었던 것 같아요. 이렇게 절로 자라고 움직이는 것들이 되게 신기하더라고요. 하늘은 왜 높고, 비는 어떻게 내리고, 난 왜 태어났지? 이런 고민요. 아, 창피하다.

    호기심이 많은 편인가요?
    네. 호기심은 많은 편이에요. 스스로 이해가 안 되면 납득을 못해요. 고집이 있어요.

    예전 인터뷰들을 읽고 보니 <지붕 뚫고 하이킥> 끝나고 꽤 힘들었다는 얘기가 많았어요. 그건 역시 비슷한 이유 때문인가요?
    네. 예전부터 그런 생각은 많이 했는데 그냥 좀 덮어놓고 살다가 <지붕 뚫고 하이킥> 무렵 다시 그 생각이 들었죠. 운이 좋아서 인기를 얻고 잘됐는데 이게 괜찮은 건지. 편안해지긴 했는데 평안하진 않았어요. 이게 다 뭘까라는 생각이 들었고. 가졌기 때문에 잃을까 노심초사하기도 했어요. 주변 환경, 사람들과의 관계가 이전과는 달라지니까 불안해진 거죠. 처음으로 위기의식이 왔어요.

    지금 뒤돌아보면 어때요?
    되게 열심히 한 것 같아요. 그리고 한편으로는 좀더 가져도 되지 않았을까, 보여지는 것들을 더 챙길 수도 있지 않았을까 생각은 해요. 실제로 그럴 수 있는 기회도 있었고요. 근데 저는 그냥 제 삶을 생각할 수 있는 여유를 택한 게 아닌가 싶어요.

    검정 밀리터리 재킷은 프라다, 네이비색 티셔츠는 우영미, 브라운색 체크 팬츠는 에트로, 검정 로퍼는 구찌, 호피 뿔테 안경은 리에티.

    기본적으로 사색가 스타일인가 보죠?
    단어가 적합한 게 뭐가 있을까요? 성찰? 체크? 점검? 아무튼 그런 걸 종종 해요. 배우 일만 해도 좀더 전투적으로, 운동선수들처럼 밀어붙여야 하는 구석도 있는데, 전 그런 욕구가 별로 없어요. 자신이 불행하다고 생각하면 그걸 벗어나려고 더 욕심부리고 전투적으로 달리잖아요. 근데 전 제가 불행하다 생각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어요.

    타인의 충고에도 거의 영향을 받지 않을 것 같아요.
    외골수예요. 오히려 남들이 살기 위해 치열하게 생각한다면, 저는 혼자만의 생각, 공상, 몽상, 이런 거에 치열해요.

    그래도 작품에 들어가면 어쩔 수 없이 치열해지잖아요.
    그건 왜 그럴까요?(웃음) 돈을 받고 일하는 거니까, 직업적인 면도 있고. 필이 꽂혀 하는 것도 있는 것 같고. 만약 제게 다른 재능이 있었다면 저는 연기 안 했을 거예요. 제가 게을러서 그 다른 재능을 못 찾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연기가 유일한 재능이라고 생각하니까 나름대로 절실하게, 전투적으로 하고 있지 않나 싶어요. 이것마저 못하면 나는 왜 사나? 이런 생각. 남하고 경쟁하는 게 아니고 스스로 열심인 것. 그래서 남들이 제 연기 이상하다고 욕을 해도 저는 제가 생각했을 때 최선이면 ‘잘했는데요. 좋은데요’ 막 이래요. 되게 이기적이에요.

    배우 안 했으면 뭘 했을까요?
    그런 건 없어요. 어릴 때부터 배우가 될 것 같았고, 근거 없는 자신감이 가득했어요.(웃음) 왜인지는 모르겠는데… 왜 그냥 중학교 때 ‘나는 키가 클 거야’ ‘성인 되면 180cm 될 거야’라 생각하는 거 있잖아요. 긍정이라기보다는 터무니없다? ‘지금 여자 친구가 없는 건 어려서이기 때문이고 나중에 어른 되면 생길 거야’ ‘크면 맥주에 통닭 먹을 수 있을 거야’ 이런 거요.

    방금 ‘30대엔 어떤 남자가 돼 있을 것 같나요’란 질문을 하려 했어요. 근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좀 바꿔야 할 것 같아요. ‘이런 사람은 되지 말아야지’ 같은 게 있나요?
    음… 그게 잘못되었다는 걸 알았는데 의지박약이라, 게을러서 고치지 않았을 때 불편해하는 마음, 양심에 인두를 지진 듯한 느낌을 모른 체하며 살고 싶진 않아요. 물론 실수도, 나쁜 짓도 할 수 있죠. 근데 그것에 대해 양심의 가책을 느낄 줄 아는 사람이었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요즘 행복하세요?
    행복하기도 하고 감사하기도 해요. 예전엔 외로웠는데 이젠 그런 생각 별로 안 하고. 많은 부분이 여유롭고 풍성해진 것 같아요.

      에디터
      피처 에디터 / 정재혁(JUNG, JAE HYUK)
      포토그래퍼
      AN JI SUP
      스탭
      스타일리스트/서수경, 헤어 / 김혜연, 메이크업 / 김범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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