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그> 복싱 장으로 초대된 매력만점 차세대 톱 모델들 2
송경아, 장윤주, 한혜진, 이현이, 이혜정의 뒤를 이을 차세대 모델들이 최근 대거 진출했다. 한으뜸, 이호정, 황세온, 진정선, 최소라, 정호연, 여혜원. 이미 <보그 코리아> 화보 지면을 통해 익숙한 그들을 한자리에 모았다. 싱그러운 젊음과 넘치는 끼,개성 있는 마스크와 미완성인 듯 완벽한 프로포션, 그리고 요즘 세대다운 쿨한 애티튜드로 무장한 그들!
나는 살짝 긴장했다. 주먹만한 얼굴에 매끈한 이목구비의 소녀가 내 앞에 앉아 스낵을 입에 넣으며 수다 떨고 있기에. 머리를 포니테일로 질끈 묶은 이 소녀는 <보그> 스타일 디렉터가 오늘 취재를 위해 촬영에 합류한 나를 <보그> 패션 뉴스 디렉터라고 소개했을 때, 그저 간단히 눈인사만 한 차례 던질 뿐이었다. 물론 나는 이 소녀를 잘 안다. 럭키 슈에뜨 패션쇼와 지면 광고, 그리고 최근 <보그> 화보를 통해 눈여겨보고 있었으니까(게다가 1년 전쯤, 쟈뎅 드 슈에뜨 청담동 사무실에 취재차 들렀을 때 교복 차림으로 놀러온 바로 그 소녀였기에). 관심과 약간의 팬심을 지닌 채 말이다. 그녀가 이호정이다.
겉으론 <보그>의 노련한 패션 기자로 능수능란한 척했지만, 당돌한 소녀 앞에서 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심지어 옆엔 최소라가 있었으니까. 와, 최소라다! 내가 마음속으로 너무 크게 외쳤나? 늘씬하고 이국적인 그녀가 이호정과 달리 가느다랗게 눈웃음치며 내게 친절하게 인사한다. 자타 공인 뼛속까지(요새는 솜털까지라고 표현!) 패피인 나로선 그녀가 루이 비통 리조트쇼에 섰을 때 얼마나 환호했던지(여자 양궁 선수들이 올림픽 단체전에서 금메달 땄을 때처럼). 최소라에게 눈을 돌려 반대쪽을 보니, 이번엔 ‘도수코 스타’ 진정선이 긴 갈색 머리를 한쪽으로 쓸어내린 채 그림처럼 앉아 있다. 스낵을 먹는 것도 어찌나 우아하던지! 성숙한 여인이 젊은 남자들에게 둘러싸일 때 “나 오늘 계 탄 거야?”라며 감격스러워하는 기분이 뭔지 이제야 감이 온다.
80~90년대 톱 모델들(이인혜, 민윤경, 조명숙, 최미애, 진희경, 이복영, 이종희, 박영선, 노선미, 박순희 등), 2000년대 톱 모델들(장윤주, 송경아, 한혜진, 김원경 등)을 취재하고 촬영할 때만 해도 이런 긴장감은 드물었다. 조카뻘 되는 여자아이들을 앞에 두곤 땀을 삐질 흘린 이유? 곰곰 생각해보니, 그건 새로운 아름다움과 태도 때문이다. 게다가 한두 명도 아닌 무려 일곱 명이나 한꺼번에 들이닥쳤기에. 바야흐로 당대 패션을 정의하고 기록하는 <보그> 지면과 서울 패션 위크의 얼굴들이 전면 교체됐다!
때로 패션에서 새로운 경향은 들어맞지 않는 기상예보처럼 우발적으로 밀려오곤 하는데, 우리 역시 2014년 들어 패션의 새 얼굴과 급작스럽게 맞닥뜨리게 됐다. 그건 선 굵고 자로 잰 듯 각도가 정확한 민윤경이나 조명숙 같은 서구형 모델들의 등장 이후, 장윤주처럼 얼굴은 신윤복의 미인도 얼굴에 몸매는 바비 인형인 모델 시대가 도래했다는 식의 작용과 반작용 법칙에 의한 출현이 아니다. 익숙지 않은 얼굴들의 기습적 등장이었다. 그렇기에 10여 년간 수많은 모델들을 지켜봐온 나로서도 꽤 당황했던 것이다. 젬마 워드, 릴리 콜, 캐롤라인 트렌티니, 제시카 스탬, 사샤 피보바로바 등 천사와 처키 이미지를 동시에 지닌 모델들이 뉴욕과 파리에 일제히 나타났을 때와 비슷한 기분이랄까.
어쨌든, 최근 몇 달간 <보그> 지면은 황세온, 이호정, 여혜원, 정호연, 진정선, 한으뜸, 최소라 등이 휩쓸고 있다. 글로벌 패션 무대로 진출한 수주, 성희, 지혜에서 곧바로 이들로 넘어온 것이다. 직전만 해도 송경아, 한혜진, 김원경, 이현이, 이혜정이 매달 <보그> 지면을 채웠는데 말이다. 이 과정에 대해 <보그> 편집장은 이렇게 설명한다. “그런 일들은 어느 날 갑자기 찾아와요. 준비된 각본과 의도에 의해서가 아니죠. 디자이너들이 어떤 컬러, 패브릭, 실루엣에 어느 날 갑자기 ‘필이 꽂히는’ 것과 마찬가지죠. 유행의 범주에서 본다면 너무 당연한 일입니다.”
사실 패션만큼 변덕을 잘 부리는 영역도 없다. 그런 면에서 얼마 전까지 대한민국 하이패션을 장악했던 한혜진, 송경아, 김원경, 이현이 등은 그들 자신은 물론 한국 패션계 모두가 충분히 만족할 만큼 많은 것을 누렸다. 장윤주는 서둘러 이 상황에서 벗어나 엔터테인먼트 쪽으로 움직였고(예능인으로서 그녀의 천부적 자질이 발휘됐음은 물론이다), 예능에서 패션을 원하는 욕망과 타이밍도 마침 딱 맞아떨어졌다.
그들의 뒤를 이은 모델들이 수주, 지혜, 성희로 구성된 글로벌 트리오. 다만 이 아름다운 아가씨들은 주로 해외에서 활약하기에 한국의 패션지와 서울 패션쇼에 출연할 기회는 드물다(가끔 서울에 오면 일정 잡기가 좀 까다로운지!). 그럼에도 변화가 너무 갑작스럽게 일어났다는 느낌이 드는 이유? 그건 두세 명이 아니라 한꺼번에 등장했기 때문. 한혜진, 김원경, 이현이 시대가 지나간 후, 패션 생태계 안에서 당분간 동고동락할 모델들이 최소한 일곱 명은 더 된다.
최소라는 유럽에서 돌아온 지 일주일째다. 모나코에서 열린 루이 비통 리조트쇼 이후, 파리에서 디올, 고티에, 율리아나 세르젠코 등의 오뜨 꾸뛰르쇼에 선 뒤 <누메로> 패션 화보 촬영까지 마쳤다. “니콜라 제스키에르가 삭발을 권했어도 당연히 했을 거예요”라고 그녀는 루이 비통 쇼를 위한 ‘단발령’을 추억하며 웃었다. “가슴까지 길게 길렀던 머리를 쇄골뼈 근처까지 싹둑 잘랐죠. 지금은 2~3cm쯤 길었어요.” 사람 좋은 말투로 자연스럽게 자신을 소개했다. 179cm로 모델로서도 장신 축에 드는 그녀는 국제 무대에서 서양 모델들에게도 전혀 꿀리지 않을 신체 조건이다. 자신감을 얻은 그녀는 다가올 패션 위크 때도 뉴욕부터 시작해 밀라노, 파리로 여정을 늘릴 예정이다. 그렇다면 단점은? “현지 모델 관계자들은 ‘좀더 시크해졌으면 좋겠다’고 조언하더군요. 제가 워낙 왈가닥 성격인 데다 급히 옷을 챙겨 간 탓에 제대로 꾸미지 못했는데, 매의 눈을 지닌 현지 패션 전문가들에게 들키고 만 거죠. 하하!”
그녀는 최근 한국에 예쁜 모델들이 많아졌다며 긴 팔로 주위를 쓱 휘저었다(이호정, 황세온, 정호연, 한으뜸 등은 여전히 자기들끼리 소곤거리고 있었다). 열여섯 살 때 데뷔한 이호정은 <보그>가 국제적으로 실시한 ‘헬스 이니셔티브’ 캠페인부터 딱 꼬집어 얘기했다. 그 캠페인의 가장 중요한 항목인 나이 제약 때문에 <보그>에서 불러줄 날만 손꼽아 기다렸다는 것. 이젠 안심이 된다는 표정으로 1997년생 소녀가 특유의 쌍꺼풀 없는 큰 눈을 찡긋거렸다(<보그> 역시 이호정과 함께할 날을 눈 빠지게 기다렸다!). 그러자 테이블에 앉은 동료 모델들로부터 축하 세리머리가 잠시 뻑적지근하게 이어졌다.
그런데 민윤경, 송경아, 이현이 등이 풍기는 성숙한 외모에 비해 이호정은 전혀 다른 분위기다. “모델 데뷔 당시 167cm였던 키는 어느덧 170cm로 자랐어요”라고 기분 좋은 말투로 이 소녀가 얘기했다. “처음엔 키가 콤플렉스였는데, 이젠 제 비율이 꽤 괜찮아 보여 자신감이 생겼죠!” 그러자 미리 입을 맞추기라도 한 듯 이호정의 ‘끼’에 대한 언니들의 칭찬이 마구 이어졌다(이호정은 일곱 명 가운데 막내!). “자그마한 체구에서 뿜어대는 카리스마와 포즈가 정말 끝내주죠.” 모델치곤 아담한 신체 조건과 동시대적 마스크로 인해 연예계로부터 유혹의 손길도 있지 않았을까? “처음엔 모델 일만 할 생각이었어요. 연기하고 싶어 모델이 된 게 아니었으니까요. 하지만 2년쯤 지나고 보니, 굳이 경계를 둘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게 됐어요. 아직 구체적 계획은 없지만요.”
이호정과 같은 모델 에이전시 ‘에스팀’에 소속된 정호연은 스물한 살에 키는 176cm다(빅뱅 태양의 <보그> 표지에서 가운데). 까무잡잡한 피부의 관능미와 아기자기한 이목구비의 귀여운 이미지를 동시에 지닌 그녀에게도 칭찬이 빗발쳤다. 성격이 가장 좋다는 둥, 착하다는 둥, 이보다 더 긍정적일 수 없다는 둥. “저와 비슷한 매력을 지닌 모델은 없다고요. 하하!” 하지만 예쁘고 멋진 옷을 입고 일할 땐 한없이 즐겁다가도 일이 없을 땐 우울해지기 일쑤인 그녀. 불규칙적인 모델 일로 인한 허무함을 달래기 위해 그녀는 지금 취미 생활을 찾으려고 노력 중이다. “누구나 한혜진이나 송경아 선배처럼 될 순 없어요. 다른 뭔가가 필요하죠. 플러스알파 요소가 있어야 모델 일을 할 때도 시너지 효과가 생기거든요. 모델 일에만 집중해서는 안 되는 시대 같아요.” 정호연의 말이 맞다. <보그>를 비롯, 여러 매체들은 이제 색다른 재능과 끼를 지닌 모델을 간절히 원하고 있다.
20대 초반 아가씨들이 이토록 생각이 깊을까 싶을 만큼 오늘 <보그> 촬영장의 어린 모델들은 자신의 장단점은 물론, 자신의 상황을 둘러싼 문제들을 이미 꿰뚫고 있다. 게다가 미래 준비도 철저했다. 황세온 역시 그렇다. “열다섯 살 때부터 모델 일을 했지만, 모델이 꿈이었던 적은 없어요.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죠. 자연스럽게 모델계에 입문해 어쩌다 보니 5년 차. 현재 저의 가장 큰 고민은 뭘 해서 먹고 살까예요. 공부? 졸업? 전공인 경영학이든 현재 모델 일이든, 두 가지가 호환될 뭔가를 찾는 중이에요.”
그녀는 한국에선 신인 모델이지만 호주와 뉴질랜드에선 프로 모델이다. 열다섯 살 때부터 IMG 호주에 소속돼 호주 <보그>와 <하퍼스 바자> <마리 끌레르> 등은 물론, 중국판 라이선스 패션지 등에서 촬영 경험을 쌓았다. “오세아니아엔 동양 모델이 드물었어요. 그래서 일할 기회가 꽤 많았죠.” 그녀는 대학에서 전공에 별 재미를 못 느껴 학업을 내려놓은 뒤 모델 일에 몰입하자는 데 스스로 합의해 서울에 왔다. 작년 11월 입국, 다음 해 2월 첫 번째 일이 스타일리스트 서영희와 사진가 어상선이 함께한 <보그> 화보 촬영. 그리고 장안의 화제였던 빅뱅 태양의 <보그> 표지에서 맨 왼쪽 빨간 머리 아가씨가 그녀다. 그래서 본의 아니게 주위에서 오해와 질투를 받았다고 고백한다. “서로 다른 문화 때문에 한국 모델들과의 긴장감 해소에 시간이 좀 걸렸어요.” 지금은 진정선이 곁에 딱 붙어 앉았고, 이호정, 정호연을 비롯, 소속사 모델들과 언니 동생 하며 더없이 살갑게 지낸다.
보조 MC처럼 오늘의 대화를 이끈 진정선에게 ‘도수코’라는 단어는 하나의 작위가 됐다. “솔직히 처음엔 이 꼬리표가 평생 따라다닐 듯해 좋아하지 않았어요.” 그러자 주변에서 “그 덕분에 네가 성공했잖아?”란 멘트를 귀가 따갑게 들어야 했다. 물론 진정선 역시 그 사실을 부인하지 않았다. 내게도 ‘도수코 진정선’이 그녀의 풀네임처럼 들릴 정도니까. 그녀가 가로수길에 뜨기라도 하면, 팬들 역시 ‘진정선이다!’가 아닌 ‘도수코 진정선이다!’라고 부르짖는다. “17세 소녀에게 ‘도수코’는 첫 사회생활의 경험을 선물했죠.” 이제 진정선은 겸손하게 고백했다. “단체 생활하면서 많은 걸 배웠으니까요.”
그녀 역시 선배 세대에 비해 키가 작은 건 비슷하다. “174cm. 이렇게 태어난 걸 어쩌겠어요.” 그녀는 어떤 장점과 특징 때문에 ‘도수코 여왕’이 될 수 있었을까? 그러자 주위에서 심사평들이 잇따랐다. “포즈!” ‘포즈의 여왕’이란 동료들의 부러움 섞인 칭찬이 논스톱으로 이어졌다. 일명 ‘몸끼’에 잠시 민망해하던 그녀가 크게 부인하지 않는다는 듯 시원하게 웃더니 자가 품평을 시작했다. “맞아요. 도수코 우승은 분명 포즈 덕분일 거예요. 보시다시피 저는 키가 크지 않아요. 그래서 늘 포즈라도 잘 취해야 한다는 강박이 있었죠.”
최근 모델 에이전시 ‘에스팀’은 필요에 의해, 그리고 각자의 재능과 가능성에 맞춰 서로의 합의하에 연기 공부를 시킨다. 또 ‘케이플러스’는 대형 연예기획사 ‘YG엔터테인먼트’와 동맹해 패션과 예능을 겸비한 인재 발굴에 돌입했다. 그런 면에서 패션 필름은 요즘 모델들에게 주어진 새로운 기회다.
“지금까지 모델 일이란 즉각적 반응이 있는 패션쇼, 두고두고 간직하며 반응할 수 있는 패션지로 나뉘었죠. 하지만 얼마 전부터 영상을 찍기 시작했어요. ‘바닐라 어쿠스틱’의 뮤직비디오였죠.” 진정선의 얘기에 정호연도 거든다. “아디다스 관련 패션 영상 촬영 때였어요. 화보 촬영은 한 컷 한 컷으로 구성돼 페이지가 완성되는 반면, 영상은 한 컷과 다른 컷으로 가는 중간 과정 모든 게 ‘저’였어요.” 그래서 선배 세대가 별로 경험하지 못했던 영상이 그들에겐 새로운 도전이 됐다. 중요한 건 여기 모인 일곱 명 모두 디지털 세대답게 영상 작업을 즐기고 있다는 것!
이렇게 워킹과 포즈를 뛰어넘어 ‘감정 표현’과 ‘리액션’ 등 입체적 반응도 모델의 임무라고 쳤을 때, 한으뜸은 최적의 조건을 갖췄다. 대학에서 CF 영상 제작을 공부했으니 말이다. “대학 때 제가 주인공을 맡고 직접 제작한 영상 작업들이 많아요.” 웬만한 CF 모델 못지않은 그녀의 예쁘장한 외모는 여기 모인 후배들로부터 부러움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그녀에겐 남모를 속사정이 있다. “10년 전만 해도 코가 높고 키가 더 커야 모델로서 대접받는 상황이었어요. 그런 모델들만 패션쇼에 섰으니까요. 그러니 만날 짜증 부리고 좌절할 수밖에요. 현재 172cm인 키는 중 2 때 멈춘 사이즈예요. 더 클 줄 알았는데! 하지만 지금은 생각이 달라졌어요. 패션모델에게 가장 중요한 건 분위기와 이미지죠. 무한 변신이 가능한 제 이미지가 강점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러자 동생들이 ‘최강 동안’이라는 찬사로 ‘언니’를 격려했다.
하긴, 패션모델을 이야기할 때 ‘키’는 무의미한 조건이나 필요 없는 단어가 된 지 오래다. “저를 보세요. 통통한 볼과 볼록한 입술만으로 모델이 됐거든요. 하하!” 자기 세계에 빠져 있는 듯한 여혜원이 툭 던지듯 끼어들었다(<보그>의 태양 표지 가운데 금발 아가씨!). “보시다시피 제가 좀 특이하게 생겼잖아요?”라고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되물었다. “제 볼과 입술이 좀 독특하잖아요.” 주위의 진지한 대화가 영 어색한지 그녀가 잔잔한 물잔에 얼음 한 덩어리를 톡 떨어뜨리듯 엉뚱한 질문을 던졌다. “모델 일 하면서 무슨 고민이 그리 많아요? 저는 즐기기 위해 일을 해요. 재미있게 놀기 위해 돈 버는 거죠.” 여혜원은 한국 정서에서 불가능한 현실, 다시 말해 촬영 수위의 제약이나 제한에도 불만이 많다. “좀더 과감한 도발과 실험을 할 수 없는 상황이 아쉬워요.”
말은 도발적이고 맹랑하게 했지만 그녀는 패션 정보에 꽤 ‘빠삭’했다. 젬마 워드, 데본 아오키, 릴리 콜, 린지 윅슨, 사샤 피보바로바 등 자신이 좋아하는 모델 명단을 단숨에 나열하는 것만 봐도 그렇다. 모르긴 몰라도 젬마, 데본, 릴리 등이 지닌 앙큼한 이미지가 자신과 닮았다는 것도 이미 파악한 것 같다(전혀 그렇지 않다며 잘 익은 자두처럼 뾰로통한 입술을 삐죽거렸지만). 하긴 악동, 처키, 배드 걸 이미지가 있어야 패션에서 먹힌다는 걸 감안하면, 여혜원의 170cm가 채 안 되는 신장 따윈 문제가 되지 않는다.
“카라 델레빈이나 바바라 팔빈을 봐요. 예전 기준에선 모델 얼굴과 몸매가 아니죠. 하지만 독특한 이미지 덕분에 어떤 패션 무대에서도 돋보이죠.” 여혜원의 지적에 이호정 역시 긍정적으로 대꾸했다. “선배 모델 시대에는 전형적인 패션모델의 카리스마로 대중에게 어필했어요. 저처럼 작은 모델들은 끼기 힘들 정도로. 하지만 지금은 다양성의 시대예요. 제 얼굴과 이미지를 보고 패션쇼와 패션 화보에 캐스팅하니까요.” 그래서 이젠 옷을 만들 때 ‘모델 사이즈’라는 개념이 없어지는 추세다. “저를 위해 옷을 따로 만들 정도니까요.”
고 3 소녀 이호정은 학교 친구들과 달리 대학 진학 고민으로 머리가 무겁지 않다. 당분간은 모델에 집중한 뒤 언젠가 금속공예를 전공하고 싶을 뿐.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팔찌를 만들곤 했는데 나중에 제대로 배우고 싶어요.” 여혜원은 LA에서 경영학으로 유명한 대학으로 돌아가 공부를 마칠 생각이다. “경영학을 전공한 건 졸업 후 어떤 일을 하든 그 영역과 기능의 필요성 때문이었죠.”
한국 모델들의 해외 진출에서 늘 핸디캡이었던 영어가 능숙할 테니, 그녀는 뉴욕이나 유럽에서의 모델 일을 꿈꾸진 않을까? “뉴질랜드에서 신인, 호주에서 다시 신인, 그리고 이제 한국에서도 신인. 그런데 뉴욕이나 유럽에 가면 또 신인일 거 아니에요?” 커다란 쌍꺼풀진 눈과 새까만 눈동자로 더없이 표정이 풍부한 황세온이 “그건 별로예요!”라고 딱 잘라 말한다. “저는 외국에서 일할 때 이미 그들과의 경쟁 분위기에 익숙해요. 이젠 한국에서 충분히 즐기며 일하고 싶어요.” 그들에겐 해외 진출이 엄청난 야망이자 파리 쇼에 서기만 하면 모든 걸 이뤘다는 식의 대업이 아닌 듯 했다.
“지금까지의 경력에서 좀더 완성도를 높이고 싶을 뿐이에요”라고 진정선도 덧붙였다. “해외 진출이 절실하진 않아요. 해외 쇼가 목적이자 목표가 될 순 없죠!” 다만 해외 메이저 무대 데뷔가 코앞인 최소라는 다르다. 그녀는 현재 휴학 중인 모델학과 졸업에 대해 전혀 미련이 없다. “공부보다 지금 하는 일 그 자체가 무엇보다 중요하니까요. 또 해외에서도 활발하게 활동하고 싶어요. 어차피 국내에서도 신인인걸요.”
미래에 대한 고민은 둘째치고 현재 일에 몰두하기에도 일곱 명 모델들의 스케줄은 잘나가는 아이돌 그룹 못지않다. 그러면서 드는 생각이 ‘요 일곱 명으로 걸그룹을 결성한다면?’이었다. ‘K-POP과 K-STYLE이 시너지를 이룰 수 있는 엄청난 프로젝트가 되지 않을까?’ 이호정은 학교에서 후배들이 사인을 요구할 만큼 인기다. “중학교 중간고사 때 제 사인을 만들곤 했어요. 가끔 맥도날드에 가면 테이블에 앉아 친구들과 노닥거리며 냅킨에 나만의 사인을 그려보곤 하잖아요?” 바로 그 사인을 이제 내 취재 노트에 받게 될 만큼 이호정은 톱 모델로 무럭무럭 잘 자라고 있다.
진정선, 최소라, 정호연 역시 ‘도수코’라는 매스컴을 탄 덕분에 패션계에선 유명 인사다. 하지만 그들이 모두 혀를 내두른 모델이 있으니, 바로 요즘 남자 모델들이다. “그들은 이미 연예인이에요!” “연예인은 저 멀리, 저 높은 곳에 기거하는 신비한 존재예요. 하지만 남자 모델들은 배우나 가수에 비해 그나마 좀더 현실감이 있죠.” “배우나 가수와 모델은 팬층이 아예 달라요. 모델을 좋아하는 팬은 주로 여자예요. 남자 모델 팬은 당연히 여자가 많고, 여자 모델 팬 역시 주로 여자. 우릴 보며 ‘언니!’라고 아우성치는 팬들은 봤지만, ‘누나!’ 소리는 별로 못 들어봤거든요.” “씨엘, 효리를 좋아하는 것처럼!” ‘직장 동료’ 겸 ‘업계 선후배’인 남자 모델들의 인기를 언급하는 대목에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부러움 반, 하소연 반을 쏟아냈다.
일곱 명의 아가씨(아직 10대도 있기에 엄밀히 말하자면 소녀 한 명, 아가씨 여섯 명)들이 슬슬 삼촌뻘인 내 앞에서 무장 해제되고 있었다. 수입과 재테크는 물론(구체적인 숫자는 밝히지 않았지만) 결혼관까지(남자 친구 유무는 말하지 않았지만). 아가씨 일곱 명과 40대 초반 남자 한 명의 박장대소와 논스톱 수다가 위층까지 전달됐는지, 이 기획의 주동자인 <보그> 스타일 디렉터와 이들의 기념비적 ‘떼샷’을 촬영할 포토그래퍼가 번갈아가며 우리 쪽으로 염탐을 왔다. 나와 또래가 비슷한 두 여인이 미리 짰는지 “어리고 예쁜 모델들 사이에 있으니 어때요?”란 짓궂은 질문을 차례로 던졌다.
내가 기사에 한마디 보태겠다고 했더니 사진가 강혜원은 “전형적인 모델 이미지 대신 특정 ‘캐릭터’가 훨씬 중요해졌다”고 전했고, <보그> 이지아 스타일 디렉터는 그것을 ‘수주 효과’라고 덧붙였다. “지금처럼 뜨기 전, 뉴욕에서 활동하는 한국 모델이었을 때 수주와 한국 톱 모델들을 함께 촬영할 때였어요. 다른 모델들이 구체관절 인형처럼 각을 잡아 세련되게 폼 잡는 동안, 난데 없이 수주가 손가락으로 V자를 그리는 게 아니겠어요?” 분위기 파악 못하는 V자가 아닌, 어떤 의미심장한 사인으로 그녀는 기억했다. “다른 모델에 비해 키가 크거나 비율이 끝내주는 것도 아니었지만, 그런 일상적 태도가 쇼킹하게 다가왔죠.” 현실감이야말로 다가올 모델 이미지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얘기다.
내가 보기에 요즘 그들에게 모델 일은 생계형 직업이 아니다. 그렇다고 근성이 떨어지고 직업의식이 결여됐다는 얘기가 아니다. 더 잘하고 싶은 욕심은 있지만 아등바등하지 않을 뿐. 셀피 세대답게 무엇보다 자신이 한창 예쁠 때라는 걸 아는지, 이 순간 주위에서 예쁘고 멋지다는 칭찬을 듣는 게 좋을 뿐이다.
참, 그들이 이처럼 즐기며 일할 수 있는 또 다른 행운의 조건도 있다. 그녀들의 부모는 40대에서 50대, 다시 말해 선배들의 부모와는 세대가 다르다. 10여 년 전 어느 모델이 모 패션지에 찍은 노출 사진을 보고 기함한 부모가 전국을 뒤져 그 잡지를 다 불질러버리겠다고 노발대발한 후일담은 이제 신화 같은 일화다. 이에 비해 요즘 모델들의 부모 세대는 딸의 일에 대한 이해가 빠르다. 한창때의 딸이 대중에게 주목받는 것을 흡족히 여기는 눈치다.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란 말은 들리지도 않았다. 대신 “엄마 아빠가 무진장 좋아하셔요!”가 일곱 명 모두의 입에서 이구동성으로 터져 나왔다. 게다가 TV와 일간지, 인터넷에서 패션이 눈에 띄지 않은 날이 없는 지금이요, 대중문화가 패션의 꽃인 모델을 원하는 시대다. 이에 대해 모델들은 “선배들이 길을 잘 열어놓은 덕분”이라며 제법 의젓한 감사 인사를 전했다.
육체적 조건보다 이미지와 스토리텔링을 선호하는 매체들에게 강렬한 개성과 동시대적 태도를 지닌 요즘 모델들은 그야말로 딱이다. 어느 케이블 채널의 PD는 패션이 엔터테인먼트에서 대세임을 간파했는지 모델들이 주인공인 참신한 기획이 또 뭐가 있을지 고민이라고 전했다. 정호연이 슬쩍 한마디 던졌다. “오늘 꼭 모델판 <여배우들> 촬영하는 것 같아요!” 내친김에 아예 그 기획을 던져줄까? 호기심 많은 여자애들 일곱 명이 모이니 결국 주제가 산으로 올라갔다. “선후배 간의 예의범절 수위는 어느 정도가 적절할까?” 내 딴엔 모델 일도 공동 작업이니 한국 정서에선 때로 엄격할 필요가 있다고 보수적으로 조언했다(외국에서 온 황세온과 여혜원은 어깨를 으쓱하며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얼마 후 대화는 ‘몸’으로 가지를 쳤고, 난 그들을 처음 만날 때처럼 패션 기자로서 태연한 척 연기하며 취재 노트에 시선을 고정해야 했다. 주된 단어가 ‘가슴’과 ‘엉덩이’였으니까. “난 살이 찌면 맨 먼저 엉덩이야.” “대신 난 가슴이 빈약하잖아.” “수영장 안에서 티셔츠를 입고 촬영하는데 옷이 자꾸 위로 올라가는 거야. 푸하하!” 아가씨들이 각각의 신체 부위로 손을 갖다 대고 세밀하고도 거침없이 설명했기에 까딱 잘못하다간 내 시선이 자연스럽게 그쪽을 따라갈 뻔했다. 다행히 대화는 얼굴과 몸매, 특히 각자의 이미지에 대한 자신감으로 귀결되는 듯했다. 스스로 자존감을 세우며 다들 자리에서 우후죽순 일어나 카메라 앞으로 걸어갔으니까. “우린 선택받은 인물들이에요!” “배우나 가수는 각고의 노력 끝에 될 수 있지만, 모델은 타고나야 하는 것 아닌가요?” 당연하지! “세상에서 이 일을 할 수 있는 여자가 몇이나 되겠어요?
- 에디터
- 신광호, 스타일 에디터/ 이지아
- 포토그래퍼
- HYEA W. KANG
- 모델
- 한으뜸, 이호정, 황세온, 진정선, 최소라, 정호연, 여혜원
- 스탭
- 헤어 / 한지선, 메이크업 / 원조연, 박혜령, 세트 스타일링 / 최서윤(Da;ra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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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08by 오기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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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없더라도 브랜드는 계속 살아남도록" - 잉크의 이혜미
2024.10.10by VOG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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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션 뉴스
굿바이 에디 슬리먼, 웰컴 마이클 라이더! 셀린느의 변화
2024.10.04by 오기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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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토리아 베컴이 꼽은 최고의 패션쇼
2024.10.10by 황혜원, Laia Garcia-Furta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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뷰티 아이템
아이돌 응원봉과 립밤이 만났다
2024.09.23by 오기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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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밀리 아담스 보디가 꼽은 최고의 패션쇼
2024.10.07by 황혜원, Laia Garcia-Furta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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