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 화보

루이 비통으로 복귀한 니콜라 제스키에르

2016.03.17

by VOGUE

    루이 비통으로 복귀한 니콜라 제스키에르

    1년의 공백기간을 거쳐 루이 비통의 수장으로 패션계에 복귀한 니콜라 제스키에르.
    지금 그는 가장 오랜 역사와 수많은 이야기를 지닌 파리 패션 하우스에 스트리트 에너지를 불어넣고 있다.

    세상에서 가장 큰 럭셔리 브랜드인 루이 비통의 파리 본사는 루브르 동쪽, 오스만 시대 건물에 있다. 세련되고 새로운 내부로 들어가려면 개인별 마스터 키와 확신에 찬 용기가 필요할 정도. 가장 멋진 방들에서는 우아한 퐁뇌프 다리가 내려다보인다. 그 이름에도 불구하고(퐁뇌프는 ‘새로운 다리’라는 의미다) 그곳은 현재 파리에서 가장 오래된 다리다. 지금은 아름답고 역사적인 동시에 기술적으로 현대화된, 새로운 프랑스의 소우주처럼 보이는 시대. 이 시대는 루이 비통의 여성복 컬렉션 디자이너인 니콜라 제스키에르(Nicolas Ghesquiere)의 야망과 잘 맞아떨어진다.

    첫 컬렉션을 준비 중인 그는 거의 커피에 의존해 살아가는 듯 보이는 장난기 많고 포스트모던한 고전주의자다. “모든 게 새로워요.” 그가 VIP 피팅룸에서 내게 건넨 첫 마디였다. 때는 3월 초 패션 위크로 우리는 소파에 앉아 있었고, 옆에는 비통 슈즈들과 핸드백들이 진열돼 있었다. 작년 11월 이 회사에 합류한 후 그는 맹렬하게 일해왔다. 엄청난 기대를 받고 있는 그의 첫 기성복 가을 컬렉션뿐만 아니라, 그것과 함께 선보일 핸드백, 슈즈, 심지어 데뷔 컬렉션의 세팅까지 결정하면서 말이다. “완전히 백지상태였죠”라고 그는 작은 커피 잔을 가까이 당기며 말했다. “그래서 무엇이든 할 수 있었어요.”

    제스키에르는 과거와 미래를 동시에 바라보며 비통 우먼을 재창조하는 쪽을 선택했다. 여름에 열릴 꾸뛰르의 모더니즘을 예감케 했던 접근 방식이다. 프랑스 패션이 과거처럼 실질적 리더가 아닌 시대에 그는 비실용적 패션 실험 없이 신선하고 여성스러운 실루엣을 추구한다. 구세대의 절충적 도발을 포착하면서도 현대 생활의 날카로운 관점을 구현한 그런 실루엣 말이다. 이 말은 10여 년 동안 팝 문화로 광을 낸 패션(제이콥스의 미국화된 시각)과 동의어였던 루이 비통의 변신, 말하자면 옛것을 새롭게 만드는 전략을 의미한다. 그의 첫 과제 중 하나는 루브르의 쿠르 카레 안의 모던한 유리 큐브 내부를 디자인해 옷과 파리 거리의 에너지를 연결하는 것.

    “우리는 모델들이 밖에서 걸어 들어온다고 생각해야 해요. 여느 여성들처럼 그 공간을 가로지르고 있다는 그런 생각 말이에요”라고 제스키에르는 설명했다. 자그마한 체격의 그(현재 43세)는 파란 눈과 프랑스 사람 특유의 날카로운 이목구비를 가졌다. 그는 지금도 기말시험을 앞둔 학생처럼 초조한 쾌활함과 이를 악문 치열함을 내비친다. 그의 개인적인 옷차림은 가장 낮은 키의 광시곡 같다. 진한 색깔의 진, 몸에 잘 맞는 검정, 혹은 흰 티셔츠, 날씨가 추울 때 입는 크루넥 스웨터, 스니커즈. 패션이 개인적으로 화려하고 저 높이 떠받들어지는 쪽으로 기울었지만, 성공의 정점에 있는 그는 도시 생활의 흐름 속에 녹아들려고 노력하는 남자 티가 난다.

    커스틴 크라프 릴예그렌이 입은 독특한 보디수트 룩. 스포티한 하늘색 니트 소재 보디수트와 클래식한 트렌치코트가 절묘한 조화를 이룬다.

    잠시 얘기를 나눈 후 제스키에르는 양해를 구하고 기차를 놓치지 않으려는 통근자처럼 일을 하러 급하게 방을 빠져 나갔다. 나는 그의 접근 방식에서 첫 번째 교훈을 얻었다는 걸 깨달았다. 세월의 시험을 이겨낸 디자인이 여전히 놀라움을 준다면, 절대 꾸미거나 너무 곱씹어 생각하지 마라!

    쇼가 열린 날 아침, 그는 쿠르 카레에서 최종 리허설을 지켜봤다. 그것은 꼼꼼하게 계획된 행사다. 관객이 모던하게 디자인된 공간에 앉아 있는 동안 모델들은 네 곳의 교차로에서 서로 교차하는 다섯 개 고리 모양의 길을 따라 걸을 것이다. 제스키에르의 무대는 맥 컴퓨터에 장착된 커맨드 키의 로고에서 영감을 얻었다. 작년에 제이콥스의 로코코식 회전목마뿐 아니라 발렌시아가 런웨이에서 자신이 보여준 활기 넘치는 판타지에 대한 디지털 시대 식의 대비다. 하지만 아이디어 구상이 쉬웠다고 그것을 실행하는 것도 쉽다는 의미는 아니다. 얼굴 위에 번들거리는 미용 마스크를 쓰고 메이크업 가운을 입은 모델들은 마라톤 선수처럼 목에 자신의 위치를 구분해주는 숫자를 두르고 있었다. 그리고 제스키에르가 디자인한 부츠를 신고 있었다. 미리 신고 걷는 것에 적응하기 위해서다.

    “비트가 느껴져요?”라고 줄리 마니옹이 소리쳤다. 그녀는 모델 위스퍼러(모델 소통자)로 유명하다. 음악에 맞춰 모델을 움직이게 하는 것이 일이다. 이번 음악은 제스키에르의 모방자들을 약 올리는 노래인 스크림의 ‘Copy Cat’이다. (“나는 그 드레스의 왕 팬이야!”라고 가사는 조롱한다. “내가 그것을 산 이유야. 5년 전에.”) 무대의 네 개 교차로는 도전이다. “중앙으로, 아주 타이트하게 가까이 가봐!”라고 그녀가 소리쳤다. “움직여! 움직여! 계속 움직여!” 리허설 후 그는 마니옹과 밀담을 나눴다. 모델 몇 명이 너무 느리게 움직였다고 말했다. 한 모델은 눈을 너무 깜빡였다. 무대의 미적인 부분은 쿨하고 빠르고 황홀하다. 오프닝에서 유리 큐브 안에 둘러싸인 금속 블라인드가 탁 열리며 루브르 내부 파사드가 드러날 것이다.

    아침 9시 40분에 관객들이 줄지어 들어오기 시작했다. 1,300명이 넘었고, 제스키에르는 압박감을 느꼈다. “과거에 우리는 잘 만들어진 쇼들을 선보여왔어요. 하지만 규모가 중요합니다.” 루이 비통에서 그것은 정말 중요하다. <포브스>에 따르면 작년에 거의 100억 달러 판매를 올린 이 브랜드는 팝 문화의 기저를 관통하는 프린트 가죽 패턴들을 찾아냄으로써 다른 브랜드들과 달리 세계시장에 널리 퍼졌다. 누가 스프라우스와 무라카미 같은 아티스트들과 비통의 색다른 시너지를 잊을 수 있겠는가? 혹은 소피아 코폴라와의 친밀한 관계나 그것이 팝 음악에 끼친 영향은 어떤가? (“그녀가 얘기하는 건 루이, 루이뿐이야/ 그녀가 얘기하는 건 루이 비통뿐이야!”-Fabolous가 부른 노래 ‘Louis Vuitton’의 가사)

    니트와 가죽 소재가 대비를 이루는 박지혜의 민소매 가죽 미니 드레스.

    늘 그랬던 건 아니다. 20세기에 몇십 년 동안 비통은 패션의 선구자라는 이미지가 많이 위축돼 있었다. 그 후 1996년 LVMH 베르나르 아르노 회장과 당시 이 브랜드의 북미 CEO였던 마이클 버크는 마크 제이콥스를 고용해 기성복을 선보이기로 결정했다. 제이콥스의 쇼는 순간의 집요함으로 유명했다. “그 달이 아닌 그 주의 시대정신이었죠”라고 현재 모든 비통을 책임지는 CEO 버크가 말했다. 반면 제스키에르는 이 브랜드의 세계적인 우위를 놓치지 않으면서도 프랑스의 뿌리로 되돌려놓기 위해 선택됐다(지금까지는 잘되고 있는 것 같다. 월드컵 트로피가 전통적인 맞춤 케이스에 담겨 필드로 옮겨졌을 때 소셜 미디어를 장악한 것은 비통 리조트 컬렉션의 물색 드레스를 입은 비통의 대사, 지젤 번천이었다).

    잠시 후 배우 겸 가수 샬롯 갱스부르가 들어왔다. 그녀는 이자벨 위페르 곁에 앉았다. 그리고 케이트 마라와 클로에 세비니는 건너편에 앉았다. 갱스부르와 제스키에르는 오랜 친구 사이다. 사실 그녀는 헝클어진 머리로 그의 첫 광고를 장식한 주인공이다(광고 이미지는 애니 레보비츠, 브루스 웨버, 유르겐 텔러가 촬영했다). “비통이 그의 성격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모르겠어요”라고 그녀는 말했다. 말 그대로다. 발렌시아가에 있을 때 그는 반아이콘적 장난스러움으로 유명했고, 쿨한 여성들의 사랑을 받았다. 가장 아이코닉한 브랜드 중 하나인 루이 비통에선 다를 것이다.

    한 가지 예를 들면 디자인 과정이 달라졌다. 이 일을 맡은 직후 제스키에르는 가방 브리핑 요청을 받았다. “그것조차 생소했어요. 과거엔 브리핑한 적이 없거든요. 물론 요청대로 브리핑했습니다”라고 그는 말했다. 그가 말을 멈추면 비통 스태프들도 조용해졌다. 그들이 자신의 아이디어를 싫어하는 건 아닌지 불안했지만, 그게 아니었다. “그들은 그것을 할 수 있었기에 조용했던 거예요.” 다음에 만날 때 그들은 완벽하게 표현된 시제품을 내놓았다. “상자와 리본까지요.” 그 후 동료들은 자신들의 작업을 ‘공학’이라 불렀다. 그들은 새 컬렉션을 디자인할 뿐만 아니라 디테일 하나하나까지 챙겼다. 시장에선 실수와 비독창성이 똑같이 위험할 수 있으니까. “이런 점이 외부 사람들을 놀라게 하죠. 그들은 그것이 비합리적이고 미친 짓이라고 생각합니다”라고 마이클 버크는 백스테이지 소파에 걸터 앉아 말했다. “우리의 디자인 과정은 엔지니어들이 벤츠를 만드는 것만큼이나 진지해요. 그것은 질 낮고 번드르르한 것과는 거리가 멉니다.”

    런웨이 컬렉션은 잘 통제되고 깔끔하고 대범했다. 컬렉션은 몇 가지 전통적인 아우트라인을 가져왔고(비통의 L과 V의 반복을 기본으로 한틀 잡힌 미니스커트, 날카로운 윙 칼라, 매듭 벨트) 다양한 텍스처의 사선들과 경계가 확실한 컬러 블록들(예를 들어 스포티한 녹색 스키 색상들)을 추가했다. 결과물은 현시대처럼 보이지 않았으며, 심지어는 어느 방향(과거 혹은 미래)인지 알기 힘들었다. 복고풍인가? 미래적인가? 혹은 둘 다인가? 패션 위크 기준으로 볼 때 작품들은 충격적이지 않았다. 그러나 제스키에르의 특징이 그렇듯이, 작품들은 그 순간의 정수를 그대로 담고 있었다. 가을 컬렉션들의 홍수 속에서 그것은 그 어떤 컬렉션과도 달랐다. 백스테이지에선 이번 컬렉션에 대한 책(올가을 슈타이들에서 출판될 )을 위해 유르겐 텔러가 촬영 중이었다.

    가죽 스트랩이 강렬한 인상을 주는 스텔라 테넌트의 룩. 싱글 이어링이 룩에 세련된 표정을 더한다.

    “니콜라는 여성에게 맞추려고 노력합니다”라고 이번 쇼에 섰던 슈퍼 모델이자 사회운동가인 매기 라이저가 말했다. 옷차림을 위해 8시간을 보낸 후 결국 과도하게 꾸민 여성이 아닌 활동적인 여성 말이다. 1999년 발렌시아가 패션쇼 때 그에게 처음 발탁된 라이저는 그가 새로운 스타일의 고전주의에 도달했다고 느꼈다. “각기 다른 나이대의 많은 여성들이 비통을 입은 걸 볼 수 있었어요. 제 할머니도 트위드와 여성스러운 실루엣 때문에 마음에 들어 하셨어요. 저도 그것을 좋아했고 여동생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모든 사람들을 위한 옷이었어요. 그러기는 쉽지 않죠.”

    역사적으로 창의적인 직업을 가지려면 크게 세 가지 방법이 있다. 우연(우연히 타이틀 카드-필름이나 슬라이드로 처리되는 것과는 달리 카메라에 잡히도록 만든 그래픽 카드. 캡션(caption)이라고 한다-디자인에 발을 들여놓은 히치콕), 구원(법조계에서의 비참한 생활로부터 그림으로 도망친 칸딘스키), 그리고 그 사이 어디쯤에 있는 운명(ABC 노래를 배울 때부터 천직이 확실했던 마이클 잭슨). 제스키에르는 세 번째에 해당한다. 파리 남서쪽의 유서 깊은 마을인 루됭(Loudun)에서 성장한 그는 드레스와 스포츠카를 그리는 걸 좋아했다. 그 밖에 다른 것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약간 남자아이 같기도 하고 여자아이 같기도 했어요”라고 그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한다. “저는 질문을 던지며 균형을 잡아갔습니다.” 어린 시절 부모님은 그가 하는 일이 아무리 이상해도 지지해주었다(벨기에인인 그의 아버지는 골프 코스를 운영했다). “모든 아이들이 그림을 그리지만 어떤 아이들은 그걸 그만두고 다른 것을 합니다. 제가 패션에 관심을 가진 후로 어떤 의문도 없었어요”라고 그는 말했다.

    10대 초반에 그는 아네스 베에서 견습생으로 일했다. “일단 패션계에 들어오면 절대 그만둘 수 없다는 사실을 배웠어요.” 그는 코린 콥송 스튜디오에서도 일했다. 그런 뒤 패션을 포기하고(혹은 그런 것처럼 보였다) 학교로 돌아갔다. 열여덟 살에 그는 장 폴 고티에의 어시스턴트가 돼 패션계로 돌아왔다. 80년대에 프랑스에선 꾸뛰리에에서 크레아퇴르(créateur, 크리에이터)로 개념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그는 그런 변화가 충격적이라고 생각했다. “당신은 한순간을 만들어낼 수 있어요. 사람들, 옷, 느낌을 합하면 갑자기 상상 속에서 나온 아주 구체적인 순간을 분리해낼 수 있습니다. 영화감독과는 다르지만 비슷한 면이 있지요.”

    95년 발렌시아가에 디자이너 자리가 났을 때 그는 그 자리를 차지했다. 지나고 나서 보니 그것은 루이 비통에서 그의 역할에 대한 소름 끼치는 예언이었다. 그의 일은 세계시장을 위한 의복, 행사 의상, 가장 괴상하게도 장례식 의상 디자인과 관련된 것이었다. 그러나 창작 사다리의 맨 아래칸 가까이에서 고생하며 경험을 쌓는 자리였다. 사다리 상층부로의 도약(지금 생각해도 놀랄 만한)은 2년 후 일어났다. 당시 겨우 스물다섯 살이던 제스키에르는 발렌시아가의 디자이너로 고속 승진했다.

    오랜만에 런웨이에 모습을 드러낸 매기 라이저는 페어아일 스웨터를 닮은 스포티한 집업을 입었다.

    많은 구경꾼들의 눈에 그는 하룻밤 사이에 발렌시아가 하우스를 상쾌한 에너지로 가득 채우는 듯 보였다. 몰락하진 않았지만 꾸뛰르 위상에서 갑자기 추락한 발렌시아가(제스키에르는 당시 이 하우스를 잠자는 숲 속의 공주로 묘사했다)는 다시 한 번 탐나는 레이블로 바뀌었다. 과거의 쇼킹한 컬러와 뻔뻔한 이브닝 컷은 사라졌다. 그는 강하고 실용적인 프로필, 즉 마법처럼 여성스러운 몸매를 그대로 따라가는 듯 영리한 프로포션 안에서 우아하게 레이어드된 텍스처에 대한 안목을 제공했다.

    그의 본능적 감각은 고전적이었지만 상상력은 팔다리가 길고 모던 했다. 그는 80년대에서 영향을 받은 브리콜라주(도구를 닥치는 대로 써서 만드는 것) 디테일로 유명해졌다. 스타일리시한 드레스의 잠수복 지퍼, 비전통적으로 사용된 전통적인 페이즐리, 옷의 윤곽선을 강조한 러플과 모피의 기발한 사용. 아폴리네르가 프랑스 시의 리듬으로 했던 것과 같은 방식이었다. 단언컨대 제스키에르의 작품은 거칠었지만 속도와 침착한 자신감을 보여주었다. 그것은 남을 의식하지 않는 그의 쇼가 강조하는 효과다. 그의 날카로운 안목은 곧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명작들을 만들어냈다. 20세기에서 21세기로 넘어가는 시기에 선보인 라리앗 백과 전반적으로 여성을 더욱 근사해 보이게 만들어준 팬츠 같은 것들 말이다. 그의 네오 바로크 밀푀유 실크 드레스는 세계적으로 인정받은 발렌시아가 하우스의 대표 의상 중 하나가 되었다. 팝 문화가 조용히 매력적이고 차분한 여성들을 포용한 것처럼 보이던 순간, 제스키에르의 패션은 그 대표적인 여성들(갱스부르, 세비니, 제니퍼 코넬리, 니콜 키드먼)의 사랑을 받았다. “그런지가 퇴장하고 있었고, 그가 새로운 것을 가지고 등장 했어요. 쿨하고 어둡고 모던했죠”라고 클로에 세비니는 말했다. 그러나 그것은 파리 꾸뛰르의 긴 역사를 반영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어떤 면에서 아카이브를 습격했다고 할 수 있죠.” 그리고 이것이 발렌시아가에 특별한 권위를 부여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그러므로 2012년 발렌시아가에서 수석 디자이너로 15년을 보낸 제스키에르가 그곳을 떠나게 되었다고 발표했을 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시스템>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제스키에르는 그 브랜드가 주장한 조건과 관련해 경영 관행이 호의적이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 인터뷰 때문에 발렌시아가는 합의 결별을 위반했다면서 그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그다음 해에 제스키에르는 젊은 시절 이후 처음으로 실업자가 됐다. 그는 많은 시간을 일본에서 보내며 여행을 다녔다. “일본은 제가 아주 매력적이라고 생각하는 나라입니다. 교양, 문화, 그 미학!”이라고 그는 말했다. “전통, 즉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것들과 기술과 모더니즘 사이의 충격이죠.” 그는 자신을 위한 시간을 가졌다(제스키에르는 생제르맹에 위치한 천장 높은 집에 살고 있다. 1768년에 지어진 건물 내부는 20세기 중반의 미래파 가구들로 세심하게 꾸며져 있다). “어떤 면에서 파리에 있는데도 지방에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저는 작은 도시에서 성장했어요. 그리고 현재 이 집은 제게 작은 도시가 되었습니다.” 그는 스케치를 멈추지 않았다. 파리 컬렉션에서 선보인 독특한 의상들 중 많은 것들이 제스키에르가 쉬는 동안 얻은 아이디어를 발전시킨 것이다.

    니트 집업과 가죽 스커트를 매치한 다프네 시몬스. 제스키에르는 완전히 새로운 가방 디자인을 선보였다.

    “저는 이런 시간과 거리감이 일할 때 모든 것을 더 잘 종합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는 걸 배웠어요”라고 그는 말했다. 그는 스카우트 제안에 익숙했다. 그는 발렌시아가에 있을 때 패션계에서 가장 호감을 사던 디자이너 중 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루이 비통의 미학적 자원이 얼마나 풍부한지 알았을 때 그는 제안을 받아들였다. “아주 훌륭한 역사 부서를 갖고 있어요. 과거로 여행하고 싶으면 다른 시대로 접근할 수 있습니다. 비통 백을 들고 제트기로 여행하던 제인 버킨의 70년대로도 갈 수 있지요. 그것은 사고할 수 있는 좋은 방법입니다. 움직이고 여행하는 것! 향수를 느끼는 동시에 미래를 바라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수작업으로 마무리한 가죽 슈즈처럼 딱 맞는 느낌. “늘 생각하는 거예요. 몇 개월 후에 사람들이 어떻게 옷을 입고 어떤 모습일지, 동시에 과거에는 어땠는지!”

    쇼 다음 날 아침, 루이 비통 본사에서 홍보 담당자들은 흡족해했다. 첫 리뷰들이 쏟아졌다. 그러나 그 반응은 들뜨게 하기엔 충분치 않았다. 우리가 자리에 앉았을 때 그는 비서에게 더블 에스프레소를 주문했고, 이야기 도중에 에스프레소를 한 잔 더 주문했다. 동안인 40대 남자들이 혈색이 좋지 않은 도리언 그레이 같은 초상화를 대가로 멋진 외모를 얻는 건 옛날 얘기다. 제스키에르가 그런 예술 작품을 숨기고 있다면 거기에 묘사된 남자는 잠들어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뭔가 보고 난 후 그것을 잊어버리지만 언젠가는 다시 생각납니다. 어떤 색깔일 수도 있고, 머릿속의 연상 작용일 수도 있어요. 거기서부터 작업을 시작하게 되죠”라고 제스키에르는 몽환적인 상태에서 얘기했다. 그는 자신의 창작 과정을 설명하려고 노력했다. 그 과정은 추억과 미래주의의 혼합이다. 디자이너로서 유창한 달변을 채운 내용도 그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흥분하면 단호해진다. 그러나 그의 열정은 오히려 위축시킨다. 또 조용해지고 상처 받기 쉬워진다. 패션의 상층부는 종종 관료적인 개념론이나 반짝이는 과잉에 빠지지만 제스키에르는 둘 다 피한다. 패션 지배층의 중심에 있으면서도 최고의 일중독자인 동시에 여전한 현역이다. 그는 자신에게 꼭 필요한 작업을 시각 체조라고 묘사했다. 정확한 것 같다. 끝없이 움직이고, 중력에 묶이고, 본능의 신비로운 복잡함과 궤도에 오른 훈련을 바탕으로 한 창작 스타일은 의도적인 노력보다 상상의 가속도를 반영하니까.

    그런 흐름은 최근 그에게 많은 팬들뿐만 아니라 비판자들도 생겨나게 했다. 첫 성공 이후 그의 컬렉션은 상상보다 조작으로 보는 패션 피플들로부터 작은 반발을 샀다. 그러나 그런 접근 방식은 비통 역사와 잘 맞는다. 1854년 루이 비통을 설립한 동명의 프랑스 남자는 제스키에르처럼 필요성과 훈련에 의해 혁신을 이룬 사람이었다. 그는 패션이 아니라 운송 전문가였다. 부자들을 위한 트렁크와 다른 중요한 여행 장비들을 만드는 전문가 말이다. 비통의 중요한 발명품인 방수 캔버스로 만든 가방들은 짐 싸는 과정을 바꾸어놓았다. 전통적으로 트렁크에는 보물을 담는 궤처럼 비가 스며들지 않는 둥근 뚜껑이 달려 있었다. 비통의 방수 트렁크들은 완벽한 직사각형으로 만들어졌다. 이 말은 트렁크들을 쌓을 수 있다는 의미다. 예술적 열망을 가진 루이의 아들 조르주는 회사를 확장했고 갈색 바탕 위에 탠 컬러의 LV 모노그램 모티브를 디자인하기도 했다.

    광택 있는 가죽 팬츠와 레이스 칼라 장식 집업, 체크 재킷을 매치한 나탈리 웨슬링. 트렁크를 축소한 숄더백은 이번 시즌 최고의 ‘잇백’이다.

    그 후 럭셔리의 의미가 바뀌었다. 유럽 엘리트들은 한때 자신의 부를 독특한 물건들(미키엘 페르비스트와 피터 데 루즈가 멋지게 조각한 테이블 상판, 고블렝의 대체 불가능한 태피스트리 등)에 쏟아부었지만 산업화는 탐나는 물건의 보다 표준화된 기준들을 만들어냈다. 포르쉐 카레라, 롤렉스 요트 마스터 등등. 첫눈에 루이 비통은 이런 변화와 연관 있어 보인다. 이 브랜드는 실제로 현대의 세계적인 럭셔리와 동의어다. 그런데도 이 회사는 지금도 아스니에르 쉬르 세느 작업장에서 제품을 제작한다. 파리에서 감당하기엔 규모가 너무 커지자 1859년 이곳으로 옮겼다. 현재 공장 입구에는 트렁크의 뼈대를 만드는 목재 작업장이 있다. 복도를 따라 몇 발짝 걸어가면 22도의 축축한 온도에서 가죽을 검사하고, 등급을 매기고, 보관하는 가죽 보관소가 있다. 그곳에서 수십 년간 일해온 노동자들이 루이 비통 가방 하나를 만드는 데엔 500가지 작업을 거쳐야 한다.

    제스키에르에게 작업장은 하나의 계시였다. “저는 루이 비통에서 노하우, 기술, 아름답게 만들어진 제품, 동시에 산업적 개념들이 조화를 이룬 걸 보고 아주 매료됐어요.” 그의 데뷔 컬렉션은 작업장의 가죽 보관실에서 색상 배합을 가져왔다. 오랫동안 비통 백을 작업해온 장인들은 처음으로 자신들의 기술을 옷에 쏟아부었다. 그는 회사 아카이브에 익숙해지는 과정을 즐겼다. 트렁크, 의상, 그리고 회사 설립 시기의 서류들이 있는 거대한 산업용 창고 말이다. “프랑스에는 그곳만의 아주 특별한 럭셔리의 한 세기가 있어요. 하지만 전 세계인의 마음을 움직입니다. 장인들의 뛰어난 기술과 축적된 노하우, 럭셔리 하우스를 위해 필요한 온갖 시스템. 그 모든 것들로 여성들에게 꼭 필요한 필수 의상들(어떤 면에선 꽤 간소한)을 갖춘 비통 우먼을 출발시켰죠”라고 제스키에르는 말을 꺼냈다.

    “과거엔 스케줄 때문에 지금보다 더 스트레스를 받았어요. 하지만 모든 것이 새롭고 굉장히 환영받고 지지받는다고 느껴지니까 모든 일이 아주 행복합니다.” 그의 방식도 바뀌었다. “저는 모든 것을 훨씬 더 명확하고 훨씬 덜 복잡하게 말합니다.” 그가 커피를 한 모금 더 마셨다. 내가 질문하려는 순간 계속 말을 이었다. “과거엔 접근 방식이 복잡해 보여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마땅히 그것을 해야 하고, 지시 설명서를 갖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이젠 그런 매뉴얼은 던져버렸다. 제스키에르는 의자에 다시 기대고는 에스프레소를 한 모금 더 마신 뒤 뭔가 막 떠오른 듯 미소를 지었다. “이젠 접근 방식이 쉬워 보였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게 전혀 두렵지 않아요.”

      에디터
      글 / 나단 헬러(Nathan Heller)
      포토그래퍼
      KARIM SADLI
      스탭
      스타일리스트 / 마리 아멜리 소베(Marie Amélie Sauvé)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 마크 아스콜리(Marc Ascol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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