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

19금 소설 개론

2016.03.17

by VOGUE

    19금 소설 개론

    <트와일라잇>의 팬픽으로 글쓰기를 시작한 E L 제임스는 섹스는 일상,
    로맨스는 환상이 되어버린 보통 주부들이 상상만 해오던 판타지 세계를 글로써 펼쳐 보였다.
    엄마들의 포르노,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의 개봉을 앞두고 짚어보는 19금 소설 개론.

    90년대 초반 교실 바닥을 굴러다니던 할리퀸 로맨스물엔 몇 가지 법칙이 있었다. 평범한 집안에서 자란 비교적 아리따운 외모의 순진무구한 아가씨가 어딘지 수수께끼 같은 구석이 있는 그늘진 남자를 만나 첫 경험을 하고 운명적인 사랑에 빠진다는 이야기는 주인공들의 직업만 다를 뿐 어떤 책을 집어 들거나 비슷했다. 어차피 줄거리는 중요치 않았다. 재료보단 러브신이라는 양념이 이들 소설의 셀링 포인트였다. 구릿빛 피부의 젊은 남자들은 하나같이 엄청난 부자였고, 1권이 끝날 때쯤 “이 사랑은 안 돼!”라며 갈등하던 여자들은 다음 장에서 위험한 남자를 사랑으로 길들였다. 시대가 바뀌었지만 요즘도 그 패턴은 별반 다르지 않다. 유일한 차이점이라면 여주인공들이 더 이상 처녀가 아니라는 것 정도다.

    엄마들의 포르노로 화제가 된 원작 소설을 바탕으로 만든 영화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는 할리퀸 로맨스물에 열광하던 그 시절 여학생들의 판타지가 만들어낸 신화다. 아마존닷컴 사상 100만 부 이상 판매된 전자책은 ‘그레이’ 시리즈가 최초다. 그럴 수 밖에 없다. 오프라인 서점에서 이 책을 구하기 위해선 난생처음 보는 직원에게 제품을 문의하는 용기가 필요하니까. <심연>과 <해방>으로 이어지는 ‘그레이’ 시리즈 중, 앞의 네 권은 서점마다 창고에서 따로 보관 중이다. 사람들의 눈을 피해 직원과 접선하면 그는 19금 마크가 찍힌 밀봉된 책을 비밀스럽게 내밀며 카운터까지 동행해주는 친절을 베풀 것이다.

    그 은밀한 과정에 비해 그 내용은 다소 싱겁다. <테스> 같은 고전소설을 즐겨 읽으며 낭만적 사랑을 꿈꿔왔던 ‘철벽녀’가 우연히 젊고 오만한 억만장자를 만났는데, 하필이면 그가 SM플레이를 즐기는 남다른 취향의 소유자라는 것. 포틀랜드의 공구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생활비를 충당하던 여대생은 엄청나게 잘생긴 이 남자(‘잘생겼다’는 말이 한 백번쯤은 나온다)로부터 값비싼 드레스며 맥북과 최신 폰, 새빨간 아우디 따위를 선물 받으며 팔자에 없던 호사를 누리지만, 세상에 공짜는 없어 그와의 부적절한 관계에 대해 갈등한다는 게 주된 줄거리다. 빈약한 스토리를 떠받치는 건 전체 페이지 3분의 2 이상을 채우는 베드신에 대한 묘사다.

    하지만 그 수위는 한때 밥맛을 잃게 만들던 사드 후작의 <소돔의 120일>이 전한 충격에 비하면 아이들 장난 수준이다. 로리타와 불륜, 사디즘과 마조히즘, 분뇨도착증 등으로 점철된 장정일의 문제적 소설 <내게 거짓말을 해봐>만큼 그 표현이 적나라하지도 않다. 장정일은 이 책이 출간된 후 음란 문서 제작 및 배포 혐의로 구속되어 1년을 감옥에서 보내야 했다. 90년대 절판 판금소설의 양대 산맥 마광수의 <즐거운 사라>는 또 얼마나 직설적이었던가. 음탕함으로 치자면 엄마 책장에서 우연히 발견해 빨개진 얼굴로 몰래 읽곤 했던 에밀 졸라의 <나나>와 <목로주점>, 귀스타브 플로베르의 <보바리 부인>이 한 수 위다. 상처 입은 쓸쓸한 남자의 변태적인 욕구와 방황은 미셸 우엘벡의 일련의 소설들을 통해서도 충분히 만끽할 수 있다. 물론 이들 소설은 로맨틱한 분위기와는 한참 거리가 있다.

    반면 엘리자베스 시대의 고문실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그레이 씨의 밀실에서 펼쳐지는 하드코어 베드신엔 달콤한 향수가 잔뜩 뿌려져 있다. <트와일라잇>의 팬픽으로 글쓰기를 시작한 E L 제임스는 ‘섹스는 일상, 로맨스는 환상’이 되어버린 보통 주부들의 판타지를 같은 주부 입장에서 성인판 <마이 페어 레이디>로 완성했다. 작가는 그 과정을 자세히 묘사하면서 꽤나 세련된 태도를 취하려고는 하나, 토마스 탈리스의 엄청나게 경건한 40성부 모테토 ‘Spem in Alium’을 들으며 섹스를 한다고 해서 품격 있는 소설이 되는 건 아닐 것이다. 취향의 문제겠지만, ‘그레이’ 시리즈에 빠져드느냐, 아니냐는 전적으로 다음과 같은 멘트들을 견뎌낼 수 있느냐에 달렸다. “말썽꾸러기로군, 귀여운 아가씨” “주인님” “오, 자기” “세상에, 어머나” “아주 맛있게 젖었군” “왜 나는 50빛깔을 가진 남자와 사랑에 빠졌나요?” 등등.

    영화는 어떨까? 2월 개봉을 앞둔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는 역대 청소년 관람 불가 영화 중 최단 기간 최고 예매율을 기록 중이다. 유럽과 미국의 섹스 토이 업계는 덩달아 특수를 노리고 있다. 소설 속에 등장한 채찍과 수갑, 사슬, 눈가리개 등을 앞다퉈 선보이고 있으며, 제작사와 정식 라이선스 계약을 맺은 성인용 기획 상품까지 등장했다. 물론 이 야릇한 물건들이 맥도날드의 해피밀 세트 메뉴로 판매될 수는 없을 것이다. 연출을 맡은 여성 감독 샘 테일러 존슨은 포르노 영화가 아님을 강조했지만, <선데이 타임스>가 발표한 데이터에 따르면 지난 10년간 개봉한 영화 중 베드신 분량이 가장 많다. 총 125분의 러닝타임 중 무려 20여 분이 거친 숨소리와 살덩이들로 채워질 예정이다. 영화 <소셜 네트워크>에서 저스틴 팀버레이크의 하룻밤 상대로 잠깐 출연한 다코타 존슨과 캘빈 클라인 모델 출신의 제이미 도넌은 이 영화의 주인공으로 캐스팅되며 일약 스타로 떠올랐다.

    때맞춰 얼마 전 국내에선 소녀들의 소프트 포르노 <다락방의 꽃들>이 재출간됐다. 다락방에 유폐된 꽃처럼 아름다운 네 남매의 기구한 사연을 담은 이 책은 지금 생각하면 근친상간과 패륜으로 얼룩진 막장 드라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 세계 4,000만부를 돌파하며 엄청난 인기를 끌었던 건 순전히 남자 주인공 크리스(크리스토퍼)가 너무 멋졌기 때문이다. 잘생기고 똑똑한 데다 책임감 넘치는 크리스는 10대 소녀들의 완벽한 첫사랑이었다. 작가 V.C. 앤드루스는 소녀 팬들의 응원에 힘입어 한때 스티븐 킹을 제치고 전미서점협회에서 발표한 공포·오컬트 분야 최고의 베스트셀러 작가로 선정되기도 했다. 이들 시리즈가 취향에 맞는다면 UK 펭귄 역사상 단기간에 가장 많이 팔린 소설 <크로스 파이어> 시리즈도 추천한다. 미야베 미유키가 쓴 동명의 추리소설과는 한참 거리가 먼 이 에로틱 로맨스 소설의 여주인공 에바는 철벽녀 아나스타샤처럼 마냥 순진하지만은 않다. 시간적인 여유가 있다면 오랜만에 옛날 책방을 찾아 <올훼스의 창>으로 유명한 파름문고 전집이나 할리퀸의 고색창연한 로맨스물을 더 찾아볼 수도 있겠다. 다만 마지막 책장을 덮을 때까지 당신이 무엇을 읽고 있는지에 대해 누구에게도 알리지 마라. 길티 플레저란 원래 몰래 해야 제맛이다.

      에디터
      피처 에디터 / 이미혜
      포토그래퍼
      HWANG IN WO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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