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 제국의 뒷담화
영화와 사람이 모이는 바다 도시 칸. 올해도 그곳에선 지상 최고의 영화 축제가 열렸다. 하지만 페스티벌이 항상 화려한 사진만 남기는 건 아니다. 칸의 낭만 속에 가려진 고지식하고도 구차한 사정들, 그리고 우리가 잘 모르던 자질구레한 이야기들.
“미리 알아두면 좋은 게 있을까요?” 칸으로의 출국을 앞둔 어느 날, 첫 칸영화제 출장을 앞두고 군기가 바짝 든 후배 기자 K가 내게 물었다. 해주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결국 직접 부딪히며 알게 될 것이 더 많은 듯해 딱 한마디만 해준 기억이 난다. “글쎄, 무슨 일이 일어나든 너무 마음 쓰지 마. 칸은 원래 그런 곳이라 생각해버려.” 이게 무슨 말인가 하고 K는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3년 전, 칸으로 처음 떠나던 내게도 이미 칸을 경험한 선배들이 비슷한 말을 해주었지만 결국 이 말의 뜻을 온전히 이해한 건 영화제가 개막한 뒤 3일쯤 지나고 나서였으니까(그렇다. 3일이면 충분하다). 칸 영화제 기간 동안 이곳에 머무르기로 결심한 이들이 반드시 염두에 두어야 할 점은? 하나부터 열까지 칸이 제시하는 온갖 규칙과 규범에 순응하는 것이다. 역사와 권위로 무장한 이 영화제는 자신들의 룰을 따르는 이들에게만 그 ’좁은 문’을 열어주기 때문이다.
3년간 매년 5월을 칸에서 보내며 느낀 점은 이곳에서 가장 중요하고 자주 하는 행동이 ‘줄 서기’라는 것이다. 개막 전날 사무국에서 프레스 배지를 받는 순간부터 마지막 영화를 보기 위해 극장 앞에서 기다리는 순간까지, 세계 각국의 기자들은 기나긴 대기의 순간을 경험한다(30분은 기본이다. 그 때문인지 고국에 돌아와서는 웬만하면 줄을 서는 곳에 가지 않는다). 물론 누가 어느 줄에 서야 할지 결정하는 건 칸영화제 쪽이다. “당신이 누구인지는 당신의 배지가 말해줄 것이다”라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로, 화이트, 핑크, 블루, 옐로 등급으로 나뉘어 있는 칸영화제 배지는 영화제 기간 동안 기자들의 운명을 결정한다. 화이트 배지는 거의 ‘프리 패스’ 같은 존재다. 지역신문 기자 또는 수십 년동안 칸에 온 기자들에게만 주어진다는 이 고귀한 배지를 지니고 있으면, 상영 직전 극장에 도착하더라도 길게 늘어선 다른 색깔 배지 기자들의 줄을 제치고 가장 먼저 입장할 수 있다. 핑크 배지의 경우도 취재가 수월한 편이다. 30분 정도만 줄을 서면, 웬만한 영화는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블루 배지를 가진 기자들은 관심이 높은 경쟁 부문 상영작 시사회의 입장을 보장받을 수 없다. 1시간 전에 도착해서 줄을 선다 하더라도 화이트와 핑크 배지를 가진 자들이 뒤늦게 나타나 모두 입장할 때까지 극장에 들어설 수 없기 때문이다.그렇다면 옐로 배지를 가진 자들은? 기자들은 말한다. 옐로 배지는 희생하기 위해 존재하는 배지라고. 언젠가는 블루 배지로 승급되지 않겠느냐고. 그때까지 옐로 배지 기자들에게 필요한 건 엄청난 인내심과 뙤약볕을 피하기 위한 양산이다.
이처럼 칸이 정한 나름의 규칙을 따라야 하는 건 비단 칸을 찾은 기자들뿐만이 아니다. 전 세계에서 모여든 A급 스타들에게도 ‘칸의 법칙’은 예외가 아니다. 칸영화제 취재 1년차 시절, 가장 충격적으로 다가온 ‘사건’은 코엔 형제의 영화 <인사이드 르윈>의 주연배우 오스카 아이삭이 자신이 출연한 영화 프리미어 상영을 놓쳤다는 것이었다. <인사이드 르윈>이 막 상영을 시작한 그때, 볼일이 급하던 그는 잠시 극장을 나와 화장실에 다녀왔다가 재입장을 저지하는 경비원들에게 막혀 끝내 영화를 보지 못했다. 어느 영화제든 상영 중 재입장을 금지하는 것이 대체적인 룰이지만, 경쟁 부문에 초청된 상영작의 주연배우 (게다가 오스카 아이삭은 그해 강력한 남우주연상 후보였다)에게까지 그토록 엄격한 규정을 적용한다는 점이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올해 영화제에서는 예술감독 티에리 프리모의 발언이 화제가 됐다. “(레드 카펫에서) 걸으면서 ‘셀카’를 찍는 건 우스꽝스럽고 그로테스크한 일이다. 레드 카펫에서 셀카를 찍는 것만큼 추한 게 없다.” 칸의 실질적인 권력자로 평가받는 그의 말을 아무도 가벼이 넘기지 않았다. 칸을 찾은 세계적인 톱스타들은 여전히 엄청난 플래시 세례를 받았지만, 레드 카펫 행사 이후 스타들의 SNS에 종종 올라오곤 하던 즐거운 ‘셀카’ 사진은 올해의 영화제에서 자취를 감췄다(물론 그 룰을 가벼이 넘겨버린 스타는 존재한다. 할리우드의 악동 패리스 힐튼이다. 에바 롱고리아, 우디 앨런, 톰 하디, 셀마 헤이엑도 ‘셀카’를 찍었지만, 티에리 프리모의 말을 거스른 게 영 마음에 걸렸는지 셀마 헤이엑은 이후 사과의 말을 전하기도 했다).
요즘 시대에 다소 융통성 없고 고지식해 보이기까지 한 일련의 규칙에, 조심스럽고 위트있는 항의의 뜻을 전달하는 스타들을 지켜보는 건 칸영화제에서 매년 누릴 수 있는 즐거움이다. 올해 칸을 가장 뜨겁게 달군 이슈는 ‘레드 카펫에서 플랫 슈즈를 신을 수 없는가’ 에 대한 것이었다. 올해 황금종려상의 유력한 후보로 손꼽히던 토드 헤인즈의 <캐롤> 프리미어 상영일, 플랫 슈즈를 신은 여성이 레드 카펫 입장을 거부당하자 스타들의 발언이 거세졌다. 경쟁 부문 상영작 <시카리오>의 주연배우였던 에밀리 블런트는 이 사태에 대해 칸에 강력한 항의의 뜻을 전달했고, 그녀의 상대 배우 베네치오 델 토로는 아예 “하이힐을 신고 레드 카펫을 걸어가겠다”고 선언하기도 했다. 턱시도를 입은 델 토로가 하이힐을 신고 비틀거리며 레드 카펫 위를 걸어가는 풍경은 끝내 연출되지 않았지만, 예술감독 티에리 프리모는 “칸은 남성이나 여성의 구두 굽 높이에 대해 특별한 규정을 두고 있지 않다”며 자신의 트위터 계정을 통해 플랫 슈즈 논란을 서둘러 진화하는 등 진땀을 빼야 했다. 그러나 티에리 프리모의 발언 다음 날, 나는 보았다. 거의 ‘쪼리’에 가까운 샌들을 신고 있던 한 중국 기자가 레드 카펫에 오르려 하자 보안요원들이 “다음부터 이 신발을 신고 오면 안 된다”며 황급히 막아서는 풍경을. 칸에서는 할 수 있는 것보다 해선 안 되는 것이 더 많고, ‘해선 안 되는 것’을 강요함으로써 칸은 철옹성 같은 그들의 권위를 더욱 견고하게 만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년 5월쯤이면 또다시 전 세계 영화 관계자들은 기꺼이 이 규칙들을 감수해내겠다고 다짐하며 칸으로 모여들 것이다. 새로운 에너지를 지닌 영화를 발견하고, 스타들의 한마디에 귀 기울이고, 세계 영화계의 큰 흐름을 가늠하기 위해서. 칸을 칸답게 만드는 매혹의 요소들이, 여전히 그곳에 존재하기에.
- 글
- 장영엽(〈씨네21〉 기자)
- 에디터
- 정재혁
- 일러스트
- NO YEO J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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