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슈 기욤 앙리
기욤 앙리는 박제된 하우스에 생기를 불어넣고 동시대의 쿨한 소녀들을 단숨에 사로잡았다. 이제 그는 좀더 성숙하고 신비로운 여자들에게 다가갈 준비를 마쳤다.
몽테뉴 가의 니나리치 하우스 건너편에 위치한 카페 ‘라 브뉴’는 패션 위크 시즌이면 전 세계 셀러브리티들이 한 번씩 들르는 곳이다. 오전 10시. 공기는 상쾌했고 날씨는 파리 카페 테라스에서 느긋하게 커피 마시기 딱 좋을 만큼 화창했다. 멀리서 본사 PR 담당자 클라라와 함께 기욤 앙리가 길을 건너 오는 게 보였다. 그는 싱긋 웃으며 더없이 상냥한 첫인사를 건넸다. “봉주르!” 그리고 인터뷰가 끝날 때쯤 다다른 결론은 그가 젊지만 고집 있고 확고한 디자이너라는 것. 앙리는 결코 까르벵의 통통 튀는 소녀들처럼 순진무구하지 않다. “제가 의상을 입혀도 될까요?” 결벽증적으로 정갈하게 정리된 본사 쇼룸에서 그는 모델의 룩을 직접 스타일링하겠다고 제안했다. 그가 옷걸이에서 집어든 건 컬렉션 4번 룩의 파란색 시퀸 드레스. 어시스턴트에게 20번 룩의 베이지색 코트를 검은색으로 가져오라고 주문했다. “제가 보여주고 싶은 룩은 이거예요.” 모델 퐁의 어깨에 뾰족한 라펠의 오버사이즈 울 코트를 살며시 얹으며 그가 말했다. “전 흰 셔츠와 데님 팬츠를 입을 거니까 거기에도 잘 어울릴 거고요.” 꼼꼼하게 룩을 살펴본 그는 코트에서 삐져 나온 재봉실을 조심스럽게 검정 마커로 칠했다. 그리고 두 번째로 고른 18번 룩은 입는 데 꽤 시간이 걸렸다. 톱의 프린지 소매가 손등을 완전히 덮을 때까지 그가 계속해서 옷을 매만졌기 때문이다. 한참 만에 소매를 정리하고 큼지막한 피코트 안으로 퐁의 머리카락까지 밀어 넣은 후에야 그는 만족스럽게 외쳤다. “자, 이제 촬영해도 될 것 같아요.”
VOGUE KOREA(이하 VK) 옛날 영화 보는 걸 좋아한다고 들었어요. 그래서 컬렉션을 디자인할 때도 영화 속 여자 주인공을 만들어낸다는 생각으로 작업한다고.
GUILLAUME HENRY(이하 GH) 네, 맞아요. 특정 ‘배우’보다는 ‘캐릭터’에 훨씬 매력을 느낍니다. 이전에도 컬렉션을 준비할 때 그 컬렉션 전체를 보여주는 하나의 캐릭터를 창조한다는 생각으로 진행했죠. 일종의 시나리오 작업 같은 개념이에요. 하지만 첫번째 니나리치 컬렉션은 좀 다르게 접근했습니다. 하우스와의 첫 만남인 만큼, 새로운 캐릭터를 창조하기 보다는 ‘‘니나리치’는 어떤 여인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에 답을 하는 방향으로 초점을 맞췄죠. 무한하게 펼쳐진 퍼즐 조각들을 끼워 맞추는 것과 비슷한 작업이었어요.
VK 아마도 당신이 니나리치 우먼을 설명하는 키워드로 꼽았던 여성성, 관능성, 단순성과 연관이 있겠죠? 추상적인 단어인데, 동시대적인 관점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인가요?
GH 여성성이란 움직이는 방식이나 (무의식적인)몸짓처럼, 내면으로부터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거라고 생각해요. 그건 특정한 색이나 소재 혹은 디테일처럼 외부의 사물로 ‘장식’한다고 해서 결코 가질 수 있는 게 아니죠. 관능성 또한 직접적인 섹스어필보다는 감성적인 의미인데, 쉽게 말해 감각적인 여자들한테서 자연스럽게 뿜어져 나오는 매력이라고 설명할 수 있겠군요. 예를 들면 저의 첫 니나리치 컬렉션에서 부드러운 실루엣의 의상 위에 넉넉한 볼륨의 오버사이즈 코트를 입은 여자들처럼요. 커다란 코트의 실루엣 사이로 보일 듯 말 듯한 여성의 몸과 옷자락의 움직임이 굉장히 관능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단순성도 이와 같은 맥락이에요. 미니멀리즘 미학에 기반한, 구조물 같은 의상과는 완전히 다르죠. 옷을 입는 사람이 가진 매력이 최대한 잘 드러나도록 하는 것이 제가 생각하는 단순함의 미학입니다. 화려한 옷 뒤에 자신을 감추는 여자는 이 세 가지 키워드에 해당되지 않아요. 니나리치 하우스는 직접적인 방식으로 표현할 수 없는, 여자들 본연의 아름다움이 가미된 옷을 지향합니다.
VK 게다가 당신이 제시한 니나리치 우먼은 한층 동시대적이기도 하죠. 그렇지만 당신이 이전에 보여줬던 여자들에 비하면 꽤 진중하고 성숙해 보여요.
GH 까르벵을 통해 보여준 여자들은 늘 생기발랄하고 호기심 많은, 이를테면 ‘팝‘적인 여자들이었습니다. 사실 여자보다는 소녀 쪽에 가깝죠. 반면에 니나리치 여인은 성숙하고 확신에 차 있습니다. 여자로서 또 다른 단계와 시기에 들어섰기 때문에 까르벵 걸들과 비교할 수 없는 측면이 있죠. 개인적으로 나이가 들면서 구현하고 싶은 여성상도 함께 진화하는 느낌이에요. 그런 면에서 니나리치라는 성숙한 꾸뛰르 하우스에서 일하게 된 건 또한 시기적으로 잘 맞아떨어졌죠. 니나리치와 까르벵이 연장선상에 존재한다기 보다는 제 커리어에서 새로운 페이지를 열었다고 생각합니다.
VK 의상도 아름다웠지만 소매처럼 늘어진 프린지 팔찌와 키튼 힐 펌프스가 컬렉션 전반에 미묘한 시적인 분위기를 더하는 방식이 정말 마음에 들었어요. 특별히 의도한 게 있나요?
GH 아, 그렇게 느꼈다니 굉장히 반갑군요! 전 액세서리가 가지는 특유의 서술적인 성격을 늘 중요하게 생각하거든요. 컬렉션을 선보일 때 가장 효과적으로 ‘스토리텔링’을 할 수 있는 부분이죠. 그래서 액세서리를 구상하고 배치하는 데 특별히 주의를 기울입니다. 이번에 선보인 손등을 타고 내려오는 프린지 팔찌와 구두 뒤편에 금색 체인이 한 줄 달린 키튼 힐은 안정적이면서도 세련되고, 동시에 신비로운 매력을 풍기는 여자의 물건이에요. 금색 체인들이 손을 감싸는 동시에 은근히 드러내는 방식, 안정적인 굽의 높이나 형태와 상반되는 날카로운 구두 코의 키튼 힐은 이 여인의 ‘감춰진 부분’에 대해 궁금증을 불러일으키죠.
VK 당신이 디자인한 첫 니나리치 백 ‘유칼리’는요?
GH 아, ‘유칼리’는 좋아하는 오페라 작품의 제목을 따서 이름 지었죠. 다른 액세서리와 마찬가지로 구상 단계에서 ‘가방이란 무엇인가?’ ‘구두는 무엇인가?’라는 본질적인 물음에서 출발했기에 절제된 디자인과 실용성이 특징입니다. 그리고 여행가방 같은 핸드백이라는 개념도 들어 있어요, 평소 여행 가방을 든 여자들에게서 강한 매력을 느껴왔거든요. ‘여행을 떠나는 여자들의 손에 들린 가방은 어떤 걸까?’라는 상상을 하며 만들었죠. 그래서 심플하면서도 구조적이고 무게감 있는 디자인의 가방이 탄생한 겁니다.
VK 전례들을 보면 하우스의 전통에 의존하기 보다는 현재에 반응하면서 새로운 컨셉을 제안한 디자이너들이 하우스를 부활시키는 데 성공했어요. 당신도 같은 방식으로 까르벵을 성공시켰다고 생각하는데, 니나리치 하우스에서 당신의 행보가 궁금하군요.
GH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한 가지는, 니나리치 하우스에서 저한테 기대하는 건 까르벵에서의 성공을 재현하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동시대를 사는 디자이너로서 현대적인 감성을 투영하는 건 매우 중요합니다. 그렇지만 하우스가 오랜 세월 쌓아온 심미적 정체성을 최우선으로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아카이브 자체에 대한 오마주나 재해석 같은 회고적인 방식에 대해 말하는 게 아닙니다. ‘니나리치’라는 이름 자체가 과거에 머무르지 않고 현재를 살 수 있게끔, 시대의 흐름에 반응하는 방식으로 말이죠. 이건 저뿐만이 아니라 오랜 역사의 패션 하우스를 이끄는 동시대 디자이너 모두에게 주어진 과제일 겁니다.
VK 그렇다면 니나리치에 대한 당신의 비전은 무엇인가요?
GH 단순히 성공이라는 단어로 표현하긴 힘들군요. 현재로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대중들이 ‘니나리치 여인’에 대해 떠올리는 이미지를 한층 더 짙고 견고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제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패션 하우스는 단순히 브랜드나 기업으로서의 이미지가 아닌, 실제로 존재하는 인물처럼 특별한 캐릭터를 가진 하우스예요. 니나리치도 ‘살아 있는 듯한’ 이미지, 어떤 의미에서 ‘인간’에 가까운 성격을 갖게 하는 게 제가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바입니다.
VK 당신은 ‘여자들을 잘 이해하는 여자 디자이너’처럼 디자인하기 위해 노력한다는 얘길 들었어요. 그러기 위해 주변 여자들에게 조언을 얻곤 한다고요.
GH 작업에 있어 필수적이죠. 주변 여자들을 관찰하면서 많은 영감을 얻기도 하지만, 늘 그렇듯이 주인을 찾지 못하는 옷은 결국 아무런 의미가 없으니까요. 아마도 그녀들은 내가 그들을 관찰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를 겁니다. 그저 거리낌없이 환하게 웃고, 대화를 나누고, 활기차게 행동하죠. 그 자연스러운 모습 하나하나가 아름다운 여인들이에요.
VK 와우, 그녀들이 부럽군요.
GH 부러워할 필요 없어요. 당신뿐 아니라 서울의 여자들도 전부 저의 뮤즈가 될 수 있으니까요!
- 에디터
- 송보라
- 포토그래퍼
- FRANÇOIS COQUEREL
- 모델
- Pong Lee
- 진행
- 정혜선(파리 통신원)
- 스탭
- 헤어 / Chiao Chen, 메이크업 / Min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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