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렬하고 화려한 검정
수수하고 칙칙한 상복은 여자들을 더 초라하게 만들 뿐. 디자이너들이 가장 강렬하고 화려한 검정으로 애도의 패션풍경을 바꿔놓았다.
최근 패션계는 꽤 여러 번의 중요한 장례식을 치러야 했다. 잉그리드 시시(패션 저널리스트), 루이스 윌슨(센트럴 세인트 마틴 교수이자 런던 디자이너들의 대모), 마리아 루이자 푸마이유(유명 편집숍 마리아 루이자의 설립자), 그리고 오스카 드 라 렌타, 에일린 포드(포드 모델 에이전시의 설립자)까지. 침통한 표정의 패피들은 매번 몸서리칠 정도로 화려하거나 세련된 상복으로 추도식이 열리는 교회 앞 돌길을 장엄한 런웨이로 만들어왔다. 1997년 밀라노의 두오모 성당에서 치러진 지아니 베르사체의 장례식장에는 조르지오 아르마니, 나오미 캠벨, 캐롤린 베셋 케네디, 다이애나 왕세자비 등이 관능적인 베르사체 의상을 입고 참석하는 통에 신부는 다음과 같은 멘트로 식을 시작해야 했
다. “우리는 오늘 저녁, 쇼가 아니라 신념의 행위를 위해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만약 그 신부가 알렉산더 맥퀸의 장례식을 목격했다면 혀를 내둘렀을 게 분명하다.
뉴욕을 시작으로 가을 런웨이는 먹물을 뒤집어쓴 듯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정 일색이거나 장례식처럼 엄숙한 분위기의 컬렉션이 반복적으로 등장했다. 아마도 디자이너들은 연이은 장례식에 무엇을 입고 가야할지 고민하는 패션계 동료들, 혹은 공교롭게도 드 라 렌타가 타계한 바로 다음 날 시작한 안나 윈투어 코스튬 센터의 첫 전시 <Death Becomes Her>에서 영감을 얻었을 것이다. 실제로 그 전시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톰 브라운은 19~20세기 의상을 참고하는 대신 상상력을 발휘(톰 브라운은 컬렉션을 완성하기 전까지 아틀리에 스태프들에게 전시를 보지 못하게 했다), 로맨틱하면서도 한껏 부를 드러내는 격식을 차린 빅토리안풍 상복 컬렉션을 완성했다(쇼장을 마피아 장례식장처럼 꾸몄는데, 2000년엔 이미테이션 오브 크라이스트가 장례식이 치러지는 응접실을 무대로 쇼를 진행한 적이 있다). “그렇지만 슬프거나 감정적으로 지나치게 가라앉는 걸 원치는 않았죠.” 모델들은 얼굴에 드리워진 스티븐 존스의 헤드피스 부터 스타킹과 구두까지 온통 검정으로 뒤덮인 가운데 흰색 셔츠와 창백한 살결만 간신히 드러날 뿐이었다. 이처럼 채도가 사라진 컬렉션은 놀랍게도 비단결처럼 고운 모피 트리밍의 인타르시아 조직 코트 드레스, 밍크 털로 표현한 무아레 패턴과 익살맞은 고래 패치워크 등으로 소재와 질감이 얼마나 호화롭고 풍요로운지를 과시했다. 그리고 이것은 디자이너들의 재해석이라기보다 실제로 오랜 기간 상복을 입어야만 했던 과거 상류층이 단색의 무료함을 견뎌내는 방식이기도 했다.
“검정 옷은 겸손함의 표시입니다. 그 옷을 입은 사람들이 다양한 패션을 즐기는 사치에서 제외됐다는 것을 의미하죠.” 메트로폴리탄 뮤지엄의 어시스턴트 큐레이터 제시카 리건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적으로 상복은 동시대 패션의 유행과 실루엣, 장식을 충분히 흡수해왔다고 설명했다. “패션 매거진과 에티켓 어드바이스 북은 상복이 일상복보다 간소해야 한다고 강조했지만, 많은 여자들이 그 충고를 무시하고 하이패션의 모든 정교한 디테일을 유지했으니까요.” 다이애나 브릴랜드에게 바치는 마크 제이콥스 컬렉션은 마치 별이 반짝이는 밤하늘 같았다. 입술조차 검게 물들인 어둠 속에서 반짝이는 페이턴트 부츠, 정교한 자수 장식과 세퀸, 비즈 장식!
스타일닷컴의 팀 블랭크는 디자이너들이 검정을 선택하는 현상에 대해 두 가지로 분석했다. 죽음과 애도에 대한 개념이거나 철저히 상업적인 선택이라는 것. 사실상 검정은 사별의 상태를 나타내기도 하지만 패션 피플들이 가장 많이 입는 클래식하고 세련된 궁극의 패션 컬러기도하다. 그리고 요즘 젊은이들은 멜랑콜리하고 고딕적인 것에 끌리고 있다. 베라 왕은 자신의 도회적인 검정 옷은 디자이너 자신이 “어떻게 생활하고 어떻게 입는지를 반영한 것”이었고 알렉산더 왕은 끊임없이 검정 옷을 찾아대는 고객들의 요구에 흔쾌히 응한 것이라고 했다. “바이어들은 매번 ‘이걸로 검정도 있나요?’라고 묻죠. 그래서 올 블랙인 컬렉션을 만들지 못할 이유도 없겠다고 생각한 것뿐이에요.” 왕은 고스와 일본 롤리타, 헤비메탈을 조합해 걸을 때마다 금속 조각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릴 듯한 껄렁한 블랙 룩을 완성했다. 이 옷은 패션계에서만큼은 충분히 장례식에 적절한 옷이 될 수 있다고 장담한다. 만약 에일린 포드가 가을 뉴욕 쇼 직후까지 생명의 끈을 놓지 않았다면 장례식에 참석한 젊고 늘씬한 모델 중 누군가는 분명히 왕의 최신 컬렉션 차림이었을 것이다. 모델계의 대모에게 자신이 얼마나 패션모델로 적합한가를 보여주는 것이 그녀에 대한 최고의 예우니까.
유럽에서 활동하는 디자이너들은 검정을 때가 덜 타고 입기 쉬운 색보다 죽음과 장례식에 대해 생각하게 만드는 개념적인 색으로 바라보고 있다. 특히 파리의 꼼데가르쏭과 요지 야마모토, 맥퀸 쇼장에서 우리는 마치 패션의 죽음을 기리는 듯 장중한 분위기 속에서 검정 옷의 행렬을 마주했다. 승려가 두른 천처럼 몸 위에 겸허하게 늘어진 광택 없는 검정 옷, 작별을 고하는 리본의 무덤과 만개했다가 사그라드는 흑장미를 연상시키는 의상은 충분한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이 옷들은 사라져가는 패션의 한 시대를 암시하는 걸까? 절대 자신의 의도를 밝히지 않는 미스터리한 디자이너의 아리송한 힌트에도 불구하고 이번 시즌의 ‘퓨너럴코어’는 우리에게 두 가지를 시사한다. 장례식에 적합한 의상은 ‘망자에 대한 존경의 의미’를 담는 한 그 해석법이 열려 있다는 것(특히 패션계에서는 더더욱) 그리고 이번 시즌 여자들은 강하고 세련되고 쿨한 패션의 기본, 검정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
- 에디터
- 송보라
- 포토 크래딧
- GETTYIMAGES/ MULTIBITS, REXFEATURES, INDIGITAL, COURTESY OF 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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